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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자수당의 정사
잡풀마저 누릇누릇하게 뜬 고추밭은 김을 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름도 먹인 적이 없었던지 자갈이 더 많은 박토였다. 살찐 땅에 비해 가뭄살이 쉬이 들고 불을 놓으면 확 타버릴 것같이 보인다. 그런 속에 가냘픈 열매가 매달려 있다. 빨갛게 익어서, 구기자 열매만큼 조그마한 것이 잡풀 사이에서 아른거린다. 열여섯쯤 됐을까 어린댁네와 서른을 넘어서 중간으로 접어든 부인이 베수건을 내려쓰고 남의 눈을 피하듯 고추를 따고 있었다. 김진사댁의 두 청상, 시어머니와 며느리다. 고추를 따는 손이 어설프고 수건 밑의 얼굴이 해쓱하며 창백해다. 밭둑길을 지나가던 평산이 여인들을 보자 멈추며
"산 사람은 먹어야지요."
한마디 하고 다시 걷는다. 비꼬는 것도 아니며 동정하는 투도 아니다. 두 여인은 더욱더 피하는 기색을 보이며 몸을 움츠린다. 산자락에 이어진 콩밭에서 꿩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어머니는 눈에 티라도 든 것처럼 옷고름으로 눈을 닦는다. 지난해 아들을 열병에 잃고 과부가 된 철부지 며느리를 데리고 고추밭에 나온 김진사댁 부인은 선비집의 가난을 으레 그러려니 살아왔었고 엄격한 법도는 오랜 습관으로 거의 생리가 되다시피, 외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는 것은 더없이 수치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못 본척 지나가버릴 일이지, 평산이 제딴에는 '다 세상 잘못 만난 탓이지요. 뼈대 있는 집안의 마님과 아씨과 흙을 만지지 않고 못 살아가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제 마누라의 노동은 당연한 일로 치부하면서 이들 고부간의 밭일을 딱하게 여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김진사댁 부인은 수모를 당하였다는 설움도 설움이려니와 부끄러움이 더하였다. 평산의 지나가는 말은 빈정거림으로 들이었다. 남편을 따라 죽지 못나 여자, 후사를 위해 살아남았노라고. 그러나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이유인 아들은 죽었다. 아들은 따라 죽지 못한 어미, 가문이 끊기고 살아 있을 아무런 구실이 없건만 박복한 생을 잇고자 밭에 나온 자기 모습을 평산은 조롱했던 것같이 느껴졌던 것이다.'산 사람은 먹어야지요.' 듣기에 따라서 그렇게 들을 수도 있었다.
"아가, 그만 들어가자. 고추는 내일 따기로 하고."
영문 모르는 며느리는 앞서가는 시어머니의 뒤를 따른다. 규모는 최참판댁에 비할 것이 못 되지만 격식은 갖춘 기와집, 그러나 지금은 퇴락하여 돌담이 무너진 솟을 대문으로 두 여인은 들어간다.
"왜 모두들 그리 단명한지 모르겠다."
논둑 옆에, 장구벌레가 노는 도랑을 따라가며 평산은 혼자 중얼거린다. 그의 첫아들도 죽지 않고 자랐더라면 벌써 며느리를 보았을지 모른다. 농촌에서는 누구 할것 없이 아이들을 많이 낳았고 또 많이 잃었다. 바위 틈새에 자라난 여위 소나무에 보다 많은 솔방울이 매달리는 것처럼 그렇게들 많이 낳은 자식들 중에 한두 명이라도 남아 절손이되지 않는다면 다행으로 생각하는 농민들이었다. 마마에 죽고 홍역에 죽고 열병에 죽고, 거적에 말아 산에 갖다 버리면 잊어야 하고 또 잊어진다. 칠성이네 삽짝 앞에까지 간 평산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 모두들 그리 단명한지 모르겠다."
아까 한 말을 다시 중얼거려본다. 울타리 너머 우묵한 초가지붕, 푸르스름한 박이 무겁게 기대인 지붕을 평산을 막연한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흥부와 놀부란 놈이..."
하다가 발끝으로 눈을 내린다. 미투리 한 귀퉁이 터져서 버선발이 비어져나와 있었다.
"제에기럴! 칠성이!"
고함치듯 부르며 여느 때와는 달리 마당으로 성큼 들어선다.
"야!"
헛간 앞에 퍼질러앉아 연장을 고치고 있던 칠성이 벌떡 일어났다. 아는듯 모르는 듯 살며시 불러내던 평소의 습관과 다르기 때문에 놀란 눈치다.
"바쁜가?"
"머 바쁠 거는 없지마는."
힐끗 쳐다본다. 새까맣게 탄 얼굴이 번들거렸다.
"음 그래?"
집안을 살피듯 평산은 시선을 옮긴다.
"여핀네가 고뿔이 들어서 방에 처자빠져 있구마요."
행여 조심해야 할 말을 비칠까봐 칠성이는 얼른 알리듯 말했다.
"흥, 개만 못하군. 하기야 여름은 다 갔다마는. "
엄지손각락으로 코끝을 튀긴다.
"그러기 말입니다. 할일을 태산겉이 두고 대낮부터 터자빠져 있인께. 찬하절색 양귀비도 아니겄고."
"어때? 금년 자네 농사는."
"그저 그렇지요."
엉거주춤 말한다.
"곡식 말이나 빌릴까 싶어서."
"야?"
단박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돈다.
"자네 나하고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그거야 어떻게 안 되겠는가?"
"그, 그거는...고, 곡식이야 아직 들판에 누어 있인께요."
허둥지둥 말하는데 평산은 칠성이를 향해 한 눈을 찡긋 감아 보이고 방 쪽으로 고개짓을 한다.
"...? "
"곡식이 들판에 누워 있는 걸 누가 모르나?"
미미하게 웃는다. '네 이놈! 배은망덕한 놈이로고. 까짓 곡식 한 말 못 내놓을 거는 뭐있누. 그간에 들인 밑천도 밑천이려니와 함께 일을 꾸미기로 작정한 네놈이 곡식 한 말을 아껴? 내 비록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느니 네깟놈한테 곡식 빌러 왔을까.' 미미한 웃음은 큰 비웃음으로 변했다. 칠성이는 갈팡질팡하다가 풀이 죽는다.
"곡식이야 머...넉넉할 리가 있겄습니까마는 어려우시믄."
평산은 바싹 다가섰다.
"나중에 눈치채지 않게 주막으로 나오게나."
나직이 소곤거렸다. 무안하여 대답을 못하고 칠성이 씩 웃는다.
"어렵다면 그만두게. 나 그럴 줄은 알았다만 세상 인심 볼 만하군. "
큰소리로 내뱉고
"에헴! 흠."
평산은 기침을 하며 나간다. 나가자 방문을 열고 임이네가 내다본다.
"그 양반 와 오는 기요!"
"내가 아나, 와 오는가?"
칠성이는 손보던 연장을 들었다 놨다 하며 마음이 잡히지 않는 눈치다.
"내가 안 들은 줄 알고 그러요?"
"멋을?"
"흥, 그 양반 신세도 영 망조구마. 없는 내 집구석에 와서 양식 빌리달라꼬요?"
"안 빌려주믄 고만 아니가."
"그러기 내가 머라 캅디까. 따라댕기지 마라 안 캅디까. 흥, 언제부텀 그 양반 처자 굶는 거를 알았던고? 말이 좋아 불로초다. 보나마나 뻔하지. 노름 밑천이 떨어져서 그럴 기요. 돈은 없일 성싶고 그런께 곡식이나 알가낼라꼬. 우리는 흙파다 묵고 살라 카는가?"
임이네는 흐르는 콧물을 닦는다.
"그러매, 싱거운 사람 다 봤지. 쌀을 말하는가 보리를 말하는가 모르겄다마는 곡식 한 말이 뉘 집 아아 이름이건데?"
"그라믄서 머 때문에 상종하는 거요."
그 말 대답은 없이
"세상 인심이 우떻다고? 나올 데 없는 사람한테 곡식을 빌리주까? 우리는 그라믄 솥 씻어놓고 앉아 있으라고?"
들뜨는 마음을,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가라앉힌다.
"내 참, 기가 맥히서, 그럼서 와, 와 그런 말으 했소. 응? 어려우시믄? 우짜고 안 했소!"
"공것도 많이 얻어묵었는데 아 밑천 안 든 말을 애끼쌀 거 머 있노. 애낄거는 내 곡식이고."
"듣기 싫소. 딱 잘라서 와 말 못하요. 되로 받고 말로 갚을라꼬?"
"제집년이 와 이 지랄을 하노! 보자니까 카니께 간뎅이가 부어서, 시부릴 기력 있거든 나와서 일이나 해! 처자빠져서 조둥이만 까지 말고. 제기 화통이 터져서 나도모르겄다!"
고치던 연장을 내팽개치고 칠성이 삽짝 밖으로 휙 나가 버린다. 신열이나서 얼굴이 벌개진 임이네는 콧물을 줄줄 흘리며 자리에 눕는다. '태산겉이 일을 두고 내가 이리 누워 있이믄 안 될 긴데. 빌어묵을, 정신을 채릴 수가 있이야제. 약이라도 한 첩 지어다주었이믄 묵고 일어날 긴데, 어디 평생 아프다고 누워 있으란 말 한마디 하며 걱정 한분 하까. 도치기 겉은 인사, 나도 이녁한테 손톱만치 정도 없지마는... 참말이지 서글프고 가스럽다.' 온종일 어미가 누워 있어 양껏 젖을 먹은 아이는 저만큼 나동그라져 자고 있다.' 내 팔자 지박해서 듯 맞는 사람 못 만내고... 내가 생가시나였다믄 저런 인사한테 시집왔이까. 이웃에 소문만 안 났어도... 친정이라고 볕 바르게 가보지도 못하고 죽으나사나 일구덕에 매이서이야 싶은 일 없이 내 청춘이 가는고나.' 누워서 한탄을 하는데
"옴마! 떡 가지고 왔다! 영만이 집에서 떡 가지고 왔다!"
임이가 소리를 질렀다.
"떡을 가지고 와?"
임이네는 밀려내려간 허릿말을 추켜올리며 마루에 나온다.
"옴마, 떡! 떡!"
하며 세 살박이 사내아이도 넘어질 듯 임이 옷자락을 잡으며 쫓아온다. 선이는 함지를 마루에 내려놓고 빙긋이 웃는다.
"무신 떡고?"
"할매 생일이라꼬 조맨 했소."
"우리는 갈라묵는 것도 없는데, 아이구 골이야."
임이네는 마루선반에서 대바구니를 내린다.
"어디 아픕니까."
"개주무린가배. 예사로 여깄더마는 영 갱신을 못하겄다."
떡을 바구니에 옮겨 선반에 올려놓자 마루 끝에 바싹 붙어서서 떡을 노려보며 떨어진 팥고물을 주워먹던 사내아이가
"히힝!"
하고 칭얼거린다. 임이도 손가락을 입에 물고
"옴마아!"
어미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부지 어디 갔노?"
"몰라아... 아까 나가든데."
"아부지 어디 갔노?"
"히잉 히힝"
사내아이는 떡바구니만 올려다본다.
"오매가 욕봤구나. 아이구 머리야. 골을 패는 거 겉구나. 오매보고 잘 묵겄다 캐라."
함지를 받아 인 선이는
"머를요. 그라믄 조리 잘 하이소."
말이 많지는 않으나 인사성 바르게 하고 선이는 삽짝을 나갔다. 풀발이 선 검정 무명 치마의 허릿말이 가느스름했다. 해거름에 다소 술기 든 얼굴로 칠성이 돌아왔다.
"어디 갔다 이지 오요."
임이네 눈꼬리는 까끄름했다.
"가악중에 참견은 무신 참견고, 제집년 말이 많으믄 그 집구석은 볼장 다보는 기다."
했으나 기분은 과히 나쁘지 않았고 임이네 비위라도 맞추어주고 싶은 기색이다.
"아이구 골치야. 골을 패는 거 겉네. 구신이 들었나 와 이렇노. 어서 저녁이나 드소. 기어감서 밥은 했인께."
임이네는 치맛자락을 걷어 코를 푼다. 칠성이는 얼굴을 씻는다.
"저녁에 무신 세수요?"
"땀이 나서 씻는다."
세수를 끝낸 칠성이는 머리를 감은 수건을 풀어 얼굴을 닦고 손도 깨끗이 닦는다.
"옴아, 떡!"
하고 임이는 밥상을 들고 오는 제 어미에게 턱을 주억거리며 말했다.
"제집년이 밤세수하믄 그거는 알아볼 조지마는."
칠성이 중얼거렸다. 제 변명이겠으나 임이네는 힐끔 칠성이 눈치를 살핀다. 강청댁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며 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혹 그 말이 구에 들어가지않았나 싶었던 것이다. '무신 징거가 있노. 징거라도 있었이믄 차라리 좋겄다.'
"옴마아. 떡!"
임이가 또 말했다.
"떡 떡 하는데 무신 떡고?"
"아아, 아까 두만네 집에서 두만할매 생신이라꼬 떡을 가지왔더마요."
"인심 좋구나. 하로 묵고안 살라 카나? 아즉 나락은 논에 있는데 떡이라니."
"인심 쓰는 기지요. 땅 가질 신세가 됐는데 떡만 하겄소."
"하기는 주는 거라믄 마다할 내가 아닌께."
밥상을 남편 앞에 갖다놓고
"떡 먼지 잡수실라요?"
"밥은 밤낮 묵는 밥이고 떡부터 묵어보까."
아이들이 엉덩이를 들썩인다.
"새끼들이 떡 돌라고 우찌 지랄을 하든지."
했으나 칠성이는 먼저 주지 그랬느냐는 말은 하지 않는다. 말없이 돼지처럼 먹는다. 아이들은 급하게 먹다가 목이 메어 숨을 모아 쉬고 눈물까지 글썽였으나 먹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임이네 역시 콧물을 닦아가며 부지런히 씹어 삼킨다. 네 식구 먹을 만큼 보내온 떡을 제가끔 흉년 만난 들쥐처럼, 굶주린 이리 가족처럼 으르렁대기라도 할 듯이, 조금이라도 제입에만 많이 넣으려고 경쟁이다.
"아따! 아프느니 죽겄느니 하더마는 잘도 처묵는다. 뱃속에 섬을 찼나?"
칠성이 눈을 부라린다.
"아프다 캐서 약 사주었십디까. 안 묵고 우짤 기요."
"그라믄 아프다 소리나 말지. 어구로 처묵는다."
"죽을 병을 실었다믄... 오장이 성한데 굶겄소! 아프니 어디 약 한첩을 지어주까."
하고 눈을 흘긴다.
"약 살 돈이 어디 있노."
"초상 치는 데는 돈 안 드까."
한동안 말이 귾어지고 네 식구 먹는 소리뿐이다.
"떡이 있이믄 저녁밥은 그만둘 일이지. 간뎅이가 커서 살림 망해 묵기 십상이다."
칠성이 또 눈을 부릅떴다.
"떡은 떡이고 밥은 밥이지."
"뉘 앞에서 건중건중 악다구니고! 아가리 찢을라!"
"저녁 안 해놨이믄 또 처자빠져서 저녁 굶진다고 얄리베락할 기믄서."
"살림을 이리 헤피 살아서는 집구석 망한다. 남으 집의 제집들은 하늘 아래 제 가장밖에 없는 줄 아는데 네년은 대체 서방을 멀로아노, 응? 낯신 음식이 있이믄 독에 넣어두었다가 내일 다시 줄 생각은 않고 입에 맞는다고 배가 터지게 앉은 자리에서 처묵어 없앨라 카이. 흥, 엽전에 씨 실겄소. 그만두소! 안 묵을긴께."
공연한 트집을 부리더니 칠성이는 떡 먹은 뒤 밥 한 그릇도 뚝딱 먹어치웠다.
"어, 배부르다."
배를 슬슬 만지며 상 앞에서 나앉는다.
"어, 배부르다. 숭늉은 안 줄 것까."
임이네는 상을 들고 나가더니 숭늉 한 그릇을 칠성이 앞에 떠다 놓고 한기가 든다면서 이불을 쓰고 누워 버린다. '빌어묵을 제집년, 어구로 처묵으믄서, 아프기는, 내일 아침에도 안일어났다만 봐라, 방 구들을 파불릴 기니.' 담배 한 대를 붙여물고 등잔에 불을 켜놓고 많이 먹어서 색색거리는 아이들을 한번 노려보고 나서 그는 생각에 잠긴다.
'그 양반 여니 때겉이 불러내믄 될 긴데 와 곡식 빌리달라는 말은 했이꼬? 내 마음 떠보노라 그랬나? 여핀네한테 속임수 쓰노라고 그런 거맨치로 그러기는 하더라마는 머 그래쌀 것도 없일긴데...' 사방이 어두워진다. 짙게 어두워졌다. 방문에서 비쳐나간 밝음을 보고 송충 나방들이 문살에 몸을 부딪쳐오곤 한다. 아이들은 어느 새 쓰러져 잠이 들고 임이네 코고는 소리도 간혹 들려왔다.'만약에 제집애나 나믄 다 허사 아니가. 그래도 그 양반 그 말 듣고 아무 대꾸 안 하는데 무신 꿍꿍이속인지 내사 모르겄다. 기왕에 함께 하는 일, 속 씨원하게 털어주믄 좋을 긴데. 흥, 내가 예사 능구렝이라꼬? 일만 성사되고 보믄 씨 임자가 제일이지. 아암 제일이고말고. 씨 도둑질은 못하는 법이니께.' 칠성이는 등잔불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는다. 기름을 먹인 듯 검게 탄 얼굴에 윤이 흐른다. 숲에서 밤꾀꼬리의 울음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밤은 깊어진 모양이었다.
"어, 갈증난다."
칠성이는 방문을 여고 밖으로 나온다. 한낮의 열기가 어느새 식어 버리고 썰렁한 야기가 가슴에 와닿는다. 부엌 물독에서 냉수 한 그릇을 떠내어 벌떡벌떡 들이킨 칠성이는 뜰 안을 서성거리는 척하다가 방안에서 아무 기척이 없자 삽짝을 빠져나간다. 집 울타리를 지나고 김진사댁 고추밭을 지나고 최참판댁과 반대 방향의 산기슭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칠성이의 걸음은 빨라진다. 뒤켠에서 당산을 거슬러올라 다시 내리막길로 들어서서 삼신당에 이르는 돌다리까지 왔을 때 그곳에 평산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삼신당 쪽을 가리키며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종마같이 정한한 칠성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평산은 그들, 귀녀와의 정사 아니 동사를 위해 밤이슬을 맞으며 소쩍새와 밤꾀꼬리의 울음을 들으며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삼신당 앞에 갔을때 귀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서로 말없이 어둠에 가려진 서로를 지켜본다. 오는 길에 평산이를 만났느냐고 귀녀 쪽에서 먼저 물었다. 칠성이는 만났노라고 대꾸한다.
"다짐을 두어야겄소."
"멋을?"
"쥐도 새도 모르게 그럴 수 있소?"
"그럴 수 있지러. 안 그러믄 내가 여기 왜 왔일꼬?"
"그러믄 됐소."
"귀녀나 조심해야 될 기구마. 여자는 입이 헤프니께."
"흐음... 거기 일이요? 내 일이지."
씹어뱉는다.
"누가 올라. 저기 어서 들어가자."
칠성이는 서둔다.
"오기는 누가 울꼬? 이 밤에."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매구겉은 년들 끌고 와서."
"그러니 그 양반을 파수보게 했지."
귀녀는 타박을 준다. 말씨도 반말 비슷하다. '이기이? 풀 세구나. 누가 제년 몸둥이 탐나서 온 줄 아나?' 귀녀가 먼저 삼신당으로 들어갔다. 귀녀는 부싯돌을 비벼, 들고 온 초에 불을 붙였다. 칠성이 질겁을 한다.
"부, 불은!"
불을 끄려는 듯 팔을 들었으나 귀녀는 말없이 몸으로 막아선다. 삼신당 안에 모셔놓은 동자불 앞에 초를 세운다. 귀녀 머리칼은 물에 젖어 있었다. 개울에서 목욕을 했던 것이다. 여느 때같이 소리내지 않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귀녀는 수없이, 수없이 머리를 조아린다. 칠성이는 구석지에 꼭 처박혀 감히 동자불을 쳐다보지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 눈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눈동자에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삼천 년 후 자기 뒤에 올 미륵불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무후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미래에 올 미륵불은 전지전능의 부처로서 특히 자수신으로 영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신앙하였다. 따라서 삼신당의 신체는 동자미륵. 신심이 없으면서 칠성이는 부처가 두려웠다. 촛불을 받으며 무수히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의 옆모습은 처절하고 아름다웠다. 칠성이는 그 얼굴이 두려웠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달려들어 초를 넘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옴짝할 수 없다. 이윽고 귀녀는 나긋한 손을 들어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잎같이 촛불을 껐다. 칠성이 입에서 깊고 긴 숨결이 토해진다. 그는 씨름판에 나간 장사같이 귀녀의 주변을 맴돌 듯 몸을 움직이었다. 귀녀는, 그렇다, 귀녀는 신성한 처녀성을 한 사나이에게 바치기 위하여 목욕재계를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수당 미륵불에게 뜨거운 소망을 기원하기 위하여. 음란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 거짓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 살인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 오로지 소망을 들어달라는 다짐만이 간절했을 뿐이다. 신은 이 여자에게는 악도 선도 아니었다. 오로지 소망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 영험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일이었을 뿐이다. 씨름판의 장사같이 맴을 돌던 칠성이는 재빨리 허리끈을 풀고 귀녀에게 덤벼들었다. 여자는 아무 저항 없이,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던 행위의 연장인 것같이 남자를 받아들였다. 최초의 고통을 여자는 개울물을 끼얹었을 때 느꼈던 짜릿하고 오소소 떨리었던 그 고통의 연속인 양 받아들였다. 사나이의 신음 소리와 무게를 먼 꿈속의 일인 양 귀녀는 동자불을 눈앞에 그리며 기원을 입속에서 뇌고 있었다. 사나이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 귀녀는 비로소 사나이의 체취를 콧가에 느끼었다. 역한 냄새였다. 그리고 제 몸이 사나이의 땀으로 함빡 젖어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칠성이는 허둥지둥 옷을 주워입고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