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클레어 집안은 밝은 세계를 상징한다. 밝은 세계의 특징은 보수적인 태도다.
현재 지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방해되는 요소는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선'이라고 치장한다.
분명히 세상에는 그들이 속해 있는 곳과는 구별된 성향의 인생들이 있다. 화려한
백화점 뒤에 자리잡은 사창가가 있고, 거창한 교회에서 외면하는 남루한 걸인이 있다.
전철을 타면 만나는 행상인들을 보고 값싼 동정을 표하거나, 질타를 하는 태도 역시
밝은 세계에 있는 이들의 별 차이 없는 행위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삶이 있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존중해야 하건만 밝은
세계에 속한 이들은 애써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신비화한다.
그러기에 아들인 싱클레어가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지도
않고 신발을 벗어 털라는 말만 한다.
인간에게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사람의 개별적인 행동에 대해서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이 누리는
행복을 유지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그러기에 이들은 '진리', 또는 '진실'을 찾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밝은 세계에 속한 이들은 그들의 영역을 성역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차용한다.
카인과 아벨이 대표적인 이야기다, 악인은 벌을 받아 평생 고생하게 되었다는 내용
으로 취사선택한다, 그러나, 데미안은 밝은 세계인들의 아전인수식 해석을 질타한
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가장 주의깊게 바라보아야할 부분은, 왜 하나님이 카
인에게 표식을 주어서 그 누구도 카인을 해하지 못하게끔 하셨을까이다.
악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악인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이 부분을 은근슬쩍 구렁이 담넘어가듯한다.
데미안은 이 점을 집중 공략한다. 강자가 약자를 죽였을 뿐이다. 사람들은 강자를
무서워 한다. 그래서 대적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이 물어본다. 왜 힘을 합해서 저
사람을 처단하지 않느냐? 저 사람은 하나님이 준 표식이 있다, 건드려서는 안 된다.
약자들의 변명이, 성서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추론이다. 일리가 있다,
그리고, 데미안은 카인을 악인으로 보지 않는다, 카인은 강자일 뿐이다, 남들이 범
접하기 힘든 존재일 뿐이다, 이 역시 일리가 있다,
내가 보기에, 헷세는 성서를 후대 사람들의 신앙고백서 정도로 보는 것같다. 하나님
의 영이 움직여서 일사천리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
쳐서 형성된 고백서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
는 눈이 다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헷세는 보다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시선을 가졌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듯이 카인은 악인이 아니고 강자일 뿐인가? 타당성이 있다.
'보통'이 쓴 '명예'라는 글이 있다' 중세,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일 년에 삼천 명이
나 되는 남자가 결투 때문에 죽었다. 결투는 합법화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남자다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싸움의 발단은 다양했다. 포도
주를 먹다가 어느 지방 것이 더 맛있다느니 하는 와중에 감정이 폭발하여 결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외지인이 와서 그 고장 풍습에 저촉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결투를 하게 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사소한 이유로 목숨을 걸어야 했는데, 당사
자인 결투자들은 유치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명예를 지키는 바람직한 행
동으로 자신했다. 죽어가면서도 말이다.
즉 사람은 때때로 지극히 단순하고 가벼운 존재일 수 있는데, 이를 그럴싸하게 포
장할 뿐인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에서는 형제 간의 살해가 전혀 없지 않았다. 훗날, 야곱과 에서
간에도 형제애는 발견할 수가 없다. 형제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고 뜯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죽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선
세이셔널한 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카인은 악인이 아니라 강자일 뿐이
다. 사실, 현대에도 이런 광경은 종종 나타난다. 현대 그룹의 형제 간 다툼도 그 범
주에 들어간다. 북한 정권의 인수 과정 역시 비슷한 양상이다.
매우 도덕적인 듯하지만, 속내는 카인과 아벨의 시대와 별 다를 바 없다. 제도로 살
인을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하시면 통시대적인 분이시다. 그러한 하나
님은 어떤 이유로 카인에게 표식을 주어서 보호를 하셨을까?
물론 헷세의 이 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약자들의 창조물이 카인과 아
벨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이기에 하나님 운운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이 문제는 쉽게 넘길 부분은 아니다. 자신이 없는 이들은 아
예 다루지조차 않는다.
몇몇은 이러하다. 아무리 살인을 저지를 카인이라고 할지라고 하나님이 손수 지으
신 아담의 장자이므로 싫든 좋든 보호해준 것이라고. 또 다른 견해로는 비록 살인
범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이 이에 대한 징벌권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나타낸 것
이라는 추론이다. 둘 다 의미있는 발언이었다.
내가 보기에, 카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표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과 인간은 파트너이기는 하지만 엄격히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 주종 관계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인간을 통하여 만천하에 실현시
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종속되는 분이 아니다.
때때로, 극히 드물게 하나님이 인간의 간절한 청원에 감복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때
도 없지는 않지만, 근본적인 관계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최종적인 결정권자는 하나
님이고, 그리고 인간은 수단이다.
인간을 목적으로 보는 여타의 사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사에서는 망종이라고 보여지는 인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귀히 쓰실
수 있는 법이며, 사람 사이에서는 흠잡힐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귀인이라손 치더라
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뜩지 않아서 벌을 내리실 수도 있고, 하찮게 쓰실 수도 있
는 것이다.
충신의 아내를 취하고 발각될까봐 전쟁터에 충신을 홀로 놓게 한 파렴치범인 사람
이 바로 다윗왕이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
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하
나님에게는 솔직했고, 하나님 말씀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다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멸망시키면서 겨우 겨우 구출해낸 가족에게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곳이 하루 아침에 멸
망해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심정은 인지상정 아니겠나? 그런데 돌아보는
순간, 그 사람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다.
목숨을 걸고 노구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구출해낸 모세는
단 한 번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다. 무리들이 투덜거리자 하나님에게 저것들을 위해
서 물을 구해다 주어야 합니까? 라고 항변했고, 하나님이 가르쳐준 방식을 취하면
서 무리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이런 짓까지 해야 하겠느냐고 푸념을 했다는
이유로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와 이성을 초월하는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한시적이고,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
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부인당할
수 잇다는 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 늙어서야 자식을 허락했다. 그런데 그 귀한 자식을 제물
로 바치라 한다. 아브라함이 칼을 자식의 몸에 대려는 순간.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너의 믿음을 보았으니 이제 되었다며 중단을 명하신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든지 수단이 되어야 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
카인이 악인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카인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으
셨던 모양이다.
조금, 다른 듯해 보이지만 헷세가 데미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위와 일정
부분 맥을 같이 한다.
헷세는 기존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보수적인 기득권 집단은
자신들의 평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존 관습을 전파하고 주입한다. 그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즉, 헷세의 표현대로 하면 '알' 이다.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 환희가 절망과 함께 하고, 선이 악과 공존하고, 불안과 평안
이 섞여 있는 그런 상태, 즉 현재의 선악 구도를 벗어나는 새로운 '선'을 헷세는
추구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이 바로 하나님이 아닐까?
과제1) 우리 모두는 형제 살인을 저지른 카인의 후예다 : "카인의 후예"
과제2)"아담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과제3) 전쟁을 미화한 니체 와 반대되는 헷세
과제4) 성선설과 성악설:맹자와 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