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깊어가는 가을밤에 외로움에 몸부림치지 말고 단편 소설이나마 읽어 보시라고 천재시인 이상의 단편소설 과 수필, <슬픈 이야기 어떤 두 주일 동안>과 <봉별기>를 올립니다. 난해한 내용을 난해한 방법으로 올린 <슬픈 이야기.....>는 읽다가 짜증날 수도 있습니다. 자주 되돌려 보셔야 될껄요. ㅎㅎㅎ 이 글에는 전에 올린 글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8년 10월 6일 (토) 촬영 23회차 서울미래유산 투어는 <이상의 문학>을 주제로 그의 소설과 시를 썼던 당시의 흔적을 찾아 보는 투어였습니다. 사직동주민센터 앞 정자에서 출발한 여행은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작됐습니다. 이상(본명,김해경)은 1910년 8월 20일(양력 9월 23일) 아버지 김영창,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 남동생 운경, 6년 후 여동생 옥희가 태어났지요. 이상은 3세 때부터 23세까지 20년동안 백부 김연필의 집인 통인동 154번지에서 친가족과는 떨어져 살았죠. 1921년 신명학교, 1926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고공 건축과에 입학했습니다. 1929년 경성고공을 졸업하는데 이때 졸업앨범에 처음으로 "이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곧바로 조선총독부 내무국의 기수(技手)로 근무하기 시작 했답니다. 1929년 12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며,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 (2월~12월)하며 정식적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이후 1931년 7월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8월호에 일본어 연작시 <조감도>를 10월호에 <3차각 설계도>를 발표했으며 1932년 <조선> 3월호에 소설 <지도의 암실> 4월호에 <휴업과 사정>을 잇따라 발표하고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했습니다. 1934년에는 김기림, 이태준, 정지용 등이 중심이었던 "구인회"에 입회했습니다. 1934년 7월부터 8월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하다가 독자들의 비난으로 연재를 중단합니다. 1936년 구본웅이 경영하는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하였고 시 <지비> <가외가전> <위독> 소설 <지주회사> <날개> <봉별기> <동해> 등을 발표했으며 1936년에 11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사후 발표작인 소설 <종생기> 수필 <권태> 등을 썼습니다. 1937년 일경에 의해 불량선인으로 검거되어 2월 12일부터 3월 16일까지 구금되었다가 건강 악화로 풀려나와 도쿄대학 부속병원에 입원 했으나 27세가 되던 그해 4월 17일에 사망하죠. 이상은 자신의 유고수필 <슬픈 이야기 어떤 두 주일 동안>에서 어릴적 동네 모습을 회상하여 묘사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죠? 거기는 참 오래간만에 가본 것입니다. 누가 거기를 가보라고 그랬나 ㅡ 모릅니다. 퍽 변했습니다. 그전에 사생(寫生)하던 다리 아치가 모색(暮色) 속에 여전하고 시냇물도 그 밑을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양쪽 언덕은 잘 다듬어서 중간중간 연못처럼 물이 괴었고 자그마한 섬들이 아주 세간처럼 조촐하게 놓여 있습니다. 게서 시냇물을 따라 좀 올라가면 졸업 기념으로 사진을 찍던 목교(木橋)가 있습니다. 그 시절 동무들은 다 뿔뿔이 헤어져서 지금은 안부조차 모릅니다 -이상 <슬픈이야기, 어느 두 주일 동안에> - 필운동의 홍건익 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3호)입니다 필운동 홍건익 가옥은 1934년에서 1936년 사이에 지은 한옥입니다. 740.5m2의 대지에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등 다섯 동이 낮은 언덕을 따라 자연스럽게 놓여 있고,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에서 일각문, 우물, 빙고까지 갖추고 있는 집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집은 전통 한옥의 배치를 취하면서도 , 근대 한옥의 요소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안채 대청마루의 풍혈판에 새겨진 팔괘문양과 별채의 화초벽을 장식한 태극문양,이화꽃문양, 연꽃문양 등 장식요소들이 돋보입니다. 서울시가 이 집을 매입할 때에는 전체적으로 심하게 퇴락한 상태로, 증축되거나 변형된 부분들도 많았는데 1930년도 중반에 지어진 한옥의 기본적인 구조와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2013년에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필운동 홍건익 가옥은 2015년에 복원 공사를 완료했으며 현재는 서촌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소이자 주민들을 위한 사랑방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홍건익 가옥이 토지대장에 처음 등장한 1912년에 이 대지의 소유주는 고영주였습니다. 1934년에 홍건익이 이 땅을 매입해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으므로 현재는 홍건익 가옥이라 부릅니다. 고영주는 역관으로 중인이 많이 살던 서촌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지요. 조선시대의 중인은 기술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전문직 종사자로, 관청으로 출퇴근이 편한 청계천과 인왕산 일대에 주로 거주했습니다. 중인은 양반과 평민 사이의 계급으로, 이들은 양반보다 신분은 낮았으나 대체로 부유하고 지식과 교양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중인들은 대를 이어 직업을 세습하고 한 동네에 모여 살면서 결혼도 중인 집안끼리 하였습니다. 고영주와 형제들, 조카들도 필운데 주변의 옥동, 통동에 거주하였습니다. 역관들은 아들이 10세 전후가 되면 역과 시험을 준비시켰다고 하네요. ㅠㅠ 그때나 지금이나 그넘의 시험은.... (안내문 참조) 고진풍(1812년생)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역관이었습니다. 첫째 고영주(1840년생), 둘째 고영희(1849년생), 셋째 고영선(1850년생), 넷째 고영철(1853년생)입니다. 이중 막내 고영철은 1882년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뒤 1883년 미국에 파견한 일종의 답례사절로 서양에 최초로 파견한 외교 사절단에 역관으로 참여 했습니다. 당시 전권대신은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24세)이었고,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 개화파 인사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여기에 중국인 오례당(吳禮堂)과 일본인 미야오카, 미국인 로웰이 역관으로 참여해 일행이 모두 11인이 되었습니다, 고영철의 아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년생)입니다. 그는 역관(프랑스어) 이기도 했습니다. 홍건익가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본가였습니다. 홍건익 가옥을 내려다 보고 있는 이땅엔 지금은 환경운동연합의 건물이 서 있지만 이상의 친구로 평생 그를 돌봐온 후원자이기도 했던 구본웅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구본웅이 없었다면 이상도 없었을지도 모를만큼 구본웅은 이상에게 큰 도움을 준 친구였죠. 종로구 필운동 89, 90번지에 지금도 살고 있는 노거수는 알고 있을꺼예요. 구본웅과 이상의 이야기들을요. 나는 게까지는 가지 않고 걸상처럼 생긴 어느 나무토막에 가 앉아서 물 속으로도 황혼이 오나 안 오나 들여다보고 앉았습니다. 잎새도 다 떨어진 나무들이 거꾸로 물 속에 비쳤습니다. 또 전신주도 비쳤습니다. 물은 그런 틈바구니로 잘 빠져서 흐르나 봅니다. 그 내려놓은 풍경을 만져보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바람 없는 저녁입니다. 그러더니 물 속 전신주에 달린 전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마치 무슨 요긴한 <말씀> 같습니다. <밤이 오십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땅 위의 전신주를 보았습니다. 얼른 불이 켜집니다. 내가 안 보는 동안에 백주를 한 병 담아 가지고 놀던 전등이 잠깐 한눈을 판 것도 같습니다. 그래 밤이 오나. 그러고 보니까 참 공기가 차갑습니다. 두루마기 아궁탱이 속에서 바른손이 왼손을 아귀에 꼭 쥐고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허공에 이씨거나 물속으로 가라앉았을 동안에도 육신은 육신끼리의 사랑을 잊어버리거나 게을리 하지는 않는가 봅니다. 머리카락은 모자 속에서 헝클어진 채 소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가난한 모체를 의지하고 저러고 지내는 각 부분들이 무한히 측은한 것도 같습니다. 땅으로 치면 토박한 불모지셈일 거니까. 눈도 퀭하니 힘이 없고 귀도 먼지가 잔뜩 앉아서 주접이 들었습니다 목에서는 소리가 제대로 나기는 나지만 낡은 풍금처럼 다 윤택이 없습니다. 콧속도 그저 늘 도배한 것, 낡은 것 모양으로 구중중합니다. 20여 년이 나 하나를 믿고 다소곳이 따라 지내온 그네들이 여간 가엾고 또 끔찍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그윽한 충성을 지금 그냥 없이하고 모체 나는 망하려 드는 것입니다. -이상 <슬픈이야기, 어느 두 주일 동안에> - 아직도 비는 줄기차게 오고 있네요. 이상이 살았던 통인동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길에는 이상 뿐만 아니고 많은 문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노천명도 이 길 골목에 살았었습니다. 이상의 집에 자주 왔던 시인 김기림은 노천명을 짝사랑해 그의 집을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물론 창밖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서기만 했을 뿐이였지만 말입니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 덮어 버린 골목 길, 시려운 손을, 찔러 넣은 바지 주머니 속의 온기에 녹이며 그 녀의 집, 달빛 아래 잠든 창문가에서 서성입니다. 그때에 얼어 버렸던 뽀도독 소리가, 이제 무시로 녹아 마음을 적시는군요, 아직도 내 마음이 그 곳에 남아있는지. 하얀 눈이 오는 날이면 난 길에 나서고 싶어집니다. (내 생각, ㅋㅋ) 길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 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납북작가 김기림(1908~ ). 이상이 살던 집 터 입니다. 서울미래 유산입니다. 이상의 집 건너편 골목에 한옥들이 들어섰군요. 이상이 살던 집 터가 이 곳일 수도 있다지만 글쎄요. 이상이 사랑했던 여인 금홍이. 이상은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23세때 각혈이 심해지자 황해도 배천(白川)온천으로 요양을 갑니다. 이 곳에서 출산까지 했던 경험이 있는 작부 금홍(본명:연심)을 만나 사랑하게 됩니다. 후일 서울로 올라와 제비란 다방을 차려 금홍을 불러 올린 이상은 그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시절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시만 쓰던 이상은 금홍에겐 나긋나긋한 시로 사랑을 표현 하기도 했고 다툼도 했답니다. 금홍을 그토록 사랑 했으면서도 간음을 권하기도 했고 막상 간음하는 금홍을 보며 감정의 동요를 느끼기도 했다는 그는,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였지요. 이런시. 역사(役事)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보니 도무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줄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난해한 시"만 썼던 이상이 금홍이를 만나 지은 시로 알려진 "이런시"입니다. 이상이 금홍이와 마지막 밤을 보낸 날을 자전적 소설 <봉별기>에는 이렇게 남겼습니다. 술상을 보아 왔다. 나도 한 잔 먹고 금홍이도 한 잔 먹었다. 나는 영변가를 한 마디하고 금홍이는 육자배기를 한마디했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제 이 생(生)에서의 영이별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내가 한 번도 들은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네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연서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픔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케 한 것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그 한번이 내 시골에 있던 때 입니다. 이런 말하면 웃을지 모르나 그간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금 잘 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고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단 것을 어느날 나는 확실히 알았었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걸음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그야말로 모연한 시욋길을 혼자 걸으면서 나는 별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죽을 뻔 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로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 보면 웃을 편지입니다.
정희야,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은 못됐었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었다. 내 이제 너와 더불어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길 거울 같기를 빌지도 모른다
정희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고 한다 하지만 정희야, 이건 언제라도 좋다. 네가 백발일 때도 좋고 내일이래도 좋다. 만일 네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보다도 더 또렸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찾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디 내게로 와다오.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적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다구니도 좋다.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희야 너를 위해 네가 다시 오기 위해 저 야공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히 살아가련다... 하는 어리석은 수작이었으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있을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럼 약아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었던지 내가 글을 쓰겠다면 무척 좋아하든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럼 속삭이던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언짢게 하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다고 해서 쓰기로 한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만나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히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 금년 마지막날 오후 다섯시에 후루사토(故鄕)라는 집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李箱 이상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권영민 교수가 발견 했다는 이상의 연서를 공개 한 것은 2014년 7월 24일 이상의 오감도 발표 8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강연회때 였습니다 위 글은 권영민 교수가 이상의 편지글을 현재의 글로 번역해 놓은 글입니다 최정희(1912,12,3~1990,12,21)는 함남 단천에서 태어난 재원으로 유학까지 했던 신여성입니다. 동경서 영화감독이던 김유영과 결혼 했으나 곧 헤어졌고 1931년 조국으로 돌아와 파인 김동환이 운영하던 삼천리 잡지사의 기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뛰여난 미모와 지식으로 많은 문인들로부터 구애를 받았는데 백석과 이상도 그들 중 하나 였습니다. 그러나 최정희는 유부남이던 파인 김동환과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는데 두 딸(치원,채원)도 소설가가 되어 이상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상과의 인연이 남다르다고 해야 하겠죠. 보안여관으로 가는 길입니다. 일신의 식구들이 손, 코, 귀, 발, 허리, 종아리, 목 등 주인의 심사를 무던히 짐작하나 봅니다. 이리 비켜서고 저리 비켜서고 서로서로 쳐다보기도 하고 불안스러워 하기도 하고 하는 중에도 서로서로 의지하고 여전히 다소곳이 닥쳐올 일을 기다리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꽤 어두워 들어왔습니다. 별이 한 분씩 두 분씩 모여들기 시작입니다. 어디서 오시나 굿이브닝 뿔뿔이 이야기꽃이 피나 봅니다. 어떤 별은 궐련을 피우고 어떤 별은 정한 손수건 으로 안경알을 닦기도 하고 또 기념 촬영을 하는 패도 있나봅니다. 나는 그런 오붓한 회장을 고개를 들어보지 않고 차라리 물 속으로 해서 쳐다봅니다. 시각이 거의 되었나봅니다. 오늘밤의 <프로그램>은 참 재미있는 여흥이 가지가지 있나봅니다. 금단추를 단 순시가 여기저기서 들창을 닫는 소리가 납니다. 갑자기 회장이 어두워지더니 모든 인원 얼굴이 활기를 띄웁니다. 중에는 가벼운 흥분 때문에 잠깐 입술이 떨리는 이도 있고 의미 있는 듯한 미소를 주고받으면서 눈을 꿈뻑하는 이들도 있나 봅니다.<아드로메다>, <오리온> 이렇게 좌석을 정하고 궐련들도 다 꺼져버렸습니다. 그때 누가 급히 회장 뒷문으로 허둥지둥 들어왔나 봅니다. 모든 별의 고개가 한쪽으로 일제히 기울어졌습 니다. 근심스러운 체조, 그리고 숨결 죽이는 겸허로 하여 장내, 넓은 하늘이 더 깊고 멀고 어둡고 멀어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고-넓은 하늘 맨 뒤까지 들리는 그윽하나 결코 거칠지 않은 목소리의 음악처럼 유량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에는 모두들 일찍 돌아가시라는 전령입니다. 우-들 일어나나 봅니다, <벨루아> 검정모자는 참 품이 있어 보이고 또 서반아식 <망토> 자락도 퍽 보기 좋습니다. <에나멜> 구두가 부드러운 융단을 딛는 소리가 빠드득 빠드득 꼬아리 부는 소리처럼 납니다. 뿔뿔이 걸어서들 갑니다. 이제는 회장이 텅 빈 거 같고 군데군데 전등이 몇 개 남아있나 봅니다. 늙은 숙직인이 들어오더니 그나마 하나씩 둘씩 꺼들어 갑니다. 삽시간에 등불도 다 꺼지고 어둡고 답답한 하늘 넓이에는 <추잉껌> <캬라멜> 껍데기가 여기저기 헤어져 있습니다. -이상 <슬픈이야기, 어느 두 주일 동안에> - 보안여관입니다. 경복궁 영추문 맞은편에 위치한 보안여관은 시인 서정주, 화가 이중섭 등 많은 예술인들이 애용했던 여관 이었습니다. 2004년까지 운영되다 문을 닫았던 보안여관은 2010년부터 리모델링을 거쳐 전시장으로 탈바꿈하여 운영되고 있습니다. 보안여관이 그나마 옛모습을 지니고 남을 수 있게 된것은 최성우 대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8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건물에 깃든 1930년대 예술인들의 흔적을 지워버리기가 아쉬어 옛 모습을 간직 하기로 한 최성우 대표가 없었다면 보안여관은 지금 없어졌겠지요. 건물과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는 최성수 대표입니다. 대나무로 엮어 벽을 만들었던 흔적도 남겼네요. 천장에서 상량문도 나왔습니다. 상량문에 소화17년이라고 써있으니 1942년에 지은 집이네요.객주도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구수명이군요. 최성우 대표. 보안여관과 이어 지은 건물도 탐방 했습니다. 지하층의 모습입니다. 건물 신축 당시 발굴됐던 유물인 조선시대의 건물초석들을 지하에 그대로 옮겨 보존해 놓았습니다. 5,60년 대의 책상도 있고요. 이런 곳에서 차 한잔하며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면 참 행복하겠네요. 무슨 일이 있으려나, 대궐에 초상이 났나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우두자국을 만져보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우리 아버지도 다 얽으셨습니다. 그분들은 다 마음이 착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손톱이 일곱밖에 없습니다. 궁내부 활판소에 다니실적에 손가락 셋을 두번에 잘리우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생일도 모르십니다. 맨 처음부터 친정이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외갓집 있는 사람이 퍽 부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장모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나는 그분들께 돈을 갖다드린 일도 없고 엿을 사다드린 일도 없고 또 한번도 절을 해본 일도 없습니다. 그분들이 내게 경제화를 사 주시면 나는 그것을 신고 그분들이 모르는 골목길로만 다녀서 다 해트려 버렸습니다. 그분들이 월사금을 주시면 나는 그분들이 못 알아보시는 글자만을 골라서 배웠습니다. 그랬건만 한번도 사설(잔소리)하신 일이 없습니다. 젖 떨어져서 나갔다가 23년만에 돌아와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하게들 사십디다. 어머니는 내 대님과 허리띠를 접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내 모자와 양복저고리를 걸기 위한 못을 박으셨습니다. 동생도 다 자랐고 막내누이도 새악씨꼴이 단단히 박였습니다. 그렇건만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내게는 어른도 없습니다. 버릇도 없습니다. 뚝심도 없습니다.손이 내 뺨을 만집니다. 남의 손같이 차디차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이렇게 야위었는데> 모체가 망하려는 기색을 알아차렸나봅니다. 연해 위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얼하나. 속절없지. 내마음은 버얼써 내 마음 최후의 재산이던 기사들까지도 몰래 다 내다버렸습니다. 약 한봉지와 물 한 보시기가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이고 밤 깊이 너희들이 잠든 틈을 타서 살짝 망하리라. 그 생각이 하나 적혀있을 뿐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는 고하지 않고 우리 친구들께는 전화 걸지 않고 기아(棄兒)하듯이 망하렵니다. 하하,- 비가 오시기 시작입니다. 살랑살랑 물 위에 파문이 어지럽습니다. 고무신 신은 사람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눈물보다도 고요합니다. 공기는 한층이나 더 차갑습니다. 까치나 한마리- 참, 이 스며들 듯 하는 비에 까치집이 새지나 않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까치들도 살기가 어려워서 경성 근방에서는 다 없어졌나 봅니다. 이렇게 궃은 비가 오는 밤에는 우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건너편 양옥집 들창이 유달리 환-하더니 이제 누가 그 들창을 안으로 닫아버립니다. 따뜻한 방이 눈을 감고, 실없는 장난을 하려나 봅니다. 마음대로 하라지요.- 하지만 한데는 너무 춥고 빗방울은 차차 굵어갑니다. 비가오네 비가오네나.- 이제 비가 들기만 하면 날이 드윽하렸다. 그런 계절에 대한 근심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때 나는 불현 듯 그리워지나 봅니다. 내 곁에는 내 여인이 그저 벙어리처럼 서 있는 채입니다. -이상 <슬픈이야기, 어느 두 주일 동안에> - 아직도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하 2층의 중정엔 신비감이 쌓여가고. 강영진해설사의 해설도 점점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말리지 않았더라면 우린 한참을 더 이곳에 머물렀을꺼예요. 다시 길에 나섰습니다. 경복궁을 통과합니다. 광화문입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입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모규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형식의 중층집으로 우진각지붕을 얹었습니다. 1395년(태조4) 경복궁의 정전과 편전, 침전 등을 지은 후인 1399년 동,서문과 함께 세웠습니다. 경복궁 내림마루에 있는 잡상은 위 아래 지붕에 7개씩 배치 되었네요. 1층, 2층 내림마루에 7개씩의 잡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성의 남대문은 위 아래의 잡상 수가 다릅니다. 나는 가만히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면 참 희고도 애처롭습니다. 이렇게 어둠침침한 밤에 몸시계처럼 맑고도 깨끗합니다. 여인은 그 전에 월광 아래 오래오래 놀던 세월이 있었나 봅니다. 아 - 저런 얼굴에 - 그러나 입 맞출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입 맞출 자리란 말하자면 얼굴 중에도 정히 아무것도 아닌 자그마한 빈 터전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건만 이 여인의 얼굴에는 그런 공지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나는 이 태엽을 감아도 소리 안나는 여인을 가만히 가져다가 내 마음에다 놓아두는 중입니다. 텅텅 빈 내 모체가 망할 때에 나는 이 <시몬느>와 같은 여인을 체(滯)한 채 그리렵니다. 이 여인은 내 마음의 잃어버린 제목입니다. 그리고 미구에 내다버릴 내 마음 잠깐 걸어두는 한 개 못입니다. 육신의 각부분들도 이 모체의 허망한 것을 묵인하고 있나봅니다. 여인, 내 그대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이지 않으리다. 죽읍시다 <더블 플라토닉 슈사이드(동반자살)인가요> 아니지요.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지요. 나는 수첩을 꺼내서 짚었습니다. 오늘이 11월 16일이고 오는 공일날이 12월 1일이고 그렇다고. <두 주일이군요> 참 그렇군요. 여인의 창호지 같이 창백한 얼굴에 금이 가면서 그리로 웃음이 가만히 내다보나봅니다. 여인은 내 그윽한 공책에다 악보같이 생긴 글자로 증서를 하나 쓰고 지장을 하나 찍어 주었습니다. <틀림없이 같이 죽어드리기로>. 네- 감사하다 뿐이겠습니까.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생각하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죄송스러운 일을 잊어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손수건을 기처럼 흔들었습니다. 패배의 기념입니다. -이상 <슬픈이야기, 어느 두 주일 동안에> - 비가와서인지 늘 시장통같이 북적이던 광화문이 모처럼 한가롭습니다. 민방위 훈련을 해도 오늘같지는 않을꺼예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입니다. 옛 조선중앙일보 건물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판문점 분단 속 평화를 꿈꾸다>란 제목의 기획 사진전이 열리고 있더라구요. 판문점의 초기 모습부터 최근 우리의 대통령이 북쪽의 지도자를 만나는 사진까지 전시해 놓았습니다. 초기 판문점 전경 서로를 찍고 있는 공산측과 유엔측 기자들.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쪽 지역에 선 문제인대통령과 김정은. 실외에 마련한 전시장의 모습입니다. 종로구청과 조계사 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인 수송공원입니다. 이곳에 고려 말기의 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영당이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의 한 사람으로 불리던 목은 이색은 대사헌, 대사성을 거쳐 1388년 문하시중까지 했습니다. 그의 문하에서는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과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은 한 정도전, 하륜, 윤소종, 권근 등의 제자들이 배출 되었습니다.(백과사전) "저기 저 자동차들은 비는 오는데 어디를 저렇게 갑니까, 네?" 그 고개 너머 성모의 시장이 있습니다. "1원짜리가 있다니 정말 불을 지르고 싶습니다." 왜요.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로 물을 튀기면서 언덕 너머로 언덕 너머로 몰려갑니다. 오늘같이 척척한 밤공기 속에서는 분도 좀더 발라야 하고 향수도 좀더 강렬한 것이 소용될 것 같습니다. 참 척척합니다. 비는 인제 제법 옵니다. 모자 채앙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두루마기는 속속들이 젖어서 이제는 저고리가 젖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뉘에다가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나는 누구나 만나거든 부끄러워해 드리렵니다. 그러나 그이는 내가 왜 부끄러워해 하는지 모릅니다. 내 속에 사는 악마는 고생살이 많이 한 사람 모양으로 키가 작습니다. 또 체중도 몇 푼어치 안 되나 봅니다. 악마는 어디가서 횡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장갑을 벗으면서 초췌하나 즐거운 얼굴을 잠깐 거울 속으로 엿보나 봅니다. 그리고 나서는 깨끗한 도화지 위에 단색으로 풍경화를 한 장 그립니다. 거기도 언젠가 한번은 왔다 간 일이 있는 항구입니다.날이 좀 흐렸습니다. 반찬도 맛이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 젊은 여인을 곁에 세우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습니다. 찰싹- 어둠은 물과 같이 출렁출렁하나 봅니다. 우체통 안으로 꼭두서니 빗물이 차갑게 튀어서 편지가 젖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젊은 사람은 입맛을 다시더니 곁에 섰던 여인과 어깨를 나란히 부두를 향하여 서로 기울고 걸어갑니다. 몇시나 되었나,- 4시? 해는 어지간히 서로 기울고 음산한 바람이 밀물 내음새를 품고 불어옵니다. "담배를 다섯갑만 주십시오 그리고 50전짜리 초콜릿도 하나 주십시오" 골목은 길고 보도에는 귤껍질이 여기저기 헤어졌습니다. 뚜 - 부두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가 분명합니다. 뚜 - 이 뚜 - 소리에는 옅은 보라색을 칠해야 합니다. 부두요 올시다.- 에그 여기도 버스가 있구려. 마스트 위에서 깃발이 오늘은 숨이 차서 헐떡헐떡 야단입니다. 젊은 사람은 앞가슴 둘째 단추를 빼어놓습니다. 누가 암살을 하면 어떻게 하게 - 축항 물은 그냥 "마루자이"처럼 검습니다. 나무토막이 떴습니다. 저놈은 대체 어디서 떨어져나온 놈인구 - 참, 갈매기가 나네 - 오늘은 헌옷을 입었습니다. 허공중에도 길이 진가봅니다. 자- 탑시다. 선벽은 검고 굴딱지가 많이 붙었습니다. 여하간 탑시다. 시간이 된 모양이지. 뚜- 뚜뚜- 떠나나보. 나 좀 드러눕겠소. "저도요" 좀 똥그란 들창으로 좀 내다봐야겠군- 항구에는 불이 들어왔습니다. 여인의 이마를 좀 짚어봅니다. 따끈따끈해요. 팔팔 끓습니다. 어쩌나- 그러지 마오. 담배를 피워물었습니다.한 개 피우고 두 개 피우고 잇대러 세 개 피우고 네 개 다섯 개 이렇게 해서 쉰 개를 피우는 동안에 결심을 하면 됩니다. 여보 그동안에 당신을랑 초콜릿이나 잡수시오. 선실에도 다 불이 켜졌습니다. 모두들 피곤한가봅니다. 마흔 개, 마흔 한 개- 이렇게 해서 어느 사이에 마흔 아홉 개를 태워버렸습니다.혀가 아려서 못 견디겠습니다. 초저녁이 흔들립니다. 여보- 이 꽁초 늘어선 것 좀 봐요! 마흔 아홉 개요 -일어나요- 인제 갑판으로 나갑시다. 여인은 다소곳이 일어나건만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흐렸군- 별도 없이 바다는 그냥 문을 닫은 것처럼 어둡습니다. 소금내 나는 바람이 여인의 치맛자락을 날립니다. 한 개 남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요거 한 개가 다 타는 동안에 마지막 결심을 하면 됩니다. 여보 섧지는 않고? 여인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다 탓소. 문을 닫아라- 배를 벗어버리는 미끄러운 소리- 답답한 야음을 떠미는 힘든 소리ㅡ 바다가 개어지는 요란한 소리- 굿바이. 악마는 이 그림 한구석에 차근차근히 사인을 하였습니다. -이상 <슬픈이야기, 어느 두 주일 동안에> - 조계사입니다. 조계사는 보성고보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옛 사진을 보면 조계사의 대웅전 앞에 있는 회화나무가 보성교보 시절엔 본관 옆에 살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26년 이 학교를 졸업한 "이상"도 조계사의 회화나무를 보며 이 땅을 걸었겠지요. 오늘 우리가 이 곳을 찾은 이유입니다. 이상의 흔적을 찾아보는 투어니까요. 조계사 마당에 국화로 초전법륜상도 만들어 놓았네요. 싯다르타는 붓다가 된 후 깨달음의 법을 펴기로 결심하고, 처음으로 법을 가르칠 상대로 이전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가 있는 바라나시의 녹야원을 찾아갑니다. 다섯 수행자는 처음에는 붓다를 거부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붓다를 보고 자연스럽게 맞이하여 붓다가 설명하는 가르침을 듣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녹야원에서 이루어진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처음으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다"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농협건물이지만 1933년부터 1937년까지 4년간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이였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의 3대 신문이던 조선중앙일보에 "이상"의 시 오감도가 실렸습니다. 1934년 7월 24일의 일입니다.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던 상허 이태준의 도움이 있었지요. 오감도(烏瞰圖)는 조감도(鳥瞰圖)를 부정적으로 바꾼 신조어로 이상이 만든 단어입니다. 한문으로 보면 새 조(鳥)에서 획 하나만 뺏지만 까마귀 오(烏)로 변했습니다. 까마귀 눈으로 본 세상이라는 말이겠죠. 오감도는 한달간 연재하기로 했으나 연작시로 제목이 시1호, 시2호로 발표되며 첫회부터 독자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로 물의를 일으키며 거센 반발을 사 결국은 연재 15일만인 8월 8일에 그만두게 됩니다. 농협건물은 서울시미래유산입니다. 구, 조선중앙신문사 건물옆에 있는 동헌필방도 서울미래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미래유산이 건물이 아니고 필방이라고 하네요. 1966년 창업하여 현재까지 50년 동안 동헌필방(東軒筆房)으로 운영되어온 문구점이 문화유산이랍니다. 문방사우로 가득 찬 동헌필방이 세 들어 있는 건물은 1934년 미국에서 경제를 공부하고 돌아온 윤지창이 처남인 손원일과 함께 지은 붉은 벽돌집으로 남계(南桂)양행이라는 상호로 수입품을 취급하던 가게였습니다. 남계는 윤치호의 이복동생인 윤지창의 호입니다. 해방 후 손원일은 한국 해군의 아버지가 되었고 윤지창은 외교관으로 세계를 누볐습니다.(출처,안창모교수) 두 주일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공일날이 닥쳐왔습니다. 강변 모래밭을 나는 여인과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나는 기침을 합니다. 콜록콜록 코올록, 감기가 촉생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상류를 향하여 인정 없이 불어옵니다. 내 포켓에는 걱정이 하나가득 들어있습니다. 여인은 오늘 유달리 키가 작아 보이고 또 생기가 없어 보입니다. 내 그럴줄을 알았지요. 당신은 너무 젊습니다. 그렇게 젊은 몸으로 이렇게 자꾸 기일이 천연되는 데에서 나는 불안이 점점 커갈 뿐입니다. 바람은 띵띵 먹은 돛폭을 둘씩 셋씩 세워서 상고선은 뒤에 뒤이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노래나 한마디 하시구려. 하늘은 차고 땅은 젖었습니다. 과자보다도 가벼운 여인의 체중이었습니다. 나는 돌아서서 간신히 담배를 붙여 물고 겸사겸사한 숨을 쉬었습니다. 기침이 납니다. 저리 가봅시다. 방풍림 우거진 속으로 철로가 놓여있습니다. 까치 한 마리도 없이 낙엽은 낙엽대로 쌓여서 이세상에 이렇게 황량한 데가 또 있겠습니까. 나는 여인의 팔짱을 끼고 질컥질컥하는 낙엽을 디디면서 동으로 동으로 걸었습니다. 자갈 실은 화물차가 자그마한 기적을 울리면서 우리 곁으로 지나갑니다. 우리는 서서 그 동화같은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가끔가다가는 낙엽 위로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든지 황량한 인외경입니다. 나는 야트막한 여인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그 장미처럼 생긴 귀에다 대이고 부드러운 발음을 하였습니다. 집에 갑시다. -싫어요. 저는 오늘 아주 나왔세요- 닷새만 더 참아요 참지요-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꼭 죽어야 되나요- 그러믄요? -죽은 셈치고 그 영혼을 제게 빌려주실 수는 없나요?-안 됩니다. "언제든지 죽어드리겠다는 저당을 붙여도" 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나는 주머니 속에서 몇 번 편지를 꺼내서는 그 자리에서 다 찢어버렸습니다. 군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는 나는 벌써 아무개와 함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내 마지막 허영심의 레터 페이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써 얻어 보오리다. 까치도 오지 않는 이 그윽한 수풀 속에이 무슨 난데없는 떼 상장(喪章)이 쏟아진 것입니다. 여인은 새파래졌습니다. -이상 <슬픈이야기, 어느 두 주일 동안에> -끝. 종로타워 옆에 도시환경 정비사업 신축공사로 새로 지은 공평지구 고층빌딩입니다. 지하 8층 지상 26층의 이 빌딩 지하 1층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종로 한복판 빌딩 지하에 있던 조선의 600년 역사가 고스란히 깨어난 것이죠. 연면적 3천817입방미터의 서울 최대의 유적 전시관입니다. 26층짜리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발굴된 옛 건물터에서는 골목길과 1천점이 넘는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전시관의 투명한 유리 바닥과 데크를 따라 걸으면 발아래로 16~17세기 건물터와 골목길을 볼 수 있습니다. 청동화로, 거울, 일제강점기 담뱃가게 간판 등,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도 만날 수 있고요. 참 넓은 전시장입니다. 전시관에는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인 혜원전신첩(국보 제 135호)에 실린 30점의 그림 중 하나인 주사거배 酒肆擧盃를 형상화 해놓은 곳도 있습니다. 주막에서 술잔을 든다"라는 뜻의 주사거배는 조선 후기 선술집의 모습을 담은 신윤복(1758~?)의 그림입니다. 청색치마를 입고 트레머리를 한 주모. 심부름을 하는 동자의 모습과 함께 도포와 중치막 차림의 선비, 붉은색 덜렁에 노란 초립을 쓴 무예청 별감, 까치등걸이에 깔때기를 쓴 의금부 나장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중 별감과 나장은 흔히 왈짜라고 불리며 기방의 기둥서방을 자처하기도 했던 인물들입니다.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를 끌어안으며 맑은 바람을 대한다. 擧盃邀晧月 抱甕對淸風 (거배요호월 포옹대청풍)라는 풍류적인 시가 덧붙어 있습니다. 나장의 근무처인 의금부는 지금의 공평동 유적 근처에 위치하였는데, 별감과 나장이 등장하는 혜원의 그림을 통해 술집들로 즐비했을 이 지역의 조선시대 풍경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정조실록>에 한양은 "큰 술집이 골목에 가득하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술집이 많았다고 합니다. 종로 대로변은 시전 행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술집은 대개 공평동 유적과 같은 시전 뒷골목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내용) 실제 발굴 지면과 복원 지면과의 차이가 약 3m라고 합니다. 예전 건물의 기초. 조선연초주식회사의 광고입니다. 수선총도 / 1776~1824년 사이 / 77 * 85cm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8호.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입니다, 영풍문고 종각종로본점 앞에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3년전인 1895년 4월 24일은 동학농민봉기에 패배하여 포로로 압송된 전봉준 장군이 처형된 날이고 동상이 세워진 바로 이 자리는 당시 사형이 집행된 전옥서 처형장이 있었던 곳입니다. 광통교입니다. 광통교(廣通橋) 1410(태종10)에 신덕왕후(태조의 계비)의 옛 무덤터에 있던 돌을 옮겨와 세운, 도성 최대의 다리로서 어가(御駕)와 사신 행렬이 지나가는 주요 통로이자,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를 하는 장소였습니다. 교대(橋臺)에는 신덕왕후 무덤 주위의 돌에 새겼던 정교한 조각들이 남아 있으며 교각에는 여러 시기에 걸쳐 개천을 고친 기록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습니다. 1910년 전차 선로가 다리 위에 놓이면서 크게 훼손된 바 있으며 1959년에는 청계천 복개 공사로도로 밑에 묻혔으나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2005년에 현 위치에 옮겨 세웠습니다. 신덕왕후 능에 있던 병풍석을 확대하여 만든 돌을 광통교 난간으로 대신 세웠네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환구단도 지나, 한국은행 앞 미스코시백화점(현 신세계)까지 왔습니다. 이상이 그의 자전적 소설 날개에서 올라왔던 옥상,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올리며 끝을 맺습니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스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그러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 키웠다. 작은 놈은 작은 놈대로 큰놈은 큰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리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허리가 따뜻하다. 나는 또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비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회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그때 내 눈앞에는 아내의 모가지가 벼락처럼 내려 떨어졌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리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가 그럴 대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면서 도적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 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 -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봉별기 1 스물세살이오 - 三월이오 - 咯血(각혈)이다. 여섯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藥 한 재 지어 들고 B라는 新開地(신개지) 閑寂(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寒燈(한등) 아래 밤이면 나는 억울해 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이 나는 여관 주인 영감을 앞장 세워 밤에 長鼓(장고)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錦紅(금홍)이다. <몇 살인구 ?> 體大(체대)가 비록 풋고추만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살? 많아야 열아홉살이지 하고 있자니까 <스물 한 살이예요.> <그럼 내 나인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쎄 마흔? 서른 아홉?> 나는 그저 흥! 그래 버렸다. 그리고 팔짱을 떡 끼고 앉아서는 더욱더욱 점잖은 체했다. 그냥 그날은 무사히 헤어졌건만 이튿날 畫友(화우) K군이 왔다. 이 사람인즉 나와 弄(농)하는 친구다. 나는 어쩌는 수 없이 그 나비 같다면서 달고 다니던 코밑수염을 아주 밀어 버렸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가 급하게 또 금홍이를 만나러 갔다. <어디서 뵌 어른 같은데> <엊저녁에 왔던 수염 난 양반, 내가 바루 아들이지. 목소리까지 닮았지> 하고 익살을 부렸다. 酒席(주석)이 어느덧 파하고 마당에 내려서다가 K군의 귀에 대이고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어때? 괜찮지? 자네 한 번 얼러보게.> <관두게, 자네나 얼러보게.> <어쨌든 여관으로 껄구 가서 짱껭뽕을 해서 정허기루 허세나.> <거 좋지> 그랬는데 K군은 측간에 가는 체하고 피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부전승으로 금홍이를 이겼다. 그날 밤에 금홍이는 금홍이가 經産婦(경산부)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언제?> <열여섯살에 머리 얹어서 열일굽살에 낳았지.> <아들?> <딸> <어딨나?> <돌만에 죽었어.> 지어 가지고 온 약은 집어치우고 나는 전혀 금홍이를 사랑하는 데만 골몰했다. 못난 소린 듯하나 사랑의 힘으로 각혈이 다 멈췄으니까.... 나는 금홍이에게 노름채를 주지 않았다. 왜? 날마다 밤마다 금홍이가 내 방에 있거나 내가 금홍이 방에 있거나 했기 때문에.... 그대신... 禹(우)라는 불란서 유학생의 遊冶郞(유야량)을 나는 금홍이에게 권하였다. 금홍이는 내 말대로 우씨와 더불어 <독탕>에 들어갔다. 이<독탕>이라는 것은 좀 음란한 설비였다. 나는 이 음란한 설비 문간에 나란히 벗어 놓은 우씨와 금홍이의 신발을 보고 언짢아하지 않았다. 나는 또 내 곁방에 와 묵고 있는 C라는 변호사에게도 금홍이를 권하였다. C는 내 熱誠(열성)에 감동되어 하는 수 없이 금홍이 방을 犯(범)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금홍이는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禹, C 등등에게서 받은 十圓紙幣(십원지폐)를 여러 장 꺼내 놓고 어리광 섞어 내게 자랑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백부님 소상 때문에 귀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정자 곁으로 석간수가 졸졸 흐르는 좋은 터전을 한 군데 찾아가서 우리는 석별의 하루를 즐겼다. 停車場(정거장)에서 나는 금홍이에게 십원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다. 금홍이는 이것으로 전당잡힌 시계를 찾겠다고 그러면서 울었다. 2 금홍이가 내 아내가 되었으니까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했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 금홍이는 겨우 스물한살인데 서른한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았다. 서른한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은 금홍이가 내 눈에는 열일곱살 먹은 少女로만 보이고 금홍이 눈에 마흔살 먹은 사람으로 보인 나는 기실 스물세살이오 게다가 주책이 좀 없어서 똑 여나믄살 먹은 아이 같다. 우리 내외는 이렇게 세상에도 없이 絢爛(현란)하고 아기자기하였다. 부질없는 세월이- 일년이 지나고 8월, 여름으로는 늦고 가을로는 이른 그 북새통에- 금홍이에게는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왔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누워 잠만 자니까 금홍이에게 대하여 심심하다. 그래서 금홍이는 밖에 나가 심심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 심심치 않게 놀고 돌아오는 - 즉 금홍이의 狹窄(협착)한 생활이 금홍이의 향수를 향하여 발전하고 비약하기 시작하였다는데 지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게 자랑하지 않는다. 않을 뿐만 아니라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금홍이로서 금홍이답지 않은 일일밖에 없다. 숨길것이 있나? 숨기지 않아도 좋지. 자랑을 해도 좋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금홍이 오락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가끔 P군 집에 가 잤다. P군은 나를 불쌍하다고 그랬던가시피 지금 기억된다. 나는 또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즉 남의 아내라는 것은 정조를 지켜야 하느니라고! 금홍이는 나를 懶怠(나태)한 생활에서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우정 姦淫(간음)하였다고 나는 호의로 해석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흔히 있는 아내다운 예의를 지키는 체해 본 것은 금홍이로서 말하자면 千慮(천려)의 一失(일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실없는 정조를 간판 삼자니까 자연 나는 외출이 잦았고 금홍이 사업에 편의를 도웁기 위하여 내 방까지도 개방하여 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월은 흐르는 법이다. 하루 나는 제목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 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 묻은 버선을 웃목에다 벗어 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이렇게도 못나게 홀아비가 된 내게 몇 사람의 친구가 금홍이에 관한 불미한 까십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으나 終始(종시) 나는 그런 취미를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금홍이와 남자는 멀리 과천 관악산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내가 쫒아가서 야단이나 칠까 봐 무서워서 그런 모양이니까 퍽 겁쟁이다. 3 인간이라는 것은 임시 거부하기로 한 내 생활이 기억력이라는 敏捷(민첩)한 작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달 후에는 나는 금홍이라는 성명 三字(삼자)까지도 말쑥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두절된 세월 가운데 하루 길일을 卜(복)하여 금홍이가 왕복엽서처럼 돌아왔다.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금홍이의 모양은 뜻밖에도 초췌하여 보이는 것이 참 슬펐다. 나는 꾸짖지 않고 맥주와 붕어과자와 장국밥을 사 먹여가면서 금홍이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금홍이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고 울면서 나를 원망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서 나도 그만 울어 버렸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그만해두 두달지간이나 되지않니? 헤어지자, 응?> <그럼 난 어떻게 되우, 응?> <마땅헌데 있거든 가거라, 응?> <당신두 그럼 장가가나? 응?> 헤어지는 한에도 위로해 보낼지어다. 나는 이런 良識(양식) 아래 금홍이와 이별했더니라. 갈 때 금홍이는 선물로 내게 베개를 주고 갔다. 그런데 이 베개 말이다. 이 베개는 이인용이다. 싫대도 자꾸 떠맡기고 간 이 베개를 나는 두 주일동안 혼자 베어 보았다. 너무 길어서 안 됐다. 안 됐을 뿐 아니라 내 머리에서는 나지 않는 묘한 머릿기름 땟내 때문에 안면에 저으기 방해된다. 나는 하루 금홍이에게 엽서를 띄었다. <중병에 걸려 누웠으니 얼른 오라> 고, 금홍이는 와서 보니까 내가 참 딱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역시 며칠이 못 가서 굶어 죽을 것 같이만 보였던가보다. 두 팔을 부르걷고 그 날 부터 나가서 벌어다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오 - 케 ㅡ> 人間天國(인간천국)- 그러나 날이 좀 추웠다. 그러나 나는 대단히 안일하였기 때문에 재치기도 하지 않았다. 이러기를 두 달? 아니 다섯 달이나 되나보다. 금홍이는 홀연히 외출했다. 달포를 두고 금홍이는 홈식(향수)을 기대하다가 진력이 나서 나는 器皿什物(기명집물)을 뚜들겨 팔아 버리고 이십일년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와 보니 우리집은 老衰(노쇠)했다. 이어 불초 이상(李箱)은 이 노쇠한 가정을 아주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그 동안 이태 가량... 於焉間(어언간) 나도 노쇠해 버렸다. 나는 스물입곱살이나 먹어 버렸다. 천하의 여성은 다소간 매춘부의 요소를 품었느니라고 나혼자는 굳이 신념한다. 그 대신 내가 매춘부에게 은화를 지불하면서는 한 번도 그네들을 매춘부라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이것은 내 금홍이와의 생활에서 얻은 체험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이론같이 생각되나 기실 내 진담이다. 4 나는 몇 편의 소설과 몇 줄의 시를 써서 내 衰亡(쇠망)해 가는 심신 위에 치욕을 배가하였다. 이 이상 내가 이 땅에서의 생존을 계속하기가 자못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여하간 허울돟게 말하자면 망명해야겠다. 어디로 갈까. 만나는 사람마다 동경으로 가겠다고 호언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친구에게는 전기기술에 관한 전문공부를 하러 간다는 둥 학교선생님을 만나서는 고급단식인쇄술을 연구하겠다는 둥 친한 친구에게는 내 5개 국어에 능통할 작정일쎄 어쩌구 甚(심)하면 법률을 배우겠소 까지 虛談(허담)을 탕탕 하는 것이다. 웬만한 친구는 보통들 속나보다. 그러나 이 헷선전을 안 믿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여하간 이것은 영영 빈 털털이가 되어버린 李箱(이상)의 마지막 공포에 지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겠다.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여전히 공포를 놓으면서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자니끼 내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다. "긴상" 이라는 이다. <긴상(이상도 사실은 긴상이다) 참 오래간만이슈, 건데 긴상 꼭 긴상 한 번 만나 뵙자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긴상 어덯거시려우> <거 누군구. 남자야? 여자야?> <여자니까 일이 재미있지 않으냐, 거런말야> <여자라?> <긴상 옛날 오쿠상>(아내) 금홍이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나타났으면 나타났지 나를 왜 찾누? 나는 긴상에게서 금홍이의 숙소를 알아 가지고 어쩔 것인가 망설였다. 숙소는 동생 일심이 집이다. 드디어 나는 만나보기로 결심하고 일심이 집을 찾아가서 <언니가 왔다지?> <어유- 아제두, 돌아가신 줄 알았구려! 그래 자그마치 인제 온단말씀유, 어서 들오슈> 금홍이는 역시 초췌하다. 생활전선에서의 피로의 빛이 그 얼굴에 여실하였다. <네눔 하나 보구져서 서울 왔지 내 서울 뭘하러 왔다디?> <그리게 또 난 이렇게 널 찾어오지 않었니?> <너 장가 갔다더구나.> <얘 디끼 싫다.그 육모초 겉은 소리.> <안 갔단말이냐, 그럼?> <그럼.> 당장에 목침이 내 면상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나는 예나 다름없이 못나게 웃어 주었다. 술상을 보았다. 나도 한 잔 먹고 금홍이도 한 잔 먹었다. 나는 영변가를 한 마디 하고 금홍이는 육자배기를 한 마디 했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生(생)에서 영이별 이란, 결론으로 밀려 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네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云云>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숭례문 내림마루의 잡상은 2층에 9개, 1층에 7개가 있습니다. 아래 위가 같지 않습니다.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