전북은 예로부터 맛고을로 통했다. 그러나 국수만큼은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산해진미가 풍성해서다. 하지만 6·70년대 들어선 여느 지방처럼 국수집이 크게 번창했다. 한국전쟁 직후 극심한 식량난을 겪으면서 물밀듯이 들어온 대외 원조물이 밀가루였던 까닭이다. 여기에 1965년 시작된 혼분식 장려운동도 한몫 했다. 덩달아 국수는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던 한끼 식사로, 누군가에겐 살아가는 생계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런 국수에 얽힌 맛고을을 들여다봤다. 글=정성학·사진=오세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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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발을 뽑아내는 완주 상관 대동국수. 올해로 창업 40주년인 이 업체는 도내 몇 안 남은 향토 국수공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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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봉동 멸치국수 vs 정읍 신태인 내장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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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 봉동 멸치국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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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이라면 목로주점 형태의 국수집이 낯설지 않다. 긴 널빤지나 벽돌로 쌓아올린 식탁 위에 막걸리와 국수를 함께 차려내던 옛스런 음식점 얘기다. 아버지는 막걸리로 시름을 달래고, 아들은 국수로 허기를 달래던 시절이다. 장터마다 빼곡했던 그런 국수집은 어느순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완주 봉동과 정읍 신태인 등 몇몇 곳에선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중장년이라면 목로주점 형태의 국수집이 낯설지 않다. 긴 널빤지나 벽돌로 쌓아올린 식탁 위에 막걸리와 국수를 함께 차려내던 옛스런 음식점 얘기다. 아버지는 막걸리로 시름을 달래고, 아들은 국수로 허기를 달래던 시절이다. 장터마다 빼곡했던 그런 국수집은 어느순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완주 봉동과 정읍 신태인 등 몇몇 곳에선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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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신태인 내장국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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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림 입담처럼 구수한 멸치국수
전통장이 살아있는 완주 봉동에는 10곳 남짓한 국수집이 여전히 성업중이다. 도시에 흔한 프랜차이즈 국수집과는 다른 옛 장터국수 맛 그대로란 게 공통점이다. 차림표도 마찬가지로 물국수 딱 한 종류다. 논두렁에 걸터앉아 먹던 새참 맛이랄까?
이 가운데 봉동농협 앞 ‘원조 3대(代) 할머니 국수’는 맛집으로도 입소문 났다. 말 그대로 3대에 걸쳐 60년 가까이 손맛이 전해졌다고 한다. 현재는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정현자(69)씨가 주인장이고 그의 딸과 며느리가 도왔다.
이 집의 물국수는 멸치로 우려낸 육수에 소면을 말아 시원하고 맛깔스럽다. 여기에 들기름을 한 방울 떨어트려 넉살좋은 장돌림의 입담처럼 구수하기까지 했다. 면을 입에 몰아넣고 전통장에 풋고추를 찍어먹은 뒤 육수를 마시면 찰떡궁합이다.
찌그러진 양은냄비도 푸근하다. 때마침 찾았던 4월 마지막 날은 5일장이 섰다. 읍내는 장돌림과 촌로들의 흥정속에 왁자지껄 했고 국수집도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북새통이었다. 가까운 대아수목원과 대둔산에서 힘을 뺀 산행객도 적지않았다.
“아직도 육수 빼는 비법만큼은 전수받지 못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은 3대들은 “배고파서 시작한 국수집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을줄은 몰랐다. 그저 잊지않고 찾아주는 단골 손님들이 고마울 뿐이다”며 감사했다. 한편 국수값은 소 3,500원, 중 4,000원, 대 5,000원.
△추억의 맛 기찻길 옆 내장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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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내장국수집으로 성황을 이뤘던 신태인 역 앞 상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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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하면 으레 막국수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짧은 정차시간 플랫폼에 서서 쫓기듯 후루룩 들이키던 추억의 먹거리, 자가용이 별로없던 시절에는 그랬다는 얘기다. 정읍 신태인역 주변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불과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만해도 20~30개 안팎의 국수집이 장사진을 이뤘던 곳이다. 오고가는 여행객과 장보려는 촌로들이 뒤엉켜 요기를 때우거나 시름을 달랬던 곳이었다. 완주 봉동과 마찬가지로 주 메뉴는 막걸리와 국수였다.
다른 점이라면 멸치가 아닌 삶은 암돼지 머리로 육수를 뺀 내장국수란 점이다. 돼지 부산물이 잔뜩 들어간 순대국에 밥 대신 소면을 말았다고 보면 된다. 1일 옛 추억을 더듬어 찾아간 국수거리는 여느 읍내처럼 크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역 앞에 ‘원조 역전국밥’이란 상호를 내건 국수집 하나만큼은 고집스레 제자릴 지켰다. 순대국에 들깨가루를 듬뿍 올린 내장국수의 푸짐하고 구수한 맛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차림표 옆에 열차 시간표를 붙여둔 것도 그대로다.
어머니에서 딸로 2대를 대물림 한 결과였다. 주인장인 임은경(45)씨는 “평소에는 단골 손님들이, 명절이나 휴가철에는 고향에 내려온 귀성객들이 내장국수를 많이 찾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손님 중에는 옛맛을 더듬는듯한 백발의 촌로들이 많아보였다.
/정성학 기자 csh@sjbnews.com
△국수집 낸 하반영 화백 “붓을 놓을 수 없어서”
국내 최고령 화백인 하반영(96·군산) 선생은 지난해 가을 완주 상관에서 군산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올해 초 군산 신영시장 인근에 국수집을 냈다. 그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인 10평 남짓한 막국수집이다. 그것도 주거를 겸해서다.
“평소 돈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데다 오랜 투병생활로 생계마저 곤란해진 까닭”이란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무엇보다 “황혼을 무색케 끝까지 붓을 놓을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국수집까지 내게 됐다”는 얘기다.
현재 선생의 국수집은 평소 그를 도와온 큐레이터가 맡아보고 있다. 일곱살에 붓을 잡은 선생은 국선 입선만도 7회에 이르고 한국예총 부회장과 민전 목우회 전북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 20년 전부턴 사재를 털어 반영미술상을 제정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노력해왔다.
/정성학 기자 csh@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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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째 대물림 중인 완주 봉동 할머니 국수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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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국수 박병곤 사장 “국수로 대동 하고파”
완주 상관 월암마을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사상가인 정여립(1546~89년)의 고향으로 잘 알려졌다. 대동계(大同契)를 만든 그는 누군가에겐 개혁가로 지지받았지만, 반대파에겐 모반을 꾀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의 생가 터와 가까운 곳에는 몇 안남은 향토 국수공장이 명맥을 잇고 있다. 올해로 창업 40년된 ‘대동국수’이다. 창업당시 그 이름 그대로 대물림된 대동국수는 현재 맏아들인 박병곤(39) 사장이 맡고 있다.
그는 사명에 대해 “정여립의 대동계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소비자는 물론 지역사회와 더불어 ‘크게 넓게 함께’ 상생하자는 창업정신이 담겼다”며 “올해가 바로 그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소면부터 오디국수와 뽕잎국수 등 기능성 국수까지 생산중인 대동국수는 빠르면 이달 중 전주에 우리밀 국수공장을 새로 짓는다. 박 사장은 “사명대로 우리 밀로 국수를 만들고 그 수익금 일부는 우리 밀 농업발전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