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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전은 실존했던 백제시대 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다.
역사성, 문학성을 갖춘 장대한 스케일의 고대 설화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주마간산 격으로 알고 있다. 최근엔 학계와 행정기관에 의해 도미설화가 왜곡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아 사람들이 도미설화의 가치를 깊이 음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결혼은 남녀 배우자 모두에게 정절을 요구한다. 그 당위성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불륜이 일상화되고, 이혼가정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는 지금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이러한 때에 백제 시대 한 부부의 운명적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듯하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면 춘향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춘향은 소설의 주인공일 뿐 실존 인물은 아니다.
한국인이 소설의 주인공에 불과한 춘향을 추앙하면서도 그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실존 인물 도미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미설화는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와 같다.
도미전(都彌傳)은 고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 열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모 대학 교수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서 도미전설을 수집하여 서울의 모 유력 일간지에
그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교수는 여기서 열전의 주인공 도미와 도미의 부인이 살았던 곳이
충남 보령이었다고 주장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황당한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보령시는 열녀비각을 짓고 그 안에다 열녀 도미처(都彌妻)의 영정을 모셨다.
물론 열녀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송덕비를 세우고 전각을 짓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도미설화의 발생지가 충남 보령이라는 잘못된 주장에 근거해 보령시가 기념물을 만든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최초의 기록인 ‘삼국사기 열녀전’의 내용으로 보아 도미 부부가 살던 곳은 한홀(漢城, 현 경기도 광주) 지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뮤지컬 ‘도미전’이 제작중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도미전의 내용이 뮤지컬에선 어느 정도 바로잡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도미전’은 허구가 아닌 백제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실화(實話)란 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리고 원전에 적혀 있는 대로 역사적 사실과 배경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현대에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조선 세종은 ‘삼국사기’의 도미전을 ‘삼강행실도’(1432년)에 수록하여 열녀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동사열전’을 비롯, ‘동국통감’ ‘오륜행실’ ‘신속동국행실’ 등에도 한결같이 수록되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도미전을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열녀전으로 꼽아온 셈이다.
먼저 ‘삼국사기 도미전’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자.
도미는 백제 사람이었다. 비록 벽촌 소민(編戶小民)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도 절행(節行)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백제 개루왕(蓋婁王)은 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무릇 부인의 덕은 정결(貞潔)이 제일이라 하지만, 만일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좋은 말로 교묘히 꾀면
넘어가지 않을 여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왕은 도미의 부인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왕은 도미를 궁궐 안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신하에게 왕의 옷을 입힌 뒤
말과 몸종을 딸려 밤에 도미의 집에 가게 했다. 그에 앞서 왕은 사람을 보내 도미의 아내에게 왕이 온다고 기별했다.
가짜 왕은 도미의 집에 도착하여 도미 부인에게 “내가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네 남편과 내기 장기를 두어 내가 이겼다.
내일은 너를 왕궁으로 데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이제 너의 몸은 나의 소유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짜 왕은 도미의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께오서 망령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사온데 어찌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곧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모시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물러나와 미모의 몸종을 곱게 단장시켜 대신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후에 왕이 속은 사실을 알고 격노하여 남편 도미에게 속인 죄를 물어 두 눈을 뽑은 뒤 조각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버렸다.
그리고 그 부인을 다시 강제로 범하려 하자 부인은 “지금 저는 남편을 잃은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은 월경으로 몸이 더럽사오니 다른 날에 목욕 재계하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해 왕이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은 그 길로 도망쳐 남편이 버려진 강가에 이르러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때 홀연히 조각배 한 척이 떠내려왔다.
부인은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거기서 도미 부부는 풀뿌리로 연명하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蒜山) 아래로 가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차스럽게 살면서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는 내용이다.
왕의 짓궂은 장난과 부부의 열정적 사랑이 잘 대비된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부부의 행동이 감흥을 부른다.
이야기의 결말도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삼국사기’ 원문을 중심으로 도미전을 조명하려 한다. 이 원문에서 파생한 전설, 전기,
구전설화는 마음대로 보태고 뺀 허구가 많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통해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언제인가, 전설화(전기화)한 시기는 언제인가,
도미 부부가 살던 곳은 어디인가, 도미는 과연 편호소민이었던가, 체형(體刑)을 당한 뒤에 버려진 강안(江岸)은 어디인가,
도미 부인의 배가 도착하여 남편과 해후한 천성도(泉城島)는 어디인가, 망명하여 여생을 마친 산산은 어디인가”
하는 7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 일곱 가지의 요소는 곧 도미전을 바로 알 수 있는 사안들이다.
도미전은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전국에 걸쳐 아류작들이 파생되어 전해져온다는 점이 특징이다.
도미전은 여러 고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오기도 하고, 구전(口傳)으로 유포되어 있기도 하다.
구전되고 있는 도미전설로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蘇城里)의 전설, 경남 진해시 청안리(晴安里)의 전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창우리(倉隅里)의 전설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보령시의 전설은 1990년 앞서 언급한 모 교수가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낚시하러 갔다가 소성리에서 수집하여
서울의 모 유력 일간지에 발표한 도미전설이다. 보령시에 ‘도미항(道美港)’이 있고,
도미 부인이 남편을 그리던 ‘상사봉(相思峰)’이 있으며 ‘미인도(美人島)’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보령 일대가 도미 부부가 실제로 살던 곳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오해로,
전공영역을 벗어난 위치에서 흔히 범할 수 있는 억측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원본의 내용에 강진(江津)은 있어도 항구(港口)는 없다.
즉, 도미설화의 발생지는 바다를 낀 항구가 아니라 큰 강변이었다는 것이다.
천성도(泉城島)는 있어도 상사봉과 미인도는 없다. ‘도미항’ ‘상사봉’ ‘미인도’는 전국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이곳들을 모두 도미전설의 발생지로 보아야 하는 모순이 나온다.
도미 부부가 진해에 살았다는 진해시의 전설은 ‘삼국사기’의 도미전에 나오는 지명 천성도와 경남 진해 가덕도(加德島)의
마을 이름인 천성도(天城島)가 동일한 발음이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다.
더구나 진해 해안 청안리에 도미묘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도미전의 결말 대목은 “도미 부부가 고구려에 가서 살았다”로 되어 있다.
이 대목은 경남 진해에 도미묘가 들어섰다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시 진해는 신라의 영토였다. 진해의 어부들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출항하기에 앞서
도미의 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전통적으로 행하여왔다.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모신 가묘일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경기 광주군의 전설은 ‘도미진’(渡迷津 또는 斗迷津)이란 지명이 도미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발생한 듯하다.
두 눈동자를 잃은 도미가 버려진 강변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에 전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곳은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한 무대인 한홀(廣州)과 인접한 지역인 것은 사실이다.
도미전은 백제 민간에 암암리에 유통되어오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 통일신라기 때
구전 또는 문헌으로 전승되던 것을 고려 시대에 수집·정리하여 ‘구 삼국사기’ 열전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다시 김부식이 ‘삼국사기’ 제 48권 열전 도미전으로 옮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기 광주군의 전설이 ‘삼국사기’의 도미전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는 도미를 백제 개루왕 때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백제의 제4대 왕과
제21대 왕의 이름이 똑같은 데 있다. 제4대 개루왕은 서기 128년부터 165년까지 38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제21대 개루왕은 서기 455년부터 475년까지 21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무려 300년 이상의 시대 차이가 발생한다.
삼국 시대 왕명을 보면 같은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백제만 예로 들어도 제4대 개루왕과 제21대 근개루왕,
제5대 초고왕과 제13대 근초고왕, 제6대 구수왕과 제14대 근구수왕 등과 같이 선대의 왕명을 되풀이하여
사용하던 관습이 있었다. 물론 선대왕과 구별하기 위하여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과 같이
호칭 앞에 근(近)자를 일부러 붙였다. 이 ‘근’은 ‘大’를 의미하는 ‘근’(>큰)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도미의 사건은 언제 발생한 것인가.
제4대 개루왕 때는 백제 건국 초기라서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사회적인 상황이 성숙되지 않았다.
당시 백제는 부족국가에 가까운 작은 나라였고, 고구려 역시 초기 부족국가로 졸본에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엔 대방·옥저·예맥이라는 나라들이 건재하여 있었다. 따라서 도미전의 내용 중
“고구려의 산산 아래에 피신하여 여생을 마쳤다”는 대목은 제4대 개루왕 때에는 실현되기 매우 어려웠던 일인 것이다.
또한 “제4대 개루왕은 품성이 공손하고 조행이 있었다(性恭順有操行)”는 기록이 있어 가능성을 더욱 흐리게 한다.
이 기록이 맞다면 제4대 개루왕은 ‘도미의 두 눈을 뽑는’ 그런 잔인한 사건을 자행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제21대 개루왕 때를 면밀히 살펴보자. 이때의 백제는 영토가 황해도·경기도·강원도 영서(嶺西)·충청도·전라도에까지
확대된 최강의 시대였다. 왕권은 강력했고 왕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도미전의 사건과 같은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을 만큼 시대적 배경이 여러 모로 성숙해 있었다.
도미전의 배경이 된 지명인 도미진·천성도·산산이 모두 제21대 개루왕 이후에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미진은 현재 경기도 광주시 한강변에 위치해 있다. 그 이전에는 도미진, 산산 등 한자지명 우리말은 없었고
고유지명인 ‘얼매곶, 매시달’만 쓰였다. 지명은 도미전이 4대 개루왕 때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제21대 개루왕은 성품이 호탕하고 호전적이었다. 개루왕 15년(469) 백제는 고구려의 남변을 침범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년에 급격히 국세가 기울어 개루왕 21년(475)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서울인 한홀(漢城)은 함락되고
개루왕은 비참하게 전사했다. 겨우 망국을 모면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의자왕과 다를 바 없다.
절대적 패인은 개루왕이 고구려에서 밀파한 간첩 도림(道琳)과 바둑을 즐긴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대목은 도미전에서 왕과 도미가 내기장기를 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도미전의 사건은
제21대 개루왕 재위 21년(455∼475) 동안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루왕 재임기간 중에서도
후반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천성도(泉城島)·산산(蒜山) 그리고 고구려에 망명하였다는 대목과 관련이 있다.
도미전에는 도미가 체형을 당한 후 배에 실려 떠내려가다 도달한 섬이 천성도이며, 망명하여 여생을 마친 곳은
고구려의 산산이라고 적혀 있다. 이 두 곳은 백제 시대에는 얼매곶과 매시달로 불렸던 곳들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장수왕이 남침하여 백제 영역을 점령한 이후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정하였다.
여기서 고구려가 백제 중부 지역의 지명을 개정한 시기는 장수왕이 강점(백제 문주왕 1년, 475)하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기가 무작정 늦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가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의 점령지역에서 10군의 땅을 약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왕 때(492∼518)에 얼매곶이 천정구(泉井口)로, 매시달이 산산(蒜山)으로 개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천정구가 후에 천성도(泉城島)로도 불렸거나, 아니면 천정구 부근에 있는 섬 이름이 천성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명이 동일한 ‘천(泉)’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도미전은 배경 지명인 ‘천성도’와 ‘산산’이란
지명이 발생한 시기 이후, 즉 문자왕 말년(518) 이후에 전기화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흔히 노래나 전설에 등장하는 지명은 세월이 흘러도 잘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지어진 시대를 알리는 징표로 남는다.
가령 정읍사,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양산도가 등도 앞에 붙어 있는
지명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경우와 같다.
도미전은 도미의 신분을 편호소민(編戶小民)이라 하였다. 일부에선 도미가 평민으로 직업은 어부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편호’는 호적을 말함이니 ‘편호소민’은 ‘호적에 오른 평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도미의 신분을 이처럼 비하한 것은
그 아내의 절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적인 꾸밈인 듯하다.
이번엔 ‘삼국사기’ 원본이 위작(僞作)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를 원본의 내용에서 확인해 보자.
첫째, 당시 상황에서 “벽촌의 촌부가 의리를 안다”는 표현은 현실성이 없다.
“두메에 묻혀 사는 아낙네의 절행이 널리 알려져 칭찬이 자자하였다”는 내용도 현실성이 없다.
둘째, 도미전에 왕과 도미 부인 사이에서 벌어진 공격과 방어는 도미 부인의 승리로 끝났다.
이 공방의 과정에 등장하는 조역들은 왕을 대신한 신하와 도미 부인을 대리한 여종(婢女)이다.
만일 도미가 ‘편호소민’이라면 어떻게 종을 거느릴 수 있었을까.
‘편호소민’과 ‘종을 거느림’은 어느 한 쪽이 위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자가 사실이 아니면 도미전은 그 스토리가 파괴되지만 ‘편호소민’이란 신분은
다른 신분으로 바꾸어도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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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2003년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의
‘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을 옮겨온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