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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땅을 차지하라
신 2:16-25
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멸망한 후에
17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20 (이곳도 르바임의 땅이라 하였나니 전에 르바임이 거기 거주하였음이요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일컬었으며
21 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22 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23 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
24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신 2:16-25 / 그 당시의 군인들이 모두 죽어 이 백성 가운데에서 완전히 제거되었을 때에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이제는 너희가 모압 족속의 아르 지역을 통과한 다음 19) 암몬 족속의 남쪽 경계선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암몬 족속을 공격하지도 말고, 그들과 전쟁을 하지도 말아라. 내가 그들의 땅은 너희에게 조금도 주지 않겠다. 암몬 족속도 롯의 후손들인데 나는 이미 그들에게 그 땅을 영원한 소유지로 떼어주었기 때문이다.' 20) 암몬 족속의 땅도 본래는 라파 거인족이 살았기 때문에 그 땅도 라파 거인족의 땅으로 소문난 곳입니다. 암몬 족속은 그들을 잠줌 족속이라고 불렀습니다. 21) 잠줌 족속도 크고 강한 백성이었으며 아낙 족속처럼 키가 엄청나게 큰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암몬 족속의 손에 넘겨 주시자 암몬 족속이 그들을 없애고 대신 그 땅을 차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22) 마치 여호와께서 호르 족속과 그들의 땅을 에돔 족속에게 넘겨 주셔서 에돔 족속이 오늘날까지 그곳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23) 또 에돔 땅에서 가사까지의 모든 마을에는 본래 아브 족속이 살았지만 ㄷ) 갑돌에서 온 갑돌 족속이 그들을 없애고 대신 그곳에 살았습니다. (ㄷ. 그레데 섬이나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를 가리킨다) 24) [원주민의 왕들을 징벌하다] 그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일어나 다시 출발하여 아르논강을 건너가거라! 수도 헤스본에서 다스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을 내가 이미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는 그들을 공격하라. 그들과 싸워서 그들의 땅을 차지하여라. 25) 오늘부터는 천하 만민이 너희를 두려워하며 떨게 된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놓겠다. 너희 소문을 듣는 이들이 모두 너희를 무서워하며 떨 것이다.'
이스라엘이 타 민족들의 땅을 지나치며 약속의 땅에 대한 열망을 키웁니다.
멸망한 후에(16-19) 세렛 시내가 요단 강 근처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요단 강까지의 거리는 약 200-250km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여기까지 오는데 38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린 원인은 불순종입니다. 그 동안 불순종한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군대는 초고속으로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순종하는 2세대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가라는 명령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입니다. 한편, 에돔, 모압을 지날 때처럼 하나님께서는 암몬 땅을 지날 때에도 그들을 괴롭히거나 다투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유는 같습니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원주민을 몰아낸 이주민들(20-23) 이는 이주민이 강한 원주민을 몰아내는 역사입니다. 암몬 땅의 원주민은 거인이라는 뜻인 르바임입니다.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주민인 암몬이 아낙과 같이 강하고 많고 거인인 삼숨밈을 몰아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삼숨밈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돔의 역사도 암몬의 역사를 닮았습니다. 세일은 산악지대이기에 에돔이 세일의 원주민을 물리치는데 큰 난관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런 원주민을 몰아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하신 일입니다. 크레타 섬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이는 갑돌 민족 또한 이주민으로서 원주민 아위 사람을 몰아내고 정착하였습니다. 이런 민족들의 역사의 공통점은 이주민이 원주민을 몰아냈다는 것, 배후에서 여호와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21). 모든 땅에 대한 주권이 여호와에게 있습니다. 이들의 역사는 현재 이주민으로서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땅을 차지하라(24-25)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은 혈연관계인 에돔, 모압, 암몬 민족들의 땅을 지나쳐왔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그 땅을 주지 아니하리라’(5, 9, 19)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이스라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그 땅을 차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승리의 소식으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이 두려워 떨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적용: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다가 오랜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얻은 경험이 있나요? 그때 당신의 심정을 말해 보세요.
우리 가족 중에 질병으로 고통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그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시간은 절망적인 시간이고 상황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의 시간, 새로운 나라의 소망이 시작됩니다.
< 설 교 >
세상이 너를 두려워하리라
신명기 2:16-25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이후 하나님은 출애굽 2세대에게 가나안 땅을 향하여 다시 북으로 올라가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이 여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과 모압 땅을 우회해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에돔과 모압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암몬 족속의 땅에 가까이 오자,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암몬 족속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18-1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신 2:18) 내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신 2: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암몬 족속과 다투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암몬 족속이 살고 있는 땅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 당시 암몬 족속이 살고 있는 땅은 본래 르비임이란 족속의 땅이었습니다. 21절 말씀을 보니, 이 르비임 족속은 거인족이라 알려진 아낙 족속처럼 키가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전투력이 강하고 힘이 센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르비임 족속을 멸하시고 암몬 족속이 대신 그 땅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숫자도 많은 르비임 족속이었으나, 암몬 족속에게 이 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암몬 족속은 르비임 족속에 비해 힘도 약하고 숫자도 적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힘과 능력을 뛰어넘어 일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우리 하나님은 해내십니다. 따라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들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따라는 하나님께서 나의 두려움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가능한 것이 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 삶의 문제들을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힘이 센 르비임 족속을 쫓아내시고 주님의 뜻대로 암몬 족속에게 르비임 족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22절을 보면, 하나님은 에돔 자손에게도 땅을 주시기 위해 그들 전에 살고 있는 호리 사람들을 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 되어 있는 신이 아니라, 온 세상과 온 민족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르는 참새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영역은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할 상황이나 문제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시기 때문 입니다.
24절 말씀을 보니, 이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싸우라고 명령하시며,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이미 붙여 주셨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워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헤스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이들도 강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고, 싸움에 능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시며 담대히 전쟁에 임할 것을 명령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돕고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오늘부터 천하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두려워하게 하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강한 민족은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전쟁 물자나, 전쟁 무기, 훈련된 군사들… 그 어느 것으로 봐도 이스라엘은 이방 족속과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이방 민족이 가지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민족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약속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연약합니다. 지혜도 부족하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세상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시며 헤스본과 싸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할 것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들이 세상을 보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며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님과 매 순간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하신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죄의 세력을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언약에 참여하는 자 되게 하소서
신 2:16-25 /
출애굽 1세대의 군인들이 모두 죽은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변경 아르(모압 북쪽 경계선에 있던 성읍)를 지나가도록 말씀하신다.
이곳을 지나 갈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다투지 말 것을 명령하시는데 이는 암몬 족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지 않고 롯 자손에게 주었기 때문임을 말씀하신다.
암몬 족속의 땅도 르바임(장대한 자들의 족속)의 땅으로 불렀으며 그들이 거주했던 곳이었다.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불렀고 그들도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키가 컸으나 하나님께서 암목 족속에게 멸망당하게 하셨고 그 결과 그들이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이것은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이 호리 사람을 멸하고 그곳에 거주했으며 갑돌(블레셋의 고대 이름) 사람이 가나안의 가사까지 살던 아위 사람을 물리치고 거주한 것과 같음을 제시한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에 대한 확실성을 의미하며 이 내용은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기에 ( )의 표시로 되어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 갈 것을 명령하시고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흔과 그 땅을 주셨으니 싸워 그 땅을 차지하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때부터 천하 만민이 이스라엘을 무서워하며 두려워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명성을 듣고 떨며 근심하게 될 것을 선포하신다.
나의 묵상
하나님은 출애굽 1세대의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향하도록 만드신다.
광야에서 그들이 모두 죽기까지 38년의 시간을 보내고 모두 죽은 후에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심은 죄에 대한 온전한 심판인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필요함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심을 선포하셨고(요14:6) 사도들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포했다.(행4:12)
심판의 대상이 바로 자신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은혜이며 믿음의 첫걸음이 됨을 보여준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늘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며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 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도록 만드시는 은혜를 경험케 하시기에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드신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끝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모압이나 암몬 족속이 아닌 가나안 족속임을 상기시키신다.
모암과 암몬은 롯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야곱)과 혈연관계에 있는 족속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거주할 곳을 정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땅에 대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땅의 사람과 지역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궁극적인 약속은 땅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며 싸움의 대상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임을 의미한다.
베드로 사도는 영적 가나안 전쟁을 제시하며 성도가 무엇을 위해 힘써야 할지를 이야기한다(벧전 5:8~10).
성도가 싸워야 할 대상은 마귀이며 또한 육신을 따르는 육체의 소욕이다.(갈 5:17)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죄의 세력과 옛 사람을 벗어버림이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만드는 능력임을 보여준다.
영적 가나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죄의 세력과 육신의 정욕을 죽일 때 가능하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어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영적싸움을 위해 성도가 해야 할 일을 제시한다(엡 6:10~20).
사회가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를 지날수록 복음의 바른 선포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신앙의 모습이 더욱 중요함을 느낀다.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복음으로 무장함이 말세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있어야 할 모습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오늘도 죽어야 할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내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일깨우시는 주의 은혜를 경험한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를 깨우시고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케 하시는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주 안에서 복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자 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교회의 모든 지체들도 동일한 은혜 가운데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 영생의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오늘도 주의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어야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케 하십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언약의 땅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언약에 참여하는 자로 세우십니다.
그 은혜를 따라 사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영적 승리자가 됨을 고백합니다.
죄의 세력에 대적하고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은혜를 오늘도 누리며 사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붙드시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셔서 하늘의 보좌로 나아가는 자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일에 흔들리고 요동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기쁨으로 땅의 고난을 이기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연약한 자들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자 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함께 하시고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경영
신명기 2:16-25 / 대복교회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대표적인 정신을 꼽으라면 아마 주저 없이 ‘박애(博愛)’즉 ‘사랑’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닮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랑이 중심이 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으뜸 되는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제리 포엘」이라는 유명한 보수주의 정치운동을 하는 목사가 「멘하임 베긴」 전 이스라엘 수상과 나눈 이야기 중의 한 토막입니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었는데, 한 번은 사석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 중에 「포엘」 목사가 베긴 수상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전에서 기막힌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긴 「베긴」 수상은, “그것은 우리 이스라엘 군대의 용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 지휘관들은 전선에 나갈 때 부하들에게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전진!》이라는 명령입니다. 그 대신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우리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만든 비결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며,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되는 자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본이 되는’자세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고, 요한복음10:3,4절에서 성도들을 인도하실 때에도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앞서서 나아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그리스도인은 대장 되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전진!”이라고 명령하실 때는 지체 없이 따라 나서야 하며, “대기!”라는 명령에는 언제까지라도 준비된 자세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본이 되는 정신은 구약에서도 동일합니다. 민수기9:17-20절을 봅시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지켜 진행치 아니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현실에 좌우되는 나약한 것이어서도 안 되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해서도 안 됩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는 담대하게, 기다릴 때는 인내함으로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기다림의 순종
본문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행동 강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땅을 지척에 두고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40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원인이었기는 하지만, 본문에서는 해를 끼치지 않고 그냥 지나쳐야 할 민족과 진멸해야 할 민족을 구분해 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작정(뜻과 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작정을 떠나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실망과 낭패가 따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과 정하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속을 흐르는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시면, ‘기다림의 역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약을 주시고 즉시 이루기도 하시지만,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서 이루게 하셨습니다. 짧게는 며칠을, 길게는 몇 백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합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제단 아래에서 탄원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찾아볼까요. 요한계시록6:9-11절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왜 이렇게 기다려야 합니까? 그것은 전도서 3장에서 하신 말씀처럼, 모든 일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전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이는, 사람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작정,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제 아무리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본문을 조금 지나서 37절을 봅시다. 그리고 잠언16:9절에서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어떤 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2:9절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또는 영을 울리는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도들에게 알리십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막막한 어두움에 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며 죄를 틀어내고,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신호를 신속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나 모든 일에 세 가지의 신호를 보내십니다. ‘나아가라.’는 청색 신호, ‘기다리라’는 황색 신호, ‘안된다.’라는 적색 신호가 그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는 영적인 신호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도들에게 신호를 보내십니다. 이러한 신호를 분별하기 위하여 깨어 있으십시오.
2.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행동하는 순종
성도는 하나님의 작정을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있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는 담대하게 행동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14:13-16에서 추격하는 애굽 군대를 보며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니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이 있은 후에도 계속 막연히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홍해 해변에서 계속 부르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오히려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거의 800여 년 전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40년간의 징계 기간도 지났습니다. 지금은 그 약속의 땅을 바로 앞에 두고 그곳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최종적인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처럼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기로 허락하셨음을 “비로소”, “오늘부터”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본문24-25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여 차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두려워하고 힘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렇게 하다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하는 근본적인 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21:22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고, 야고보서1:6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며, ‘행동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의 일인자인 ‘루터’는 곧잘 우울해지곤 했습니다. 그런 때면 그의 아내가 충고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아내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얼마 전 어느 날, 많은 고민으로 우울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아내의 위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기운을 잃은 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우울한 기분이 전혀 가시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에 들어온 루터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매우 슬픈 얼굴로 눈물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루터가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여보, 우리들의 주님이신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슬퍼하고 있답니다.”루터는 어이없다는 듯, “하나님이 어떻게 죽는단 말이요.”그러자 아내는, “나는 당신이 하도 걱정하고 우울해 하기에 하나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렇게 고민하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그 순간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음을 깨닫고 새롭게 힘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루터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도 시인하고 마음으로도 믿습니다. 그런데 행동으로는 불신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고백과 삶이 다른 신앙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마음의 고백과 행동하는 삶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때늦은 순종’도 불신앙의 일부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2년 여 만에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도, 인간적인 보고를 한 다수의 정탐꾼 말만 믿고 불순종하다가 38년이란 세월을 낭비했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뒤늦게 순종하고자 했지만 이미 하나님의 마음이 돌아선 후였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음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하며 또 어떻게 순종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매일 말씀과 기도와 감사로 깨어 있으십시오. 만일 깨어 있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한다면 철저하게 차단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5: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으로 강행하게 되면 극심한 손해와 함께 생명의 위험까지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합당한 경영으로 기쁨과 만족이 있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땅
신 2:16-25
결혼한 부부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이 집장만이라고 합니다. 5년 계획, 10년 계획 등 철저한 계획 아래서 저축하고, 맞벌이하고, 이 계획을 위해서는 아이를 낳는 것까지 뒤로 미루면서 내 집을 갖는 것에 모든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비둘기집 같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하게 되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뛸 듯이 기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집에 집착을 할까요? 세상에는 좋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집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단지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내 집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집에 대한 집착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집만이 아닙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도 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집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집을 땅에서의 자신의 안식처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어갈 집이 있고, 쉴 수 있는 나만의 집이 있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셋방살이하던 사람이 집을 장만했을 때 그 집에 아무리 작은 집이라고 할지라도 내집이라는 것 때문에 그 집에서 푸근한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조금 지나면 그것도 사라지고 좀 더 나은 집에 대한 집착에 빠져 살아가게 되지만 어쨌든 처음 집을 샀을 때는 집으로부터 안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의 땅, 또는 집을 갖고자 하는 것은 땅에서의 안식처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땅, 내 집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것입니다. 떠돌아다니지 않고 확고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것이 곧 든든한 안식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주부들이 집을 가꾸는 것을 보면 셋방이나 전세, 즉 남의 집에서 살 때보다는 내집에서 살 때 더 많은 정성을 들여서 가꾸고 치장을 합니다. 물론 내집이라는 애착심도 있겠지만 그 속내면에는 확고한 내 안식처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안식하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 보려는 마음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전쟁입니다. 고통과 복잡함과 어지러움의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나만의 공간, 나만의 안식처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이는 것입니다. 그 안식처가 일차적으로 내집이며, 집에서 안식을 얻지 못할 때는 결국 다른 안식처를 찾아서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TV에 보면 갈곳이 없어서 공원을 배회하는 노인분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분들은 세상에 자기의 안식처가 없는 분들입니다. 집이 없어서 공원에서 배회하시겠습니까? 집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집이 안식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집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이 있는데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 집이 아니라 자식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큰소리칠 권리가 사라지고 집주인인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집에 대한 권리가 바뀌는 순간 나타납니다. 부모는 집에 대한 권리를 잃은 자로서 아들은 내 집, 내 안식처를 확보한 자로서 위치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제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안식처를 제공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때문에 자식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누구의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집에서 잃어버린 안식을 찾기 위해 공원을 배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장소를 찾아서 안식처가 없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지나간 인생을 후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살이는 물레방아 돌 듯 돌고 도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인간만이 겪는 인생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겪게 되는 물레방아 인생입니다.
지금껏 개인이 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개인을 지나서 어떤 단체, 회사, 국가로까지 나아가도 동일합니다. 땅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 있는 곳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회사도 많은 땅을 확보하려고 하고, 국가도 많은 땅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옛날부터 있어 왔던 전쟁은 모두 땅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한국이 조그만 섬에 불과한 독도를 놓고 다투는 이유도 결국 바다라는 땅을 좀더 많이,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국가가 좀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땅이 많을수록 존재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지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서 땅을 확보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산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땅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내 집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땅에 애착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내 집은커녕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모두 세상에 머리 둘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우리들과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차이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다리 밑에서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람이 집을 장만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머리 둘 곳을 확보함으로서 마음의 쉼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를 향해서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집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집을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도 안식을 누리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사셨기에 땅에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도 안식을 누리고 평안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신 것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시면 못하실 것이 없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것이 무슨 가난의 본을 보이고 청빈의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더러운 곳으로 보신다는 폭로입니다. 그만큼 더러운 곳이기 때문에 땅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땅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처음에 땅을 창조하실 때는 온 땅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충만하기를 원해서입니다. 창 1:27,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통해서 온 땅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함으로서 땅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한 곳은 하나도 없고 죄로 더러워진 땅이 되고 만것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더러운 곳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결코 세상을 더러운 곳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상과 같이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살아가면서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악가운데 태어나고 살면서 더러움에 물들었기 때문에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땅은 의가 되시는 주님을 용납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의를 용납하지 않는 땅, 그 땅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사라질 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땅에 애착을 가지고 땅에서 즐기지 못해서 안달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믿는 신자의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명기 2장의 주된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땅만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지 않은 땅이 나옵니다. 4절에 에서의 자손의 지경을 지날 때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는 한발자국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8절에는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 모압을 괴롭게 하지 말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역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절에서 암몬 족속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미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수많은 민족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세상에는 우리가 거할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은 자기 땅을 가지고 정착해서 잘살아 가는데 이스라엘은 땅없이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세상은 우리가 머물 수 없는 곳임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외에 다른 땅에서 자리 잡아서는 안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땅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더러운 땅에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다투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땅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 자리를 확보해서 안식을 누린다고 해도 조금 지나면 확보한 자리를 좀 더 늘이고 싶어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다투는 삶이 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땅을 지나면서 '저 땅은 내 땅이 아니야'라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들이 살 땅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땅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내가 살 땅이 아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더러움과 악함을 발견하면서 '나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땅에 들어갈 사람이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다투는 삶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지금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투고 있습니다. 이 땅에 확고한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다투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부모들도 이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내 자리를 확고하게 하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에서의 자기 자리를 위해서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위해서 싸워야 할 자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사실 여러분은 어떤 싸움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기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까? 아마 전자의 싸움에 모든 힘을 쏟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우리가 싸우고 다툰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소유하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싸우고 다툼으로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고 부족함이 없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 자기 힘으로 양식을 구하고 자기 자리를 마련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인간 되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이 있는 삶은 피곤함이 있을 뿐입니다. 뺏기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다퉈야 하는 것이 땅의 인생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연속인 삶속에서 어찌 피곤함이 없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피곤을 자신이 싸움으로 뺏은 전리품을 바라보면서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계속되어지는 싸움과 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피곤과 고통 속에서 안식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자의 삶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땅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의 땅을 탐내고 산다면 그도 역시 피곤함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싸우고 다투지 않아도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이 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누리고 싶은 대로 누릴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게, 즉 양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 외에 다른 땅에 애착을 두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얼마든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족이란 많아서 풍족이 아니라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풍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나그네 인생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미리 앞서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던 이스라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 자리 만들어서 정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정착하려는 순간부터 이미 싸움과 다툼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땅을 향해서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나그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을 배우라고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신자의 땅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죄가 가득한 땅에 머리 두고 살아라고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땅에 내 자리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타협하고 아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을 속이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을 배워라고 여러분을 직장으로 보내시고 가정으로 보내시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24절에 보면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땅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네 손에 붙였다고 합니다. 붙였다는 것은 이 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싸워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이 하는 독특한 싸움입니다. 상식적인 싸움은 힘겨루기입니다. 힘을 겨루어서 그 결과에 따라서 승자 패자가 가려지는 것이지 미리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어 놓고 싸우라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싸움의 결과로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싸워놓고도 그것을 자기들의 승리로 보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살면서 내 힘으로 싸우고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여러분의 힘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여러분께 붙여주신 것으로 봐야 합니다. 만약 싸우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노력이 들어갔는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신자가 들어갑니다. 천국에 들어와서도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을 사람을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34절에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진멸하였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진멸해 버리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존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혼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나 시혼이나 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특별한 사랑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시혼을 치면서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시혼이 진멸당할 때 우리가 바로 진멸당해야 할 자들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려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본분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살지 마십시오. 아무리 든든한 자리를 만들어도 그 안에 안식과 평안은 없습니다.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땅은 이런 사람이 차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곧 온유한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모릅니다. 세상이 모르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시고 마지막까지 새땅에 들어 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