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베스크 / 안영희
내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나를 보낸 계절은 가고 없었네
창창울울 휘늘어졌던 나뭇가지
하늘 아래 그 초록 城벽 숭숭 뚫려
숨어야 할 내 영혼 더는
품어 주지 못했네
- 알라 이외 신은 없고
모하멧은 알라의 사도이시다 -
허공 꿈꾸듯 유영하는 글씨체
현판 걸린 블루모스크, 지붕 안에 들인
꽃덩굴 너울지는 알라의 들판
그 몽환의 색채보다 더 현란하게 물들어 온
내 마음속 아라베스크들도
이내 지워내야 할 벼랑 끝 단풍이다,
마중인사를 했네
불가不可 불가不可의 팻말을 든
인식의 쓸쓸한 시절이
벌써 마중하고 있었네
- 안영희 시집 <내 마음의 습지> 2008
쥐똥나무를 읽다 / 안영희
양귀비 같은 봄날이라,
목마름도 흠뻑 바람조차 그만이라
덩달아 쑤욱쑥 하늘로
깃발을 흔들어서는 안 되지
자작나무 버드나무 미루나무 나무나무나무
목욕 끝낸 후 풀어헤친 머릿단들
봄볕의 흰 손가락 애무하는데
자를 댔었나 봐 수평도 저리 반듯하게
산목숨을 친 직각의 초록면 색 부셔라
전지가위질 당한 쥐똥나무들
너는 나무가 아니고 울타리였었지
사람의 허리께 이상 키를 올려서는 안 되는 거였지
보기 좋은 것들 더욱 돋보이게끔 몸 낮춰 에워싸는
세상의 보조물, 주인공들 잠들지 말고 지켜 줘야 할
너의 배역은 키 작은 불침번
수십 층 밀집빌딩 도심의 뒷그늘에
유독 주소 튼튼히 뿌리박는, 치사량의 공해도
밥으로 식사할 수 있는
목숨의 힘이 무엇인 줄 아느냐
자라는 대로 윗동이 잘리면
팔다리가 그대로 무기일밖에 없는 슬픔을 아느냐,
이 아침 다시 잘려
아, 아, 아… 토해내고 있는
쥐똥나무, 저 치명적인 향내!
- 안영희 시집 <내 마음의 습지> 2008
내 청춘이 지나듯이 - 후암동 야시장 / 안영희
버스가 떨궈 준 후암동 종점
산비탈을 감는 동네의 층계는
뒤트는 지점 쯤 간신히 흐릿한 외등빛 번질 뿐
어둠의 긴 통치영역이었는데요
불현듯 남산 중턱에
불 밝힌 야시장이 난만히 피어 있었어요
털이! 터어리이요! 외치는 노점에서
무더기의 생선을, 과일봉지를 받아 안으며
카바이드 불빛아래 때깔 자랑하는 늦가을의 홍옥처럼
배고픔도 잊은 채 문득 홍조가 드는
스무 살 즈음이 있었어요
옷깃 여미며 여미며 견디던 하루의 한기가
어느 결엔지 훈훈히 풀리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의
무심한 위로
기다리는 건 처마 밑에 쌓아둔 서너 줄 연탄,
중고품 앉은뱅이책상 하나뿐인 불 꺼진 방 한 칸
…오늘저녁은 옷이 얇은 어느 외국인 노동자가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한사코 어둠이 뭉개는 생의 비탈,
기나 긴 층계를 올라가고 있을까
남산 중턱께에 홀연히 불빛 환한 아라비안나이트,
후암동 야시장에서 얇은 지갑을 열며
시린 마음자리 문득 난방이 들고 있을까
이마를 마주 댄 낮은 지붕아래 해방촌의 긴 골목
저녁 숟가락들 부딪는 소리 들으며
내 청춘 지나듯이,
이 저녁은 가난한 누가 지나가고 있을까.
가슴에 시장봉투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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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습지는 시의 보고(寶庫)
자연에서 습지는 육지와 물을 이어주는 중간단계의 생태적
환경 특성을 갖는다. 습지는 오랜 세월 동안 퇴적물이 쌓여
먹이사슬이 잘 형성된 곳이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습지는 다양한 생물들이 산란하고 서식하는 가장 생산적인
생태계인 셈이다. 따라서 안영희 시인의 시집 <내 마음의
습지>에서는 끊임없이 움트고 자라나고 사랑하고 새끼치며
살아있는 시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얻은 폭 넓은 경험과 한 덩어리의
흙을 껴안고 종일토록 흙 물레를 돌리며 몸과 마음을 바쳐
얻은 깨달음이 자양분이 되어 시의 밭이 나날이 울울해지고
있었다. 시인의 원초적인 감성과 때묻지 않은 마음의 습지에서
길러낸, 혹은 자생한 시들은 하나같이 건강하고 든실했다.
제 1부 <쥐똥나무를 읽다> 에서는 “20억만 년의 절대 고독”
(- 히말라야,히말라야 3)인 히말라야의 원시와 “전지가위질
당한 쥐똥나무들”(- 쥐똥나무를 읽다)의 반듯하게 잘려진
목숨이 공존하고 있었다. “매순간 전율하며/ 매순간 영원을
바치는”(- 이과수의 새) 이과수의 새와 정복자의 총구 앞에
목숨을 날리는 과라니족, 그리고 동업중생인 안영희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너무 춥기만 한/ 詩의 겨울날”(- 커피를
간다)이지만 살아서 단 한 점의 그림밖엔 팔지 못했다는
빈센트 반 고흐가 시인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이
된다.
제 2부 <모래톱>에는 과거의 추억과 폐허의 시간과 화해하는
시편들과 여행시들이 실려있다. 이국의 풍경도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낯선 곳도 곧 익숙해진다.
“사과 볼의 소녀”(- 사과)가 견디며 건너야하는 “폭약의 여름”,
“태풍의 밤”이 우리네 삶이겠기에 공감이 간다. <사과>를
소리내어 몇 번 읽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 왔다.
/ 주경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