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1945년생)는 1971년부터 2005년 말까지 36년 7개월간 국립국악원에 있으면서 가곡을 도맡아 부르는 연주활동을 했고 지금도 꾸준히 무대에서 가곡을 부르고 제자들에게 가곡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가곡의 정체를 잘 모른다. 가곡원류나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언락’이나 ‘편락’ 같은 노래들이 가곡이고 그것이 우리음악문화의 중요한 성악 갈래라는 것도 모른다. ‘가고파’나 ‘그리운 금강산’ 같은 노래가 한국가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기는 가곡이라는 용어 자체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굳이 앞에 한국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가곡은 우리 전통성악의 한 갈래이고 한국가곡은 서양음악어법으로 작곡한 서양식 노래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양식 노래이기 때문에 정체성에 문제가 있어서 서양에서는 한국의 예술노래(가곡)로 대접받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성악가들이 서양무대에서는 거의 부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서양에서 대단한 대접을 받는 가곡은 우리네의 전통 가곡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해외에 나가면 빛을 발하는 것이 우리네의 가곡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가곡을 무대에서 가장 많이 불렀고 또 많은 제자를 양성한 사람이 이동규라는 음악명문가의 5대종손이어서 소개하려는 것이다.
금년에 문화관광부에서는 전통예술명문가 세 집안을 선정했는데 모두 호남의 민속음악가문이었다. 대개 3대를 같은 분야에서 활동한 집안들이었는데 진도의 박병천가와 보성의 정회천가 그리고 호남출신이지만 경주에 살고 있는 정순임가 등이었다. 5대를 궁중음악과 궁중정재 가곡 등을 통해 뚜렷이 음악역사를 만들어 온 이동규 가문은 제외되었는데 이동규 가문이야말로 대단한 음악의 명문가이다. 이동규의 고조되는 이인식(李寅植)은 헌종 때 가전악(假典樂) 고종 때 전악(典樂)을 지낸 피리의 명인이고 증조부 이원근(李源根,1869~1902)은 고종 때 가전악 그 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지낸 피리의 명인이다. 그리고 할아버지 이수경(李壽卿,1882~1955)은 아악부의 아악수장을 지냈고 거문고와 정재(呈才)를 잘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를 잘 만드는 악기장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에서 처용무 등 9종의 궁중무용을 김천흥 등에게 가르친 사범이 이수경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 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궁중무용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산회상을 가장 잘 타는 거문고의 명인이면서 정재를 잘 추는 명무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동규의 아버지 이병성(李炳星,1909~1960)은 이왕직아악부 제2기 출신으로 가곡의 최고봉이었고 그의 사촌되는 이병우 역시 피리전공이었는데 나중에는 오보연주자로 서양음악분야에서 크게 활동했었다. 이동규 가계의 음악가들은 한국음악사에 그 이름이 나오는 대단한 인물들이지만 이동규가 기억하는 분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정도이다. 할아버지 이수경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여서 배급타오는 쌀자루를 양손에 번쩍 들고 오실정도였다고 한다. 거문고 만들 오동나무를 늘 담벼락에 기대 말렸고 악기의 줄을 만들 때면 손자인 동규에게 명주실 줄을 잡아 달라 하여 그 줄을 잡아주던 기억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동규의 아버지 이병성은 인물이 미남이었고 가곡을 출중하게 잘 불러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음악가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 후까지 많은 음반을 남겼고 가곡 사범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전라도 부안의 석암(石庵) 정경태가 서울까지 올라와 배우기도 하고 72일동안 부안에 초청하여 배우기도 했던 사범이 바로 두봉(斗峯)이병성이다. 이런 가문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동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음악생활 분위기를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6.25피난시절 부산에서 다른 국악원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강장원명창에게 단가 강상풍월을 배운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음악공부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중·고등학교과정인 국악사양성소에 들어간 이동규는 편종, 편경, 적, 시조, 가곡 등을 배우고 가야금을 전공했다. 특히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이주환선생에게 배운 가곡분야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아버지인 이병성처럼 목소리가 대단히 좋은데다 가곡을 쉽게 배우면서 잘한다는 평가였다. 이동규도 가곡이 좋았다. 군대에 가 있을 때는 보초를 서면서도 가곡을 흥얼거리면 시간이 금방 가기 때문에 가곡을 늘 입에 달고 살면서 군대생활을 했다. 버스를 타도 가곡을 흥얼거리고 혼자 있을 때에도 가곡을 이것저것 외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제대 후 4~5년 동안 다시 이주환선생에게 가곡을 정식으로 지도 받았다. 1971년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립국악원에 들어갔다. 이동규는 가야금 전공으로 되어있었지만 가곡에 관심이 더 많았다. 마침 1972년 전국가곡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가객들이 많이 참가했다. 경연은 우조3곡 계면조3곡 태평가를 부르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태평가를 부를 때에는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막 나오는 것이었다. 결과는 우승이었다. 제일 젊은 이동규가 1등을 한 것이다. 이동규의 가곡을 듣고 이동규의 아버지 이병성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정국악원을 만든 임윤수는 이동규을 가곡을 듣고 우봉(又峯)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아버지 호가 두봉(斗峯)이었는데 두봉이 또 하나 나왔다는 뜻이다. 1973년 이동규는 김기수가 단장이 되어 4개월 간 이란 스위스 독일 등 여러 나라를 순회공연 하는 연주단의 일원으로 독일에 간적이 있었다. 뮌헨에 갔을 때 윤이상(작곡가,1917~1995)이 사회와 해설을 했는데 이동규가 이병성의 아들이라고 하자 무척 반기면서 가곡에 대해 여러 가지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부를 것이냐고 하여 ‘언락’을 준비했다고 하니까 ‘태평가’를 훨씬 느리게 불러달라고 하여 그렇게 곡목을 바꾸고 한국에서 부르는 태평가보다 더 느리게 불렀는데 그 노래가 끝나자마자 모두 기립박수를 한참동안 보내주어 정말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가곡을 매력 있는 노래로 널리 알렸었는데 이동규 역시 가곡의 예술성을 널리 알리는 가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동규는 되도록 아버지가 하셨던 가곡을 계승하기 위해 KBS 등 여러 곳의 자료를 뒤지고 옛날 음반들을 모으며 연구하고 연습하며 노력했다. 아버지가 공부할 때 필사해 놓은 32정간의 가곡악보가 있는데 그것이 아버지처럼 느껴져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가곡의 도(道)를 터득하기위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연습을 했다. 국립국악원의 생활은 그 자체가 음악으로 꽉 차 있는 것인데 이동규는 온통 가곡으로 일관하는 생활을 했다. 1982년에는 한국정악원 주최로 국립극장소극장에서 제1회 남창가곡발표회를 했는데 2시간여에 걸쳐 16곡을 내리 불렀다. 한국음악역사상 최초의 가곡 독창회라 할 수 있는 발표회였다. 이동규라는 이름은 가곡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크고 작은 무대에서 늘 가곡을 부르는 가객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가곡을 가르쳤고 KBS국악대상 등 많은 상도 받았다. 하주화·박문규·이정규·김광섭·강숙현 등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악장이나 음악감독도 했다. 음악감독을 하면서 2004년에는 ‘황진이’라는 음악극을 창작하여 공연했는데 가곡·가사·시조를 이용한 정가(正歌)의 음악극을 만들었다. 이동규는 정가로 음악극을 더 만들고 싶어 한다. 하규일의 일대기를 음악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싶은 것이다.
가곡은 전통사회의 교양음악으로 널리 회자되던 풍류의 음악이다. 1600년대 이후의 것이 많이 남아있는 고악보를 보면 대부분 가곡의 악보들이다.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금합자보』도 가곡이 중심이고 100여종에 달하는 고악보가 대부분 가곡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런 가곡음악이 일제강점기에 이왕직아악부로 들어오게 되어 이동규가계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그 때까지는 민간에서 유행되던 가곡인데 함화진 같은 선각자가 하규일이나 임기준 같은 가객을 초청하여 이왕직아악부에서 가르치게 했다. 그 때 배운 사람들 중 이병성과 이주환이 가곡을 전수했고 그 밑에서 지금 활동하는 가곡 전문가들이 나왔다. 처음 인간문화재였던 이주환 다음으로 전효준·홍원기·김월하(여창)가 지정되었고 이동규는 1987년 준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지금은 홍원기의 후계로 되어있는 김경배와 김월하의 후계로 되어있는 김영기만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고 이동규가 지정받지 못했다. 가곡의 명가객으로 가장 많이 활동한 이동규이고 가문의 전승소리를 완벽하게 보유하고 있는 이동규인지라 하루 빨리 지정되어야 할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진짜 한국가곡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이동규 같은 명가객을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마음껏 활동하고 크게 꿈을 펼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어야 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