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하면 안강최씨로 통한다..그 설화를 정리해 보자!
1.최씨 고집.
그 유명한 최영장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고려 말의 장수로서 엄청난 무운을 자랑했던 최영장군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대립하여 결국 죽음을 맞게 되지요.
그는 죽기전에 자신의 청렴함을 얘기하며 “내 평생 탐욕을 가졌으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로되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라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정말로 최영 장군의 묘에는 풀 한포기 자라지 않아 지금까지도 황토색의 붉은 무덤이 되었다는군요.
그래서 최씨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난다는 말이 생긴거랍니다.
실은 고집보다는 청렴함을 나타내는 얘긴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집센 사람으로 변한거죠.
아마도 조선 개국에 대항한, 말하자면 역적과 같은 사람이므로 조선 500년동안 의도적으로 그렇게 변질이 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2.강고집의 유래
강씨의 성격은 고고한 기상을 지닌, 타인에 굴하고자 하는 기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독선으로 흐르기 쉬우므로 고집이 세다는 정평이 나 있다. 고집이란 것을 어느 면으로 보면 주관이 그 만큼 강하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강씨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진취적인 면이 많아서, 강씨 집안 딸들은 사납다는 평판을 듣기도 한다.
첫째 일찍이 패망(668)한 고구려의 명사를 시조(姜以式)로 하는 유일한 성씨라는 것,
둘째 신라 통일이후 고려까지는 우리나라 창씨기(創氏期)로 타 성씨에서 많이 보는 창씨분파를 거부하며 단일 본을 고집해온 점,
셋째 조선 중기 이후 붕당-세도정치로 사회가 혼탁해지자 출세의 관문인 과거에 급제하시고도 벼슬보다 학문에 더 관심을 가지셨던 점,
넷째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병과 같은 국난(國亂)을 맞아서는 창의(倡義)에 가담해 목숨 바쳐 구국에 앞장서신 일,
다섯째 국권을 상실했던 병자호란과 일제 식민통치 때는 아예 벼슬에서 물러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사신 것 등등이라 하겠다.
이 같이 출세를 위한 아부나 타협을 모르며 정의롭고 강직함을 지켜온 전통이 강씨고집이란 별명이 붙게된 것이 아닌가 싶다.
3.안씨고집
경상도 안동의 하회마을에는 류씨와 김해허씨 와 광주안씨가 살고 있는데 오늘날들어 특히 광주안씨의 집안들이 내륙도시 그것도 깊숙히 내것을 소중히 여기고 고집하며 살아오는 양반도시를 고집하며 현재까지도 이여져 오는 전통의 예를 보아도 안씨의 고집은 예로부터 유명하였다.
역사적인 예로는 조선초기에 태종떼 후궁 선빈안씨의 고집은 중전 민씨의 여러의견들이 백지화되고 결국 중전의 위치까지도 흔들리게 한 선빈안씨의 고집은 우리나라의 내명부품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사상의학의 대가인 이제마 와의 학술논쟁으로도 유명한 안씨집안들은 전통을 고집하는 경향이 짙고 보수적인 경우가 많은지 우리나라의 유명한 식당이나 무형문화재등록인이 많으며 특히 식당의 대표적인예로 춘천막국수의 고집스런 경영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문화가 되기도 하였다. (춘천막국수 의 원조)
최씨와는 동업을 해도 안씨와는 동업을 하지마라 던 옛사람들이 애기는 아마도 지나친 고집을 염려 한 나머지 우스게 소리로 전해져 온다고 하니 가희 고집에 대해서는 안씨 고집이 최고임을 인정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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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난다.
강씨는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풀이 안난다.
안씨는 생각만 해도 그 자리에 풀이 안난다. |
첫댓글 나 근혜사랑마린보이도 진주강씨 박사공파 25세손입니다..... 같은 강씨지만 저건 고집이 아니라.. 개지랄입니다.. 족보에서 빼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식구도 강씨인데 참말로 고집 세여
강재서비 고집은 쓰잘데 없는 똥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