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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통신 <27>
시어머니는 어쩔 수 없어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32>
트루스 할머니와 제이콥 할아버지가 싱글벙글하며 오셨다. 아직 예배시간까지는 몇 분 남아
있어서 교회 마당에 서 있는데. 며느리가 드디어 딸을 낳았다는 것이다. 위로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뒤이어 에릭 할아버지와 프리다 할머니가 오셨다. 나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손녀를 보셨다면서요 라고 덧붙이면서. 그런데 에릭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다.
트루스 할머니와 프리다 할머니는 사돈인데, 두 노부부가 친구처럼 지낸다. 함께 교회 오고 성가대도 같이 하고 음악회도 같이 가는 등 온갖 문화행사를 같이 하신다. 평소에 사돈의 서먹함이란 전혀 없는 사이다.
이 일처럼 전혀 반대되는 반응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에릭 할아버지는 손녀 본 것이 정말 기쁘지 않으신 것 같아 축하한다고 내가 말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친정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났다. 친 손주가 징징거리면 며느리가 왜 아이를 좀 더 잘 보아주지 못하는가 싶고, 외손주가 징징거리면 저 녀석이 왜 엄마를 저렇게 괴롭히나 싶어 외손주가 이쁘게 보이지 않는다고. 어쩌면 이렇게 며느리 생각하는 마음하고 딸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지, 여고 동창회에 갔을 때 친구분들이랑 이야기했다고 하셨다. 딸이 또 아이를 낳은 것이 딸에게는 고생이다 싶은 마음이 한국 부모이나 마찬가지로 에릭 할아버지에게 있나 보다 생각했다.
얼마 뒤 할아버지 집에 갈 일이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벽마다 사진들이 걸려있는데 단연 딸의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고등학교 때 전교생이 찍은 사진을 확대한 것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라고 하시면서 고등학교 때 얼마나 공부를 잘 했는지, 또 바이올린도 잘 켜서 고등학생 경연대회에 나가 일등 했다고 자랑하시면서 그 상장 붙여놓은 것도 손으로 가리키셨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시면서 그런 게 다 소용없다고, 너도 딸을 키우니까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의대에 들어가서 뉴질랜드에서 유학 온 남자랑 연애하더니 여기까지 와서 의사노릇도 몇 년 못하고는 아이 키운다고 집에 들어앉은 것도 한심한데 이제 아이를 넷이나 낳았으니 언제 의사 노릇을 다시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자기가 다 좋아서 아이를 넷 낳은 건데 우리가 뭐라고 할 것 뭐 있냐고 할아버지에게 말하는데도, 할아버지는 딸 생각만 하시면 마음이 영 언짢으셨다. 아이가 셋일 때는 그래도 집에서라도 의사협회 회보 만드는 일을 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내 느낌은 의사 일을 그만 둔 것보다는 거의 연년생으로 낳은 네 아이들 뒷바라지에 치일 딸이 가여워 그렇게 불평하시는 것 같았다.
딸 하나만 있는 나와 그래서 에릭 할아버지와 프리다 할머니는 무척 가까웠고, 30년이 훨씬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이 잘 통했다. 딸이 넷째 아이를 낳고 일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영국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우겨서. 그 다음 해에 딸과 손자 손녀 보고 싶어 다시 잠깐 들리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 일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늙으셨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사돈인 트루스 할머니가 전해 주는 말로는 프리다 할머니가 알쯔하이머 병(치매)에 걸리셔서 자기가 전화를 걸어도 누구인지 모른다고 안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여기 계실 때도 잘 잊어버리시고 한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경향은 있었지만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 다음 해 그러니까 작년에 트루스 할머니가 들려주는 소식은 지금도 간혹 생각이 나며 가슴이 무거워진다. 프리다 할머니의 외딸인 트루스 할머니의 며느리, 새러가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한 채 3개월 째 입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루스 할머니의 말, 새러가 안 되었어, 여기에 아무 가족도 없고, 자기 어머니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요양원에 있고 아버지는 어머니 때문에 딸이 아파 누워 있어도 이곳에 와 보지도 못하고. 그리고 나서 덧붙이는 말, 내 아들이 참 안되었어. 마누라는 입원해 있고 아이를 넷이나 돌보아야 하고. 직장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얼마 뒤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트루스 할머니에게 새러가 아직도 입원해 있는지, 병명은 알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 끝에 다시 덧붙이셨다. 내 아들 불쌍해 라고, 이번에는 새러 불쌍하다는 말씀은 없이. 시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며느리보다 아들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동서양 차이가 없다. 딸 가진 부모가 억울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2003.09.10>
우리는 한편이다 (1)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33>
처음에는 당연히 한국인 이민자들끼리 모이는 교회를 찾아갔다. 한 두 달 다니다 보니 역시 원래 내가 한국서 다니던 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교회를 옮기려면 곧장 다른 한국 교회를 나갈 것이 아니라 키위 교회를 좀 다니다가 옮겨가야겠다고 결정을 했다. 교회를 옮기면 워낙 말들이 많다고 해서. 그래서 전화번호부를 뒤져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장로교회를 찾았다.
언덕 위에 있는 자그마한 교회였다, 벽을 하얗게 칠한.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도 뗑그렁거리면서 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종소리 녹음한 것을 틀어놓는 것이었지만. 그런 외적인 매력보다는 예배를 드리면서 사람은 다르고 말은 달라도 또 찬송가 곡조는 달라도 우리가 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구나 하는 감격스러움이 있었다. 또 남편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보냈구나 라고 느꼈다고 나중에 고백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잠시 거쳐 가려고 했었는데, 그냥 우리 교회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서양교회는 노인들만 모여 예배드린다고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로 은퇴한 지 한참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다. 30대 후반인 우리가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꼬박 예배드리는 것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신통하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아도 친절한 분들이 더욱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과 말이 술술 잘 통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거의 모든 교인들이 처음에는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느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뉴질랜드에서 사는 것이 어떠냐, 좋으냐, 왜 이민 오게 되었느냐, 등등. 그리고는 너희는 참 용감하다. 우리는 남의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을 꿈도 꿀 수 없는데… 라는 말이 보통 붙여지는 말이었다. 물론 키위라 할지라도 거의 모두 이민 온 사람들인데, 우리들이 언어가 다른 나라에 온 것을 감탄(?) 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신상에 대한 보고가 끝나고 나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진다. 몇 년 살다 보니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또 이 나라의 뉴스에 대해서도 나눌 이야기가 있다 보니 대화의 폭이 차츰 넓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첫 만남에서 몇 마디 나누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대화의 끝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헬로우나 굿 모닝 등 의례적인 인사에다 날씨에 대한 언급을 약간 보태기도 하고 아닐 때도 있고, 사실 나도 할 이야기가 없었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면 내용도 모르겠고, 가끔 알아듣는다 해도 내가 끼어들만하다 싶어 머리 속으로 영작하는 동안 이미 그 이야기가 지나가버리면 김이 빠져 그나마도 노력을 하는 게 귀찮아졌다. 영어는 신통하게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냥 소음으로 지나가 버리고, 나는 혼자서 딴 생각을 즐기면 된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있든 말든 자기들끼리 신나게 이야기를 하면 소외감을 느끼고, 나는 역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는데.
연합성가대가 모여서 연습을 하기 시작할 거라고, 함께 가겠느냐고 트루스 할머니가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알토 음을 잘 못 잡는 다른 할머니들을 이끌어온 강력한 알토였다. 나도 어떤 때는 할머니에게 의존할 정도로 음감이 정확한데다 또 자신만만한 분이었다. 우리 교회는 상시 성가대는 없이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등 절기마다 모여 연습하고 성가를 불렀지만, 이 연합성가 발표회를 위해서는 친절한 반주 할머니의 배려로 할머니 집에 모여 파트 별로 일단 곡조를 익혔다. 그 다음 지역별로 큰 교회에 모여 중간 연습을 하고 마지막으로 시내에 있는 한 성공회 성당 (꽤 오래된 고딕 건물로 유명하다)에 모여 음악회를 가지는 큰 행사였다.
지금까지 알토 중에서는 트루스 할머니만 연합성가대에 참석하셨다고 한다. 처음 지역별 연습하는 날 에릭 할아버지 차에 동승하여 가면서 이제는 내가 함께 가서 좋다고 하는 트루스의 할머니 말씀을 그냥 나를 배려하여 말하는 것이려니 했다. 교회에 가득 들어선 사람들 앞에서 지역 책임자가 파트별로 나누어 서라고 했다. 그 때부터 트루스 할머니는 내가 당신 곁에서 떨어질까봐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발표회 장소에서 자리를 정할 때는 할머니와 내가 옆에 나란히 앉지 못하고 앞뒤로 갈라서게 될까봐 신경을 쓰셨다. 이것은 내가 아시아인이어서 어색해 하고 소외감 느낄까봐 배려하는 이상이었다. 오히려 할머니가 낯선 사람들 틈에서 알고 있는 단 한사람을 놓칠까봐 염려하시는 느낌이었다.
가까이에 앉아있는 다른 교회에서 온 알토가 음정이 틀리면 내 귀에다 대고 "저 사람들은 연습도 안 하고 왔나봐" 라고 소근 대며 흉도 보시고. 다른 키위들과 인사 나누려고 애쓰지도 않으시고 나하고만 붙어있는 것에 신경을 쓰셨다. 그리고 보니 나도 연습 도중 쉬는 시간에 다른 파트에 가 있는 우리 교회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는 게 무척 반가웠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교회마다 같이 온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평소에 교회에서 일상적인 인사만 하고 나면 별 할 이야기가 없던 것과는 완전히 딴 판으로 내 소속이 분명했다. 내가 내 편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런 기분이 드니까, 또 성가연습이라는 공통된 화제가 있으니까, 나도 이야기가 술술 잘 나오고.
거기서 나는 한국에서 온 이민자로 다른 키위들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사람으로 우리 교회 아닌 사람들과 구별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느 모임에 가든지 원래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는다. 내가 그 그룹 안에 들어갈 건지, 그냥 건성으로 밖에 있다 올 건지만 정하면 되니까. <2003.09.15>
우리는 한편이다 (2)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34>
어디나 그런 애들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 애가 마주치면 괴로워하는 애가 포니 클럽에 있었다. 그 아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처음 느낌 감정이 인종차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일 정도로. 처음 말을 사서 방학이면 하루 종일 포니 클럽에 가서 살 때였다.
짧으면 두세 시간에서 반나절, 길게는 하루 종일 포니 클럽에 모여서 말을 타며 노는데, 우리 애는 몇 년을 기다려 산 말이라 한 달 여를 거의 매일 하루 종일 클럽에서 살았다.
그 때는 말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또 내가 걱정할까봐 말을 하지 않았다는데, 나중에 하는 말이 리사라고 하는 두 살이나 많은 애가 우리 애를 내내 괴롭혔다고 한다. 다른 애들이 없어서 심심할 때는 우리 아이하고 말을 같이 타자고 하다가도, 다른 아이들이 오면 따돌리고 우리 애가 먼저 다른 아이와 말을 타고 있으면 끼어들어 훼방하는 등, 심지어는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 클럽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데다가 제일 신참인 우리 아이는 나이가 위인 자기보다 고참인 아이가 그러니까 고스란히 당하기만 했다. 나한테도 말을 안 하고.
그 아이는 고등학생이고 우리 아이는 중학생이었다. 한 해가 지나가고 우리 아이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고등학생 되는 것은 한국이나 여기나 다 겁나는 일이다. 아이 친구들이 처음 학교 가는 날, 학교 앞 맥도널드에서 만나서 다 같이 가자고 약속할 정도로. 숫자라도 많아야 안심이 될 것처럼 그렇게 모였다. 그런데다 교실을 대학생처럼 이리 저리 과목 따라 옮겨 다녀야 한다는 것에 겁들을 잔뜩 먹었다. 학교가 큰데 제 시간에 못 찾아가면 어쩌나 하고. 학교에서도 신입생들은 일주일 봐준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지각을 해도. 처음에는 다 그렇게 어릿어릿 하니까.
우리 아이는 클럽에서 리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학교에서도 마주칠까봐 걱정을 했다. 여기서도 상급생이 하급생을 우습게보니까 리사가 학교에서도 우리 아이를 괴롭게 만들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에 나도 염려되었다, 그런데.
드디어 어느 날 리사가 우리 아이를 학교에서 보았단다. 멀리서 지나치다가 우리 아이를 발견한 리사가 뜻밖에도 반가와 하며 손을 흔들고 다가와서는 아주 친절하게 말하면서 학교에서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하더란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잘 되었네, 너를 잘 봐줄 선배가 생겨서 라고 말했더니. 우리 아이 하는 말, 아니 언제 변덕부릴지 볼라, 친절하게 구는 것도 무섭고, 그냥 되도록이면 안 마주치는 게 좋아. 그렇게 아이는 말했지만 나는 트루스 할머니와 함께 연합성가대 하면서 느꼈던 우리는 한편이다. 라는 것이 리사의 태도에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클럽에서는 텃세를 부릴지라도 나와서 더 큰 집단 안에서는 같은 편이라는 느낌 말이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낯선 집단에 처음 속하게 되었을 때의 소외감은 우리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다는 것을 키위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영국에서 이민 온, 나의 카운슬링 코스의 선생님 이야기.
아이가 속한 운동클럽 부모 모임에 갔는데,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하더란다. 기존의 멤버들 엄마들끼리 이야기하는 속에 혼자 있었을 때의 그 외로움과 소외감을 이야기하면서 친구의 후원과 지지의 중요성을 설명해주는데, 나는 공부 내용보다는 그 분이 겪은 소외감이 반가웠다. 영어가 내 말이 아니어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기쁘기까지 했다. 내가 서양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끼어 사는 동양인이라는 것을 너무 예민하게 의식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2003.09.16>
세금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35>
봉급을 받는 사람의 경우 작년부터 세금신고를 직접 하지 않고 고용주가 하게 되었다.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세금신고 마감일이 4월 7일 1학기 중간 한참 공부할 때라 이곳에 오자마자 대학을 다닌 남편 대신 세금신고는 꼬박 나의 몫이었다. 세금 신고서와 함께 안내서가 동봉되어 몇 달 전에 날아온다. 그 안내서를 따라 더하기 빼기만 할 줄 알면 세금신고를 혼자서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내가 첫 해에는 남편 것의 계산이 틀렸고, 두 번 째 해는 내 것을 잘못 계산하여 신고했다. 나중에 보니까.
그러나 세무서에서는 신통하게도 바로 잡아 많이 낸 세금은 돌려주고 덜 낸 것은 받아내었다. 그 안내서에 재미있는 말이 있다. 세금공제 받는 부분에 있는 말인데, 탈세는 불법이지만 절세는 합법적이니까 절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적으라는 것이다. 자선단체나 공공기관에 기부한 것, 직업을 가지느라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경우 아이를 맡기는 데 들어간 비용, 그리고 세금신고를 나처럼 직접 하지 않고 세무사가 대신 할 경우 그 비용 등을 수입에서 공제하거나 아니면 세금에서 공제할 수 있었다.
잠시 오클랜드 대학의 파트타임 학생이었던 적이 있다, 6,7년 전에. 어느 날 학교 건물 여기저기에 대자보가 붙었다. 플레쳐 라는 회사 그룹이 있는데 그 회사에서 그 전 해에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회사는 그 때까지 뉴질랜드에 아직 몇 년 살지 않은 나까지도 이름을 알고 있는 회사였다. 뉴스 시간에 매일 주가의 등락을 보도할 때 나오는 회사 이름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렇게 큰 회사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수 있나 놀라는 나에게 남편의 설명은 순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절세를 하기 위하여 부자일수록 회계사와 변호사를 동원해서까지 절세를 한다. 회계사와 변호사에게 지불하는 비용보다 세금 줄이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변호사 중에 세무관계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받는 시간 당 비용이 제일 높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대자보 몇 장 붙어있는 일로 끝나다니, 데모 많은 세상에서, 조그마한 비리도 못 봐주는 세상에서 살다온 나에게는 큰 회사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대자보 몇 장으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일이 더 놀라왔다.
바람이 세게 불던 날, 창문을 열어둔 것은 내 잘못이었다. 쨍 하는 소리에 놀라 방에 들어가 보니 유리창이 바람에 밀려 닫히면서 유리가 깨져 방에 흩어져 있었다. 깨진 유리창을 놔둔 채 밤을 지낼 수는 없으니 급하게 되었다. 이미 저녁 무렵인데.
서울에서는 웬만한 것은 저녁 늦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다 해결할 수 있다. 아파트단지가 아니더라도 문만 나서면 온갖 가게가 다 있어 필요한 것을 거의 해결할 수 있지만 이 나라에서는 상가가 아니면 동네에 가게가 없다. 그나마 생필품 가게가 아니면 어디에 가야 필요한 가게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전화번호부가 최고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데 있는 곳부터 전화걸기 시작했다. 그 날 당장은 시간이 없어서 못 오겠다고 하는 대답을 몇 군데서 듣고 보니 한심했다. 전화번호부를 계속 들여다보며 24시간 서비스한다고 광고하는 데를 찾다가 재미있는 광고를 보았다. 현금으로 비용을 지불하면 10% 디스카운트해준다는 광고였다.
서양에서는 물건 값을 깎는다는 것이 없는 줄 알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서나 깎아달라고 조르면서 상인들과 실랑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나라에 처음 와서 가전제품을 살 때였다. 먼저 이민 온 친구가 우리를 안내 해주었는데, 현금으로 지불하겠다고 말하면서 디스카운트 하자고 말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말대로 했더니 정말 디스카운트를 해주었다. 현금으로 지불할 테니 디스카운트 하자는 말은 그 이후에 어디서도 통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 채.
이 나라에서도 가격을 깎지 않으면 바가지 쓸지 모른다고까지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도 상인들의 공격적인 태도가 무서워 물건 값을 깎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우리가 이곳에서는 영어 연습 삼아 흥정을 했다.
잔디 깎는 기계가 고장이 나서 동네 수리점에 맡기고 그것을 찾으러 들어간 남편이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왜 그렇게 시간이 걸렸냐고 했더니 비용을 너무 많이 청구해서 비싸다고 깎자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면서 어떤 부품을 갈았는지 일일이 설명을 해주더란다. 그래서 알았다고 다 지불하면서, 그런데 때로는 너희가 아시아인이라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바가지 씌우는 일은 없냐고 물어보았단다. 그랬더니 그 주인 말이 솔직하게 동양인에게는 조금 더 붙여서 가격을 부른다고 했다나. 그 이유는 홍콩 사람들이 이민 오면서 무엇이든지 깎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아예 깎아줄 요량으로 그런다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 말 들은 후에는 공연히 중국사람 때문에 뉴질랜드에도 바가지요금이 생긴 줄 알았다.
살아가면서 점차 알게 된 것은 모든 유형, 무형의 거래에는 그것이 물건이든 서비스든 12.5%의 소비세가 붙는다는 것이었다. 물건을 사고 현금으로 지불하면 깎아주는 이유는 그 물건 판 것은 수표처럼 추적이 되지 않으니 신고 안 해도 되고(?) 그래서 소비세에 해당하는 10% 정도를 감해주어 소비자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될 거다. 남편이 그 수리점에서 현금으로 지불하겠다고 말을 했었는데도 깎아주지 않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 때는 이런 줄 몰랐으니 내가 물어보지 않았었고, 지금은 남편이 기억을 못할테고. 어쨌거나 현금 지불이면 디스카운트해준다고 전화번호부에 버젓이 광고로 낸 그 유리상은 세무서를 아주 무시하고 있다가 혼나지 않았을까 내가 다 걱정이 되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아직도 그렇게 광고를 하나 다시 찾아보니 안 보이는 걸로 보아 탈세를 안 하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세무서에 걸려 사업을 접은 건지 모를 일이다. <2003.09.17>
연재를 마치며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36ㆍ 끝>
연재라고 하면 연재가 나가는 날이 있고 마감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이 글들은 2001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 단숨에 쓰여진 글들이다. 그래서 이 글들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의 의견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연재라는 말이 맞지 않지만, 연달아 실렸다는 의미에서는 연재를 한 셈이다.
아이 친구 중에 시를 잘 쓰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시를 좋아하는 영어 선생님이 그 아이의 시를 수업시간에 분석했단다. 우리도 국어 시간에 배웠듯이, 시인이 이것을 쓴 의미는 무엇이고, 이런 표현은 무엇을 뜻하고 등등. 아이가 나중에 친구에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쓴 건지 물어보았단다. 그 친구의 말은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그냥 쓴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곳에서 경험한 삶들을 그냥 썼다. 나에게 있었던 그대로 덧붙이지 않고.
그러나 쓰는 것과 그것을 남이 읽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아이의 친구 말처럼. 내가 썼지만 그것을 읽고 느끼는 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다. 그것을 이번 연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연재가 시작되는 줄 모르고 있다가 이틀 째 알게 되어, 첫 주에는 나도 신문을 뒤적이며 어떤 반응들이 있는지 신경을 썼다. 그러나 그 다음 주부터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라는 마음이 들어서. 미리 내 글을 읽어본 적 없는 남편이 날마다 촌평을 해주었기 때문에 엄청 느린 인터넷에 들어가는 수고를 할 마음이 들지 않은 것도 큰 이유다.
처음에는 덧붙일 이야기들이 내 안에 많아 남아있다고 느끼면서 쓰려고 했다. 그러나 내 게으름 탓에 시간을 만들지 못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마지막에 붙일 글이나 써야겠다 싶어졌다. 그 동안 읽어주신 분들과 댓글을 쓰시느라 수고하신 분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누구나 잘 아는 우화가 있다. 눈 먼 일곱 사람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그 큰 동물을 묘사하는 것이 각자 달랐다는 이야기 말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자기가 만진 부분만이 코끼리의 전부라고 우기는 것이 문제였지, 각자가 경험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내 글도 코끼리의 어느 한 부분을 말한 것일 수 있다. 내가 경험한 것이 뉴질랜드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이곳에 오기까지 살아온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 때까지 경험했던 것이 한국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없다. 비록 나의 행동거지가 이 나라 사람에게는 한국을 대표한다는 긴장감이 늘 있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고.
영어 이야기에서 내가 뉴질랜드 영어가 표준이라고 말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렇게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꼈다고 하시니 어쩔 수가 없지만. 나는 영어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 주로 발음에 관해서 내가 겪거나 느낀 것을 썼을 뿐이다. 이곳에 처음 와서 물 달라고 부탁할 때 미국식으로 t발음 빼고 '워러'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워터'라고 말을 해야 알아듣는 것을 보면서 여기 발음이 사전과 같다고 느꼈다. 'I want to go' 같은 것도 '워너 고' 라고 말하면 못 알아듣고, '원트 투 고'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단어 끝의 자음을 분명히 들리게 해야 한다. 물론 한국 사람들이 그 자음 끝에 우리나라 모음 '으'를 붙이는 것을 이 나라 사람들이 질색하지만 그래도 '으' 소리가 들리는 것이 자음 발음 안하는 것보다는 더 잘 알아듣기 때문에 '으' 소리 날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t, d, k 와 같은 자음을 발음하게 된다.
발음 문제로 뉴질랜드 말이냐, 영어냐를 말했던 글이 있었는데, 아마 그 글 때문에 마오리 말에 관하여 의견을 주신 분이 있었다. 마오리 말이 영어에 섞여 들어 뉴질랜드 영어가 다른 영어와 다르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 분이 예로 드신 kumara(고구마), haka (손님을 맞이할 때의 의식) hui(부족), marae(마오리들의 집회 장소, 우리나라의 마을회관과 같은 곳인데, 그보다는 의미가 더 깊다)는 물론 영어와 섞여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모두 마오리에 관한 명사로서. 특히 hui 말고는 고유명사로서 마오리와 관련된 뉴스나 아니면 마오리와 그들 문화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말고는 들을 일이 거의 없다. contain 처럼 라틴어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영어 단어가 되어버린 말처럼, 마오리 말이 일상의 영어에서 사용되는 것을 음식에 관한 고유 명사 말고는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김치가 옥스포드 사전에 실린다고 한들 영어 단어가 아닌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오리어는 이 나라에서 제 2의 공용어이기 때문에 공식석상에서도 인사말 등은 먼저 마오리 말로 간단히 하고 다시 영어로 말하는 독자적인 언어이다.
이민 간 것이 무슨 자랑이냐고 하는 비판이 제일 많았던 것 같다. 내 글이 이민 자랑처럼 느껴졌다면 내 글 솜씨가 모자란 탓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면 결혼 못한다고들 말했다. 눈에 감기가 걸려야, 눈이 멀어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어쩌면 셈 빠른 요즘 시대에는 이런 말도 옛말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뭔지 모르고 저질러야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했듯이, 이민도 뭔지 몰라서 온 거다. 나의 경우에는.
이민이라는 실상을 알고서 온 사람이 얼마나 될까. 친정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아무 자유도 누리지 못했기에 결혼 빨리 했다는 친구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한 결혼 생활이 자유로웠느냐, 시집살이 하느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의 결혼생활이 다르듯이 이민살이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 살면서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마음은 시집와서 친정 바라보는 마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나라는 이민을 받아들여야만 할 경제 형편이었고, 우리나라는 한참 잘(?) 나가던 때였다. 그래서 가끔 이곳 키위들이 너희 나라 잘 살지,라고 하면 괜히 기분 좋아지는 것은 든든한 친정 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등이 무너져 내릴 때, 뉴스 시간에 지금 한국에서 몇 달 안에 몇 번째 사고가 났다는 보도를 하면 친정에 큰 일 난 것처럼 가슴 아프고, 또 너희 친정은 왜 그러냐는 무언의 공격을 받는 것 같아 괴로워지는 것도 시집살이와 같다.
그래도 시집의 좋은 점은 친정에서도 따라 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친정에서 좋았던 점은 시집에다 심어놓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런 마음이 이민을 자랑한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부분이 아닐까 싶지만, 나는 친정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할 마음이 없다. 이미 나는 남의 나라에 세금을 내고 사는 사람이기에 우리나라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작년인가 논의되었던 재외국민 참정권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권리란 의무와 함께 생기는 것이지 의무 이행 없는 권리란 특권이기 때문이다.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단지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어디서 살고 있느냐가 발언권에 중요한 것이다.
나는 친정을 향하여 그냥 내 삶을 말하는 것 이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시누이가 되어서 뭔가 친정 올케에게 한 마디 하는 것처럼 내 글이 느껴졌다면 그것도 내 글 솜씨가 부족한 탓이다.
어쨌거나 친정이든 시집이든 살면 살수록 느끼는 것은, 처음 글을 시작할 때 이미 말했듯이 사람 사는 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제도나 기후 또는 관습이 다르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모습이나 정서는 마찬가지이고, 또 같은 사람이 이곳에 산들 저곳에 산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그 모습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집가서 팔자 고치겠다고 생각하고 시집간들 친정에서 가지고 온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고 한다. 자신이 변하고자 하지 않으면 환경이 바뀐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왜 그걸 말하고 싶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곳에 오면 뭔가 바뀌리라고 생각하고 왔지만 여전히 그 갈등이 심해지는 분들을 많이 보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한 달 남짓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가 직접 읽은 댓글에서, 그리고 남편을 통해서 들은 글들에서 다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신 것에도 감사한 마음이다. 또 귀한 지면을 나누어준 프레시안과 글을 쓰도록 격려했던 남편과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2003.09.18>
#지난 여름 무더위가 한창일 때 시작하여 지금 추운 겨울까지 틈틈이 시간 내어 인터넷 신문 Pressian에 실렸던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전재를 모두 마칩니다.
원래의 글을 최대한 살리면서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바로 잡고, 윤문으로 손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이 글을 다 읽어보면 어느 정도 뉴질랜드를 알고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여행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