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영역에 편입되더니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라에 통합되었다. 괴산지역은 1914년 행정구격 통폐합에 의해 괴산 연풍 청안이 합하여 괴산군이 되었다. 이 가운데 연풍은 재난이나 위기를 피할 수 있는 삼풍(三豊)지역의 하나로 꼽힌다(삼풍지역은 풍기, 무주, 연풍을 이른다).
연풍 향교쪽으로 이동했다. 20여분 버스로 달리자 산세가 달라졌다. 괴산 지역이 산들이 부드럽고 나지막하다면 이곳 연풍지역은 주변의 산들이 높고산세가 험악해 보였다.
연풍향교를 찾아 들어갔다.
명륜당
대성전
대성전에서 좌우의 동재와 서재, 그리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풍낙헌(동헌)을 찾아 나섰다. 풍낙헌 건물은 최근 연풍초교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동헌은 연풍읍치구역 중의 하나.
마을은 아기자기하고 골목길에 접시꽃이 피어 있고 ‘금이빨 삽니다’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임플란트 시술이 유행하고 있는 시대에 언제까지 금이빨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라져 가는 풍경의 하나로 '금이빨 삽니다'를 담아보았다.
풍낙헌 건물
연풍초교는 개교 100년주년 기념비가 서 있었다.
수령 3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연풍초교 운동장 가에 서 있었다.
향청을 찾아 나섰다. 골목길 바로 앞인데 연풍성당부지로 편입되어 골목을 한 바퀴 빙 돌아야만 향청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향청 건물은 일정시대 천주교에 팔렸다고 한다.
향청은 지역의 원로 유림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봉사와 교육관련 자문을 하던 곳이라 한다.
연풍성지로 들어가야 향청에 이를 수 있다.
연풍성지 순교자상
노기남 대주교님상, 지금은 한국천주교의 가장 고위층 지도자가 추기경님이지만, 우리들의 어린 시절엔 노기남 대주교님이 우리들의 가장 고위층 인도자셨다.
연풍향청
연풍성당 부지내에 있는 연풍향청을 떠날 때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각연사로 가는 중에도 빗줄기는 굵었다가 가늘어졌다가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각연사로 오르는 송림속의 길은 좋았지만 차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각연사 일주문을 경내에서 찍었다.
각연사의 대웅전
구전설화에 의하면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세웠다. 각연사의 연기설화에서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는데 까마귀 떼가 날아와 나무 조각을 물고 날아가기로 까마귀 떼를 따라 가보니 깊은 산골 연못에 나무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살펴보니 연못 속에 석불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각유불어연중(覺有佛於淵中) 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각연사(覺淵寺)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1768년(영조 44)에 작성된 각연사 대웅전의 상량문에서는 918년(태조 1)에서 975년(광종 26) 사이에 통일대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각연사 비로전의 대들보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944년(혜종 1)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금석고(朝鮮金石考)》에 실린 비문에는 958년( 고려, 광종 9) 통일대사의 제자 석총훈(釋聰訓), 석훈우(釋訓又) 등이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7870&cid=40942&categoryId=33382 참조)
대웅전 내부 조각품에 주목하라고 했다. 귀면(鬼面) 아래에 하얀 코끼리 상이 있었다.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들
귀면상과 코끼리 상 아래 있는 통일대사상, 통일대사 상을 사진으로 옮기는데 3번이나 찍었다. 여전히 통일대사상은 부연 안개 속에 있는 듯이 보였다.
통일대사의 속성은 김씨, 그의 선조는 계림(鷄林) 사람으로 중국유학파 승려다. 그는 왕실에서 불법을 강론했다.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각지에서 구름 같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가 입적하자 광종(光宗)이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처님과 통일대사
각연사 대웅전의 부처님과 통일대사, 그리고 귀면과 코끼리는 서로 어울어져 요즘 흔히 말하는 ‘ 다문화가정' 같이 보였다.
대웅전에서 나오는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랜 장마 끝에 오는 비라 반갑기는 하면서도 워낙 게릴라성 폭우라 절의 다른 건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모두 대웅전 처마 아래 서서 빗줄기가 뜸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웅전 처마 밑에서 종각에 매달린 목어 운판 쇠북들을 바라보았다.
사진 김순태,
각연사 부처님 뵙고 나서자
쏟아지는 빗발
대웅전 처마 아래 서서
비 긋고 있네
굵은 빗발 물보라도 요란한
대웅전 처마 밑
보이지 않는 손에
발목 잡혀 있네
종각의 목어 날카로운 이빨 벌리고
눈 뜨고 있네
깨어 있어라, 깨어 있으라고.
쇠북소리도 들려오는 듯 하네
정신 차리라고
대웅전 마당의 흙탕물
골을 지며 흐르다가
비 잦아지니
골마다 흐르는 물
어느 새 맑은 물로 바뀌었네.
비가 성글어진 틈을 타서 동행자들은 모두 버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이곳까지 와서 비로자나불을 보지 않고 가서는 예의가 아닌 듯 싶었다.
비로전으로 가는 길에 장대비보다 더 굵은 물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로전 모습
비로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상이 예사롭지 않았다.
비로자나불을 사진에 담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안개 서린듯 한 모습, 다른 사진들은 곧잘 나오는데 대웅전에 모신 통일대사상과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상의 모습은, 윤곽이 겹쳐 보였다.
카메라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습기가 끼어서일까. 다른 사진들은 모두 선명했다. 그런데 통일대사상과 비로자나불상만이 이상하게 윤곽이 흐려보였다. 그러나 김순태 선생이 찍은 사진 속 비로자나불상은 광배의 부처님 모습까지 선명하다.
비로자나불상 사진 김순태
비는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퍼붓고 있었다. 빗줄기 속에 갇혀서 비회차리로 매를 맞는 듯 했다. 대웅전 아랫전 건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하늘이 무너져 내려 앉는 듯 빗줄기는 무서웠다.
웬만큼 기다리면 빗줄기가 약해지려니 했는데 20분 정도가 지나도 빗줄기의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빗줄기 속을 걷기로 했다. 땅바닥에는 물이 고여 발등을 덮어왔다.
우리들 4-5명 때문에 20여명이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화 속에 물이 고여 있었고 옷은 홈씬 젖어 있었다. 차에 오르자 누군가 키친 타올을 뭉텅이로 잘라서 주었다. 그것을 타올처럼 머리에, 등판에, 팔뚝에 대고 물기를 빨아냈다.
화양구곡이 있는 화양계곡을 찾아가는길,
본래 계획보다 거의 1시간 정도 늦게 화양동 계곡이 가까운 지역, 솔묏골 식당에 도착했다. 점심 식사는 버섯전골, 솔묏골 식당은 이 지역에서도 소문난 맛집이라고 한다.
늦은 점심에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사진은 식사가 일단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 찍었다.
화양동 계곡 주차장에서 내렸다(15:30)
안내판 앞에서 우리의 탐방 진행에 대해서 약도를 보며 설명하시는 최연 선생. 이번 코스는 화양 2교를 건너를 암서재까지.
화양계곡을 걸으며 송시열은 어떤 사람이었나를 생각했다. 화양계곡은 오롯이 송시열의 나라였고 그의 제자들은 스승을 삶의 본보기로 섬기는 백성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송시열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후대인들이 기록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우리나라 유학자 중 유일하게 ‘자(子)’자를 받아 송자(宋子)로 불리운 인물이었다. 그의 방대한 문집 이름도 『宋子大全』이었다.
한 사람의 산림처사였던 그는 효종의 세자시절 사부였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정가에 나가게 된다. 이를바 송시열의 출사표인 < 기축봉사己丑封事>(1649년)에서 그는 임금에게 북벌론을 주장한다. 송시열은 존명대의(尊明大義), 명나라를 위해 오랑캐인 청에 맞설 것을 주장한다. 그에게 떠오르는 나라인 청나라는 다만 오랑캐의 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론이 수용되지 못하자 그는 1660년 화양동으로 은거했고, 1666년 8월에는 아예 거주지를 화양동으로 옮겼다. 이후 그는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송시열은 정가에서 은퇴하였다고 하나 실은 집권정당인 노론계열 학자들의 실세였다. 1668년에 우의정에 올랐으나 곧 사직, 이후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에서 서인이 득세하자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1682년 송시열은 몰락한 남인들의 처리 문제를 놓고 제자인 윤증과 반목, 정계를 은퇴하고 화양동으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장희빈 소생 아들을 원자로 삼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면서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그는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한다. 1689년 6월3일이 그의 기일이다.
송시열은 비록 사약을 받고 절명했지만 송시열 사후 그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전국에서 송시열을 모신 서원이 42개처, 이 가운데 24개처가 사액서원이라고 하니 학자로서 철학자로서 송시열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던 사람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화양 계곡은 숲이 무성하고 물가 혹은 물속의 바위들은 큼직큼직하고 잘 생겼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숲과 물과 바위, 그 중에 바위가 주인공 같다.
화양 구곡의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길
맑은 소에 구름이 비친다는 운영담과 바위 기둥. 오른 쪽 바위기둥 아래 운영담(雲影潭)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생전의 송시열은 명나라를 조선 제2의 건국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청나라는 다만 오랑캐들이었다. 송시열은 명나라의 심종과 의종 두 황제를 모실 사당 건립을 주창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측에서는 송시열의 주장이 한갓 주제 넘는 예의라고 비난했다.( 참예 儳禮)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송시열 사후인 1704년 그의 제자인 권성하가 중심이 되어 공식적인 국가적 사업이 아닌, 私人들이 뜻을 모아 명나라 황제를 모신 만동묘를 화양구곡에 만들었다.
명나라 멸망 후 60년 만에 명나라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인 유학자들, 송시열의 제자들인 노론계열에 의해서 명나라 황제의 신위를모신 만동묘가 건립된 것이다.( 비슷한 무렵, 창덕궁 옆에도 명황실을 모시는 ‘대보단 大報壇’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대보단은 일제시기에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송시열에 대해서는 당대인이나 후세인이나 양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학자로서 철학자로서 그는 존경할만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그는 세계적인 정세에 어두운 사람이었다. 모름지기 정치인은 수신제가 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변화에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양 계곡을 끼고 오르는 오른 쪽 경사진 곳에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왔다.
만동묘로 들어가는 양추문
'양추문 ' 안으로 들어서자 급경사진 곳에 돌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화강암을 잘 다듬은 석재로 되어 있었다. 계단 위에 세운 문은 ' 성공문', 그리고 오른 쪽에 '만동묘정비'가 비각 안에 있다.
묘정문에 의하면 1942년 묘당을 비롯한 일체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묘정비도 땅 속에 파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만동묘를 비롯한 일체의 건물은 사실상 복원된 건물이다.
성공문 안으로 들어가자 복원된 만동묘 건물이 들어왔다.
임란 때 군사를 파병하여 도와주었다고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의 황제를 모신 묘당이다. 묘당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명나라의 의종과 신종의 화상이 액자에 담겨 벽에 기대어 있었다.
만동묘 앞에서 펼쳐진 전경을 보았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이곳에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모셨고 오랫동안 이쪽 사람들이 정계와 학계에서 주류역할을 해왔다.
화양서원, 한국의 서원 중 가장 위세가 당당한 사액서원이었다. 그러나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횡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문헌들에 기록되어 전한다.
화양서원 현판의 글씨는 숙종임금이 썼다.
화양서원 묘정비와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