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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퇴직교원의 해외로무 체험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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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부모님이 태여나신 고국땅을 꼭 한번 밟아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는 대학에 다니는 두딸의 학비도 마련할겸하여 2000년 12월 28일 비로소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땅ㅡ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였다. 물론 고국에는 별다른 연고도 없고 하여 많은 돈을 팔고서야 이루어진 한국행이였다. 공항을 나서자 한눈에 안겨오는 우리 글 안내문과 현란한 광고판, 귀전에 들려오는 부드럽고 정답고 친절한 우리 말에 마음은 붕붕 하늘로 떠오르는것 같았다. 《아! 이곳이 바로 한국이구나.》하고 느끼는 순간 고향이 강원도이신 아버지께서 그렇게도 그리고 그리던 고향을 끝내 못가보시고 1982년에 한을 남긴채 세상을 떠나시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였지만 2년 4개월이라는 고국에서의 생활에서 나는 너무나도 많은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웠다. 특히 평생을 두고도 잊을수 없는 한일월드컵의 나날들, 2002년 5월 31일에 개막된 한일월드컵은 그야말로 세계에 한국의 저력을 아낌없이 자랑한 력사적인 순간이였다. 《대ㅡ한민국! 짜작짜 짝짝!》, 《오, 필승코리아!》. 거리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여 웨치던 그 함성, 온 나라가 태극기와 붉은 유니품으로 물결쳤던 격동의 그 장면, 그 장면을 글로, 말로는 형언할수가 없어 그저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감수하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을뿐이다. 바로 이런 저력이 있었기에 4강신화를 만들어낸것이다. 그리고 한국국민들의 애국충정은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묻어나고있었다. 그 례로 상품구입에서 아무리 비쌀지라도 주저없이 국산품을 리용하였다. 그외에도 높은 문명의식수준, 부모나 년장자에 대한 효도, 상호간의 례의범절, 시간과 다투는 근면성, 깨끗하고 정결한 길거리... 이 모든것이 내가 한국로무에서 얻은 가장 보귀한 수확이다. 한국에 도착하여 내가 맨처음 일하게 된곳은 대청역에서 가까운 함바였다. 이 함바는 외부손님접대도 겸하고있어 손님이 특별히 많은지라 하루에 17시간 남짓이 일해야 했는데 한국 전체가 그렇듯이 로동절주가 엄청 빠른 식당이였다. 나는 주로 주방에서 설걷이를 하였는데 현장일군들의 아침식사, 오전중참, 점심식사, 오후중참, 저녁에는 외부손님으로 이어지다보니 설걷이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아침설걷이가 미처 끝나기도전에 점심설걷이가 가득 쌓였고 점심설걷이가 채 끝나기도전에 저녁설걷이가 시작되였다. 게다가 짬짬이 야채와 생선을 가리고, 씻고, 썰고, 밥을 들고, 밑반찬 담고...어쨌든 아침 다섯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밥먹는 시간외에는 앉아있을새가 없이 팽이처럼 돌아쳐야 했다. 중국에서 50이 넘도록 30년간 교직에만 몸담아오면서 고생이라고는 못해본 나에게 이렇듯 과부하로동은 난생처음이였다. 처음에는 힘도 너무너무 들었고 집식구들도 너무너무 그리워 설걷이를 하면서 남모르게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르며 밤이면 잠자리에서 흐르는 눈물에 베개잇을 얼마나 적셨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코끝이 찡하고 시려온다.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것은 수면부족이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담궜는데 낮에는 장사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틈나는대로 초절이를 해뒀다가 저녁일을 끝마친 뒤에야 주방장언니와 함께 버무리기 시작하면 새벽 두시경에야 일을 끝낼수 있었다. 그로부터 세시간쯤 휴식하고 다섯시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그런 날은 어찌나 피곤하고 졸렸던지 마치 닭병에 걸린 사람처럼 설걷이를 하면서, 밥을 공기에 담으면서, 채소를 썰면서도 끄떡끄떡 졸았는데 채소를 썰다가 졸아 칼에 손을 베일번한 일이 몇번인지 모른다. 식당에 출퇴근하는 직원들은 퇴근시간만 되면 하던 일도 아랑곳없이 그냥 두고 떠났지만 식당에서 숙식하는 나는 손님이 다 떠날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설걷이와 주방정리를 끝내야 했고 아침에는 또 남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준비를 해야 했다. 가뜩이나 수면부족에다 처음하는 낯선 일이라 서툴러서 실수라도 할가봐 매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하게 일한탓인지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그 식당에서 일한지 5개월만에 주방에서 일하다가 결국 쓰러지고말았다. 일이 힘든만큼 월급은 많아 매달 한화 140만원, 한국에 올 때 많은 빚을 낸 나에게는 너무나도 유혹적이였다. 그래서 그 식당을 떠나기가 너무 아쉬웠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결국 하루 휴식하고 자리를 옮겼다. 새로 찾은 일터는 로동시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힘이 덜들고 숙식을 제공하는 신림동의 한 일식식당이였는데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첫날이 바로 2001년 5월 1일ㅡ 국제로동절날이였다. 식당주인은 나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고 몸도 허약해 보였던지라 일이 끝나서 밤 11시경이 되는데 한화 5만원을 주면서 《아줌마, 래일부터 안오셔도 됩니다. 돌아가세요.》하는것이였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것도 그렇지만 당장 이밤중에 어디로 가야할지 당황스러웠다. 한국땅에 들어서는 날부터 식당에서 숙식하다보니 자취방도 없는 신세에다가 짐까지 챙겨가지고 온 나를 한밤중에 나가라니 억이 막혔다. 나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듯 목석처럼 멍하니 서있다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하루밤만 자고 래일 아침 새벽같이 떠나면 안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손이야발이야 빌었지만 돌아온 말은 《아줌마, 주민등록증 있어요?》였다. 한국에서 3개월이 지나면 불법체류라 불길한 예감에 더럭 겁이 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쫓기듯 식당을 나와버렸다. 간신히 큰길까지 나온 나는 즐비하게 늘어선 높고낮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종래로 있어본적이 없는 고독감과 괴로움이 엄습해옴을 느꼈다. 《하늘의 별처럼 촘촘이 들어선 저 건물속에 내몸 하나 건사할 곳이 없구나!》한숨이 절로 나왔다. 잇따라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급기야 가슴에 저미는 서러움을 참지 못해 나는 애들처럼 소리내여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밤중이라 거리에는 행인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 울다가 이렇게 울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 어디든지 잠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나는 려관에는 들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피뜩 고향친구가 신림동에 살고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렴치불구하고 공중전화를 찾아서 전화를 했더니 천만다행으로 그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그덕에 그날 나는 로숙자가 될번한 고비를 넘겼다. 그날 그 두렵고, 외롭고, 서러웠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빚도 아직 다 못갚은 형편이라 휴식은 엄두도 못내고 이튿날 쓰러질것 같은 몸을 끌고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그래서 삼송역의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주인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식당은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아 나같은 약골도 견딜만 했다. 한달남짓이 일하는동안 몸은 점차 건강을 되찾았는데 식당은 그만 문을 닫게 되였다. 그래서 돈한푼 받지 못하고 또 일자리를 잃었다. 이틀후에 준다던 월급은 몇번이나 찾아갔지만 받아내지 못했고 후에는 주인이 아예 이사를 하면서 련락처가 바뀌는 바람에 찾을길이 없어 포기해야 했다. 그후 친구의 알선으로 잠실 삼전동 신성식당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그때로부터 신성식당 사모님과 나는 뗄래야 뗄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다. 사모님은 성격이 쾌활하고 인정많고 싹싹한 분이였는데 나보다는 세살이상으로 나를 친동생처럼 보살피고 아껴주었다. 사모님과 함께 지낸동안 나는 내돈 주고 생활용품을 사본적이 몇번 안되고 지어 리발, 파마 등 모든것에 신경쓸새없이 챙겨주었다. 이 식당도 함바와 외부손님접대를 겸하는 규모가 크지 않은 식당이였는데 역시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저녁 늦게야 끝났다. 사모님과 나 둘이서 하는 일이여서 항상 바삐 돌아쳐야 했다. 게다가 배달장사도 적지 않았는데 한창 무더운 여름날, 불같이 뜨거운 해볓이 쨍쨍 내리쬐는 점심시간에 쟁반을 머리에 이고 수십번 배달하고나면 온 몸이 땀으로 목욕을 했고 발바닥은 감각을 잃을 정도였다. 밤이면 쟁반을 이었던 머리와 두다리,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잠들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힘든 나날에도 고달픔을 잊게 하는 사모님의 따뜻한 온정과 극진한 사랑이 있어서 비록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었지만 마음만은 마냥 유쾌해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지냈다. 여름철이라 식당에 모기가 엄청 많았는데 식당에서 자는 내가 모기때문에 잠못이룬다고 일이 끝나면 사모님은 어김없이 모기약을 뿌리고 모기향까지 피워주고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침이면 항상 《동생, 오늘은 뭔 찌개하고 밑반찬은 뭐로 할까?》하고 물어왔는데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안될까요?》하면 《웬 일이지? 동생하고 나하고는 아마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야. 어쩌면 이렇게 호흡도 잘 맞고 마음도 잘 통하는지 모를 일이다, 마침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라고 기뻐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더욱 고맙고 감사한것은 내가 중국에서 교직생활을 했다는걸 알고 《요즘 한국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열풍이 불고있으니 아쉬워도 식당에는 다른 사람을 구할테니 식당일은 그만두고 중국어를 가르치는것이 동생한테는 더 좋지 않을까?》하면서 대학에 다니는 자기 아들, 친구 딸 등 많은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학생 5명을 소개해주었다. 그때 사모님의 속깊은 마음씨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두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나는 기껏 《감사합니다》는 한마디 말을 하고는 뒤말을 잇지 못했다. 사모님 덕분에 동대문 평화시장 사모님을 만나게 되였고 그 사모님의 따뜻한 관심과 신임을 얻게 되였으며 그 덕분에 힘겨운 식당일을 접고 또다시 평생의 직업ㅡ교직생활의 련속으로 새로운 로무생활의 보람찬 나날을 맞이하게 되였다. 나는 아침 6시부터 평화시장에 출근하여 사모님에게 중국어도 가르치고 사모님의 장사도 도와드리다가 12시면 퇴근하여 오후시간과 저녁시간에는 학생들을 상대로 중국어를 가르쳤다. 동대문 평화시장 사모님은 옷장사를 하는 분인데 중국의 무역회사와 거래가 있어 50대중반나이에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것이다. 타고난 언어적천부가 있어서인지 발음도 정확하고 열심히, 빨리 배워서 평상시 가게에서 간단한 일상대화는 중국어로 나누었는데 가끔 나로 하여금 《여기가 중국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가지게 하였다. 사모님은 나를 《아줌마》라 부르지 않고 꼭 《로우스(老師)》라고 불렀는데 이웃가게 사모님들은 처음에는 저 아줌마 이름이 참 이상하다, 웬 《로우스》야 했다면서 사모님의 해석을 듣고는 모두들 한바탕 웃은 일도 있었다. 사모님은 중국가수 등려군(鄧麗君)의 노래를 아주 즐겨들었는데 《달콤해(柑蜜蜜)》, 《내마음 달과 함께(月亮代表我的心)》 등 노래를 중국어로 제법 잘 불렀다. 지금도 가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모님의 인자한 모습과 함께 지내던 나날이 그리워지곤 한다. 사모님은 남자성격의 스타일로 장사도 남보다 씨원하고 통쾌하게 하고 옷차림도 젊은이들처럼 세련되게 입었으며 마음씨도 아주 착한 분이였다. 시장에서나 길거리에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꼭 도와주었고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항상 멀리 집떠나 있는 내가 고생이 많다며 쉬는 날이면 종종 식당에 데려가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철따라 옷도 챙겨주었다. 내가 그 사모님한테서 량심껏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게 된것은 전적으로 나에 대한 사모님의 믿음때문이였다. 요즘은 부모자식간에도 못믿을 세월이라지만 사모님은 멀리 타국에서 온 나에게 매일 농협은행, 국민은행에 송금, 저금하라면서 현금과 통장을 맡겼고 사모님이 가끔 병원에 가거나 일보러 갈 때면 가게도 나에게 맡겼다. 그 믿음이 어떤 물질적이거나 경제적인 방조보다 더 소중하고 고맙고 감사했던것이다. 한번은 년세가 든 할머니 한분이 가게에 와서 여러 사이즈, 여러 색상으로 고르고 또 고르면서 물건을 사기에 요구대로 열심히 해주었더니 고맙다면서 기어코 팁을 주는것이였다. 사양하다 못해 받아서 사모님에게 드렸더니 모두들 평생 장사를 해왔지만 손님한테서 팁받는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칭찬을 거듭했다. 2003년 4월 큰딸이 결혼날자를 받게 되였고 나 역시 몸이 안좋아서 귀국을 택했다. 식당일을 그만둔 후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한푼이라도 아끼느라고 창문도 없고 여름에는 벽에 물이 흐르고 겨울에는 수도가 꽁꽁 어는 10만원짜리 월세방을 맡았는데 습기로 병이 왔는지 무릎관절이 퉁퉁 붓기면서 몸이 안좋았던것이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많은 돈을 팔고와서 겨우 빚을 갚고 번 돈은 얼마 안되지만 어쩔수 없이 4월 17일 할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떠나기전 동대문 사모님은 딸결혼식에 보태쓰라며 부조도 하고 함께 있는동안 수고많았다면서 비행기표도 끊어주었다. 그리고 잠실 신성식당 사모님도, 이웃가게 사모님들도, 중국어를 배우던 학생들도 언제 또 만날수 있겠냐며 부조를 아끼지 않았다. 모두들 요즘은 각박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 얼마나 사랑많고 인정많은 아름다운 세상인가! 귀국하여 어언 3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고국의 고마운 분들의 뜨거운 정을 나는 한시도 잊은적이 없다 . 부모님이 태여난 땅을 찾아보고 두 딸의 대학학비를 마련해보자는것이 한국행의 최초 목적이였다면 고난많고 힘겨운 로무생활의 시련을 겪으면서 고국의 고마운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내 생에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살아있을것이다. [칠대하] 리향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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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민족은 원래 정이 많은민족임을 깨닫읍니다 우리의 6-70년대 어머니들의 억척스러움이 유럽이400년,미국이200년 일본이100년 걸린현대화를 우리한국은 불과30년만에 이룩한 저력이 아닐까요 정말 감동적인 글을 올려주신 개발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글을 읽는 사람마다 느낌은 틀리겠지만 이 퇴직로교원의 가족들이, 아니, 가족을 위하여 한국땅에서 피땀흘리며 고생하시는 중국교포들의 가족들이 이 글을 보시고 깊은 사색을 하시기를...고생많으셨습니다...그리고 잘 하셨습니다...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우리 조선족인민교원이라는 영예에 빛을 띄우는 의무를 잊지 않았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갑니다...
영광이 있으라! 조선족인민교원!
가슴이 찡합니다. 장하십니다...30여년을 교단에서 근무하신 선생님! 그 괘로움을 이겨내며 고국땅에서의 쓰고 단맛의 느낌, 무억으로 형용하리오~~~~ 감동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