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진 원장은 오늘(5.13) 분당구 석운동에 위치한,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 신종군 이효백(1433~1487)선생과 경기도 기념물 제 84호 백헌 이경석 선생 묘역 일대를 둘러 봤다.
이 묘역은 조선전기 묘역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지닌 우리 성남시 소재의 향토유적이다.
■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 신종군 이효백 소개
조선조 제2대 정종대왕의 제10왕자 덕천군 후생의 장남으로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의 본관은 전주(全州) , 궁술(弓術)이 비상하여 ‘태조의 신궁’이라고 불린 무인으로 궁술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나와 있으며, 30발 발사 29발 명중, 나머지 1발은 배려차원에서 일부러 안맞추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묘역은 묘표, 상석, 문인석 한 쌍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묘표는 전후 2면에 있고, 앞면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다. 건립연도는 1504(연산군 10)년이다.
■ 경기도 기념물 제 84호인 백헌 이경석 선생
조선중기 문신으로 1595(선조28)년에 태어나 1671(현종 12)년에 돌아갔다. 본관은 전주 호는 백헌으로 덕천군의 후손이며 김장생의 문인이다.
1626(인조 4)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사가독서하였으며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부제학으로 삼전도비문을 찬진 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내고 1642(인조 20)년에는 세자의 이사로 척화를 주장하다가 김상헌과 함께 심양의 봉황성에 끌려갔다. 1645(인조 23)년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1659(효종 10)년에 영돈영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이 즉위하여서는 남인으로 송시열 등의 서인에게 배척되기도 하였으나 왕의 총애로 유임되었으며 1668(현종 9)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경기도청 향토사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사궤장과<사궤장연회도첩>이 보물 9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으로 남원의 방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인 "백간집"이 현존하고 이정구, 이명한, 정광성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묘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석운동 대감능골에 있으며 2단의 사성으로 후면을 정리하였고 봉분앞에는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조성하였다. 묘역은 약 100 여평으로 석물은 묘갈, 장명등, 상석 각1기, 망주석, 문인석, 신도비 각2기가 있는데 장명등과 신도비 1기는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묘갈은 1751(영조 27)년에 건립되었는데 재질은 대리석이다. 전면에는'유명조선 국영의정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라 쓰여있어 정경부인 전주유씨가 부장되었음을 알수 있고 후면의 갈문은 현손 광회와 광사가 각각 짓고 썼다. 규모는 비높이 162cm, 너비 53cm, 두께 22cm이다.
신도비는 묘역입구에 신구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이광사가 쓰고 전액을 하였으며 1754(영조 30)년에 건립되었으나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되어 1975년 신비를 개수하였다. 신비는 화강암이며 규모는 총높이 475cm,비높이 259cm,너비 84cm,두께 40cm이다.
김대진 원장은 오늘(5.13) 분당구 석운동에 위치한,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 신종군 이효백(1433~1487)선생과 경기도 기념물 제 84호 백헌 이경석 선생 묘역 일대를 둘러 봤다.
이 묘역은 조선전기 묘역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지닌 우리 성남시 소재의 향토유적이다.
■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 신종군 이효백 소개
조선조 제2대 정종대왕의 제10왕자 덕천군 후생의 장남으로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의 본관은 전주(全州) , 궁술(弓術)이 비상하여 ‘태조의 신궁’이라고 불린 무인으로 궁술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나와 있으며, 30발 발사 29발 명중, 나머지 1발은 배려차원에서 일부러 안맞추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묘역은 묘표, 상석, 문인석 한 쌍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묘표는 전후 2면에 있고, 앞면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다. 건립연도는 1504(연산군 10)년이다.
■ 경기도 기념물 제 84호인 백헌 이경석 선생
조선중기 문신으로 1595(선조28)년에 태어나 1671(현종 12)년에 돌아갔다. 본관은 전주 호는 백헌으로 덕천군의 후손이며 김장생의 문인이다.
1626(인조 4)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사가독서하였으며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부제학으로 삼전도비문을 찬진 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내고 1642(인조 20)년에는 세자의 이사로 척화를 주장하다가 김상헌과 함께 심양의 봉황성에 끌려갔다. 1645(인조 23)년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1659(효종 10)년에 영돈영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이 즉위하여서는 남인으로 송시열 등의 서인에게 배척되기도 하였으나 왕의 총애로 유임되었으며 1668(현종 9)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경기도청 향토사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사궤장과<사궤장연회도첩>이 보물 9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으로 남원의 방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인 "백간집"이 현존하고 이정구, 이명한, 정광성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묘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석운동 대감능골에 있으며 2단의 사성으로 후면을 정리하였고 봉분앞에는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조성하였다. 묘역은 약 100 여평으로 석물은 묘갈, 장명등, 상석 각1기, 망주석, 문인석, 신도비 각2기가 있는데 장명등과 신도비 1기는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묘갈은 1751(영조 27)년에 건립되었는데 재질은 대리석이다. 전면에는'유명조선 국영의정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라 쓰여있어 정경부인 전주유씨가 부장되었음을 알수 있고 후면의 갈문은 현손 광회와 광사가 각각 짓고 썼다. 규모는 비높이 162cm, 너비 53cm, 두께 22cm이다.
신도비는 묘역입구에 신구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이광사가 쓰고 전액을 하였으며 1754(영조 30)년에 건립되었으나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되어 1975년 신비를 개수하였다. 신비는 화강암이며 규모는 총높이 475cm,비높이 259cm,너비 84cm,두께 40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