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3)
5. 특수교육대에 공헌한 장교들
어느덧 파월 청룡부대의 인원교대 제2차 년도인 1967년으로 들어섰다. 청룡부대에서 소대장 요원 5명의 긴급 보충 요청이 사단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심사숙고한 후 현재 벽암지 훈련장에서 파월 훈련을 받고 있던 장교 중에서 오종근 소위(해간 34기) 외 4명의 장교를 우선 선발했다. 이들은 1월4일 김포공항에 있는 미군 전용 TMNL에서 미군 특별기편으로 월남으로 향발했다.
계속되는 파월 교대병력 교육훈련은 1차 년도 파월훈련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교관들은 더욱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교육을 할 수 있었고 귀국 장교 중에서 우수한 장교들을 선발해서 특수교육대 교관으로 발령 조치하도록 하였다. 특수교육대 전체장교들의 파월교육에 대한 열의는 내가 보기에도 감동적이었다.
(1) 성병문 소령
특히 이들 중 작전장교인 성병문 소령(해사 11기 후에 해병대 사령관으로 보임됨)의 성실성과 책임감은 군인이면 마땅히 구비하고 있어야 할 전형적인 면을 갖추고 있어서 교육, 훈련 관계업무는 안심하고 위임할 수 있는 장교였다. 나도 이 장교의 계획 및 건의로 교육, 훈련 중 야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장교이다.
성병문 소령(제16대 해병대 사령관)
이 성 소령은 미 해병학교 지휘참모과정 시험에 합격하여 입교 발령이 났었다. 그때 마침 성 소령의 부인이 임신 중에 있었는데 난산기가 있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이때 성 소령이 부인으로 인해 도미유학을 가느냐 포기하느냐 하고 망설일 때 나는 그의 군인됨이 아깝고 장래성이 있음을 보고 적극 그의 도미유학을 권했다.
결국 성 소령은 도미유학의 길을 택했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 해병대 사령관으로 보임되는 기반을 그때 닦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의 부인도 별일 없이 순산하여 득남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나는 그때 태어난 성 소령의 아들의 결혼식에 초청된 바 있다. 감격의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그뿐아니라 성 소령은 1968년 내가 미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재학 중 금전문제로 곤경에 빠져있는 나를 옛날의 의리를 생각하여 희생적으로 도와준 나의 친구같은 후배장교이다.
(2) 김종세 대위
성 소령과 함께 특수교육대 발전에 공헌했고 아직도 내가 잊고싶지 않은 장교에 교관반장을 한 김종세 대위(해간 24기)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경호과장이었던 안재송 대위와 동기생이며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 사관 후보생 24기로 입교하여 소위로 임관 후 청룡부대에서 중대장을 역임한 우수한 장교다. 또한 그는 유도 4단의 유단자이기도 했다. 그의 지적수준에 알맞게 머리도 명철하고 냉철하며 또한 책임감이 강해서 맡겨진 업무는 최선을 다해 100% 완수했으며 내가 가장 아끼던 장교 중의 일원이었다.
김종세 소령(좌측 해간 24기 사복), 중앙 필자(해병대 정복), 우측 이동성 소령(해사 11기 사복) -진해 1970년 12월 성탄절 연회에서-
나는 전역 후 이들을 2회 만났는데 성 소령은 해병대 중장으로 해병대 사령관실에서, 김종세 대위는 해병대 대령으로 해병대 사령관 공관에서 있었던 파티에서 만난 이후 이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아무쪼록 이들의 노후가 평안할 것을 바라는 마음은 항상 간절했다. 그러나 김종세 대령은 1992년 발행 해병대 장교명단에 사망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정말 아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장교였는데!
나는 특별히 이 파월인원의 교육훈련에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관들에게 교관수당을 지급했다. 물론 교육대 참모들도 포함되었다. 이 수당의 자금은 어떤 예산상으로 계상된 것이 아니고 특수교육대 매점의 이익금이 자금의 원천이었다. 특수교육대에서 파월될 인원들을 위해 매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이익금은 전액 파월병력 수송 시 몇 교관들의 수당 등으로 사용했다.
나는 1963년에 김포에서 대대장을 하면서 대대장실에 장교들을 위한 Bar를 부설해서 장교들의 휴식실겸 양주를 마시는 장소로 운영했는데 여기에 소용되는 자금 역시 대대매점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전액 이용한 것 같이 여기서도 매점의 전 이익금을 장교들의 수당, 회식비등으로 사용했다.
파월장병을 위한 청룡기도 이 이익금에서 계속 제작했었다. 대금 지불은 매점장이 직접했고 나는 결과보고 만 받았다. 그것은 "견물생심"을 예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당한 시일이 지난 어느날 내가 도미유학(미국 육군대학 입학)을 위하여 특수교육대장직을 이임할 무렵에 보안대 하사관이 찾아왔다. 자기는 특수교육대 담당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특수교육대의 매점에서 나오는 이익금이 상당한 액수가 되어서 그것을 교육대장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확인하라는 지시가 있어서 그 동안 대장님의 행적을 항상 추적한 결과 교육대장은 매점 이익금을 전혀 쓰지 않고 모든 비용지불은 전부 매점장을 통해서 대금결산을 하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은 놀랐다는 소리를 했다. 물론 상부에도 그렇게 계속 보고했다고 나에게 말했는 데 나는 오히려 그의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을 하고 있었는 데 그걸 놀랐다하니 그 소리를 듣고 내가 오히려 놀랐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지고 놀랐다는 소리는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상례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는 대대장 시절에도 이때와 같은 방법으로 매점장을 통해서 이익금을 전액 부대운영에 사용했다. 남이야 믿건, 말건, 나는 그렇게 하면서 나의 지휘관 직무에 최선을 다했고 또한 그 속에서 보람을 느꼈다.
6. 3.5" RKT 포탄 폭발사고(양포리 사격장)
파월 교대장병 훈련이 순조로히 잘 진행되고 있는 어느날 아침 예상치도 않았던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다. 양포리 사격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는데 현장에서 교육받고 있던 파월훈련 중에 있던 해병 5명이 폭사했다는 큰 사고다.
나는 큰 방망이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1명도 큰 데 5명이라니! 순간 나는 소대장 시절에 소대원들이 중동부전선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 적의 Booby trap에 걸려 여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의 처참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더 이상의 희생자는 나지 않았기를 기원하면서 급히 앰블런스와 함께 약 25분 거리에 위치한 양포리 사격장으로 정신 없이 Jeep로 달려갔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3.5" 로켓포탄이 폭발한 것이다. 사격장관리는 포항 해병기지사령부에서 맡고 있는데 불발탄 처리 등의 현장관리가 잘 안 된 듯 했다. 모든 실탄 사격 후에는 불발탄이 발생했을 시 반드시 불발탄을 수거하여 처리하도록 규정 되어 있었는데 사격장 지역일대가 광범위하고 굴곡이 심하고 바위와 돌멩이가 많아서 100% 불발탄 처리는 사실 잘 안 된 듯 했다.
그 미처리된 포탄 중의 하나인 3.5"로켓포탄이 불발탄으로 땅 위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훈련장에서 파월훈련 중에 있던 해병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고 뒷날개는 떼어버리고 앞부분인 세모꼴형 탄두부분만을 야전잠바 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가 교관이 강의 중 훈련병들이 졸고 있을 때 이들을 깨우기 위하여 "일어섯!" "앉아!"를 몇번 거듭하는 과정에서 주머니 속에 있던 3.5"로켓포탄 탄두가 땅에 부딛쳐서 폭발한 것이다.
바로 그 주변에 있던 대원 중 4명이 동시에 그 폭발현장에서 사망하고 몇 명은 부상 당했다. 그 당시의 참상은 뭐라 차마 표현할 수가 없다. 이거야말로 평시에 해병대에서 훈련 중 발생한 최대사건이었다. 정오 12시 방송에 국방부 발표로 이 사고가 긴급 News로 전국에 보도 됐다.
사실 대전차포탄인 3.5"로켓포탄 폭발에 이 정도의 희생자가 난 것으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 당시 그곳에서 교육받고 있던 해병들의 수는 150명 정도였으며 집단으로 강의교육을 받고 있었다. 사단본부에서 긴급대책회의가 열리고 유가족 접대 담당부서 및 인원들이 선정되었고 장의위원도 임명되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었고 또한 사전에 예방이 안됐을까? 그것은 첫째 불발탄 처리가 원칙대로 안됐고 둘째로는 사격장내에서는 일절 아무거나 절대 손대지 말며 이상한 것이 발견되면 즉시 소속장교나 교관에게 보고 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훈련해병들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규정이나 수칙이 아무리 그 내용이 철저히, 그리고 상세히 잘 되어 있어도 그것을 그대로 지키지 않으면 하나의 사문서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큰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고 예방하기 위해 교육을 철저히 하도록 돼 있으나 이번 사고는 아주 간단한 수칙 즉 "만지거나 줍지 말라"는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해병은 3.5"로켓포탄 탄두를 어디에 쓰려했을까? 쇠붙이 하나 때문에 5명의 귀중한 생명까지 잃었어야 할 정도로 그것이 필요했었는지? 이런 예상되는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관리부서가 있고 감독기관이 있고 또한 지휘관에게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책임소재는 어딘가? 그러면 우선 사격장관리대장은 평소에 무얼하고 있었고 그것을 감독하여야 할 상급기관인 기지사령부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조사단이 구성되어 원인규명과 사후대책을 수립했지만 이미 떠나간 그들은, 해병들은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훈련장 관리 및 감독부서에서 이 엄청난 사고에 대해서 책임진 사람은 누구하나 없었다. 사고처리 후에 예방책만 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훈련장의 관리 유지는 포항기지 사령부의 소관 업무 사항인데 이런 엄청난 사고에 대한 문책이 없었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부터 40여 년이 지난 그 당시의 참사 현장이, 글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눈 앞에 떠올라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미안한 생각으로 어떻게 나 자신을 자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심정은 아마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순직한 5인의 해병을 위한 장례식은 사단장으로 엄숙히 사단 비행장 활주로에서 유족들의 오열 속에 거행되었고 나는 상주로서 조사를 낭독했다. 나는 조사를 낭독하던 중 이들이 나의 불찰로 사고를 당했다는 어떤 자책감으로 머리 속에 꽉 차 있어서 조사를 낭독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기도 했다. 고인이 된 해병들이 나의 친자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오늘까지 수천 명의 해병들이 우리, 특수교육대에서 같은 훈련장에서, 같은 훈련을 받고 무사히 전원이 파월되었는데 이러한 엄청난 사고가 났을까 하고 나는 소대장 시절 전투 중 나의 전령이 중공군의 수류탄에 의해 전사한 그때의 광경이 순간 머리 속에 떠올랐고 또한 공격 중 나의 바로 옆에 호를 파고 들어 있던 전령이 적의 박격포의 직격탄을 맞고 전사한 그 당시의 장면도 동시에 떠올라 더욱 슬픈 감정에 깊이 젖었었다. 유족들의 비통해 하는 모습은 말로 표현키 어려웠다.
이런 곤경을 겪으면서 우리는 더욱 훈련 중 안전관리에 주의를 경주하면서 파월인원들에 대한 교육훈련에 정진하였다. 이후 내가 특수교육대장직을 인계하고 떠날 때까지 안전사고는 한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7. 서해 무인도 무장정찰
1968년 1월21일 오후에 나의 사무실에 지구보안대장 이 소령이 찾아왔다. 말인즉 "오늘 아침에 청와대가 무장공비들에게 습격당했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그래서 필요지역에 비상경계령이 선포되었고 다행히 청와대의 피해는 없었고 6군단 병력이 현재 무장공비들을 추격, 소탕 중이라는 충격적이고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서해 00지점에 상륙하여 무장정찰 중인 일행(필자 우측에서 3번 째 첫째 김종세 대위)
며칠 후 사단에서 작전명령이 나에게 왔다. "이근식 대령은 수색중대의 1개 분대 병력을 완전무장 시키고 군산 00 지역의 예상되는 북의 무장공비의 상륙지점에 해상으로부터 상륙하여 지역 일대를 정밀 탐색하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명령이 나에게 시달된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즉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기습 사건 후 국방부 군무회의(각 군 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참석 )에서 군산 인근 지역의 무인도 일대에 북한의 무장공비 출몰(상륙)정보가 있는데 이에 대한 수색정찰을 우리 해병대에서 하겠다는 해병대 사령관의 제안으로 결정되어 그 지시가 우리, 해병 제1상륙사단으로 떨어졌고 그 내용이 명령화 되어 나에게 시달된 것이다.
전투부대 연대장도 있는데, 그리고 지금 파월교대병력의 교육훈련에 한참 바쁜 나에게 어떻게 이런 명령이 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장정찰을 수색대 하사관(공수교육 이수자)들을 인솔하여 무장공비들의 예상 출몰지역에서 수색정찰 하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고 문제도 나에게는 되지 않지만 만일 나의 부재 시 지난번과 같은 엄청난 사고라도 발생하면 어떻하나 하는 걱정도 앞섰지만 현존 대령들 가운데 특수훈련을 받은 장교는 나밖에 없고 하니 역시 내가 가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됐다.
인원 편성은 수색대 하사관들과 지구보안대장 (이도행소령 해간 14기) 김종세 대위(특수교육대 교관반장 유도4단) 계12명으로 완료하고 탄약 1기수씩 각자 휴대하고 우리는 트럭 2대에 분승하여 1대는 수색대원, 1대는 상륙주정(소형)을 싣고 진해까지 이동후 진해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새벽 해군의 호위구축함편에 출항했다.
오후 늦게 군산 인근 해상에서 상륙함(중형)으로 환승하고 밤새 계속 항진하여 새벽, 어둠 속에서 군산에 가까운 무인도 인근에서 우리가 운반해 온 상륙용 소주정에 환승하여 새벽의 찬 바닷 바람과 높은 파도를 뒤집어 쓰면서 목표 지역 인근에 도착하여 동이 틀무렵 우리는 2회에 걸쳐 목적지에 상륙했다. 마치 상륙작전 시 적 해안에 기습상륙하는 기분이었다. 파도가 좀 높았지만 어렵지 않게 전원이 휴대한 탄약과 함께 상륙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서 우리는 완전무장하고 오전 7시부터 무인도 지역 일대를 정밀 탐색했으나 별 이상은 발견치 못했다. 계속하여 인근도서 몇 곳을 육군보안대 군산지대의 협조하에 그리고 공군 헬리곱터의 지원으로 2박 3일 간 지역일대를 다시 정밀 수색한 결과 특별한 이상은 발견 못하고 포항으로 귀대한 바 있다. 국방부 군무회의에도 그렇게 보고 되었다.
8. 청룡부대 출장
1967년 5월 나는 청룡부대의 현황과 교대인원 교육에 필요한 교육참고 자료 등의 수집을 목적으로 해병대 사령부의 관계부서 과장급장교(중령) 2명을 대동하고 1주 간 청룡부대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