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의 대몽(對蒙)항쟁 의지가 굳게 담겨진 38년 강도(江都)의 중심지
강화 고려궁터(高麗宮址) - 사적
133호
▲ 잡초만 가득한 고려궁터
▲ 고려궁터 외규장각(外奎章閣) |
강화도의
서울인 강화읍내 북쪽 야트막한 산자락에 옛 고려궁터가 읍내를 바라보고 있다. 13세
기 중반, 천하의 패자를 꿈꾸며 주변 나라를 거침없이 사냥한 몽골(몽고)은 고려에게 자신들의
천하(天下)에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안그래도 몽고가 시덥지 않던 고려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
했다.
그러다가 1231년 몽고사신 저고여 일행이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피살된 사건으로 몽고는 고
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고려 vs 몽고의 38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고려의 실권자이자 최씨정권의 2번 째 우두머리인 최우(崔瑀, 최충헌의 장자)는 몽고와 전쟁을
선언하고 1232년
6월, 고종(高宗)에게 강화도로의 천도를 상주(上奏)한다. 그래서 왕실과 관리
들, 백성들 모두 반강제로 끌고가 개경(開京)을 버리고 급히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최우는 이 기회에 강화도를 임시가 아닌 새로운 도읍으로 삼을 생각으로 강화도를 강도(江都)라
하였으며, 그 규모를 개경에 걸맞게 하고자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강도 건설을
추진하였다. 우선 내성(內城)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사찰, 사직단(社稷壇), 태묘(太廟, 종묘)
등을 큰 규모로 건립하여 1234년 궁궐이 완성되었다.
궁궐의 정문은 개경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평문(昇平門)이라 하고, 양쪽으로 누각(樓閣) 형태의
문
2개를 달았으며, 동쪽에 광화문(光化門)을 두고, 궁궐 뒤쪽 산을 송악산(松嶽山)이라
했다.
그리고 내성(內城)이 완공되자, 곧바로 외성(外城)을 축성했다.
전쟁이 예상외로 길어지자 1259년 비상용으로 마니산 부근에 흥왕이궁(興王離宮)을 세우고 정족
산(鼎足山)과 선원사 부근에 행궁(行宮)을 지었으며, 부처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생각에 선원
사(禪源寺)를 건립하고 한국 불교문화의 정수인 '8만대장경'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허나 그정도
로 몽고의 파상적인 공격을 잠재울 순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원종(元宗)은 더 이상 전쟁이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1270년 몽고
와
화의(和議)를 맺고 38년에 걸친 전쟁을 종결시킨다. 화의를 맺은 후에도 몽고는 40년씩이나
자신들에게 대항한 고려의 저력이 두려운지 개경으로 완전히 환도(還都)할 것과 강화도의 궁궐
을 모조리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30여
년 동안 정들었던 강도의 왕궁이 모두 철거되면
서 강도 시대는 그 끝을 맺는다. 허나 적군에 의해 강제로 불탄 것이 아닌 비록 몽고의 요구에
따른 것이긴 해도 고려 정부가 자체적으로 허문
것이니 험한 꼴을 무수히 당했던 조선시대보다
는 그나마 낫다.
고려궁터가 아비지옥의 치욕스러운 꼴을 당한 것은 동아시아의 호구국가나 다름없던 약소국 조
선시대에 일이다. 그것도 외침(外侵)으로 1번도 아닌 2번씩이나 말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
反正)으로 재위에 오른
무능한 인조와 그를 옹립한 서인패거리는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이
곳에 행궁을 지었다. 허나 전쟁준비도 행궁 짓는 선에서 끝난지라 정작
병자호란(1636~1637년)
때 강화도를 공격한 청나라군에 의해 죄다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 이후
그 자리에 강화부 관청
이 들어섰고, 1782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워 국가의 주요
서적 350권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강화도를 공격한 프랑스 패거리가 아주 손쉽게 강화부를
점령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직지심경(直指心經) 등의 서적 대부분이 털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외규장각과
관청 건물 대부분을 불질러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왕실 관련 보물 99점과 서적
5,000권이
어이없이 한줌의 재로 사라지고 만다.
1976년 강화도 전적지 정화사업에 따라 정비되었으며 개경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넓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궁터는 그 일부인 지금의 궁터와 당시 기단(基壇), 돌계단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땅 속에 묻혀 당장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궁터 남쪽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강화부 관청 2동(명위헌, 이방청)과 강화동종(銅鍾),
근래에 복원된 외규장각 등이 대머리처럼
허전한 궁터를 듬성듬성 덮어준다.
※ 고려궁터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강화도까지의 교통편은 앞의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참조
* 일산신도시(대화역, 마두역, 백석역)나 김포(고촌, 김포시내, 마송)에서 오는 96번 시내버스
를 타거나 인천터미널과 동암역(검암역 입구, 검단)에서 700번을 탈 경우 강화군청에서 내려
왼쪽으로 가면 고려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강화터미널에서 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하점면, 송해면, 외포리 방면 버스)를 타고 강화군
청에서 하차, 또는 도보로 이동 (강화터미널에서 고려궁터입구까지는 도보 15분, 궁터입구에
서 고려궁터까지는 도보 7분
*
승용차로 갈 경우
① 서울 → 김포 → 강화대교 → 강화읍내 → 고려궁터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강화역사관 → 강화읍내 →
고려궁터
★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900원(30인 이상 단체 700원) / 청소년 이하 600원 (30인 이상 단체 500원)
* 고려궁터 앞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고려궁터 주변 관광지 - 김상용 순절비, 용흥궁(龍興宮), 강화 성공회성당, 왕자샘, 강
화산성 북문/서문/남문, 석수문, 연무당터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북문길 42) <☎ 032-930-7078~9> |
▲ 고려궁터의 정문 승평문(昇平門) |
승평문은 옛 고려궁터의 정문으로 개경에 있던 궁궐의 정문 이름을 따왔다. 비록 개경의 그것에
는
훨씬 못미치지만 삼문(三門)으로 다시 태어난 승평문은 마치 제왕이 아래를 바라보듯 작지만
위엄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굽어 본다. 계단을 오를 때는 계단의 좌측 부분을 이용하기 바란다. |
▲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의 동헌(東軒)인 명위헌(明威軒)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승평문을 들어서면 길이 2갈래로 갈라지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길쭉한 모습의 명위헌이
나온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강화도를 다스
리던 강화유수(留守)가 집무를 보던 곳으로 건물의 크기를 통해 강화고을의 규모와 위치가 생각
외로 상당했음을 가늠케 한다.
이 건물은 1638년(인조 15년)에 세워졌으며, 1769년에 유수 황경원(黃景源)이 동헌 이름을 현윤
관(顯允館)이라 했다. 1866년 병인양요로 피해를 입어 다시 지었으며,
1976년 고려궁터를 정비
하면서 건물의 기둥을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는 베이지색으로 모조리
떡칠을 했으나, 그 이후
원래의 색깔로 다시 칠했다.
높다랗게 걸려있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 현판은 18세기 초반의 문장가 윤순(尹
淳)이 쓴 것으로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으며, 건물의 장대한 규모는 답사객을
압
도하기에 충분하다. |
▲
명위헌 중앙 부분
강화유수가 이방(吏房)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리들을 소환해 고을의 일을
논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
명위헌 우측 부분 - 강화유수가 공무(公務)를 보던 방이다.
▲ 병인년의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외규장각(外奎章閣)
잔디만 무성히 입혀진 황량한 옛 궁터를 외규장각이 보듬고 있다.
저 건물도 없었다면 그 허전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
1753년 강화유수 신사(申思)는 객사 동쪽에 내책고(內冊庫)를 세워 강화부의 서적을 보관했다.
허나 보관할 책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나고 그 수용능력이 한계점에 이르자 1782년
정조의
왕명에 따라 연초헌(燕超軒)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외규장각을 세워 직지심경을 비롯한 강화도
일대에 전하는 주요 서적과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한 왕실의 주요 서적 및 보물<어필(御筆), 옥
인(玉印), 의궤(儀軌)..)을 옮겨와 보관하였다.
1866년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패거리는 이곳에 있던 서적 297권과 여러 보물들을 말끔히 약탈
하고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부 소속 관청을 모조리 불질렀는데, 그 과정에서 왕실 관련 보물
99점과 서적 5,000권이 무정하게도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은 것은 2003년
에 새로 지었다.
이곳에 있던 직지심경(直指心經)을 비롯한 서적과 보물은 대부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가 있
다. 1990년대
후반, 김영삼 정권은 고속전철을 만드려는 욕심에 프랑스제 고속전철을 도입하기
로 했는데,
프랑스는 그 대가로 직지심경을 비롯한 병인년에 약탈한 보물을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허나 신뢰가 안가는 야만족속들이다 보니 겨우‘휘경원소감의궤(徽慶園少監儀軌)’1권
만을 돌려주었을 뿐 아직까지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병인양요 당시 강제로 유출된 보물들은 팔자에도 없는 타국살이를 하며 고향을 그리워할텐데 그
들의 귀국이 과연 언제가 될련지는 장담을 할 수 없다. 그것을 돌려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라
를 부강하게 만들어 프랑스를 아주 통쾌하고 짜릿하게 밟아버리는 것이다. 그때 프랑스의 베르
사유궁전과
개선문, 에펠탑을 말끔히 불지르거나 부셔버리고, 박물관과 온갖 사원도 싹 털어버
리면 좋을텐데, 그만 위치가 안좋아 강대국에 둘러싸여 눈치만 보는 조그만 나라의 더러운 처지
다보니 그 꿈도 참 먼 세상의 이야기 같다. 유감스럽지만 내 세대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국가간의 약속인 만큼 직지심경이라도 우선 고스란히 돌려주면 좋겠구먼, 역시 프랑스 야만족들
은 매가 약인 것일까? 시대를 잘 타 강대국이 되어 세계 곳곳에 민폐를 끼치며 실컷 해먹었으면
이제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베푸는 모습도 보이기 바란다. 너무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곳을
프랑스 떨거지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
▲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 |
▲ 강화동종(江華銅鍾) - 보물 11-8호 |
궁터 서쪽에는
강화동종(銅鍾)의 보금자리인 종
각(鐘閣)이 있다. 빛바랜 다이어리처럼 소중히
담겨진 이 종은 1711년(숙종 37년) 강화유수 윤
지완(尹趾完)의 시주로 주조된 것으로 사인비구
(思印比丘)가 만든 8개의 동종 중에서 가장 오
래된 것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승려로 손재주가 매우
뛰어
나 장인으로도 크게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천하에 8개의 동종을 남겼는데. 강화동종을
비
롯하여 서울 화계사(華溪寺) 동종, 홍천 수타사
(壽陀寺) 동종, 포항 보경사(寶鏡寺) 동종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 종은 불교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목적
과 달리 강화읍성 성문의 개폐(開閉)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
강화동종은 18세기까지 절찬리에 쓰였던 고려 범종의 양식에서 새로운 조선 후기 양식으로 변화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로띠를 종의 중앙부분에 두른 특이한 형태로
종의 위, 아래를 구
분하였다. 종의 윗부분에는 4개의 유곽(乳廓)을
만들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된 9개의 유두(
乳頭)를 두었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긴 문장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명문에는 종과
관련된 주요 내용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강화읍성이 아비규환이 되었던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패거리들은 이 종까지 군침을 흘리며 물고
가려고 했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도 무거운 탓에 가져가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 종의 무게는 무려 4톤(3,912kg) 높이는 198
cm,
지름은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에서 가장 크다.
이 종과 종각은 처음에 남문(南門) 부근에
있던
것을 김상용 순절비 부근으로 옮겼다가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종의 건강상태는 양호하여 종을 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은은한 종소리에 내 귀와 마음을 맡
겼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타종은 통제되어 있다. 종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조차 없다.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사인비구 제작 동종 - 강화동종'으로 현재는 하점면 강화지석묘 서쪽
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에 가 있다. |
▲ 강화유수부 이방청(吏房廳)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6호 |
종각 남쪽에 자리한 이방청은 법과 군무(軍務)를 제외한 대부분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이
다. 1654년(효종 5년) 강화유수 정세규(鄭世規)가 세웠으며, 1783년(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
(金魯鎭)이 청사 내부를 보수하고 건물 이름을 괘홀당(掛忽堂)이라 하였다. 왜정 이후 1972년까
지 강화군 등기소로 쓰이다가 1974년 기와를 손질 했으며, 197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ㄷ' 형태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온돌방 8칸, 마루방 12칸, 부엌 1칸 등 총 21칸의 커다란 집
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서 잠시 아픈 다리를 쉬게할 수 있다. 건물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으
며. 그저 텅 빈 방만이 즐비할 뿐. 적막만이 한없이 감돈다. 거기에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서서
히 어둠이 잠기니 거의 폐가처럼 음산함까지 느낄 정도이다. |
▲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 - 인천 지방기념물 35호 |
읍내에서 고려궁터로
가는 길목에 비각 하나가 '잠깐 나좀 보고 가소' 하며 발걸음을 붙잡는다.
앞서 고려궁터에는 40년 몽고 전쟁의 휴유증과 병인양요의 아픈 상처가 있다면 이 비석에는 병
자호란(丙子胡亂)의 가슴 쓰린 상처가 담겨져 있다.
비석의 주인공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시절에는 권율(
權慄)
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 황제에게 굽신거렸으며, 서인(西
人)의 주요 멤버로
대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
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한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의
정(右議政)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도망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해버리
자 그 분함을 삼키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아 불을 질러 자살하고 말았다.
병자호란은 어리석게도 국제정세를 무시하며 청나라(후금)를 배척하고, 임진왜란 때 원군이랍시
고 민폐나 잔뜩 끼친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지극한 사대(事大)로 영원
한 명나라의 그늘로 남고자 했던
어리석은 조선 지배층이 일으킨 큰 화이다. '명나라 만세, 후
금 꺼져!!'를 외쳤으면 후금의 공격에 철저하게 대비라도 해야 되건만 성리학(性理學)에 목숨걸
며 국방을 게을리한 무능한 조선 지배층에게는 그딴 개념도 없었던 것이다. 김상용도 그런
정책
을 지지한 서인 패거리의 일원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음을
죽기
전에 깨닫기나 했을까..?
그 당시로는 흔치 않게 76년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포로가 되기 싫어 자살을 택한 탓에 죽어서도
충신의 대접을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이름은 그의 호에서 유래됨)
비각에는 현재 비석이 2기가 있는데 왼쪽에 구름무늬가 새겨진 비석이 1700년에 당시 강화유수
였던 김창집(金昌集, 김상용의 종증손)이 세운 것이다. 허나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비석의 건
강이 악화되자 1834년에 7대손인 김매순(金邁淳)이 지붕돌을 얹힌 새 비석을 세우고 옛 비석을
비각 밑에 묻었으며, 1976년 고려궁터 진입로 공사로 비각을 옮길 때 우연히 발견되어 부부처럼
나란히 세워놓게
된 것이다.
~~ 이리하여 강화도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첫댓글 좋은 정보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대로 답사 하려고 퍼 갑니다.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2년간 젊었을적에 살았는데 그런데 있는줄도 모르고 그냥 마니산하고 전등사하고 갑곶진.초지진 만 다닌것 같습니다.
좋은데 사셨군요.
선원사와 고려궁터는 가보았는데 하음봉씨가 세웠다는 봉천산 석불과 탑은 모르고 있었네요. 기회가 되면 들러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봉천산 석탑,석불이 강화고인돌(사적137호) 부근에 있습니다. 같이 둘러보시면 될듯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