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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한글 사용기
조선언문실록
시정곤 / 정주리, 고즈윈, 2011년 3월 25일
책소개
세종대왕이 만든 새 문자는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언문(諺文)’이라 기록되었다.
한문만이 정통이라 대접받던 시절, 언문의 실제 위상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우리말 한글은 6백여 년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을까.
언문을 사용했던 임금, 언문 편지로 비밀을 주고받은 사대부, 애절한 사랑을 담아 언문 연서를 띄운 여인과 억울함을 풀어 쓴 언문 상소로 속내를 전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계층을 막론하고 의사소통의 주된 도구였던 한글이 들려주는 사건과 사고, 재미난 이야기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실감나게 살펴본다.
목차
1장 언문을 사랑한 임금
새 문자를 만들어 널리 쓰다
한문 권력과 언문
임진왜란과 선조의 언문 교서
왕실의 언문 교육
2장 사대부, 언문 편지를 쓰다
관리가 되려면 언문을 익히라
비밀을 담은 언문 편지
정음청 혁파 사건
3장 여성의 삶과 언문
언문 연서의 비극
폐비 윤씨와 언문 투서
왕대비의 언문 수렴청정
궁녀와 연애편지
4장 백성의 소통법
언문 상소로 억울함을 호소하다
언문 소설의 매력에 빠지다
언문 익명서 사건
언문을 어떻게 배웠을까
5장 언문, 국문이 되다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언문으로 번역하라
비밀문서는 언문으로 쓰라
국문의 탄생
책속에서
106~114
조선 중종 29년(1534)에 영산 지방 현감으로 있던 남효문은 아내의 간음 사실을 알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소주를 지나치게 마신 뒤 죽고 말았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장안에 퍼졌다. 사헌부에까지 흘러들어 간 이 얘기는 마침내 왕에게까지 전해진다. 반역죄와 강상죄(綱常罪)를 가장 중죄로 여기던 당시로 보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대부의 부인이 간음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 사회가 들썩거릴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기겁할 일은 그 간음 대상이 수양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실록>에서는 남효문의 처와 수양아들 사이에 오간 언문 편지가 남효문에게 전달되면서 비극이 일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편지의 내용은 나와 있지 않으며, 다만 남효문이 노비에게서 건네받은 편지를 보고 분을 참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중략) 남효문 처 간음 사건은 남녀 사이에 주고받은 언문 편지를 근거로 삼아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여자들의 시기 질투로 빚어진 사건으로 종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 사회의 윤리 기반과 사법 절차를 여실히 보여 준 사례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특히 우리에게 흥미로운 점은 조선 중기에 이르면 아녀자들이 언문을 자유롭게 사용했을뿐만 아니라 비밀스러운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언간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174~175
<실록>을 들여다보면 최초의 언문 익명서는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세종 대에 일어났다.
황희는 재상의 자리에 있기를 20여 년에 지론(持論)이 너그럽고 후한 데다가 분경(紛更)을 좋아하지 않고, 나라 사람의 여론을 잘 진정하니, 당시 사람들이 명재상이라 불렀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에 쓰기를 ‘하 정승아, 또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_<조선왕조실록> 세종 31년(1449) 10월 5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년 만에 언문으로 쓰인 익명서가 나붙었다. 당시의 관직 임명에 대해 평가한 위의 기록에서는 황희 정승을 명재상이라 하고 하연은 성격이 까다롭고 노쇠하여 공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다고 하면서 언문 익명서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하연은 당시 70세 중반의 나이였으니 아마도 노령에서 오는 실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익명서를 통해 비난한 이가 어떤 계층의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을 통해 반포된 지 3년 만에 훈민정음이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는 문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22~223
주양우는 오히려 중국 사람에게 언문을 가르치는 등 나라에서 금하는 행동을 계속하고 말았다. 마침내 중종 34년(1539) 사건이 벌어졌다.
“요동에 이르러 혼자 방에 있는데 어떤 유생이 들어와서 언자로 자기 이름은 주사이고 자는 상지라고 썼습니다. 신이, 이것이 무슨 글인가고 물으니, 달자(韃子)의 글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그대 나라의 주양우가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장관 백인형의 처소로 가서도 역시 써 보였다 합니다.”_<조선왕조실록> 중종 34년(1539) 11월 19일
주양우는 중국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언문을 가르쳐 주었고, 다른 사신이 그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 왕에게 알린 것이다. 결국 주양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는다. (중략) 왕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주양우를 추문하라고 명한다. 중국 사람에게 언문을 가르쳐 준 일이 국가 기밀 누설죄에 해당했던 것이다.
출판사의 책소개
훈민정음으로 태어나 언문으로 불리다 국문으로 거듭나기까지
모든 이들의 삶 속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우리말의 여정
조선의 공용 문자 언문에 스며 있는 사건과 사고, 사람들 이야기
조선 시대에 왕을 비롯하여 사대부와 왕실 여성, 그리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한글을 사용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한글을 사용했을까. 이 대목을 제대로 알아야만 우리 역사에서 한글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한글 생활사를 위한 기초 작업의 성격을 갖는다.
‘조선언문실록’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한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려 내 엮은 것이다. 한글이 창제된 세종 25년(1443)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 때까지의 기록 중에서 한글과 관련된 내용을 뽑아내 구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주요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먼저 그 기록의 연속성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어, 예술 등을 시기별로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록 유산이다. 한글의 생활사도 그 기록의 연속성에 기대어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에만 근거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생활 속 한글 이야기를 쓰다 보면 앞뒤 연결을 흥미롭게 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허구의 내용을 끌어올 여지가 많다. 이 책에서는 이야기의 재미에 앞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한글 생활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첫걸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을 ‘한글실록’이라 하지 않고 ‘언문실록’이라 붙인 이유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부터 <실록>에 ‘언문’이라는 이름이 쓰였기 때문이다.[“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_<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서는 언문을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라 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 의미를 넘어 <실록>에 담긴 용어를 그대로 살린다는 뜻에서 ‘언문’을 사용하고 책 제목을 ‘조선언문실록’이라 하였다. 다만 본문에서는 ‘언문’, ‘훈민정음’, ‘한글’이라는 용어를 번갈아 사용하였다. 문맥에 따라 최적의 의미를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용어를 굳이 통일하지는 않았다.
이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록>을 살펴보면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언문을 사용한 목적과 내용에 차이가 나는데, 사용자층은 크게 왕과 왕족, 사대부와 관리, 왕실 여성, 백성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1장에서는 왕과 언문을, 2장에서는 사대부의 언문 사용을, 3장에서는 여성과 언문을, 4장에서는 백성과 언문 사용을 다루었다. 그리고 5장에서는 언문이 국문으로 되기까지의 과정에 있었던 다양한 언문 정책들을 살펴보았다.
저자 정주리 / 시정곤 교수는 <우리말의 수수께끼>(2002), <한국어가 사라진다면>(2003),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2006),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2008) 등 우리말 교양서를 꾸준히 내오고 있는 국문학자이다.
한글은 우리에게 관찰 대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며, 한글이 우리 일상에서 부지런히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한글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라 밝히는 두 저자는 앞으로도 한글 이야기를 시리즈로 꾸준히 펴낼 계획이다.
역사 속 한글의 모습에 대한 오해는 분명히 있다. 언문은 천대 받은 글이고, 사대부 및 왕실에서는 쓰지 않았으며, 여인들이 쓰는 문자였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아직 존재한다. 이 책은 창제 이후 우리글이 어떻게 쓰여 왔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한글에 대한 오해를 풀고 우리말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이끌어 낸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창제 후 6백 년에 가까운 시간의 무게를 지닌 한글이
그 안에 품고 있는 많은 얘기들을 풀어놓는다.
임금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의 귀중한 도구였던 언문의 다양한 활약상, 숨은 참모습
언문을 사랑한 임금
세종은 재위 28년(1446) 10월 10일에 왕실의 불사(佛事)를 반대하는 대간들의 상소가 이어지자 그들의 죄를 일일이 글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내렸는데, 이 글이 바로 언문으로 되어 있었다. 즉 임금이 신하들의 죄목을 직접 언문으로 써서 내린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금의 행보에 놀란 신하들은 대간에 대한 처벌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거듭 청했고 세종은 몇 차례 거부하다 대간들을 석방했다.(15~18쪽)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불안한 민심을 달래고 또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교서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고, 언문으로 방문을 만들어 반포하게 하였다. 1593년 9월에는 왜적에게 투항한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는 내용을 담은 언문 교서를 내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언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언문 덕분에 왕의 말은 백성에게까지 순식간에 직접 전달될 수 있었고, 백성들은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언문 교서를 통해 지침을 받을 수 있었다.(40쪽 ‘임진왜란과 선조의 언문 교서’)
사대부, 언문 편지를 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식적으로는 한문 문화만을 향유하는 계층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언문을 사용하곤 했다. 바로 여성 계층과의 소통을 위한 필요였다. 아내, 어머니, 시집 간 딸, 심지어는 첩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둘러싼 여성들에게 글을 쓸 때 사대부들은 반드시 언문을 사용하였다. 연산군 2년에는 딸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첩에게 언문 편지를 보낸 사대부가 신문을 받기도 했고, 명종 8년에는 양조모에게 보낸 편지가 빌미가 되어 사대부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대 이이첨은 은밀한 사안을 언문으로 자세하게 써서 김 상궁에게 보내 왕에게 고하도록 하기도 했다.(80쪽 ‘비밀을 담은 언문 편지’)
여성의 삶과 언문
조선 시대 왕실 여성은 공식 문서에도 언문을 사용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전에서도 언문으로 교서를 써 내리곤 하였다.(129쪽 ‘왕대비의 언문 수렴청정’)
궁녀들은 언문으로 연애편지를 써 전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결국 관비가 되거나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141쪽 ‘궁녀와 연애편지’)
백성의 소통법
언문이 보급되자 문자 생활이 가능하게 된 백성들 중에는 직접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천민 신분을 면하게 해 달라, 가난을 구제해 달라는 등 사연도 다양하였다. (152쪽 ‘언문 상소로 억울함을 호소하다’)
16세기 이후로는 언문 소설이 큰 인기를 얻어 책 대여점이 생기기도 하고 아녀자들은 비녀를 팔고 빚을 내어 소설을 빌려 보기도 하였다. 책 내용을 현실과 혼동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있다.(163쪽 ‘언문 소설의 매력에 빠지다’)
연산군 대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내용의 언문 익명서로 인해 한때 언문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다.(173쪽 ‘언문 익명서 사건’)
언문, 국문이 되다
언문은 다른 나라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문자로서 암호처럼 쓰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언문을 쓰기도 했고, 성종 대에는 언문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이유로 역관이 처벌을 받기도 했다.(215쪽 ‘비밀문서는 언문으로 쓰라’)
이처럼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조선의 공용 문자로 쓰여 온 언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정식으로 ‘국문’이 된다.(226쪽 ‘국문의 탄생’)
[출처=알라딘 커뮤니케이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975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