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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설(국민 주권) |
왕권신수설(군주 주권) |
공화주의 체제 |
절대 군주체제 |
의 회 파 |
왕 당 파 |
* 시민 혁명
- 영국 :
1) 청교도혁명(1649, 권리청원) :
스튜어트 왕조의 전제정치(제임스 1세 & 찰스1세). 공화정 수립.
2) 명예혁명(1688, 권리장전) :
찰스 2세 & 제임스 2세의 전제 정치.입헌 군주제(의회 > 왕)
(권리청원 : 의회동의 없이는 과세하지 않는다.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구금하지 않는다. 각종 자유권을 보장한다. 권리장전 : 의회승인 없이 법제정, 법 효력정지 못함, 의회 승인없이 과세 못함. 선거는 자유스러워야 한다. 의회는 자주 소집되어야 한다. 법은 공정하고 적절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 미국독립혁명(1783) :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영/프전쟁). → 세계 최초 민주공화국.
- 프랑스혁명(1789) : 구제도의 모순(제3신분 차별대우) 삼부회 소집(루이16세가 재정난으로 소집) → 테니스코트 서약(제3신분들이 국민의회결성) → 국왕의 탄압 → 바스티유감옥 습격(혁명의 시작) → 인권선언문 발표(‘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 헌법제정(권력분립에 입각한 단원제의 입헌군주제 채택, 부유한 시민에게만 참정권 부여 즉 제한선거) → 루이16세 국외탈출 실패(바렌 사건) → 입법의회(입헌군주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간섭, 혁명의 과격화) → 국민공회 소집(제1 공화정. 루이16세 처형) → 유럽 열강의 대프랑스 동맹결성(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등) → 물가급등 → 공포정치(공화국 반대세력 처형. 보통선거에 입각한 철저한 민주주의 헌법제정. 최고가격제) → 온건공화파가 로베스피에르 처형 → 총재정부(온건공화파 주도. 정치 불안, 경제난, 제2차 대프랑스 동맹결성) → 통령(나폴레옹의 쿠데타) → 제정.
프랑스 혁명 배경 : 시민계급의 성장과 계몽사상 수용.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
최고 가격제 : 시장가격 이하에서 정부가 최고 가격을 설정하여 그 이하로 가격이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상품이 너무 오를 때 정부가 물가를 안정시키고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한다.
최저 가격제 : 시장가격 이상에서 정부가 최저 가격을 설정하여 그 이하로 가격이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농산물 가격 지지제도나 최저임금제도 등이 그 예이다.
* 시민 혁명의 의의 및 한계
- 세습 전제군주제 타파. 시민에 의한 정치권력 행사 but 재산소유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선거권 부여(노동자, 농민, 여성의 정치참여 제한)
* 산업 혁명
- 수공업(가내수공업, 공장제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 대량생산 체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 자본주의 경제체제 확립.
- 시민계급의 성장(산업자본가들의 의회 진출)
- 인구증가
- 노동문제(사회주의, 공리주의 등장) 및 도시문제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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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 개략
- 은 : 신정정치(제정일치). 순장 풍습. 갑골문자 사용. 청동기 문화. 달력사용.
- 주 : 봉건제도(왕과 제후 사이에 혈연관계 = 종가(본가)와 분가의 형태, 지방분권적), 유목민 침입으로 주의 동천.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주의 동천 이후 진의 통일까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 춘추 전국 시대(동주) : 유가(공자). 철기 사용(농업 생산력과 전투력 향상). 우경 실시. 제자백가 활동(유가, 도가, 법가, 묵가, 병가)
유가 : 도덕정치. 인과 예 중시. 유교로 발전. 공자. 맹자. 순자.
법가 : 법치주의(엄격한 법시행). 상앙. 한비자. 이사.
도가 : 자연에 따르는 생활(무위자연). 도교로 발전. 노장. 장자.
묵가 : 차별없는 사랑. 묵자.
- 진 :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법가사상(유가 탄압 : 분서갱유), 군현제도(중앙집권), 강력한 통일정책, 만리장성(흉노족 대비), 화폐/문자/도량형 통일, 강압통치와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멸망.
- 한 : 무제(군국제도 → 군현제도,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 비단길=사막길 개척). 호족성장. 중국 문화의 기틀마련. 유학발달(훈고학 : 경전해석). 유학은 정치이념/생활원리/관리선발 기준. 종이발명(채륜), 사기(후세 역사서술의 모범. 사마천), 불교전래(비단길을 통해 전래, 장건이 개척), 황건적의 난으로 망함.
(군국제도 = 중앙은 군현제도 + 지방은 봉건제도. 황건적의 난(184-192) :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가 나타나 유랑민과 노예를 규합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한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 위진 남북조 시대 : 강남이 한족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강남의 벼농사, 수공업발달). 문벌귀족 사회(귀족 문화 발전), 불교 발전(윈강/룽먼/둔황 석굴), 도교 성립/발전(노장과 청담사상의 유행). 북조의 유목 민족왕조와 남조의 한족의 왕조 대립(남/북조시대). 관리추천제(9품 중정제 : 호족의 중앙관직독점 →문벌귀족사회 성립)
- 수 : 남북조 통일, 과거제 실시(수 문제), 대운하 건설(수양제, 화북과 강남연결). 대규모 토목공사와 고구려원정 실패로 멸망.
- 당 :
1) 3성 6부, 조/용/조, 균전제(토지제도, 성인남자에게 토지지급), 부병제(군사제도, 농한기에 군사훈련) 실시, 국제적/귀족적 문화,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유교, 불교, 한자, 율령 공통). 불교전성기, 도교유행. 한시 발달(이백, 두보), 장안의 국제도시화. 이슬람교/네스토리우스교(경교)/조로아스터교의 전래, 강남의 벼농사 발달, 목화재배, 동업조합 등장, 화폐와 비전 사용, 국제무역 발달. 안록산의 난 이후 쇠퇴, 황소의 난으로 멸망.
2) 당삼채(녹색/갈색/백색 도자기. 서역영향 받음. 국제적). 당대에는 균전제에 의해 농민들이 국가로부터 토지를 균등하게 받고 있었고, 이로 인해 조/용/조의 세법(조세제도 : 토지세, 노동력, 특산물)과 부병제가 운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호구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는데, 이는 균전제가 붕괴되고 장원(대토지 소유제)이 유행하게 됨에 따라 농민이 유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지를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조/용/조, 부병제도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해지면서 양세법(여름과 가을 2번 납세), 모병제가 나타나게 되었다(조로아 스터교 : 배화교라고도 한다. 세상을 광명의 신과 암흑의 신의 투쟁장소로 보고 최후 심판 때 천국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사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구세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 등은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에 영향을 미쳤다. 정관의 치(貞觀之治) : 중국 당(唐)나라 제2대 황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 정관은 태종의 연호이다. 수나라 말기부터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군웅이 할거하여, 당나라 초기의 국력은 피폐하였다. 태종은 현신을 발탁하여 그들의 간언을 받아들였고, 경제력 회복에 힘썼다. 그 결과 당나라 국기는 탄탄해지고 쌀값이 떨어졌으며 백성들은 대문을 잠그지 않았고, 여행할 때는 식량을 휴대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시대를 맞았다. 또한 주위의 이민족들도 복종하여 태종을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부르며 받들었다.그 뒤부터 태종의 치세를 정관의 치라고 하며, 태평성세의 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태종에게 실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당나라기록에서 태종을 지나치게 미화했다고도 한다. 개원의 치 : 중국의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치세. 현종의 연호는 개원(開元)이다.(713년부터 756년까지 43년간을 가리키며, 선정과 평화의 반세기 또는<개원의 치(治)>라고 말하며, 현종은 모병제를 바꾸어 실시하고 과다한 관리를 해고시키는 등 내정과 사회안정에 힘쓰었다. 이에 당나라는 당 태종의"정관의 치"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개원의 치"라고 부른다)(daum 지식
백과사전).
- 5대 10국
- 송 :
국수적, 서민적(서민문화 발달). 문치주의(왕권강화와 절도사세력 약화), 과거제를 통한 사대부 등장(능력중시), 군사력 약화초래, 국가재정 감소, 왕안석의 개혁(빈농과 소상인보호, 보수층 반대로but 실패) 성리학(우주원리와 인간의 본성). 화약/활판인쇄/나침반 발명(송의 3대 발명품), 남송 때 강남이 화북을 경제력에서 능가하게 됨. 금(여진)나라의 침입으로 남
송 성립. 몽고침입으로 멸망.
(정강의 변(1126) : 금이 송을 침략하여 수도인 커이펑을 함락시키면서, 휘종/흠종을 비롯하여 황후/태자 등 3천여 명을 납치해 간 사건이다. 이후 송은 화북지방을 금에게 내주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남송을 세웠다. 화약은 중세 기사 몰락 초래. 나침반은 항해술 발달로 이어져 신항로 개척. 활판인쇄술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로 발전, 지식보급에 기여함(서민문화 성장, 유럽의 종교개혁, 르네상스에 영향))
- 북방유목민족 성장
요(거란족) |
발해를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에 진출. 송과 대립. 이중정책(부족제+군현제). 거란문자사용. 송과 금의 협공으로 멸망. 부족제:유목민. 군현제:농경민. |
금(여진족) |
송과 동맹하여 요 멸망→송 공격→화북지방 지배. 이중정책(부족제+군현제). 여진문자 사용. 13세기 몽고에게 멸망당함. 군현제:한족. 부족제:여진족. 부족제-금은 여진족 300호를 1모극, 10모극을 1맹안으로 편성하고 1모극에서 100명의 군사를 징집하여 군대를 편성하는 맹안모극제를 실시하였다. |
서하(탕구트) |
중계무역으로 번성(비단길 길목에 위치). 서하문자 사용. 13세기 몽고에 멸망당함. |
- 원 :
몽고족. 역참제(동서문화 교류활발). 상업발달(지폐인 교초사용).몽고인 제일주의(지배층 : 몽고인/색목인, 피지배층 : 한인/남인), 과거제 폐지, 관리추천제 실시. 라마교 전래, 이슬람교 수용, 서민문화 발달(구어체 문학, 희곡). 민족 간 대립, 왕권다툼, 경제적 혼란으로 명에 의해 멸망당함.
- 명 :
한족 왕조 부활(과거제 부활, 육유의 제정, 이갑제실시), 유교적 통치질서 강화, 정화의 남해 원정(화교발생). 신사층(향신층 : 유교적 교양을 가진 지식인) 성장, 일조편법 실시, 양명학(지행합일 강조) 발달, 서양학문 소개. 서민문학.(육유 : 서민교육의 목표제시. 이갑제 :농촌 즉 촌락을 통제하고 조세를 징수하기 위한 향촌지배기구이다. 촌락 110호를 1리(里)라 하였는데, 세액이 많은 10호가 교대로 이장이 되고 나머지 100호를 10갑(甲)으로 나누었다. 일조편법 : 세금을 지세(토지세)와 정세(요역)로 통합, 은납(16세기 말) but 완전 은납화를 이루지 못함).
- 청 :
만주족의 한족 지배(회유책 : 한족문화 존중, 강압책 : 변발강요) 신사(향신)층 중심사회. 지정은제 실시(→인구증가), 고증학(실증적 연구) 발달. 네르친스크 조약(러시아와 맺은 국제적 조약. 러시아 남하저지). 지정은제란 지세(= 토지세)에 정세(=노동력세)를 통합해 은납한 것으로 이를 통해 세금의 은납화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 명/청시대의 경제 및 문화 :
상품작물(목화, 차) 재배, 수공업의 발달, 화폐경제 발달. 외래작물재배(담배, 땅콩), 비단/차/도자기 수출. 서민문화 발달(희곡, 소설의 유행, ‘삼국지연의’, ‘수호전’, '홍루몽‘ 등). 서양문물전래, 곤여만국전도(중국인 세계관 확대)
* 중국의 유학 변천
훈고학(한-당) → 성리학(송 → 양명학(명) → 고증학(청)
* 열강의 중국침략과 중국의 근대화운동
- 아편전쟁(1840) :
영국의 무역적자 해소 위해 인도를 통한 삼각무역이 원인(아편밀매). 난징조약 체결(불평등조약, 홍콩 할양).
- 태평천국의 난(1859-1864) : 홍수전. 청조 타도.
이상 국가 건설 = 크리스트교 + 유교 = 남녀평등, 토지균등분배. 중국 역사상 최대 농민운동.(태평천국운동과 동학의 공통점 : 종교와 결합하여 토지제도와 신분제도 등 사회개혁을 꾀한 농민중심의 반봉건 운동이었으나, 보수세력과 외세에 의해 실패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 애로호 사건(1956-1860) : 중국의 무역불균형 개선 불이행.영국과 프랑스의 공격 → 텐진조약, 베이징 조약. 크리스트교 포교 허용, 러시아 연해주 진출.
- 양무운동(1862-1894) : 이홍장. 서양 기술 도입으로 부국강병 추구. 중체서용, 군수공업에만 치우침, 청/일 전쟁의 패배로 개혁 실패.
- 변법자강운동(1898) : 캉유웨이. 근본적 개혁으로 서양의 의회제도 도입 추진. 일본의 메이지 유신 모방, but 서태후 등 보수파 반대로 실패.
- 의화단의 난(1899-1901) : 부청멸양, 배외운동. 열강의 진압으로 외국군대 주둔.
- 신해혁명(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수립) : 쑨원,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 청조타도, 중화민국 수립(아시아 최초 민주공화국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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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약 300만년 전 출현. 최초의 인류.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화석으로 발견되었다. 직립보행. 간단한 도구를 사용.
* 호모에렉투스
- 약 50만년 전 출현. 베이징인/자바인/하이델베르크인. 동굴생활. 불과 언어사용. 주먹도끼를 사용하여 수렵활동 전개.
* 호모사피엔스
- 약 20만년 전 출현. 네안데르탈인. 두개골의 용량이 오늘날 인류의 거의 같음. 시체 매장 등 종교적인 감정 보유.
*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 약 3-4만년 전 출현. 크로마뇽인. 상동 인 등. 외모와 지능이 현생인류와 비슷, 동굴에서 거주. 간단한 움집에서 생활.(신석기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전까지는 구석기 시대였으며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출현(구석기)과 그 이후(신석기)는 구석기와 신석기에 걸친 시대였음을 생각해두자)
시 대 |
특 징 |
구석기 |
뗀석기. 사냥과 채집. 이동생활(무리생활). 종교와 예술활동(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라스코 벽화) |
신석기 |
간석기. 농경과 목축시작(신석기혁명 : 정착생활). 토기사용. 움집생활.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
* 신석기시대의 변화
- 신석기 시대는 농경과 목축이 시작됨으로써 식량을 얻기 위해 이동생활을 필요없이 한 곳에 정착하였다. 이로 인해 주거지로 움집이 만들어지고 촌락이 형성되었다. 이 곳 주민들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생산물도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농경과 관련하여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는 등 여러 신앙도 생겨났다.
* 고대문명(4대 문명)의 발생 : 청동기 시대
- 공통점 : 큰 강. 온화한 기후. 비옥한 토지. 관개농업 발달. 계급발생. 문자와 청동기 사용.
* 에게문명 - 그리스 문명의 전(前) 단계, 청동기 시대
- 미노아 문명(크레타 문명) : 크노소스 궁전
- 미케네 문명 : 상무적. ‘일리아드’ (호메로스의 작품. 트로이 전쟁).
* 트로이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중요지역에 위치하여 번성하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여 고고학자 슐리만이 유적을 발굴하여 실체가 드러났다.
*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 제우스의 딸로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조화와 균형의 미를 중요시한 당시 그리스 고전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
* 그리스의 폴리스
폴리스는 아크로폴리스(신전을 둔 중심부)와 아고라(공공 생활공간)로 구성되었다.
폴리스의 중심에는 군사적/종교적 거점인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그 밑에 집회와 상거래를 위한 아고라(광장)가 있었다. 원래는 도시국가 중심지에 있는 언덕을 폴리스라 불렀으나, 점차 도시국가를 부르는 말이 되면서 작은 언덕은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고 이에는 신전이 세워져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 올림픽 경기
4년에 한 번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열린 올림피아 제전은 제우스에게 바치는 일종의 종교행사로 여러 운동경기가 열렸다. 그리스의 여러 제전 경기 중 가장 유명하고 성대하였으며, 올림픽의 기원이 되었다
* 페르시아 전쟁(기원전492-479)
-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페르시아 전쟁 초기에는 스파르타가 그리스 군의 총지휘권을 소유하였으나 후반에 아테네가 대신 연합 함대의 지휘권을 장악하였고 마침네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됨으로써 그리스 패권을 잡았다.
- 마라톤 전쟁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퇴하여 아테네가 번영의 길을 걷게 된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431-404)
-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 스파르타가 승리하였다
* 그리스 철학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 → 소피스트(관심을 인간과 사회로 확대) → 소크라테스(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와 지식강조) → 플라톤(이상국가론) → 아리스토텔레스(학문의 체계적 정리).
* 그리스의 소피스트
지식을 가진 자라는 뜻으로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활약한 직업교사들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의 웅변술과 변론술 등을 돈을 받고 가르쳤으나 결국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 연마에 불과하여 궤변론자라고 불리었다.
* 헬레니즘의 철학(알렉산드로스 제국과 관련)
- 에피쿠로스 학파 : 정신적 쾌락 추구
- 스토아 학파 : 금욕을 강조. 즉 욕망의 절제와 인내를 배워 자연과 일치된 삶을 추구.
* 헬레니즘 문화
- 아르키메데스의 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상.
* 포에니전쟁(기원전264-146) :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3차례 전쟁. 로마승리.
-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전쟁. 로마의 승리. 라티푼디움(노예 노동에 의한 대농장경영)발달.
-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로마장군 스키피오는 포에니 전쟁에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지중해를 둘러싸는 대제국 건설을 완성했다. 그는 불타오르는 카르타고를 쳐다보며 '승리에 들뜬 로마도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걸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사가들은 적고 있다. 스키피오 장군이 예견한 로마 쇠망은 원로원을 비롯한 리더들의 무뎌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에서 비롯됐다. 커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기원전247-기원전183)은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 때 로마에 대항하였다).
* 로마의 악티온 해전(=악티움해전 : Battle of Actium)
- BC 31년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리스 악티움 앞바다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한 전투.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 누이와 이혼을 계기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 악티움은 그리스 북서부의 안부라키아만 앞에 있는 반도이다. 육전(陸戰)을 주창한 안토니우스도 해상 결전을 고집한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상에서 옥타비아누스 함대와 격돌하게 되었다. 양 진영은 각각 500척 이상의 함선을 보유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의 부장 아그리파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한 교묘한 전술로 기선을 제압, 안토니우스 함대를 격파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남쪽으로 달아나는 클레오파트라 함대에 실려 이집트로 도망했다. 육상과 해상전투는 잠시 더 계속되었으나 옥타비아누스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죽고 옥타비아누스는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daum 지식백과사전).
* 로마의 콜로세움
티투스 황제 때 건립된 원형경기장이다. 검투사들은 대부분 살인이나, 강도, 신성 모독, 폭동 등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이었다.
* 로마의 아피아 가도/수도교/콜로세움
로마를 중심으로 각지를 연결하였으므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말이 생겨났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로 통하는 세계 최초의 포장도로이다.
로마시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운 교량인 수도교는 위층에 설치된 콘크리트 수로를 따라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렀다.
콜로세움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투기장으로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한번에 5만 여명의 로마시민이 이곳에서 검투사의 시합이나 동물 서커스를 구경하였다. 건축규모 등의 문제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꼽힌다.
* 노르만족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거주하면서 9세기 말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유럽 각지를 침략하였다. 항해술에 능하고 모험심이 강하였으며 바이킹이라고도 한다. 이들의 배는 머리와 꼬리 부분이 높이 휘어 올라가고 배밑이 얕아 얕은 강가도 올라가기 쉬웠다. 주로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모험을 좋아하고 항해술에 능하여 서유럽 거의 모든 해안과 내륙지방을 약탈하였다.
*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의 4개의 첨탑은 오스만 제국 때 세워진 것이다.
* 그리스 정교
크리스트교의 한 종류로, 로마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와 의식을 존중한다. 성상숭배를 반대하여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가 수장의 역할을 겸하였다.
*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
- 장원에서 도망해온 농노가 1년 1일 이상 도시에 체류하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 도시의 발생
- 봉건제후의 성 밖이나 고대 도시 주변, 교통의 요충지 등에 시장이 발생했고, 이것이 점점 커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를 형성했다. 국왕이 도시를 지원한 것은 영주의 힘을 약화시키고, 도시민의 지원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 카노사 굴욕
- 교황 > 황제(교황의 승리) : 보름스 협약(독일 이외 서임권 교황이 장악)
* 십자군 전쟁 -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성전(聖戰)결의
십자군 전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유럽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는데 교황권이 실추되고, 봉건영주도 전사하거나 전비부담으로 몰락하여 봉건제도가 흔들린 반면, 각국의 국왕들은 세력을 강화시켰다. 또 동방무역 및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은 자급자족적인 장원경제를 뒤흔들어 봉건사회의 붕괴를 더욱 촉진하였다. 십자군 전쟁이후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자치도시들이 등장했고, 이는 중세유럽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서유럽은 이슬람과 비잔틴 세계로부터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받아들였다.
*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 봉건제후 특권 인정. 입헌정치 전통 수립
- 봉건영주 들이 국왕에게 승인을 요구하며 작성한 문헌으로 이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받았다. 대헌장은 의회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대헌장은 영국의 존왕이 프랑스와 무모한 전쟁을 패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자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발하여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문서이다. 대헌장은 봉건귀족들의 특권을 확인한 것으로, 후일 의회의 승인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조항과 공정한 재판없이 체포/구금할 수 없다는 조항이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되면서 영국입헌정치의 초석이 되었다. 즉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원리가 세워진 데에 큰 의의가 있다. ).
* 모범의회
- 모범의회는 에드워드 1세가 재정적인 문제로 소집하였는데 귀족, 성직자, 도시민이 참가하여 의회구성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백년전쟁(14-15세기) - 잔다르크 활약
- 영국 왕의 프랑스 왕위계승권 주장과 프랑스 내의 영국영토인 플랑드르 지방의 프랑스 지배 등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것이 백년전쟁이다.
* 프랑스의 삼부회
프랑스의 삼부회는 영국과는 달리 국왕을 견제하기 보다는 국왕의 과세권에 협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되어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삼부회에서 귀족들의 요구가 많아지자 1614년 이후 200여년 간 소집되지 않았다. 뒤에 루이 16세가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과 시민대표가 대립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 아우구스부르크화의 - 최초로 신교 인정
- 독일황제가 루터파와의 다툼을 끝내기 위해 연 화의이다. ‘통치자가 종교를 결정한다’ 고하여 영주와 도시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군주들은 교회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정치적 분열로 힘이 약했던 독일은 교황의 간섭이 심하여 불만이 높았으므로 종교개혁이 가장 먼저 일어났던 것이다..
* 칼뱅파의 명칭
영국의 청교도,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고이센,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 예수회
- 로욜라가 창시한 것으로 교황의 지상권을 재확인하고 엄격한 규율과 순교자적인 정신으로 해외포교 활동에 헌신하였다.
* 30년 전쟁
- 독일황제가 도시국가 보헤미아의 신교도를 탄압하여 일어났다. 가장 큰 규모의 종교전쟁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가하였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3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맺은 조약으로 가톨릭교도와 신교도 모두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 신항로 개척(15-16세기)
- 1492년 컬럼버스 서인도제도(아메리카 발견)
- 1498년 바스코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하였다
- 1519년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살해되었으나 남은 일행은 희망봉을 지나 3년 만에 에스파냐로 돌아왔다(세계일주)
* 신항로 개척의 결과
- 신항로 개척을 유럽인들의 일상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특히 신대륙에서 유입된 대량의 금/은은 물가를 크게 폭등시켜 가격혁명을 일으켰다. 가격혁명은 임금노동자와 봉건지주에게는 크게 불리하였으나 상인과 제조업자(상공계층)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광대한 해외시장의 등장으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주식회사와 같은 근대적인 기업과 금융제도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경제상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업혁명이라고 한다. 상업혁명으로 상업자본가가 성장하였고, 산업자본가는 산업혁명 이후 성장하였다.
1) 세계의 일체화(유럽의 경제발전을 촉진시켜 정치/경제적 근대화의 기반을 다지게 하였고, 대외팽창을 통해 세계의 일체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참된 의미의 세계사 성립)
2) 지중해 무역의 쇠퇴와 대서양 무역의 성행
3) 가격혁명의 발생(봉건지주 불리, 상공계층 유리)
4) 상업혁명 발생(신항로 발견의 결과 경제상의 변화를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것. 즉, 광대한 시장개척, 길드의 약화로 자본주의가 발달되고 근대적 기업형태가 등장)
5) 유럽인의 시야를 넓히고 미신을 타파하는 한편, 중세의 신 중심적인 생각에 타격을 주고 새로운 세계관이 정립됨.
* 낭트칙령
- 프랑스의 앙리4세가 국내의 프로테스탄트(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이다. 루이 14세는 절대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종교적 통일을 목적으로 1685년 이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약 40만의 프로테스탄트가 프로이센, 영국, 폴란드 등으로 망명하였다.
* 젠트리
- 중세 후기에 생긴 영국의 중산적 토지 소유층, 귀족과 자영농의 중간적인 계층으로, 의회에 진출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하였다.
* 국교회
- 헨리 8세 때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세운 영국 국교이다. 예배와 종교의식은 카톨릭적 요소가 남아있다.
* 권리청원 (1628년) : 청교도 혁명
- 이후 누구도 의회의 승인없이 증여나 기부금, 세금 그리고 기타 어떠한 과세도 강요당하지 않는다.... 또 의회 승인없이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아니한다(권리청원에 등장하는 자유민은 귀족과 성직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귀족의 봉건적 특권을 재확인하는 문서이다)
* 권리장전 : 명예혁명
- 제1조 의회의 동의없이 법의 효력을 정지하거나, 법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는 권력이 국왕에게 있다는 주장은 위법이다.
- 제4조 국왕의 대권을 구실로 의회의 승인없이...국왕이 쓰기 위해 금전을 징수하는 것은 위법이다.
- 제6조 의회의 동의가 없는 한, 평시에 왕국 내에서 상비군을 징집, 유지하는 것은 위법이다.
* 미 독립선언서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포함되어 있다.....정부의 정당한 권리의 근원은 국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만일 어떠한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나 이를 변혁하거나 폐지하고....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인간의 기본권 즉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과 주권재민을 명시함)
* 프랑스 인권선언(1789)
-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권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보존에 있다. 그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및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모든 시민은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누구든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될 수 없다.
- 프랑스 인권선언은 국민의회가 발표하였으며, 근대 민주정치의 원리(인간이의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 재산권 등)가 나타나 있다.
- 국민의 98%에 해당하는 제3신분(시민, 농민, 노동자)은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어 큰 불만을 가지게 되어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게 되었다.
* 영국이 보수당과 자유당 - 빅토리아 시대(19세기)
- 토리당(보수당) : 제임스 2세의 즉위지지
- 휘그당(자유당) : 제임스 2세의 즉위반대
* 이탈리아의 통일(1861)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 세력이 약화되자, 카보우르와 가리발디의 활약 아래 민족통일을 달성하였다.(카보우르 :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으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점진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 농노 해방령(1861)
- 농민에게 실질적 혜택은 별무였다. 농노해방령은 농노가 토지를 얻기 위해서는 지주에게 많은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대부분의 농노는 소작인에 머물렀다..
* 독일의 통일(1781) : 프로이센 중심
독일은 제정시대가 두 번 있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이 제1제국이고 비스마르크가 성립시킨 독일제국을 제2제국이라고 한다. 독일은 관세동맹으로 경제적 통일을 먼저 이룬 후,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통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달성하였다.
* 러시아의 진출
- 17세기에 발트해와 시베리아 방면으로 진출한 러시아는 18세기에 흑해로 진출하였고, 19세기에는 중앙아시와 연해주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 동인도 회사
- 17세기초 영, 프, 네덜란드 등이 동양에 대한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아 설립한 회사로, 초기에는 단순한 무역회사였으나 점차 식민지개척을 목적으로 정치/군사적 실권을 위임받아 식민지 경영에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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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사 개략
4세기 : 야마토 조정(중앙집권적 정권) - 쇼토쿠태자의 섭정(아스카 문화)
7세기 : 다이카 개신(645) - 국왕(천황)중심의 율령국가체제(당의 율령체제 도입). 유교적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확립
8세기 : 나라시대(710-794) - 국왕(천황)의 통치체제가 굳혀짐. 일본 국호 처음 사용. 일본서기 편찬. 견신라사/견당사를 통해 불교문화 수용(도다이사 건립)
8세기말-12세기 : 헤이안 시대(794-1185) - 8세기 중엽부터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과 귀족 세력 간의 대립으로 무사계급의 성장, 국풍문화(견당사 폐지→일본의 독자적 고유문화 강조), 가나문자 제정.
막부정권시대 : 12세기 말 귀족에 고용된 무사계급이 지배층으로 성장함.
12세기 말(1192) : 가마쿠라 막부(최초의 막부)
14세기-16세기(1338-1573) : 무로마치막부(명과 감합무역) → 전국시대(1468-1573) → 16세기 조총(1543)/카톨릭교(1549)전래 → 1573(16세기) 토요토미 히데요시 전국통일 → 임진왜란 → 에도막부(17세기-19세기:1603-1867) : 도쿠가와 이에야스(중앙집권적 봉건정치 : 막부의 쇼군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적 봉건체제 실시, 천왕은 유명무실) → 1868년 메이지 유신(봉건제도 : 약 700여 년 간 국왕은 형식적으로 존재, 막부의 쇼군(장군)이 실질적 지배권 행사 →서양 봉건제와는 다른 일본 특유의 봉건제임. 감합무역 : 명과 일본 무로마치 막부 간에 조공관계가 성립되면서, 명은 일본과의 무역을 통제하기 위하여 감합부를 발행하여 이를 소지한 사람에게만 무역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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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사 개략
- 인더스 문명
발달된 도시문명, 기원전 2500년 경 인더스강 유역에 하라파/모헨조다로 등 계획도시 발달. 포장된 도로. 벽돌 주택. 곡물창고. 공공목욕탕. 하수도 등 각종 도시시설 갖춤. 청동기. 그림문자. 도장(메소포타미아와 교역 증거). 농경/목축생활.
- 아리아인의 진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이주. 기원전 1500년경 인더스강 상류(펀자브 지방)진출. 인더스 문명파괴. 기원전 1000년 경 갠지즈강 유역 진출(철기사용. 브라만교 성립. 카스트제도 발생. 유목대신 농경생활에 전념)(브라만교는 자연숭배의 종교이며 경전은 베다이다. 카스트 제도 : 인도의 신분차별제도.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왕족. 무사. 귀족). 바이샤(평민). 수드라(노예))
- 불교 창시
기원전 6세기 경. 왕권과 귀족이 성장하고, 상공업 발달에 따른 평민성장으로 브라만교의 형식화(타락)와 카스트제도의 계급차별 비판. 자비와 평등 강조.
(철학에 있어서도 브라만교의 형식적 제사의식을 비판하고 우주와 일치를 주장하는 우파니샤드 철학이 등장하였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우주를 범(브라만)과 자아(아트만)의 일체로 보았고, 열반과 윤회, 해탈의 개념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인간을 자기 운명의 설계자로 만들었다).
-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17-기원전 180)
인도 최초 통일왕조(찬드라굽타, 북인도 통일). 아소카 왕(‘전륜성왕’) 때 소승불교 발달(인도 대부분 통일)
(전륜성왕(轉輪聖王) : 인도신화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 정의·정법(正法)으로써 전륜왕 또는 윤왕이라고도 약칭한다. 자이나교와 힌두교에서도 상정되고 있으며, 옛 비문 등에도 나타나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존재로 되어 32상(相:신체의 특징)·7보(寶)를 갖추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에 의해 세계를 정복·지배한다고 한다. 이에는 금륜·은륜·동륜·철륜왕의 네 왕이 있다 전통적으로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BC 3세기)을 세속의 전륜성왕이라고 부른다).
- 쿠샨 왕조(기원전 1세기경-3세기경)
카니슈카 왕 때 전성기(대승불교 발달), 간다라 미술(헬레니즘 혹은 그리스 + 인도 불교문화). 불상이 처음으로 제작됨.(대승불교는 중생의 구제에, 소승불교는 개인의 해탈에 중점을 둔다)
- 굽타 왕조(320-550)
찬드라굽타 2세. 인도 고전문화 황금기(힌두교 발전, 굽타양식, 산스크리트어 문학발달)
수학 영(0)의 개념과 10진법, 천문학으로 지구 구형설, 자전설, 월식의 원리 정리.
(힌두교 발전배경 : 굽타왕조 시기에는 불교가 점차 쇠퇴하고 힌두교가 발전하였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리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대중과 멀어지고, 불교를 지지해 주던 왕과 귀족들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계급성이 강한 힌두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주신인 비슈누가 질서와 정통을 상징하며 주로 귀족층의 사랑을 받아왔다면 시바는 파괴와 가무의 신으로 기성질서의 피해자인 서민들의 신이다. 그러나 시바는 방탕한 행적을 일삼았으며, 춤과 음악을 누구보다고 즐겼다. ).
- 무굴제국
티무르의 후손인 바베르가 세움(1526). 악바르 대제 때 전성기(영토확장,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합노력(인두세 폐지)). 아우랑제브 왕 때 최대영토(재정악화로 인두세 부활 → 각지의 반란 → 18세기 서구열강 침략). 이슬람 왕조, 인도/이슬람 문화 발달(타지마할 묘당. 시크교 성립. 우르두어. 무굴문화)
(인두세 : 각 개인에 대해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조세로 이슬람 세력이 정복한 지역민에게 이슬람교 이외의 신앙을 허용하는 대신 차별적으로 부과하였다. 타지마할 묘당 :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그의 아내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묘로 세운 건축. 둥근 돔의 지붕과 네 개의 뾰족한 첨탑을 갖춘 묘당은 인도/이슬람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시크교 : 16세기에 나나크가 창시. 해탈을 목표로 하는 것은 힌두교와 같으나 일신론/인간평등/성전의무/우상숭배금지의 교리는 이슬람교에서 수용한 것이다. 우르두 어 : 힌두어 + 페르시아어 + 아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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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시아 국가들
- 캄보디아 : 메콩강 유역. 크메르 족. 부남(1-2세기초) → 진랍(6세기경) → 앙코르 왕조(9세기경)성립(앙코르 와트 사원 : 힌두교 사원이였으나 후에 불교사원이 되었다).
- 베트남 : 북부는 중국, 남부는 인도의 영향을 받음. 추놈문자. 기원전 3세기-10세기경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 → 11세기 초 리(李)왕조 → 13세기 초 진(陳)왕조 → 13세기 말 몽고 침입 → 14세기 명의 침입.
- 미얀마 : 우왕조(8세기) → 파간 왕조성립(11세기. 최초 통일왕조) → 몽고에 멸망(13세기)→ 퉁구왕조(16세기. 재통일). 파간왕조가 소승불교 수용. 미얀마 문자제정. 13세기 이후 이슬람교 전파.
- 타이 : 수코타이 왕조(13세기) 아유타야 왕조(14세기) → 미얀마에 멸망당함(1767). 소승불교 신봉. 원과 진랍의 문화 수용. 타이문자 제정.
- 인도네시아 주변 : 스리위자야 왕조(7세기. 해상무역 국가. 힌두교), 사이렌드라 왕조(8세기 초, 보로부두르 사원 . 대승불교). 마자파히트 왕조(13세기-16세기 초, 인도네시아 모든 지역통치. 이슬람교). 믈라카(말라카) 왕조(15세기, 이슬람 계통. 동서무역으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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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트 문명 - 그리스/로마 문화의 바탕
- ‘해뜨는 동쪽’이란 뜻.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생지역.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과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기원전 1500년 경 동부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와 헤브라이.
메소포타미아 |
수메르인 문명 → 바빌로니아왕국(함무라비 법전) 개방적 지형. 쐐기문자(진흙판에 새김. 표의문자). 태음력. 60진법. 점성술. 현세적 신앙. |
이집트 |
폐쇄적 지형(오랫동안 통일유지). 태양력. 측량술/기하학 발달. 10진법 영혼불멸(내세적. 미라. 스핑크스, 피라미드. 사자의 서). 그림문자(상형문자 : 파피루스). 신정정치. |
페니키아 |
표음문자(알파벧 기원). 북부아프리카에 식민지 카르타고건설. 오리엔트 문화를 서방세계에 전파. 장사의 천재. |
헤브라이 |
팔레스타인(가나안)정착 → 흉년으로 이집트로 이주 → 파라오의 탄압 → 모세의 주도로 귀향(출애급) → 팔레스타인에 헤브라이 왕국 건국. 전성기 : 다비드왕과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과 유대왕국으로 분열.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에 각각 멸망. 유대교(유일신 신앙. 구약성서) |
- 표의문자(表意文字 : ideogram) : 시각(視覺)에 의하여 사상을 전달하는 문자. 즉 그림이나 사물을 본떠 뜻을 전달하는 문자. 보통 그림에 의한 그림문자와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베낀 상형문자(象形文字)의 두 가지가 있다. 문자를 그 기능과 용법에 따라 분류하는 경우, 로마자 ·한글 ·러시아문자 ·아랍문자 등은 음을 표기하는 표음문자(表音文字)에 속하고, 그에 반해 이집트문자 ·한자(漢字)는 그 뜻을 표기하는 표의문자에 속한다. 가장 오래된 표의문자는 수메르문자이고, 그 다음이 이집트문자 ·히타이트문자 ·잉카문자 등이다. 이들 표의문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표음주의를 병용하고 있다(daum 지식백과사전).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 헤로도토스의 말. 나일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하여 농업이 발달하였다는 뜻
* 함무라비법전
성문법전. 보복법(응보형 법률). 신분에 따른 차등 적용. 서아시아 법률발달에 큰 영향. 바빌로니아 왕국은 철기를 가진 히타이트에게 멸망당함. 세계 3대법전 중의 하나(함무라비 법전, 로마법 대전, 나폴레옹법전)이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공통점 : 관개농업. 실용기술발달. 전제정치.
* 최초로 오리엔트 통일 : 아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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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교 성립과 확대
- 이슬람교 성립 이전의 서아시아
아시리아(기원전7세기) → 페르시아(기원전6세기) → 박트리아, 파르티아(기원전 3세기) → 사산조 페르시아(3세기)
- 이슬람교의 성립
- 6세기의 아라비아 홍해연안의 메카, 메디나가 번영. 그러나 상업귀족과 평민 간의 빈부격차 심화. 7세기 메카에서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창시
- 경전 코란. 성전(지하드) 강조. 우상숭배와 다신교 거부. 유일신 알라. 인간평등. 헤지라(622 : 박해를 피해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슬람력의 원년)
- 이슬람 세력의 확대 : 칼리프(마호메트 후계자)시대
정통 칼리프시대(632-661. 피정복민의 관습과 종교에 관대, 피 정복민에게 인두세와 토지세 부과. 칼리프 선출) → 세습 칼리프 시대(661-750.옴미아드 왕조. 옴미아드가에서 칼리프 세습.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 이슬람제국의 전성기. 아랍인 우월주의) → 이슬람 제국의 분열 → 아바스 왕조(751-1258. 동 칼리프. 바그다드에 도음.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에 승리(750)) → 후 옴미아드 왕조(756-1031. 서 칼리프. 코르도바에 도읍. 유럽에 이슬람 문화전파) → 파티마 왕조(909-1171. 중 칼리프. 10세기 초. 시아파가 카이로에서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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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가 직접 민주정치를 할 수 있었던 배경
페르시아 전쟁에서 농민 출신의 중장보병과 하층민 출신의 수병들이 큰 역할을 함으로써 이들의 발언권이 커졌고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경제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 헬레니즘의 라오콘 상
높이 2.4m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 때 목마를 성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해신(바다의 신) 포세이돈에 보낸 뱀에 의해 두 자식과 함께 죽었다고 전한다.
* 스파르타가 군국주의 정책을 실시한 이유
스파르타의 인구 구성으로 보았을 때 시민과 노예의 비율이 대체로 1대 10 정도였기 때문에 소수의 시민들이 다수의 노예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귀족 정치로서, 형식상의 왕과 그 밑에 평의회와 민회가 있었지만 실제 정권은 5명의 귀족 출신 감독관이 갖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이러한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엄격한 시민교육을 실시하였다. 즉 국가가 시민의 행동, 교육, 결혼 등에 일일이 간섭하여 시민을 국가에 절대적으로 복종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다.
* 로마의 평민권 신장을 통한 공화정 발달
- 호민관 → 평민회 설치 → 12표법 제정 → 리키니우스법 제정 → 호르텐시우스법 제정
- 호민관(기원전 494) : 평민에게 불리한 법률행위에 거부권 행사(원로원의 결정에 거부권행사)
- 평민회 설치(기원전472) : 평민들의 권익단체 설립
- 12표법(기원전 450) : 로마 최초의 성문법(평민들의 요구로 관습법을 성문화).귀족의 횡포로부터 평민을 법률로 보호
- 리키니우스법(기원전 367) : 집정관 1인은 반드시 평민 중에서 선출
- 호르텐시우스법(기원전 287) : 평민회의 의결을 원로원의 동의없이 국법으로 인정(평민회 결의의 법적효력). 법률상 귀족과 평민의 평등을 이룩함.
*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의 토지 소유의 변화
오랜 전쟁과 속주로부터 값싼 곡물의 유입으로 자영 농민들이 몰락하고 유력자들은 대토지(라티푼디움)를 소유하고 노예 노동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 정복 왕조(요/금/원/청)가 2중 통치 제도를 실시한 이유
고유의 습속과 강력한 군사력의 유지를 위해서이다(요/금 등의 정복왕조는 중국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중국에 흡수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유의 부족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2중 통치제도가 나타났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유
- 내적 요인 : 황제권의 급격한 약화와 귀족사회의 사치와 향락
- 외적 요인 : 로마 변경에서 살고 있던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지 못함(군대에서 이탈리아인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속주에 속한 군인이거나 로마 영내로 들어온 게르만 용병들이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헬레니즘/로마의 문화의 특징.
- 그리스는 오리엔트 문명과 에게 문명의 바탕 위에 폴리스의 자유로운 시민생활을 기반으로 한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이며 조화와 균형의 미를 추구하는 문화를 창조하였다. 인간과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그리스의 신들이나, 인간의 주관성을 강조한 소피스트, 소크라테스에서 출발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의 학문체계는 이들 문화가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이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테네 여신상 등에서는 조화와 균형의 미의 극치를 잘 나타내고 있다.
- 그러나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 인들의 대거 동방의 도시로 이주하면서 자유로운 시민 중심의 그리스 문화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확대된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은 공공의 윤리나 애국심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구원을 추구한 것이다. 여기에 헬레니즘 문화의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가 생겨났는데,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학파나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학파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이들은 미술에서도 이상적인 미보다는 인간의 관능이나 격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 한편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를 융합하여 이후 유럽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로마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창조성 대신 실용적 특성이 두드러졌다. 그러한 실용성은 특히 토목과 건축, 그리고 법률 분야에서 크게 강조되었다. 도로와 수로, 원형경기장(콜로세움), 개선문 등은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관습법에서 시민법, 만민법, 그리고 자연법으로 발전한 로마의 법률은 훗날 근대법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비잔틴 제국의 역사적 의의
1) 활발한 상업 활동에 의해 유지된 경제력, 로마로부터 물려받은 치밀한 정치제도, 국교로된 크리스트교, 그리고 이곳에 전통적으로 남아있던 헬레니즘 문화를 토대로 하여 유럽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였다(로마제국의 계승).
2) 비잔틴 제국은 동쪽으로부터 밀려 온 이슬람 세력을 무찌름으로써 서유럽 세계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정작 비잔틴 제국은 십자군 원정의 통로가 되어 참담한 약탈을 당하였고, 1204년에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농간에 넘어간 제4회 원정군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정복되는 최대의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크리스트교 세계의 방파제).
3) 그리스 고전문화는 크리스트교 사제와 수도사들의 연구와 필사, 주석에 의해 보존되었다. 그리하여 신학은 물론 고전 문학과 철학, 예술 등이 크게 진흥되었다. 이들 고전 학자들은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 및 북유럽으로 망명하여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그리스 문화의 보존)
* 중세 서유럽과 비잔틴 세계의 비교
서유럽 |
비잔틴(동로마) 제국 |
로마 카톨릭교(정교분리) 지방분권적 봉건체제 |
그리스 정교(황제 교황주의) 동방적 전제 군주 체제 |
장원중심의 자연 경제 |
동서무역 중개로 상공업 |
게르만 문화권(로마/게르만요소) |
비잔틴문화권(그리스/슬라브적 요소) |
라틴어 |
그리스어 |
* 아테네가 로마보다 팽창하지 못한 이유
로마는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시민법만으로는 통치가 어렵게 되었다. 세계 국가를 질서있게 통치하려면 시민법을 넘어 여러 민족에게 통용되는 보다 넓은 법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만민법이 제정되었다. 반면 아테네는 시민의 범위를 제한하여, 거류 외국인들에게는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즉 로마보다 이민족에 대한 포용성 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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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이 균전제를 시행하면서 성인 남자들에게 부과한 것.
당은 북위의 균전제를 이어받아 성인남자에게 구분전과 영업전을 지급하고, 그 대가로 조/용/조의 세를 부과하고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게 하는 부병제를 실시하였다. 즉 조/용/조의 세와 부병제에 따른 병역의 의무.
*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사회/경제적 변화
당의 전기(前期)인 태종 때부터 현종에 이르기 까지 약 1백년 간은 국력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현종 말년에 이르자 오랜 기간 사회 안에 내재되었던 각종 모순들이 표출되어 마침내 안/사의 난과 그로 인한 번진(절도사) 할거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 때부터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어 국력을 날로 약화되었으며 당 전기의 토지/조세/군사 제도에서 일대 변혁이 나타났다.
1) 토지제도의 변화(균전제에서 장원제로)
당 전기에 시행되었던 균전제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관료지주들을 중심으로 토지 겸병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농촌에서 빈부의 격차를 더욱 크게 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에 따라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한 지주가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을 사역시키는 장원제도가 등장하였다. 장원 안에서 농민들은 수확량의 절반을 지주에게 지불하였다.
2) 조세제도의 변화(조/용/조에서 양세법으로)
균전제를 기반으로 성립하였던 당의 조/용/조법은 후기에 이르러 균전제가 붕괴되면서 세법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이에 당 왕조는 조세 수입을 늘리고 각 계층의 백성들이 합리적으로 조세를 부담할 수 있도록 재상 양염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세법을 시행하였다(780). 양세법은 조세 수입의 주요내용인 호세와 지세를 여름과 가을의 두 시기로 나누어 징수하는 세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전의 조/용/조와 여러 명목의 세금을 합병하여 조세를 간편화하는 동시에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막을 수 있었다. 또한 가지고 있는 재산과 토지에 따라 각 호의 등급을 매겨, 재산이 적으면 세금을 적게, 재산이 많으면 세금을 많이 부과하여 상대적으로 빈곤한 계층의 생활을 안정시켜 나갔다.
3) 군사 제도의 변화(부병제에서 모병제로)
당 후기의 토지제도 변화는 군사 제도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당 초기에 실시하였던 부병제는 자영농의 토지 소유를 기초로 해서 성립한 농병일치의 군사제도였기 때문이다. 넓은 장원을 소유한 지주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군역을 기피한 반면,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은 재산이 줄어들었는데도 예전대로 조세를 부담해야 했고, 더욱이 군역에 복무해야만 했다. 따라서 723년에 당은 부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으로 바꾸어 수도 및 부근 지역의 장정을 모집함으로써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였고, 737년에는 변방지역의 병사들도 모두 모병으로 충당하였다.
4) 즉 안/사의 난 이후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장원이 발달하면서 기존의 균전제가 흔들리게 되었고, 그에 기반을 둔 부병제 역시 시행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모병제가 실시되었으며, 세금제도 역시 기존의 조/용/조 세제(세금제도)를 양세법으로 바꾸게 되었다.
* 토지의 균등분배 - 균전제
* 직업군인 - 모병제
* 병농일치 속에서 군역의 의무 이행 - 부병제
* 재산의 정도에 따라 한 해에 두 번 세금납부 - 양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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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굽타 시대의 문화의 특징
굽타 시대는 인도의 불교와 헬레니즘 문화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이 쇠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굽타 양식이 발전하였다. 굽타양식은 인도 고유의 예술적 표현 방식을 발전시킨 양식인데, 굽타 미술양식(간다라 미술적인 그리스 기법을 극복하고 인도 특유의 곡선미를 나타낸 미술 양식을 말하며, 불상과 여러 힌두 신상에 조화/균제/우미의 특징을 보이는 인도적 기법을 발휘하였다)은 불교 전파와 함께 아시아 각지에 전파되었으며, 삼국 시대의 우리나라 불상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문학에서도 브라만의 언어인 산스크리트 어를 공용어로 하여 칼리다사의 희곡 ‘사쿤탈라’가 창작되었고, 인도의 오랜 종교와 전설을 담은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가 굽타시대에 완성되었다. 또한 브라만교의 공(空)의 개념으로부터 ‘0’이 나왔고,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십진법이 정리되고, 그것이 다시 이슬람 지역으로 전파되어 아라비아 숫자가 완성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근대 유럽의 자연과학의 발달에도 영향을 끼쳤다.
* 굽타 왕조 때 힌두교가 성립하였다. 힌두교는 브라만교에 민간 신앙을 접합시키고 불교의 장점을 흡수하여 완성한 종교이다.
* 인도 이슬람 왕조의 변천
- 가즈니 왕조(962-1186), 고르왕조(1148-1206), 노예왕조(1206-1290), 델리술탄왕조(1290-1526), 무굴제국(1526-1858)
- 인도가 이슬람화 되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이슬람 계의 옴미아드 왕조가 인도에 침입한 이래, 10세기 가즈니 왕조가 펀자브를 장악하고 갠지스 강 유역을 침략하여 힌두 문화를 파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공통점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는 다같이 유일신을 따르고, 구약성경의 창세기와 시편을 믿으며, 둘 다 천사와 내세 그리고 예정을 가지고 있다.
*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차이점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 사이에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승려 계급이 없다는 점이다. 크리스트교에서는 일반 신도들은 성직자를 통해야만 신과 접할 수 있다고 한 반면, 이슬람에서는 모든 모슬렘이 알라 신과 직접 교감하기 때문에 성직자가 필요없다. 또한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신의 사도로 믿지 않는다. 이슬람에서 볼 때 예수는 평범한 사람 중 하나이며, 마호메트만이 알라 신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교리면에서 유일신 숭배, 평등사상 및 부활 등은 크리스트교와 매우 비슷하지만, 교조 마호메트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크리스트교와 다르다. 또 이슬람교에서는 계급이 없고, 교주가 정치권도 장악하며, 무력에 의한 포교를 인정하고 있다).
* 이슬람교의 특징
-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의 모세의 5경, 시편, 그리고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신의 계시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하고 코란만이 완전한 기록이고, 크리스트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마호메트만을 마지막 예언자로 섬긴다.
- 이슬람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와 이란 문화를 기본을 삼으면서 주변 문화를 섭취하고 이슬람교와 아랍적인 독창성을 첨가하여 발전시켰다. 그리고 서유럽 세계에 전파함으로써 르네상스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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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만 족이 세운 나라 중 프랑크 왕국이 가장 강했던 이유.
1) 대부분의 게르만 족들이 자신들의 근거지를 떠나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한 반면, 프랑크 족은 근거지인 라인 강 하류 지역에서 팽창하는 방식으로 이동하여 게르만의 전통과 뿌리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2) 크리스트교가 게르만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게르만 족들은 로마 교회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아리우스파를 신봉한 반면,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 클로비스는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갈리아 지방의 영토확장이 순조로웠다.
3) 프랑크 왕국은 비잔틴이나 이슬람의 직접적인 공격을 면할 수 있었던 지리 조건 덕분에 건국 초에 안정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게르만 국가들이 비잔틴과 이슬람의 공격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프랑크 왕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 이동거리가 짧아 혼란이 적었다.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융합이 쉬웠다. 지중해의 정치 중심권과 멀리 떨어져 독립을 유지하였다.
* 서양 중세 장원에서 3포제가 행해졌던 이유.
서양 중세에는 비료가 발달하지 못하여 춘경지/추경지/휴한지로 나누어 3년에 한 번 휴한지로 남겨 두는 3포제가 널리 행해졌다.
* 중세 유럽의 영주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조세 부과, 재판, 관리임명에 대하여 불수 불입권이라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것이 중세 유럽의 정치에 미친 영향.
중세 유럽 사회는 봉토를 받은 봉신(가신)은 영주로서, 주군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행정/사법뿐만 아니라 입법권까지도 소유하여 거의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지방분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 봉건 제도의 특징 이해
-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는 전사들이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고, 이에 대해 수장은 전사들에게 무기, 식량, 의복 따위를 제공하며 노획물을 분배해 주었다.
- 프랑크 왕국의 궁제 카롤루스 마르텔은 기병으로 하여금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적 봉사를 하게 하는 대신, 이들 기병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생활과 기마 및 무장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앞의 글에서 나타난 두 제도가 융합되어 나타난 사회의 특징으로는 지배층 상호간에 쌍무 계약적 주종 관계가 맺어졌으며, 국왕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지방 분권적인 정치 상황의 발생을 들 수 있다.
- 봉건제도는 고대 게르만 사회의 주종제도와 로마시대의 은대지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주종관계는 기사들이 자기보다 신분이 높고 영지가 많은 기사를 주군으로 섬겨 충성과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는 대신, 주군은 이들을 봉신으로 삼아 봉토를 주어 보호/부양함으로써 성립하였다. 이처럼 쌍무적 계약관계인 주종관계는, 점점 확대되어 국왕을 정점으로 제후와 하급기사 사이에 몇 겹으로 맺어져 피라미드식 계층 구조를 이루었다. 주종 관계는 점차 세습되었고, 봉신은 자신의 봉토 안에서 국왕의 간섭없이 재판권, 과세권 등을 행사할 수 있는 불입권을 가졌다. 이 때문에 왕권은 점점 약화 되었고, 지방 분권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봉건제도의 기원>
게르만적 전통(종사 제도) :
1. 게르만 족장(수장)들이 전사들을 선발/부양. 전사들은 족장(수장)에게 군사적 봉사와 충성을 맹세.
2. 귀족층과 자유인 사이에 맺어진 주종 관계로서 주인과 종사(從士)는 서로 서약을 한 다음 선물을 교환하고 주종 관계를 맺었다. 주인측은 종사를 보호할 의무, 종사측은 주인을 옹호할 의무를 가졌으며, 종사의 주요임무는 주인에게 일상적으로 봉사하는 것 외에 정복 전쟁이나 침략시에 주인과 함께 출정하겨 주인을 보호하는 것 등으로 규정하였다.
3. 기사가 힘있는 유력자를 주군으로 섬기면서 충성할 것을 맹세하면, 주군은 그 대가로
봉토(封土)라는 토지를 주고, 기사를 봉신(封臣)으로 삼아 보호해 줌. 이처럼 서로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면서 주군과 봉신의 관계를 맺는 것을 주종(主從) 관계라고 한다. 서유럽 봉건제도의 주종관계는 지배/복종 관계가 아니라 상호 계약에 의한 관계였음. 계약을 파기할 권리는 주군 뿐만 아니라 봉신에게도 있었고, 주군과 봉신 중 하나라도 계약을 위반한 사람이 있으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었다. 또한, 주군은 봉신에 대해,봉신은 주군에 대해 세금납부와 군대 대여의 의무를 지고 있기도 했는데, 이것을 쌍무적 계약 관계라 함. 이같은 주종관계는 게르만의 종사제에서 비롯되었는데, 종사제란 원시 게르만 사회에서 자유민의 아들 중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자들이 종사가 되어 부족의 유력자들을 주인으로 모시면서 군사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대신 옷과 노예/가축을 받았던 관습을 말한다. 종사와 주인을 봉신과 주군으로 바꾸면 봉건제와 비슷함. 그러나 봉건제는 주군이 가신에게 봉토를 줘야 한다는 점에서 종사제와 다르다.
4. 주군은 봉신에 대비될 때는 주군이지만, 농노와 대비될 때는 보통 영주라 한다. 주군과 봉신은 같은 전사로서 평등한 신분에 속하였으며, 따라서 주종 관계 또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쌍무적 계약 관계였다. 이러한 관계는 봉신이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신서(homage)와 주군이 봉신에게 행하는 서임(investiture)의 의식으로 성립되었다. 봉신의 주군에 대한 중요 의무는
첫째, 일정 기간(1년에 40일)의 군사적 복무,
둘째, 부조(aid)라 불린 공납의 부담(주군 장자의 기사 서임, 주군 장녀의 결혼, 주군이 포로가 되었을 때의 몸값 등),
셋째, 중요 사항의 결정을 위한 협의나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주군의 궁정에 출사할 의무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주군의 봉신에 대한 의무는 봉토(봉사에 대한 대가)의 수여와 봉신의 보호 등이었다.
로마적 전통(은대지 제도) :
1. 소토지 소유자들이 대토지 소유 귀족에게 군사적 보호를 요청함. 농민이 대지주에게 자기 땅을 양도하고 소작을 자청함.
2. 국왕/대귀족 등이 충성과 봉사, 정치적/군사적 결속을 위해 봉토의 전신인 베네피키움(은대지)을 관리, 소귀족에게 증여한 토지제도이다.
3. 봉토를 주는 전통은 로마의 은대지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은대지는 3세기 이후의 로마황제들이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게르만 용병들에게 준 토지를 말한다. 그 후 7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기 위해 기병을 양성해야 할 필요를 느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은 은대지제를 받아들여 부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 돈으로 말과 갑옷을 사서 무장하게 했음. 이 때부터 프랑크 왕국에서는 봉신들에게 은대지라는 명목하에 토지를 빌려주기 시작하였는데, 일시적으로 빌려준다는 의미가 강했던 은대지는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9세기부터 자자손손 영구 대여해 주는 봉토로 바뀌게 된다(세습이 시작됨)
불입권 :
봉토가 세습되기 시작하면서 봉신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 주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세금을 물리고 재판을 할 수 있는 불입권이라는 권리를 가지게 됨 이로 인해 서유럽에서는 자연히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분권화가 촉진됨. 왕도 유력한 제후 한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됨. 즉, 불입권이란 영주가 자신의 영지내에서 국왕, 주군으로부터 재판이나 조세부과 등에 관하여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적 통치권을 말한다(이로 인해 지방분권화가 촉진됨).
봉건제의 경제적 기반 - 장원제
봉신이 받은 봉토는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장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장원을 소유한 봉신을 영주라고 부름. 장원의 기원은 로마의 콜로나투스 제도에서 찾을 수 있음. 로마 말기에 ‘콜로누스’라고 불리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소작농이 나타나는데, 이 콜로누스가 바로 중세 농노의 기원이 됨. 중세 농민은 신분상 자유민과 농노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장원의 농민 대부분은 농노였음. 농노는 약간의 재산을 소유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노예와 다름. 그러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는데, 농노는 일생을 장원에 묶여 살며 영주에게 부역과 공납을 바쳐야 했었다.
부역은 영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통 일주일에 3일 정도를 영주의 땅에서 일함. 공납은 농노가 돈이 아니라 직접 생산한 물품을 영주에게 바침. 그 밖에 사람 수에 따라 내는 인두세와 사망세, 혼인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장원 내의 방앗간과 같은 시설을 이용할 때도 이용료를 지불해야 했음. 게다다 농노는 이러한 세금을 제때 내지 않았을 때나 도망갔을 때 영주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경제 외적인 속박에도 얽매여 있었음. 그러므로 중세 농노의 처지는 ‘뿔없는 소’ 라고 할 정도로 비참하였음.
* 서양 중세 농노
- 노예적 요소 :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음. 영주의 재판에 복종하여야 하며 경제외적 강제(결혼허락 등)가 있었음. 그러나 영주가 마음대로 다른 장원에 팔지 못하였다.
- 자유민적 요소 :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토지와 가옥/가축 등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구분되었으며 아이들도 농경에 동원되었다.
* 동아시아와 유럽의 고대 사회의 특징을 비교/설명
- 동아시아 사회는 백성의 대부분이 일반 농민이고 노비의 수는 많지 않았다. 농민들이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조세와 역을 부담하였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할 수가 있었다. 반면, 그리스와 로마의 경우에는 노예의 비중이 절대적이었고, 이들의 생산 활동과 각종 역할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유럽의 고대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도 한다.(EBS 탐스런 세계사)
* 중세시대의 전쟁은 기사들의 몫이었다.
* 중세 장원의 변화과정.
중세 유럽의 농노는 영주가 지배하는 장원에서 농토를 경작하고, 그 대가로 영주에게 지대(地代)의 부담을 진다. 농노가 영주에게 부담하는 지대의 형태는 중세 유럽의 경제 상황에 따라 크게 노동지대 → 현물지대 → 화폐지대의 3가지 형태로 변화하였다.
1) 노동지대는 농노가 영주에게 부역(노동력 제공)의 형태로 지대를 납부하는 방식이다. 농노는 주로 자신의 경작지를 경작하면서 동시에 일정 기간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한다. 이 경우 농노의 경작지에서 나온 생산물은 농노의 소유였고, 영주의 직영지에서 생산한 것은 모두 영주의 소유였다. 부역을 하는 일수는 대략 전체 노동 일수의 1/2정도로 이것은 지대율이 1/2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농노가 이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영주는 농노에게 경제적 불이익이 아니라 신체적 제재를 가하는 방식으로 노동지대를 관철시키려 했다.
2) 현물지대는 농노가 생산한 수확물의 일부를 지대로 납부하는 방식이다. 대략 생산한 것의 절반을 영주에게 바쳤다. 지대 납부의 방식이 노동지대에서 현물지대로 바뀌게 된 이유는 농노 경작지에 비해 영주 직영지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낮았기 때문에 영주는 자신의 직영지를 모두 농노들에게 분할하고 대신 추수가 끝난 후 생산물의 1/2을 거두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3) 화폐지대는 현물을 화폐단위로 환산하여 지대로 거두는 방식이다. 중세 말 유럽은 십자군 운동 이후 도시가 발달하고 동방 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상업 경제가 발달하였다. 당시에는 주로 원거리 교역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상인들은 교환수단으로 현물보다 운반하기 편리하고 장기간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사용하여 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결국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상인의 주된 고객인 영주들은 더 많은 화폐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필요한 화폐를 농노의 지대를 통하여 확보하려 하였다. 따라서 상업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현물지대를 대신해서 화폐지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농민들은 지대를 금납화함으로써 과중한 부역의 의무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화폐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농민들의 경제적 지위는 점차 향상되었다. 여기에 14세기 중엽에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농업 인구가 크게 감소하여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영주들은 농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농노들은 돈을 치르고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거나 축적된 부로 경지를 사들여 자영 농민이 되는 경우가 생기면서 중세 유럽의 장원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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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로마제국 성립
962년에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한 때로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帝位)를 물러난 1808년 8월까지에 걸쳐 독일 국가 원수(元首)가 황제 칭호를 가졌던 시대의 독일제국의 정식 명칭. 신성로마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연장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제국이라 불렸고, 또 고대 로마의 전통 보존자인 크리스트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神聖)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로서 그 이전은 단순히 제국 또는 로마제국이라 불렸다. 당시 오토 1세는 귀족의 침략을 받고 경제적으로 쇠락한 독일 내부의 교회·수도원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며, 로마교황에게도 접근, 교황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이탈리아에 원정, 교황을 괴롭히던 현지의 귀족을 토벌하고 교황을 구출했다. 그에게 황제권을 부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친 크리스트교적인 정책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였다. 그러나, 오토 1세의 이러한 정책들은 국내에서 왕권에 대항하는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국왕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크리트스 교회를 이용한 것이었다.
* 대헌장의 선포 배경
십자군 전쟁의 영웅 리처드의 동생이며 리처드의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존 왕은 독일과 연합하여 프랑스를 침공하였으나 오히려 프랑스에 있던 영국의 영지마저 빼앗겼고, 영국의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자 국왕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중세(重稅)를 부과하여 봉건제후와 상인들의 반감을 샀다.
* 대헌장이 중세 영국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
제12조에서 국왕이 마음대로 조세를 거둘 수 없게 만든 것은 이후 영국 의회가 조세부과를 통제하는 기초가 되어 ‘대표 없는 곳에 과세없다’ 라는 전통을 만들었으며, 제39조에서 자유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한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이후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제12조 : 짐의 왕국의 전반적 자문에 의하지 않고는 군역면제금과 보조금을 짐의 왕국에서 부과할 수 없다.
제39조 : 어떤 자유인도 같은 신분에 의한 합법적인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체포되거나 구금되거나, 점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빼앗기거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추방되거나 해를 입지 않는다)
* 대학 발생의 유래.
‘대학’을 뜻하는 유니버시티(University)라는 단어는 ‘전체’ 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이나 조합’ 이라는 말에서 발생하였는데, 중세 유럽에서는 상인들의 단체인 길드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교수와 학생 단체도 길드 체제와 같이 동일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아 이 말을 사용하였다가 나중에 대학이 번창하자 오직 대학이라는 의미로만 사용하게 된 것이다. 칼리지(Collage)는 교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조합을 말한다.
* 흑사병이 농민들의 지위에 미친 영향.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하자, 영주들은 농민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흑사병의 유행은 농민들의 지위향상에 기여하였다.
* 서양 중세 사회에서 길드의 명암
길드는 도시에서 형성된 조직으로 장원경제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길드 내에서 새로운 지배/예속 관계가 성립되면서 자유로워야 할 도시에 새로운 ‘부자유’가 생겨났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