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스본 왕 시혼을 치다
신 2:26-37
26 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 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 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30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32 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34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35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3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신 2:26-37 / 그래서 나는 ㄱ) 그데못 광야에서 ㄴ) 헤스본왕 시혼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뜻을 품고 왔습니다. (ㄱ. 이르논강 근처의 성읍. ㄴ. 요단강 동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성) 27) 우리가 왕의 땅을 지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는 큰길로만 지나가고 샛길로는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28)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과 물은 모두 왕에게 돈을 내고 사서 먹고 마시겠으며 우리는 다만 걸어서 지나가겠습니다. 29) 세일에 사는 에돔 백성과 아르에 사는 모압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땅입니다.' 30) 그러나 시혼왕은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성격도 거칠게 하시고 마음도 굳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여러분의 손에 넘겨 주어 과연 오늘날 여러분이 그의 땅을 차지한 것과 같이 되게 하려고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31)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시혼왕과 그의 땅을 너희에게 넘겨 주었다. 너희는 이제 그 땅을 차지하여라.' 32) 그래서 시혼왕이 직접 전군을 거느리고 우리와 싸우려고 아르논강 북쪽의 야하스 성읍으로 나왔으나 33)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의 손에 넘겨 주셔서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군인들을 모두 쳐죽였습니다. 34) 그리고 우리가 시혼왕의 모든 성읍들을 점령하여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를 가릴 것없이 그 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35) 가축들만은 ㄷ) 전리품으로 남겨 두었고 우리가 점령한 성읍들에서 약탈한 귀중품들도 우리가 전부 차지하였습니다.(ㄷ. 이스라엘 땅이 아닌 먼 지역의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다) 36) 아르논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아로엘 성읍과 아르논 강가에 닿은 성읍으로부터 길르앗 지역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성읍도 우리보다 더 강한 곳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성읍을 우리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에는 여러분이 가까이 가지 않았고 얍복 강변의 지역과 인접한 산지의 성읍들은 여러분이 점령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 곧 요단 동편을 차지하고 있던 두 왕인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중 헤스본 왕 시혼을 물리치는 장면입니다.
시혼이 모세의 제안을 거절하다(26-30) 모세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평화의 말로 “헤스본 땅을 지나가게만 해 달라. 양식도 물도 돈을 주고 사겠다”고 제안합니다. 앞서 에돔, 모압 땅을 지나왔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스라엘은 닥치는 대로 빼앗는 정복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거룩한 군대입니다. 그러나 헤스본 왕 시혼은 모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시혼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헤스본 땅은 본래 모압의 영토였으나 시혼이 그 땅을 차지하고 모압의 경계를 아르논까지 밀어내었습니다(민 21:26). 이에 시혼은 영토에 대한 불안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혼의 이런 개인적인 결정 이면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모든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작정하셨고, 이에 시혼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것입니다(30). 시혼은 아모리 사람입니다(민 13:29). 아모리 사람은 바로 가나안의 원주민들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주시기 위해 반드시 몰아내야 할 자들입니다. 시혼의 거절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스스로 제공한 셈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시혼과 그 백성을 진멸하다(31-35) 시혼이 모세의 평화의 제안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땅을 차지하고 기업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땅을 넘긴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참여하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야하스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완전히 승리합니다. 이스라엘이 시혼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 심지어 유아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입니다. 이는 소위 헤렘, 곧 그 땅을 더럽힌 자들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남김없이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하나님께서 가축과 성읍을 이스라엘의 소유로 허락하십니다.
모든 성읍을 점령하다(36-37) 38년 동안 광야를 지나온 이스라엘이 최초로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 있는 모든 높은 성읍을 소유합니다. 38년 전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성들의 높은 벽들을 보고 겁을 먹고 돌아섰습니다(신 1:28). 그러나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갔을 때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한 높은 성읍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시혼이 모세의 평화로운 제안을 거절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까?
소유에 대한 기준을 무엇이라 말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소유하면 만족을 할 수 있을까요? 소유에 대한 기준과 만족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지금 보다 더 많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만족감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몹시 괴로워합니다. 지키려 하고 쌓으려고 하고 여기에서 얻는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라
신명기 2:26-37 / 코너스톤장로교회
모세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출애굽 2세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스본 왕 시혼의 땅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평화의 사절단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평화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 요구 합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대로’로만 통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어떤 싸움도 원치 않으며, 또한 그들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이 땅을 평화롭게 통과하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죠. 심지어 물이나 양식도 훔쳐 먹지 않고, 그들에게 돈을 주어 사 먹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혼은 이러한 ‘평화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헤스본 땅을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헤스본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시혼 왕의 ‘성품을 완강케’ 하신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애굽의 바로에게 출애굽을 요청할 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이방민족의 왕들의 마음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 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혼 왕이 완고하게 거절하자, 이에 하나님은 31절에 모세에게 비로소 시혼과 그 땅을 차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1절 입니다. “(신 2:31)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비로소 시혼과 그 땅을 네게 붙이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 땅을 얻어서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본래 평화롭게 이 땅을 지나가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스본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가 자신들의 강한 전투력이나 뛰어난 전략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음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봅시다. “(신 2: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붙이시매 우리가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모든 백성을 쳤고” 여기서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붙이시매’란 말은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다’란 말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헤스본 왕 시혼의 목숨을 이스라엘의 손에 쥐어 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 전쟁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2세는 아직 전쟁 경험이 전무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혼과 그의 막강한 헤스본 군사들을 이긴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병사와 병기의 숫자가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승리하고, 힘이 약한 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강한 자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공공연한 비밀 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헤스본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군의 모든 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 하였습니다. 34절 말씀을 봅시다. “(신 2:34)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이와 같이 성읍의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인 것은 이 전쟁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34절 마지막 단어로 쓰인 ‘진멸하다’는 것이 히브리어로 ‘헤렘’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적군을 진멸하는 헤렘 전쟁은 여리고성 정복 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구약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전쟁에서 패배한 백성들을 노예로 삼는 경우가 일반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헤스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적국을 노예로 삼았다면 더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헤스본과의 전쟁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여기고, 헤렘 전쟁 즉 모든 적군을 진멸하는 전쟁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싸우는 이유가 어떤 물자적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순종의 표시였습니다.
36절 말씀을 보면, 모세는 강적 헤스본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승장구하여 마음만 먹으면, 근처 다른 족속들의 모든 성읍들도 취할 수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36절 말씀을 봅시다. “(신 2:3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붙이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에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취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높은 성읍’이란 싸우기 힘든 상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강적 헤스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싸워서 이기지 못할 상대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 했습니다만, 이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방 족속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임을 인정하고 조금도 넘보지 않았습니다. 37절 말씀 입니다. “(신 2: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무릇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가기를 금하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모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가기를 금하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결코 넘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이라면 에돔, 모압, 암몬과 전쟁하여 얼마든지 승리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조금도 그 땅을 넘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싸우기 힘든 대상인 헤스본과의 전쟁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더 많은 가지기 위해 집착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 삶에 주시는 것에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 많은 것들을 채워 주시고,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속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강적 헤스본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까지 차지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허락하신 축복에 넉넉한 마음과 자족한 태도를 가지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복된 삶,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다
신 2:26-37 / 그린스보로한인장로교회
오늘 말씀은 신명기 2장:26절-37절 말씀입니다.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기간을 끝내고 이제 가나안을 향해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북쪽을 향해 나아가면서 만났던, 3 족속, 에돔, 모압, 암몬 족속과는 전쟁을 하지 않고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헤스본과 바산 족속과는 전쟁을 하고 지나가게 됩니다.
헤스본과 바산은 요단강 동편의 있는 땅으로 우리에게는 트랜스 요르단으로 알려진 지역이죠. 그리고 후에는 르우벤과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차지하게 되는 땅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이 3족속과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단순히 혈연 관계이고 친족 관계여서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전쟁이었고, 그들의 땅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3족속과 전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 아니면 차지 할 수 없다는 신앙을 갖도록 만듭니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감정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갖거나 더 넓은 땅을 갖으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만족하고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헤스본과 바산과는 전쟁을 합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헤스본과 바산이 앞서 지나친 세 족속보다도 가나안에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헤스본과 바산의 땅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땅에 포함이 되죠.
이제 그 땅을 정복하는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죠. 이 전쟁의 이야기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여 보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 두 족속을 모두 진멸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은 보면, 각 성읍에 남녀와 유아까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진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죠. 그리고 3:3에서는 바산과 전쟁을 하면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6절에서는 마찬가지로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의 말씀 중에서 가장 거부감을 갖게 하는 구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을 진멸하였다는 것이죠. 성경에서 이렇게 사람을 진멸하는 기사는 본격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을 땅을 점령 할 때에 절정에 이르게 되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읽으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시는가하며 의아해 하기도 하는 구절입니다.
본문의 ‘진멸하다’라는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하람’입니다. 이 단어는 ‘진멸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잔인하게 살해만 말하는 ‘진멸’이 아니라, ‘진멸하여 봉헌하다’, ‘진멸하여 바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진멸 전쟁을 하는 것은 단지 사람을 죽여 진멸하는 전쟁이 아니라, 그 전쟁을 하나님께 받친다는 의미가 있는 전쟁이라는 것이죠. 이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가나안 정복 전쟁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살아갈 ‘땅’을 주신다는 의미가 있죠. 하지만 한편으로,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흔히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가나안 땅의 족속들의 죄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죠. 즉, 가나안 정복 전쟁은 땅을 차지함과 동시에 죄악을 멸하여 버리는 전쟁이라는 것이죠. 그리하여 가나안에서 죄를 제거함으로 그 땅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거룩한’ 땅이 되게 하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진멸하였다는 말씀은 단지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였다는 말씀이 아니라, 죄악을 제거하는 거룩한 심판을 집행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가나안 정복 전쟁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악을 제거할 때에는 남녀, 노소가 구분이 어떠한 죄악이라도 반드시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을 이 정복 전쟁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후에 가나안을 정복하면서는 모든 가나안 족속을 제거하지 않고 노예로 삼기도 하며, 같이 살기도 합니다. 그 이유로 후에는 큰 곤경에 빠지기도 하죠. 결국 헤스본과 바산과의 전쟁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철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바산과 전쟁을 할 때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잘 갖추어진 무기와 군대를 가진 헤스본과 바산과 전쟁을 하는 것이 38년을 광야에서 살다온 이스라엘에게는 굉장히 버거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죠. 히브리서 12장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거룩함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죄와 싸워야 하고, 때로는 피를 흘리는 것 같은 고통이나 손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죄와 싸우는 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에 보여주는 방법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전쟁에서의 승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어진 것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죄와 사망에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되어 진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사시되, 여전히 우리의 삶에 남아있는 악한 죄악들을 철저하게 제거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하루를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열불이 나도
신명기 2:26-37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군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내용으로, 그 도중에 헤스본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헤스본의 왕에게 평화의 메지지를 보내지만 도리어 그는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로서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전멸시키고 그 지역을 점령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보내지는 평화의 사절단, 대적하는 시혼, 하나님의 승낙, 승리하는 이스라엘 등입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잇는 도로가 왕의 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반듯한 고속도로와 같은 큰 도로를 우회해 거친 광야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돔과 다투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모압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지시가 있어 조용히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압은 악한 선지자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고, 그것이 실패하자 치사하게도 미인계를 써 백성들을 음행케 했습니다. 암몬이 더 괘씸합니다. 같은 형제국인데도 그 일을 말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번입니다. 그 때마다 출애굽 2세대는 갖은 수모를 겪으며 3지역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보면 마치 정예부대가 동네 거지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행군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아마 출애굽 2세대의 대부분은 속에서 열불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멸절한 부모세대의 점철을 다시는 밟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번번히 전쟁다운 전쟁 한 번 하지 못하고 십자가 길을 간 출애굽 2세대들은 어떤 결실을 맺었을까요? 가나안도 들어가기 전에 주변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곳이 헤스본입니다. 열불이 나도 참은 것에 대한 상급이요, 에돔, 모압, 암몬이라는 3과목을 통과한 장학금이요, 인내와 순종으로 얻은 보너스땅입니다.
헤스본은 아모리 사람들의 수도로, 왕의 이름은 시혼입니다. 그 곳은 고원에 위치해 있어 요단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기에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둔 이스라엘로서는 군사적 요충지이지요.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그 땅을 차지하라’ 40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던 말씀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로서는 주저할 수 없었습니다. 비싼 대가를 주고 배운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 헤스본을 차지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에 좌우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말씀에 순종하므로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국가는 영토, 주권, 국민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주권, 국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으니 영토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체는 ‘하나님나라’이고, 법적으로는 ‘율법공화국’이고, 종교적으로는 ‘제사장나라’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샘플이 바로 이스라엘이지요. 이 때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헤스본을 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분의 백성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영토가 탄생되는 순간으로, 이제 국토가 생겨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중차대한 때에,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헤스본을 지날 때에 앞의 족속들의 땅을 지나갈 때처럼 그들에게 겸손하게 청을 합니다. ‘우로나 좌로 지나치지 않고 큰 길로만 가겠습니다. 물과 음식은 이 백성들이 돈을 내고 사 먹을 터이니 제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본문에는 평화의 말로 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는데도 왜 모세는 그런 말을 하였을까요? 예,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맞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선전포고도 미리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지요. 전쟁도 떳떳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유이지만, 실은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는 모세의 성품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정확하게 말하면 가나안지역은 아닙니다. 단지, 인접 지역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예의 바르고 간절하게 이 마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를 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있다고 봅니다. 감히 모세는 하나님과 동역한 사람입니다. 우리 믿음의 경지가 이 수준에 오르기를 소망합니다.
목표를 너무 높이 잡았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주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능력을 심어 놓지 않았다면 그런 말씀을 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실언치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선악의 기준인 하나님
신 2:26-37 / 시애틀한사랑교회
2004 년 12 월 26 일은 전 세계에 “크리스마스 다음 날1의 악몽”이 있었던 날입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서부 해안의 40 km 지점에서 초대형 해저 지진이 발생, 쓰나미에 의해 30 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5 만 명이 실종, 169 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최악의 쓰나미 사건이 벌어진 날입니다.
수많은 희생자 중에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부모님을 따라 휴가를 즐기러 온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지역의 ‘헤럴드’지에 다음과 같은 논평이 실렸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창피하게 생각해야 한다.
무지막지한 아시아의 쓰나미, 죽음, 파괴, 그로 인한 거대한 불행 앞에서는 아무리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도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중간생략)
내 생각처럼 하나님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있다면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할 테니. 내가 볼 때 그는 죄만큼이나 악하다. 그와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다.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이러한 사건 앞에서 하나님이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경우에도 많은 불신자들에게, 심지어 신자들에게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34 절)
이러한 전쟁을 소위 ‘헤렘전쟁’이라 하는데, 히브리어 ‘헤렘’은 명사일 경우 멸하기로 작정된 물건, 저주 받은 물건의 의미이고, 동사 ’하람’일 경우는 완전히 멸하다, 저주 아래 두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모리 사람 헤스본 왕 시혼과 그 성읍에 ‘헤렘’을 명령하셨고, 모세와 이스라엘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헤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헤렘전쟁’을 명령하는 하나님은 결코 ‘선하신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치 쓰나미의 고통을 바라보는 기자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무신론자들은 에피쿠로스의 악의 문제에 대한 논증을 무기로 삼아 신이 없음을 주장합니다.
‘헤렘’이나 자연재해의 문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결코 짧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핵심적인 것 몇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우리의 선과 악의 개념이 어디서 왔을까요? 우리의 도덕, 윤리의 개념의 출발이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성품 안에 넣어두신 하나님의 형상에서 그것들이 출발합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개념은 시대나 상황 등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은 악한 것입니다. 하지만 강도가 칼을 들고 어린 아이를 죽이려 할 때, 경찰이 총으로
강도를 살인한다면 그 살인은 악한 것일까요?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과 악의 기준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인가!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선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선”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하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두 번째로 삶과 죽음의 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각 개인이 정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삶과 죽음의 때입니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입증하는 실제적 현상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죽음, 악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타락의 결과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땅까지도 저주를 받게 한 무서운 죄입니다.
자연재해를 통한 비극을 우리는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죄의 문제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것은 어린 나이에 죽은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언젠가 죽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헤렘’ 명령을 행하는 이스라엘이 느껴야 하는 감정은 죄에 대한 슬픔입니다.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동시에 죄로 인하여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 말입니다.
계시가 완성된, 즉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하나님이 ‘헤렘’을 명령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의 기준은 우리의 경험,
도덕, 철학, 사고적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선악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칼빈은 다음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 참신자의 도리이다.
오늘 하루도 얄팍한 나의 생각과 철학, 경험에 의한 선악을 구분하고 사람들과 심지어 하나님까지 정죄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닌, 선과 악의 기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진짜 착한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크리스마스 다음날 벌어진 사건이라 영미권에선 2004 Boxing Day Tsunami라고 한다.
2. 사무엘상 15:1-35 참조
3.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한 것이 아니다.
악을 없앨 능력은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악을 없앨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악을 없앨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 De Ira Dei, 13, 20-21.)
4. 그래서 말씀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제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깨달아야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2장 26-37절 말씀 묵상
(겸손하고 온유한 모세와 교만한 시혼)
모세의 행동방식과 시혼의 행동 방식은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사람이 사는 방식의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은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된 족속들로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죄악이 가득한 족속이다.
에돔과 모압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실질적으로 에돔과 모압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모세는 아모리 족속이 멸망받을 족속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자로서, 먼저 아모리 족속에게 심판을 선포하지 않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유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죄인이기에 결코 정죄하는데 앞장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바로의 아들로서 가장 정의감에 사로잡혀있었을 때, 가장 큰 실패를 하였던 것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나서는 행동은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화평을 선언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아모리 사람들은 공격받을 만한 행동을 하게된다.
표면적인 전투의 상황은 아모리왕 시혼에게 주어졌지만, 주권적 상황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교계나 세상이나 죄악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인간이 자의적 판단으로 심판의 도구가 되려고해서는 않된다.
모세와 달리 아모리왕 시혼은 교만이 극에 달하였던 자이다.
세상을 대변하는 교만하고 악한 아모리인의 왕 시혼은 악한대로 자신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을 허락하는 것은 그들에게 지혜가 아니라 굴복이었던 것이다.
종종 세상의 운영 원리는 지혜보다는 힘이며, 이는 하나님을 배제하는 인간의 승리이기에, 세상은 이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전쟁은 힘의 과시와 자존심의 싸움이며, 개인도 이러한 속성에 대부분 동참하고 있다.
개인도 이러한 이유로 망할 수밖에 없기에, 성도는 제일이 되고자하는 세상 욕심을 피하는 것도 중요한 지혜 가운데 한 가지이다.
아모리 족속인 시혼은 에돔과 모압과 같이 세상에 속하여있는 자이지만, 에서와 모압과 달리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다.
에서 자손과 모압 사람은 비록 구원의 영역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응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제일을 추구하는 아모리인의 왕 헤스본의 시혼은, 양보가 있을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 자손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악행을 행함으로서, 일반 은총의 특혜를 누릴 수가 없었다.
30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
애굽의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하여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아모리 족속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헤스본 왕 시혼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민족이다.
순탄한 길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대적자를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분이시기에 앞서서 자신의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연단시키시고 축복하시는 방법의 한 가지로 대적자를 일으키신다.
지혜로운 자는 인생의 대적자들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혈기로 자신을 통제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의 자녀를 연단시키고 성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부정적 상황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자숙하기보다는, 문제의 초점을 자신이 아닌 외부 상황에 돌리곤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정적 상황의 초점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다.
부정적 상황을 만났을 때 기도하여야 하는 이유는 상황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종종 기독교인들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사회 운동을 하곤하지만, 장작 하나님의 관심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헤스본 왕 시혼이 지배하던 영역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고 루우벤과 갓 지파의 기업으로 삼은 것은, 이미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었지만, 이는 아담에게 에덴에서 통치 명령을 실행함으로서 에덴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비록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기인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속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지도자 랍벨은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부분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를 혼동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지만, 이는 해석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을 실행하여야한다.
32 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모압의 땅이었던 야하스에서 이스라엘에 패한 시혼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시혼은 모압까지 자신의 관할로 다스리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악의 세력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악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강해지려고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심판하신다.
세상 사람은 스스로 강해지려는 속성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추구하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외적인 강함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내적인 강함을 추구해야할 것이다.
교회 건물 외적인 규모의 확장은 세상의 풍습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강한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를 죽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34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유아까지도 진멸하게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유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담겨있는 악의 씨앗이 가나안을 부패시킬 수 있었기에, 전부 멸하라고 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평화는 종종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평화,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됨이 될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이 여러가지 매체를 통하여 하나된 지구촌에서 평화를 말하고있지만, 어디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서 선이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지만, 세상적인 윤리로는 결코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아모리 족속 전부를 멸하라고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에 대한 심판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에 대한 진멸은 마지막 심판을 예표하는 것이다.
심판은 죄악의 보편성과 충만함으로 때가 찰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아모리 족속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성도는 모세와 같이 아모리 족속에게 바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세상을 심판하려고해서는 않된다.
성도는, 온유한 모세와 같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화평을 추구해야한다.
35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3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이들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중간하게 점령하였을 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배울 수가 있었을 것이며, 아모리 족속과 같이 최고가 되려고함으로서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대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량을 아시기에 적절한 분량만을 허락하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심을 주체할 수가 없기에 종종 적정선을 넘음으로서 파멸에 이르게 된다.
한국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교회의 규모를 적정선으로 유지하면서, 그 이상으로 커질 때에는 분립을 하여야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같이 욕심에 파묻혀 파멸에 이르곤한다는 것이다.
교회 명칭에서 곧잘 사용하는 제일이나 중앙이란 명칭은 최고가 되고자하였던 아모리 족속과 같이, 최고를 지향하는 세상의 원리를 교회에 도입한 어리석은 명칭들이라고 생각한다.
양보하면 더 얻습니다
신명기 2:26-37 / 이한규 목사
< 먼저 평화를 제안하십시오 >
인간 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막지는 못해도 최대한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십자가란 의와 평화를 위한 희생입니다. 희생양이 되어 잡혀 먹히면 그 희생이 감동을 일으킵니다. 목회자의 참된 카리스마는 희생양이 되려는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왜 예수님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까? 십자가의 희생으로 마음속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희생적인 삶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늘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싸움 많은 세상에서 늘 전쟁보다는 평화를 앞세움으로 자기상실이 없게 하십시오. 십자가의 희생을 외면하고 타인을 외면하면 자기상실의 길로 가게 됩니다. 인기를 위한 열정으로 살지 말고 인격을 위한 열정으로 사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으면 이웃을 형제자매로 여기고 갈등과 다툼으로 길 잃은 사람들에게 평화로 가는 이정표가 되십시오.
가나안을 향해 갈 때 모세는 헤스본 왕에게 전쟁 전에 평화 제안을 하면서 그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26-28절). 그 제안을 헤스본 왕 시혼이 완강하게 거절해서 결국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대승해서 요단강 동편의 광활한 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암몬 족속의 땅인 얍복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하나님께서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37절).
본문은 특별히 양보하는 삶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그저 통과만 하겠다는 이스라엘을 믿고 헤스본 왕 시혼이 자기 땅을 통과하도록 길을 내어주고 양보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시혼은 자기 땅의 통과를 거절하고 평화 제안을 거절해서 결국 모든 소유와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자신이 조금만 양보하면 가정, 교회, 사회가 평화를 찾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불행과 갈등은 양보가 없어 생기는 것입니다.
< 양보하면 더 얻습니다 >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시혼 왕의 것을 빼앗아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주인은 불순종했던 한 달란트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순종했던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습니다. 적게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많이 가진 자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자의 것을 빼앗아 순종하는 자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양보하지 않으면 더 빼앗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양보하면 더 얻습니다. 특히 평화와 평안을 얻습니다.
‘양보하는 삶’과 ‘순종하는 삶’은 속성이 유사합니다. 자기 뜻을 양보하는 삶이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양보는 성숙의 지표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노(No)’라는 말을 많이 할 구실을 찾지만 성숙한 사람은 ‘예스(Yes)’라는 말을 많이 할 구실을 찾습니다. 양보를 모르는 사람은 ‘노’라는 말은 잘 할 줄은 알지만 잘 받을 줄은 모릅니다. 반대로 ‘예스’라는 말은 잘 받을 줄만 알고 잘 할 줄은 모릅니다. 결국 많은 것을 잃습니다.
‘예스(Yes)’를 잘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생각 없는 ‘예스맨’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예스!”를 잘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양보할 줄 아는 ‘예수맨’이 되라는 뜻입니다. 양보하면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을 얻는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대개 보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이 남보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말하고 가장 결함이 많은 사람이 가장 비판도 많습니다.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양보할 줄 모르면 하나님의 마음도 잃고 사람의 마음도 잃습니다.
양보와 순종을 아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 “아쉽다!”고 하지만 양보와 순종을 모르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 “앓던 이가 빠졌다!”고 합니다. 결국 양보와 순종이 없는 삶처럼 불행한 삶은 없습니다. 양보하려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지만 양보를 모르는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길을 열어줄 때 길이 열립니다. 힘을 가지기를 힘쓰되 그렇게 가지게 된 힘을 힘써 절제할 때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동시에 얻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때로는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지만 역사상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을 통해 수많은 더욱 큰 비극들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은 대량살인의 통로이기에 전쟁은 최후의 대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전쟁에 이기는 길보다 평화를 지키는 길이 참된 지식이고 참된 능력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견고한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양보하는 삶을 통해 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얻고 평화를 이뤄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