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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 8:1-9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너무도 많은 오해와 왜곡이 있는 교회의 헌금, 연보에 대하여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강론에서 세상 근심과 하나님이 하게 하신 근심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았는데요, 여러분, 세상 근심이 뭡니까? 그 많은 세상 근심 중에 가장 많은 게 돈에 관한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 대부분이 돈이면 해결되니까요. 그렇게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은 곧 생명과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돈의 힘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돈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으로만 존재해요.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세상 힘을 축적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창세기 4장부터 나오는 라멕, 야발, 두발가인 등의 이야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고 난 후에 광야를 사십 년 돌게 하셨지요. 그렇게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돌게 하신 이유가 신명기 8장에 나옵니다.
(신 8장)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무엇으로 산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단 말이에요. 이 광야 사십 년이 우리 성도들의 인생 전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인생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고 체험하는 과정이에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에요.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 세상과 ‘피’로 구별되어 있고, 그 피로 말미암아 세상이 살아가는 힘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예요.
그럼, 물어봅시다, 지금 여러분의 몸이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 있잖아요. 여러분 마음속에 정욕과 탐심이 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우리가 지난주에 성경 말씀만 진짜 현실이라고 했죠? 그 하나님의 현실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인데, 그럼에도 어떠하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힘으로 살려고 해요. 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치시려고 성도의 인생에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들이 계속 발생해요. 그것을 환난 고난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정신과 세상 방식과 세상 힘과 충돌하고 분리되는 사건들이 계속 생겨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원치않는 별세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단 말이에요. 세상 힘을 축적해서 세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살고 싶은데 주께서 일으키시는 사건들을 통해서 부득불 본의 아니게 이 세상과 찢어지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게 없으면 수상한 겁니다.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신 거예요. 고린도후서 13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성경의 현실은 매우 냉엄합니다.
그럼, 그렇게 세상 속에서 세상 힘을 축적하고 고지에 올라서서 출세하고 잘 사는 사람들.. 세상 교회들이 대부분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예수 믿으면 복 받아서 부자 되고 출세하고 고지에 오른다고 말입니다. 그럼, 그들은 뭐예요? 내어버려 두신 겁니다. 세상 복에 환장한 종교인들을 도와주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헸던 마귀란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성도에게 세상과 분리되는 사건들이 꼭 있어야 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태어날 때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 안에서 태어났잖아요. 이 말은 아담의 죽음 안에서 태어난 거예요. 어떻게 보면 태어난 것 자체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어린아이들이나 연로하신 권사님이나 죽음 안에 있는 건 똑같아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저주란 말이에요. (창3:17-19)
그런데 성도에게는 일반적인 그런 죽음과는 다른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신 언약의 죽음으로 우리를 바꾸어 놔버렸단 말이에요. 우리가 요청한 적도 없는데. 언제? 창세 전에. 그리고 그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이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요. 그것을 언약의 죽음, 진리의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 죽음 안에 합류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 죽음이 세상에 대해 못 박히는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요즈음 대부분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안 하는데, 제가 자꾸 십자가만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이 그래요. 성경에는 십자가도 있고 부활도 있고 천국도 축복도 있는데, 왜 강 장로는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고 해요. 그런데 그 부활 천국 축복이 십자가 안에 다 있다니까요. 십자가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바울 사도도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에요.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하잖아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요. 바울은 그때 십자가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완성되어 있는지를 삼층천에 가서 보고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홪정된 현실, 영원한 현실에 대해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그 하나님의 현실이 우리 인생을 사는 동안에 계속 반복 확인시켜 주는 과정이 고난이에요. 이 세상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분리되는 고난입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뭡니까?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교보재로서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아닌 그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용도로 세상이 있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인생 몇 년 삽니까? 요즈음 백세시대라고 하는데 백 년을 살아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째깍도 안 돼요. 그야말로 찰나에요.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전능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담으시는 거예요. 이 세상과의 구별, 찢어짐이라는 방식으로 담아주세요. 그래서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그래서 교회는 예수의 죽음, 언약의 죽음이 작동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죽음을 살아내는 우리 안에만 예수의 생명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형과 유산 분배 중에 문제가 생겼으니 예수님이 재판 좀 해주시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난자와 하늘에서 오신 분의 경계입니다. 신명기 8장 말씀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력으로만 존재하는 게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그 이야기를 안 해요.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싶어서.
오늘날 이 세상은 돈이라고 하는, 맘몬이 쳐 놓은 너무도 튼튼하고 촘촘한 그물 구조 안에 갇혀서 사는 세상이에요. 현실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서조차 돈의 힘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하나님으로 가르칩니다. 신학교에서 실제로 그렇게 가르쳐요. 하나님도 사람이 없으면,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못하신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고 사람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리고 그 교회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하죠. 결론이 그렇게 갑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님도 돈이 있어야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거잖아요. 맞습니까? 이게 오늘날 개혁주의라고 하고 개신교의 모든 교단, 모든 신학교,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에요. 결국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입니다. 신인협동설이 여기까지 온거에요. 이렇게 인본주의에 깊이 물든 대한예수교.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낮 티끌이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서면 어느 인간도 진멸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협조자가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 그게 가능합니까? 출발부터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나대는 인간들을 하나님은 부정하다고 하세요. 그리고 그런 육체들과는 영원토록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합니다.(창 6장)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돈을 받으신다? 인간의 정성을 받는다? 우리 속담대로 지성이면 감천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다 그거예요. 지성이면 감천. 그리고 또 하나 있어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고지론. 다원주의...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성전을 지을 때도 철 연장으로 돌을 못 다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너희의 기술로 짓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베 옷을 입게 하십니다. 땀 흘리지 말라고. 너희가 땀을 흘려서 짓는 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 말씀을 오늘날 대한예수교가 몰라요. 무조건 많이 가져다 바치면 복 받는 줄 알아요. 예전부터 절에는 기와불사가 있어요. 기왓장에 이름을 써서 절을 지을 때 가져다 바치죠. 그런데 요즈음은 교회 지을 때 보면 벽돌 한 장 바친다고 하지요. 복 받을라고..이게 종교입니다. 종교의 본질이 그건데 그 수준에서 하나도 못 벗어나요. 왜 그럴까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 아담은 자아란 게 생겨서 자기 부정이 안 됩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었기 때문이에요.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신은 나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들 내가 믿고 싶은 예수만 믿어요. 내가 믿고 싶은 예수, 내가 섬기고 싶은 하나님, 한 마디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사랑하세요. 그럼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를 아들로 여겨주시는 겁니다.그게 양자 됨이에요.
오늘날 교회가 착각을해도 아주 단단히 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 기가 막힌 현상들이 참 많은데요. 여기 바로 옆에도 대형 교회가 하나 있는데, 요즈음 큰 교회들을 보면 그 입구에 헌금 봉투를 쭉 세워놓는데 헌금 종류가 수십 가지예요. 심지어 일천번제 헌금도 있고, 봉투에 구멍을 낸 교회도 있어요. 천 원짜리 넣지 말라고. 아니 교회들이 돈에 환장을 했다니까요. 그런데 그 돈 모아서 뭐 하는지를 아십니까? 부동산 사들이고, 교회 비자금 만들고, 이천억짜리 예배당 짓고 교육관 공동묘지 만들고 그럽니다. 동네 한블록을 다 사들인 교회도 있지요 서울 어느 교회 장로는 비자금 관리를 하다가 자살했어요. 종교 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하는데, 이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화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과 종교 권력이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결탁하고 합니다. 얼마 전 부활절에도 순복음 교회에서 있은 연합예배 강단에 대통령을 세웠잖아요. 왜 세웠을까요? 교회를 해체한다고 하고 교회 돈을 몰수한다니까 교회가 세상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거예요. 정치하는 교회,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귀신의 처소, 사단의 회당입니다. 종교인들이 세운 교회는 어쩔 수 없어요.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만 따로 관리하신다니까요. 하나님은 그런 종교인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세요. 너희가 교회를 세우든 선교를 하든 이천 억짜리 예배당을 짓든 무얼 하든 아무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사람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창세 전에 이미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아들들을 하나하나씩 세상에 보내셔서 너라는 존재, 너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피에 있음을 계속해서 빈틈없이 가르치십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징계라고 합니다. 그렇게 두들겨 패서라도 반드시 배울 건 배우고 오라는 거예요.
그런데도 오늘날 세상 교회들은 너희들의 돈, 너희들의 열심, 너희들의 충성, 너희들의 헌신 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말로 교인들의 돈을 갈취합니다. 또 교인들은 헌금 봉투를 던져놓고 천국 가는 보험 하나 든 것처럼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자들이 오늘날 종교인들이에요. 말라기는 그런 자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하나님을 도적질했다’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도적질한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게 하나 있는데, 그건 하나님은 인간의 것은 그 무엇도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인간의 돈, 인간의 정성이나 헌신이나 열심을 안 받으십니다. 인간들이 내어놓는 율법 행위나 종교 행위 안에는 자기 의가 있기 때문이죠. 탐심이 있어요. 생명나무에 손을 뻗치는 탐심입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는 교회에 안 다니죠. 선악과를 먹은 인간만 생명나무를 향한 탐심이 있어요. 그것을 하나님이 아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만 받으세요. 십자가의 예수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다 함께 드려졌어요. 그 영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드려졌어요. 따라서 구약의 모든 제사 제물 십일조 등은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님을 모형 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하나님이 받으신 게 아니에요.
그런데 아직도 세상 교회가 십일조를 받잖아요. 모든 절기와 제물 제사 방식 등은 예수로 완성되었는데도 절기 헌금 하고 십일조 하는 건 십자가의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거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했는데, 그 다 이루심을 교회가 부정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연보에 관한 내용이어서 제가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드리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아직도 십일조와 여러 절기 헌금을 드린다는 건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영단번의 제사, 그 완료를 모욕하고 부정하게 됨을 세상 교회가 몰라요. 이거 심각한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종교 기술자들이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거예요.
신학교에서는 구속사, 언약사라고 해서 구약의 모든 절기나 하나님 약속의 역사, 믿음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걸 안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르쳐요. 그런데 그것은 시험 볼 때, 리포트 작성할 때뿐이고 막상 현장에 나오면 꿩 잡는 게 매라고 목사들이 전도사나 강도사한테 가르치거든요. 신학교서 배운 거 교회 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입니다. 결국은 교회에요.
김성수 목사가 미국에 있을 때 한국 신학생들한테 오래도록 점심값도 주고 책도 사서 보내주고 했다잖아요. 그런데 한국 와서 그들을 만나 앞으로 어떤 목회를 하고 싶냐고 묻자, 우리도 곽모 목사처럼 벤틀리를 타고 싶다고, 큰 교회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바로 욕이 나왔다는 거죠. 이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말로만 하나님 섬기고 예수를 섬기지 실제로 섬기는 건 맘몬, 바알신을 섬기는 겁니다. 저 유명한 박영선 목사님도 최근에 말썽이 났잖아요. 아들 개척 교회 한다고 퇴직금 몇십억 내어놓으라고.. 마지막에 그렇게 가버리면 그 사람이 지금까지 전한 예수 십자가는 뭐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시는 하나님이 맞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돈이 필요 없는 분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어요. 맞죠? 목사 장로도 못하고 교회도 못합니다. 생명을 주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어요? 물론 천주교는 아직도 교회에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거 아니라고 개혁해서 나온 개신교까지도 얼마 못가서 다시 돌아가 버렸어요.
다시 말하지만, 돈으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리 말하면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아무것도 안 하면 되겠네.. 라고. 맞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됩니다.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요. 하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보고 박수치고 찬양하는 게 우리의 일이에요. 그분이 하나님이신 걸 믿는 게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자에게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 하셨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서 하려고 하죠.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고 하시는데도 말입니다. 율법 행위, 종교 행위,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선악 행위로 믿음을 대신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어떤 선행이나 열심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포장해서 내어놓는 어떤 율법 행위도 더럽다고 받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안 속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바치는 어떤 정성이나 열심에도 속지 않으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안 통해요. 내 몸을 불살라 드릴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예수가 없으면, 예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개죽음이에요. 옛날에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하면서 몸에 신나 뿌리고 죽었던 그들도 개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옳음,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죽는 그것을 하나님은 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은 세상이 규정한 그것과 전혀 달라요.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관점이 나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 부정하고, 다 치우치고, 다 음란하고, 너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해요. 아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시선이에요.
그렇게 자기 사랑, 자기 숭배에 빠진 인간들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자꾸 자기 손때를 묻히려고 합니다. 마치 인간의 열심 바침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인 것처럼 만든 게 오늘날 종교화된 기독교입니다. 이름만 다르지 불교나 유교 이슬람 등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요. 그래서 요즈음은 크리스마스에 스님들과 손잡고 함께 노래 부르죠. 조금 있으면 석가탄신일인데, 그때는 또 같이 찬불가를 부르겠죠. 다원화된 종교 참 무서운 거예요. 꼭대기에 오르면 진리는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만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뒷방 늙은이처럼 모셔놓고 세상은 우리가 접수해서 우리끼리 알아서 하겠다는 거에요
실제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교회에 충성하는 게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교회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 십자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영광만 영광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립니까?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거예요. ‘나는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 맞습니다. 당신의 은혜가 아니면, 그 십자가 피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그 고백, 그 찬송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에요. 다른 영광은 없어요. 수천억짜리 예배당을 지어서 바쳐도 하나님은 그거 안 보세요. 그런 건 마지막 날에 다 불살라 없어질 것이에요.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선교를 간다? 가면 뭐합니까?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드는데, 그곳에 사단의 회당 하나 더 만드는 것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천리 만리 가서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전한단 말이에요 이 악당들이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은 오직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서만 전해지는 것이지 교회에서 전도 훈련하고 선교사 파송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 불러내시고, 때가 되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서 (어린양의 신부로)구별하신 에클레시아 그들에게만 나누어지는 게 십자가 복음, 은혜의 복음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불러내신 성도가 있는 그곳이 땅끝입니다. 중동 아프리카가 땅끝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사는 그곳이 땅끝이에요. 예수님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고 자꾸 찾아다니는데, 여러분 한번 보세요.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 집사가 성령에 이끌려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요. 자기가 찾아간 게 아니에요. 주께서 만나게 하신 거에요. 에티오피아 내시 만나서 뭐 합니까? 그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를 설명해 주잖아요. 이게 그리스도 예수라고. 그러자 그 내시가 그 자리에서 세례를 달라고 해서 집사인 빌립이 세례를 줬어요. 오늘날 집사가 세례 주면 어떻게 됩니까? 이단으로 치리 당하죠.
온갖 교리 교회법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성경에는 목사라는 직분이 없어요. 목사가 아니라 목자예요. 포이맨.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그 목사는 나중에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 질서유지 차원에서 목사라고 만든 거예요. 그래서 카톨릭에선 목사 인정 안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 치의 실수 없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다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미 묵시 안에 이루어졌지만, 이 역사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어요.‘already not yet’ 묵시에 이루어진 그게 실체, 즉 진짜 하나님의 현실이고, 그 묵시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게 역사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헌금과 연보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연보는 뭐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의 서로 섬김, 서로 나눔을 연보라고 해요. 오늘 본문에도 나오잖아요.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게 드려진 자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드려졌기 때문에 그 드려짐, 그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들을 계속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이고 나누고 한단 말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 성도들을 서로 섬기는 것으로서의 연보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연보로 나누어졌으니까... 그래서 주일날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게 연보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진 영적 현실, 그 십자가의 현실을 확인하고 감사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으로 서로 나누는 게 바로 헌금의 목적이고 진의입니다. 한 마디로 돈이 아니고 자신을 드리는 것이에요.
복음서에도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칭찬하신 헌금 있죠? 누굽니까? 과부의 두 렙돈, 그거란 말입니다. 과부는 돈을 드린 게 아니라 자기 전부를 드린 거예요. 예수님이 그리 말씀하셨어요. 자기 전부를 드린 거라고. 이게 헌금의 진의입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또 하나의 헌금이 나와요. 헌금이라고 해도 좋고 연보라고 해도 좋은데.. 예수님이 칭찬하신 헌금이 하나 나옵니다. 자신을 예수님께 드린 여자 이야기.. 마리아죠.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 부음 사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온 천하에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마리아의 향유 부음은 그 자체가 복음이었어요. 왜 그렇습니까? 향유 부음이 어떻게 복음이에요?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가 엄청 비싼 거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거 요즈음 시세로 하면 수천만원이 된다는데 그래서 칭찬하신 게 아니에요. 이걸 두고 세상 교회들이 또 자기 가진 거 중에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면서 헌금 선동할 때 써먹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칭찬은 단순히 값진 것을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 불가능한 죄인이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되는 것,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같이 살아나는 복음 이야기를 생생한 그림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건 마리아의 향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부어지는 마리아 자신을 받으셨단 말이에요. 그럼, 왜 하필 기름입니까?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기름을 발라요. 향기 나는 기름을 사람이 죽을 때도 바르고, 제사장을 세울 때도 바르고, 손님이 집에 와도 바르고, 왕과 선지자를 세울 때도 기름을 부어요.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마리아가 그걸 다 알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마 26장)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죽음, 언약의 죽음, 그 유일한 죽음에 마리아가 연합되었단 말이에요. 같이 부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걸 복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예요. 일곱 귀신 들린 이 마리아가 전적 불가능한 우리 죄인들의 모형으로 그렇게 부어지는 그림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히브리인들의 문화에는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기름을 부어서 발을 씻게 합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잖아요. 이 세상에 자기 사람들을 찾아오신 하늘 손님, 그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잖아요. 아까 예배 시작에 영원한 문, 승리의 문을 드신 왕이라고 시편을 읽어드렸는데, 그 왕이란 말이에요. 또 제사장, 유일하게 죄가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 히브리서에 나오는 대제사장이신 그분께 기름이 부어지고, 그리고 선지자이신 예수, 하나님의 말씀을 맡으신 그분. 그분의 장례식에 그 시체에 기름을 부어서 바르는 것 (요19:39-40) 지금 마리아가 주님께 부은 기름은 이 모두를 포함한 기름 부음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그 기름을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 관원들과 바리새인 앞에서, 그 원수들 앞에서 네가 나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하시는 게 시편 23편의 실현이에요. 원수들 앞에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바로 그 장면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이 이사야서에도 나옵니다.
(사 61장)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선지자의 예언이 이제 현실로 펼쳐진 거예요. 마리아는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그 말씀이 실현되는 현장에서 죄인의 대표로 참여되었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는 복음의 현장에 마리아 자신이 부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렇게 보여주므로 해서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되는 이 십자가 복음이 나타나게 될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려짐에 동참하게 되는 게 바로 성도의 헌금이고 성도의 연보임을 마리아의 옥합 깨뜨림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연보에는 십자가의 죽음, 그 언약의 피가 내용으로 들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연보예요. 그것이 없이 형식적으로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하는 건 연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 연보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합류되는 자기 부정으로부터 나오는 드림이에요. 그 드림을 우리의 헌금, 우리의 연보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인생 전체가 그 드림의 과정이에요. 우리 삶 자체가 복음을 살아내는 연보의 삶이란 말입니다. 왜? 이미 주님께서 연보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그 연보를 우리가 나누는 것일 뿐입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아니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성도의 삶 전체가 연보로 드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순종과 헌신으로 부정한 죄인인 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런 엄청난 사건이 교회의 헌금과 연보로 재연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증언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우니까 너희들이 연보 많이 해서 복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5절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9절도 마찬가지예요.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은혜가 먼저 나오죠?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나누어졌단 말이에요. 하늘의 보화가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누어진 거예요.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연보예요.
이렇게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은혜, 그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우리로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는 사건으로서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의 사건들이에요. 복음의 사건들로서 여러분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교회는 말씀의 사건으로 발생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모였던 대구서머나 교회는 없어요. 오늘 서울에서 오시고 광주에서 오셨는데, 오늘 이렇게 모인 교회는 새롭게 발생된 교회예요. 그래서 교회는 늘 새로운 교회입니다. 새롭다는 말은 자기 역사가 없다는 말이에요. 가톨릭은 역사가 이천 년이라는데 그런 거 없어요. 개신교도 무슨 백주년기념 교회 그런거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모일 때마다 새로운 교회에 무슨 자기 역사가 있어요? 보통 큰 교회 당회장실에 가면 1대 당회장 사진부터 해서 쭉 걸어놓는데 그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요.
그렇게 성도에게 있어서 연보는 은혜요 특권으로서의 연보입니다. 성도의 특권이에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지난주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현실에 눈이 열려서 근심과 회개를 이룬 자들에게 사도가 이 연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난주 본문 말씀에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근심하고 회개하게 된 것은 그 교회 안에 하나님이 남긴 자들이 있어서예요. 그들만 하나님이 하게 하신 근심에 의해서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 근심과 회개가 뭔가 하면 보이는 세상 현실 아닌 하나님의 현실에 대해서 눈이 열린 거예요. ‘보이는 이게 현실이 아니었구나 내가 헛된 것을 좇아 멸망의 길로 달려 갔구나...’ 이런 자들만 인생의 방향성이 유턴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거예요. 멸망의 길로 달려가다가..
그런 자들에게 지금 사도가 연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들만 알아듣는 연보예요. 이방인인 고린도 교회가 이제는 십자가 은혜로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가 되었다는 그 현실을 연보를 통해서 서로 나누므로 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돈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에요. 단순히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세상 속에서 한번 누리고 살아보라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왕이에요. 모든 사람이 나를 왕으로 섬기고, 또 내가 모든 사람을 섬기는 곳, 그래서 빛과 사랑으로 충만한 그곳. 그 삶을 이 세상 속에서 연습하고 훈련해 보라고 연보가 있어요. 이게 세상과 구별된 교회의 정체성이니까 그 마땅한 본분을 너희는 행하라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잠깐 나타났던 예루살렘 교회의 나눔이 그거예요. 모든 예루살렘 교회 성도가 자기 재산을 다 교회에 내놓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겁니다. 와! 진짜 좋죠? 이단들이 이런 공동체를 하자고 많이 생겨났잖아요. 박태선입니까? 신앙촌부터 해서 전 재산 가져다 바치고 말입니다. 여기서 생겨난 게 공산주의예요. (칼 막스는 신학교 출신입니다.) 공산주의 굉장히 좋은 생각이잖아요.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누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칼 막스가 한 가지 몰랐던 게 있어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생산 도구로 봅니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에요. 공산주의 백년 실험해서 실패했는데 다시 그거 하자는 사람들 있는데 심지어 교회까지 나서서 사회주의 노동운동 외치는 자들 ..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눌 수 있는 이게 세상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이고 또 성도만의 특권으로서의 연보 맞아요. 그들이 그리스도의 연보에 참여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빠지면 다 가짜란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런 은혜의 필연성을 우리에게 확인하고 각인시켜 주시려고,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자기 부정의 드려짐을 위해서 우리에게 때로는 험악한 인생도 살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으니까 우리가 주님의 피로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때로는 우리가 의지하고 힘으로 삼고 있는 것들을 주께서 빼앗아 가기도 하십니다. 세상을 통해서 그렇게 털어내기도 하고 잘라내기도 하시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야곱입니다. 하나님마저 속이고 이용하려 했던 야곱이죠. 야곱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장자입니다. 여러분, 모든 성도는 다 장자예요. 구약에서 장자에게 축복을 내린다는 게 바로 그 뜻이거든요. 원래 하나님의 장자는 예수님 한 분인데, 그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장자로 여겨주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날 애굽 장자들이 다 죽었잖아요. 장자는 그 집안을 대표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피가 발린 집에는 죽음의 신이 넘어갔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복 주기로 작정하신 자가 야곱인데, 세상에 태어날 때는 둘째로 태어납니다. 형 에서가 있잖아요.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조건이나 자격이 야곱 너에게는 본래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에는 맏물을 제물로 드리고 하나님은 맏물에 축복하십니다, 장자이신 예수를 모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로 태어난 야곱이 장자 에서를 추월해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고 형을 속인 대가로 집을 떠나 도망가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복음이 등장해요. 야곱이 그 장자의 복을 어떻게 받습니까? 엄마가 에서 처럼 장자의 옷을 입혀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장자이신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여겨주시므로 해서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는 이게 복음이에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원래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닌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장자의 복이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형을 피해서 도망가다가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 천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마하나임, 군대라고 해요. 그리고 천사가 야곱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엄청난 축복이지요.
이 천사의 말을 들은 야곱이 완전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해서 귀한 존재로 만드시고 또 많은 힘을 가지게 해서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자로 만드실 거라고 오해한 겁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의 진의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너를 일방적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지 야곱이 원하는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신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중에 세상 끝에 선 야곱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야곱은 이 약속 때문에 험악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털리는 인생 그게 축복인 것을 늦게서야 안 것입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그 자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 벧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다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도 예전에 세상 교회 다닐 때 이런 거 많이 해봤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했던 이 서원에는 야곱이 내세우는 이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거예요. 그렇죠?
그리고 참 재미있는 게 야곱이 십일조 이야기를 해요. 이때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에요. 그럼, 야곱은 십일조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 십일조를 드렸거든요. 그러니까 야곱은 할아버지에게서 십일조가 축복의 통로가 됨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약삭빠르게 하나님과 거래를 트려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거죠. 참 야곱답죠? 그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가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임을 야곱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좋은 길을 열어주시면 자기도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겠다고 한 거예요.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서원을 한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야곱을 오랜 세월 동안 죽여가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야곱이 죽은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야곱은 십자가를, 그 복음을 온몸으로 살아내야 했던 야곱이었던 거에요.
우리 성도가, 교회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그 옛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인생을 사는 동안에도 그 십자가의 죽음에 수시로 넘기우는 그런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야곱이 죽은 자리,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씨방이 깨지는 그 밤, 그리고 그 어둠의 세월들, 그렇게 죽은 야곱에게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나온 게 바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저와 여러분 곧 교회란 말입니다. 그 교회를 야곱과 그의 아들 열두 지파를 통해서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신 거예요.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열두 기초석, 열두 문, 보석으로 표현되는 그것들,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이스라엘로 보여주신 거예요. 바울이 로마서에서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잖아요. 혈통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니고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고.
그리고 야곱이 서원했던 그 하나님의 집은 야곱이 출세해서 많은 재물을 얻어서 세우는 집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아들의 피 위에 세우시는 그런 성전입니다. 그 성전이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피로 사신 교회,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일생을 통해서 그것을 배웠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죽음을 맞으면서 하나님이 쥐어주신 지팡이에 의지해서 아들들에게 유언합니다. 자기 해골을 할아버지가 묻힌 막벨라 굴에 가져다 달라고 말입니다.
이 야곱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과 동행하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을까요? 틈만 나면 하나님을 속이고 이용해 먹으려는 그 야곱을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에요. 그게 우리의 인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마저 속이고 이용하려 했던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나는 그 이스라엘입니다. 그렇게 십일조는 야곱 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십일조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인생을 야곱은 아프게 살아내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 야곱입니다. 내가 내것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 내가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진짜 십일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가리는 짓임을 계속 폭로 당하는 삶을 야곱은 살았습니다. ‘아 이게 아니었구나.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섬겨야 내가 살아나는구나.’.. 그렇게 천국은 하나님의 희생과 섬기심으로 영원한 나라예요. 교회는 그 천국을 배우는 곳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다 종교인이에요. 십일조라는 율법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의 야곱인 것처럼 우리 모두 그런 종교 생활, 그런 탐심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빈틈없이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면서 눈동자처럼 지키고 관리하시기에 하나님의 때에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로 불려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탈탈 털린 야곱처럼, 씨방이 깨진 야곱처럼,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게 되는 그 야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이 지팡이가 라메드(가르침)예요. 가르침의 말씀과 같은 단어예요.
이렇게 말씀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생. 이 세상에 의지할 게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는 그런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연보는 내 것 중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릴 테니까, 내 시간 내 소유 중의 일부분을 십일조로 드릴 테니까, 내가 그렇게 예수 믿어줄 테니까 그런 기특한 나를 축복해주세요.. 라고 했던 그런 우리 옛사람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계속 죽어 나가고 예수님의 십자가, 그 보혈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영원토록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 맞습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 맞습니다.. 라는 그 자리, 그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자리로 우리를 띠 띠어서 끌고 가시는 게 바로 야곱의 꿈속에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언약, 그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약속을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하신, 내가 네게 허락한 그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그 이스라엘 됨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멘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그러셨잖아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일생에 작동하고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예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름이 다 삭제되고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이 축복의 자리.
이와 같이 하나님이 유일하게 받으신 십일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또 우리에게 나누신 그 연보가 무엇인지를 이제 우리는 알기 때문에, 그 주님의 연보가 지금 우리 일생에 나누어지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도 그 연보를 마케도니야 교회처럼, 고린도 교회처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아니고 사랑이에요. 돈이 아니고 은혜란 말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마저 속이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던 그 야곱을 죽이시고 하나님이 새로 지으신 이스라엘로 세상 밖에서 세상을 대표하는 바로를 축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열심,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이 우리 남은 인생에 변함없이 펼쳐질 것을 우리는 알기에 이 광야 인생동안 배우게 되는 새 노래, 그 은혜의 영광의 찬송이 이 척박한 이 땅에서도 날마다 울려 퍼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세상과 만물이 다 여러분들의 것이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고 저 멀리 보이는 우리 아버지 집, 저 천성을 향해서 함께 찬송하며 걸어가는 우리 남은 날들이 되도록, 우리 주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솟아나는 그 생명수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드려지신 그 십일조가 있어서 우리 주님의 연보 그리스도라는 연보가 있어서 우리가 부족함이 없는 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 천국 보화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로 알게 하시고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영생, 그 생명, 그 천국을 우리가 이 환난 가운데서도 누리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남은 날들이 영광의 찬송으로 채워지게 하시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남은 인생을 살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