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스터즈는 작곡가겸 가수였던 김해송과 역시 가수인 이난영 부부의 세딸(김영자, 숙자, 애자)로 구성된여성트리오로서, (나중엔 김영자 대신 조카인 김민자가 활동함)이난영은 6.25가 발발하고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자 일곱 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한다.1951년 이난영은 미군열차를 얻어 타기 위해 세자매에게 영어 노래를 가르친다. 세자매의 첫무대는 피난열차였던 것이다. 미국 걸그룹 앤드루 시스터즈의 히트곡을 뜻도 모르면서 발음만 외워 노래를 했고 열살 남짓한 새자매는발음을 엉뚱하게 하는 등 실수를 연발했지만 화음을 맞춰 부르는 앙즌맞은 모습에 한국의 앤드루 시스터즈라는애칭을 얻는다.이난영은 미군부대 무대에 세우기 위해 회초리를 들어가며 세자매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1953년 가을 김씨스터즈로 팀명을 정하고 서울 스카라극장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갖는다. 멤버들이 여러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노래하고 춤까지 추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그룹이었다. 미8군 무데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국내활동과 병행하다가 1958년에는 영화에도 출연하여 노래를 하는데 관객 10만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1958년 이들의 소문을 들은 미국의 쇼운영자는 주한미군 맥 매킨을 매니저로 내세워 계약을 맺고 미국 진출을 성사시킨다. 이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하락까지 맡아 1959년도에 아시아 최초로 미국으로 진출하는 걸그룹이 된다. 세자매는 미국 진출 후 더욱 노력해 10개 이상의 악기를 다루며 한국 민요를 곁들여 미국의 인기곡을 연주와 춤을 곁들여 보여주는 이색적인 그룹으로 입소문을 타며 "동양의 요정", "다이너마이트 걸트리오"등의 수식어를 받으며 인기를 한몸에 받기 시작한다.당시에도 미국에서도 여성그룹이 연주와 춤, 노래를 같이 하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 미국 유명 쇼프로그램인 "에드 셜리번 쇼"에 33회 단골로 출연했었고 1960년 2월 유명 잡지 "LIFE"에 특집 기사가 실리기도 하는가 하면 다른 유명 잡지의 표지 모넬로 선정되는 등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이들의 골수팬을 알려진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와 만나는 장면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알려지기도 했다. 처음 미국 진풀한 한국 그룹으로는 대단한 성공을 한 것이었다.
1963년 첫 정규 음반이 발매되었고 이후 이 음반은 딸들을 만나러 간 이난영에 의해 국내로 공수되면서 1964년 국네에도 발배되었다. 탁월한 곡해석과 아름다운 화음, 화려한 가창력등 명반이다.이 음반은 1960년대 대만에서도 발매된 것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지구촌 각국에서 발매된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확인할 길이 없다. 이음반의 B면 타이틀곡이면서 김씨스터즈의 가장 대표적인 히트곡이 "챨리 브라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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