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아버지는 산소 앞바다가 충무공이 전사하신 노량바다라고 늘 말씀해 주셨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묻히셨다.
가을전어가 유명한 삼천포 사천 노량바다에 왔으니 전어를 먹고 가지 않을 수 없다하여
삼천포시 송포동에서 창선대교까지 이어진 멋진 너무나 멋진 해안 국도를 따라 가족들과 같이 달렸다.
송포와 실안은 전어로 유명한 곳이다. 자연산 돔과 전어를 맛있게 먹었는데 값이 무척 싸고 맛있었다. 상인들의 인상도 천진해 보여서 좋았다.
아침 일찍 추석전에 못했던 성묘를 가족들과 같이 하였다. 성묘를 마치고 곤양에서 진교를 지나 전어로 역시 유명한 술상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 위판장에는 전어들이 많다. 사람들은 전어를 사서 직접 회를 떠서 술한잔과 함께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직접 사서 먹으면 싼 비용으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서민들은 가난하기에 자연과 가깝다. 바닷가에 앉아서 회를 먹는 사람들... 아무리 멋있는 집도 바닷가 갯바위에 비하랴!! 회떠는 법을 배워야 겠다. 연어회 한번 떠 본것이 유일한 경험인지라.
초등학교 1학년인 조카는 회를 무척 잘 먹는다. 요즈음 아이 안같다.
전어구이까지 먹고 노량으로 향했다. 남해대교를 건너 충무공의 시신이 처음 뭍으로 올려졌다는 이락사로 향했다. 장군께서 왜군을 격파한 관음포가 눈에 들어온다. 관음포는 제방을 쌓아 많이 간척이 되어서 바다가 그리 넓지 않았으나, 과거에는 제법 깊은 포구 였음을 알 수가 있다.
왜군은 관음포가 막다른 곳임도 모르고 이곳으로 쫓기어 대패하게 되었다.
충무공은 이미 이 관음포를 왜군을 유인할 계략을 다 짜두었던 것이다. 그분의 치밀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었다. 우리땅의 역사와 아름다움은 모르고 해외로만 다니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장군은 이미 승리가 결정된 전투상황에서 아침 9시경 전사하셨다 한다, 구지 나서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진두지휘하다가 순국하신 것이다. 10시경 조명연합군은 승전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조카와 전쟁놀이를 하며 망루를 내려왔다. 장군의 유언이 새겨진 바위 戰方急勿言我死(전황이 다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를 뒤로 하고 남해대교쪽으로 달린다.
남동생과 조카랑 차에서 내려 남해대교를 걸어서 건넌다.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바람과 차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린다.술 마셨을 때 어지러운 것과 비슷하다.
멀리 광양 제철소가 보이고 백운산과 지리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삼천포가 보인다.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 종기 섬위에 떠 있다. 화려하거나 웅대하다기 보다 아기자기한 우리의 강산이 정겹다. 어머니는 건너편에서 여동생과 제수씨랑 호박을 사고 계셨다.
동생네의 비행기 시간이 남아 곤양의 다솔사를 갈려고 했으나 그냥 공항으로 바로 가자고 한다.
독립운동가로 옥살이까지 하시고, 꺼져가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켰던 효당스님 최범술 선생이 우리 일가이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듣고 놀라다. 할아버지보다 윗어른이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할머니 49제를 효당스님이 계시던 다솔사에 지냈다고 말씀해 주신다. 당시 나는 갓 돌을 지난 아기였었다. 차에 대한 책을 보며 알게되고 존경하게 되었던 효당스님이 일가친척이라는 사실을 이제사 알다니!! 효당스님이 즐겨 드시던 반야로(般若露). 왜 어른들은 이런 이야기를 일찍이 해주시지 않았을까? 우리의 어른들은 왜 과거에 대해서 침묵하실까?
박정희 집권시절 경상도에서 김대중씨랑 정치를 하시었던 할아버지. 전두환 쿠데타 시에 정치 규제 대상자로서 수배되어 곤양을 떠나 부산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셨던 할아버지. 밤마다 몰래 음식과 할아버지 수발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지난 여름 다솔사에서 나는 효당스님의 흔적을 찾기위해 절을 혼자 지키고 있던 스님에게 효당스님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스님이 두분 계시는 한적한 절,
대웅전 뒤에 있는 조그마한 야생차밭이 아름답다.
차로 유명한 다솔사
주지스님은 출타 중이시라,
스님 한분과 차를 마신다.
시골 할머니 한분이 나무를 가져다가 아궁이를 지피고 있다. 남루하기 짝이었는 옷차림
뭐라 물어봐도 귀가 어두우신지 대답이 없고, 혼잣말을 중얼거리신다.
내년 봄에 차작업할 때 한번 꼭 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다솔사차부터 맛을 봐야지
나의 조상님들이 500년 넘게 살아온 땅 곤양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젠 아무도 곤양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서정리 사랑골 988번지를 둘러보는 마음 한구석이 무척 쓸쓸하다.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 모두 제대로 수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이제는 곤양에 가까운 친척이 살지 않는다.
내가 마시는 차한잔과 내생각과 정서속에
효당스님과 할아버지, 평생 바다와 함께 하셨던 아버지
그분들이 있음을 느낀다.
사진 1: 삼천포대교에서 통영쪽을 바라보며,
사랑도를 지나면 통영 앞바다이다. 왼쪽 위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통영의 사랑도 인지? 헷
갈린다.
사진 2: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보인다. 창선도와 삼천포 사이가 좁아 물결이 거세다. 이곳의 물결은 진도
앞의 울돌목 다음으로 세다고 한다. 위에서 물결을 내려다보니 무섭다기 보다 고맙다.
이 물결 덕분에 왜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고, 이 물결덕에 육질이 좋은 질좋은 물고기가 많이 잡
혀서 어민들을 먹여 살린다.
사진 3: 사천만 쪽을 바라보며,멀리 왼쪽끝을 돌아나가면 하동군 진교면을 지나 노량에 이르게 된다.
멸치잡이 죽방이 보인다. 이길을 따라 노량대첩시 일본군들이 노량으로 진격했다.
사진을 찍은 삼천포와 창선도 사이의 좁은 바다길을 옛날에는 적량이라 불렀다.
첫댓글 효당스님이 즐겨드셨던 차는 죽로차가 아니라 반야로 般若露입니다. 정정합니다.반야는 고대 인도어 프란냐의 중국어 음역으로서 지혜를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