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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4월 정기법회 법문
사무량심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잠재능력을 가진 신비스러운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성인의 성품과 죄인의 기질이 모두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들 중 부정적인 성향이 어떤 순간에 자신을 무너뜨리며 겉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악을 드러내는 부정적인 성향을 제거하고, 다른 한 면인 덕성을 개발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귀중한 보물인 긍정적인 성향을 캐내기 위해서는 오로지 끈기 있는 인내력으로 꾸준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강력한 파괴적인 악은 성냄입니다. 이러한 악의 힘을 가라앉히고 인간을 숭고하게 하는 좋은 덕이 사랑입니다.
잔인성은 또 다른 악입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널리 행해지는 많은 두려움과 잔혹한 행위를 이끌어 냅니다.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은 연민, 동정(悲)심입니다.
시기심은 또 다른 악입니다. 이것을 자신을 망치며, 불건전한 경쟁관계와 위험한 적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해독스러운 악에 가장 효과적인 처방은 같이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입니다.
인간의 정신적 균형을 깨뜨리는 것은 즐거운 것에 집착하는 마음과과 싫은 것을 혐오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것은 평정(捨)을 발전시켜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을 사무량심이라고 합니다. 이 ‘사무량심’의 빨리어인 ‘brahmavihāra’은 ‘숭고한 조건의 형태, 숭고한 상태, 또는 신성한 장소’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덕들은 인간을 숭고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인간을 이 삶에서 신앙, 피부색, 인종, 성별 그리고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의 세계의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이 세계를 완전한 평화와 조화 속에 살 수 있는 낙원으로 바꿀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이 사무량심은 동물들을 포함해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포용합니다. 종교적 믿음에 관계없이, 우리는 이러한 성스러운 덕을 닦을 수 있으며, 자신과 타인들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1. 자애(慈愛)
첫 번째 숭고한 마음은 자애, 즉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애심, 사랑이란 모든 존재들이 번영하고 행복하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애적인 성품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행복을 진실로 바라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는 자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생명 받쳐 자기의 외아들을 보호하듯, 모든 존재들에게 자신의 한량없는 마음을 계발하고, 사랑의 마음을 널리 베풀어 가라. 위로 천상에서 아래로 지옥에 이르기까지 일체에 걸림 없이 증오나 원한심 없이 하라.”
자애로운 마음은 고통을 유발시키는 육체적 사랑도 아니고 개인적 애정도 아닙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단순한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웃과 외부인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동물들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포용하기 때문에 단순한 보편적인 형제애가 아닙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정치적인 형제애, 민족적인 형제애, 또는 국가적 형제애 또는 심지어 종교적 형제애도 아닙니다. 어떤 국가주의자들은 국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때때로 죄 없는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을 단지 그들이 금발 또는 파란 눈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백인은 흰 피부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다른 색이 혼합된 사람들을 때때로 학대했습니다. 그들은 흔히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폭탄을 무자비하게 퍼부으면서 수백만을 죽이는 잔인한 전쟁을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2차대전의 비참한 사건은 인류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례일 것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또한 종교애도 아닙니다. 이른바 종교적인 형제애라는 한심한 제한 때문에 인간의 머리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잘리웠고, 진실을 말한 사람들을 불로 지지고 살아있는 채로 물속에 던져 넣었고, 잔인한 전쟁들이 치루어졌습니다. 문명화되어 보이는 20세기, 21세기에도 어떤 종교의 추종자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을 단지 자기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거나 냉혹하게 박해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숭고한 사랑은 이러한 종류의 편견적인 형제애를 모두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그 대상과 범위에서 제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차별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즐거운 것과 즐겁지 않은 것,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악한 자와 선한 자,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향기로운 사랑의 축복을 평등하게 쏟아 붓습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친구, 적 그리고 중립적인 자에 대해서 똑같이 대하듯이 우리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정도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 무한한 자애심을 발휘할 때 자신이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극치는 자신을 모든 존재들과 동일화시키면서 자신과 다른 것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나’란 것은 전체에서는 잃어버리고 차별 없이 하나란 것이 실현됩니다.
자애로운 마음과 정반대되는 것은 성냄, 악의, 미움, 혐오 등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성냄이나 복수심에 불타는 행위와는 함께 공존하지 못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통하여 소멸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애로운 마음을 통하여 그것들은 사라진다.”
자애로운 마음은 성냄을 극복하는 성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해 미워하는 생각을 품지 않게 합니다. 자애심을 갖고 있는 자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도 않습니다.
교묘한 간접적인 적이 친구로 가장해서 자애심을 공격합니다. 이것은 소유적인 ‘애정’입니다. 애정은 사랑을 가장하여 대상을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를 토대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보입니다. 그래서 소유되지 못할 때 자신도 모르게 사랑과는 정반대의 방향인 슬픔, 증오, 미움, 원망으로 나아갑니다.
부모들은 분명히 그들의 자식에 대한 애정을 피할 수 없으며, 자식의 부모에 대한 애정, 남편의 부인에 대한 애정, 그리고 부인의 남편에 대한 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애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합니다. 이 세계는 상호간의 애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타적인 자애심은 평범한 애정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정에서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정이 많은 태도는 자애심의 주요한 특징입니다. 자애심을 닦는 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증진시키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는 모두에게서 선과 아름다움을 찾을 뿐, 추함을 찾지는 않습니다. 추함과 결점을 찾을 때에도 그것을 비난할 목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위하여 찾을 뿐입니다.
자애심을 지니면 다음과 같은 기쁨이 찾아 듭니다.
자애심을 닦는 자는 행복하게 잠을 잡니다. 그는 미움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자연히 한번에 깊은 잠에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자마자 즉시 깊은 잠에 빠집니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듯이, 그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일어납니다. 인정이 많고 동정적인 사람들은 흔히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미소 짓는 얼굴로 일어납니다.
자애로운 사람은 잠자면서도 나쁜 꿈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깨어 있는 동안에 자애심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잠을 잘 때도 또한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깊은 잠에 빠지거나 또는 즐거운 꿈을 꿉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를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이 미소 짓는 얼굴로 거울을 바라볼 때, 비슷한 얼굴이 그를 맞이 할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 행동하는 대로 바깥 세계가 자신에게 반영됩니다.
가장 선한 사람에게 악이 있고, 가장 악한 사람에게 선이 있는데,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추함을 보아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모두에게서 선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모두에게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자애심을 닦는 자는 인간 이외의 존재로부터도 존경을 받습니다. 동물들 또한 그에게 이끌립니다.
만약 그가 어떤 피할 수 없는 업을 받게 된 인연이 아니라면, 그의 자애심에 의해서 독과 그 밖의 것들로부터 면제될 수 있습니다.
자애심은 활력 있는 건강한 힘이기 때문에 적대적인 자극에 대해서는 중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미워하는 생각이 이 육체에서 유독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자애로운 생각도 건강한 육체적 효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애심은 타인을 기쁘게 합니다.
붓다께서 깨달은 후 고향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겨우 일곱 살 밖에 안 된 아들 라훌라는 부처님께 다가가서 말했다.
“오, 구도자이시여, 당신의 그림자조차 저를 기쁘게 합니다.”
라훌라는 부처님의 자애로운 힘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그와 접촉하는 사람들도 또한 그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자애로운 힘 때문에 보이지 연들이 그를 보호합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정신적 집중을 빠르게 합니다. 그의 마음이 적대적인 파동에 의해서 혼란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자신의 얼굴표정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얼굴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면 타고날 때부터 못난 사람이라도 ‘못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화를 내면 심장은 평소보다 두배 내지 세배 더 빠르게 피를 분출해냅니다. 미워하면 피가 얼굴까지 올라가서 빨갛거나 검게 변합니다. 때때로 얼굴은 보기에 역겨울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자애로운 생각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피를 맑게 합니다. 그러면 얼굴은 사랑스러운 모습을 나타냅니다.
자애로운 마음을 지닌 사람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에 대해서도 미워하는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그의 고요한 얼굴은 그의 평화로운 죽음을 반영합니다.
자애로운 사람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나면 그는 다음 생에 행복한 상태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러한 필연적인 세속적 기쁨 이외에도 자애로운 마음은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올 수도 있습니다.
붓다 시대에 한번은 술 취한 코끼리가 붓다를 짓밟으려고 막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침착하게 자애로운 마음을 코끼리에게 발산하자 코끼리는 순한 양이 되어 붓다 앞에 무릅을 꿀고 온순하게 앉았다는 유명한 얘기도 있습니다.
인간이 파멸적인 핵무기와 다른 파괴적인 무기에 위협당할 때 과연 자애심을 닦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하늘 위에서 폭탄이 비오듯 쏟아질 때 힘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을까? 불교의 자애심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하는 그러한 치명적인 폭탄에 대한 유일한 대답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애로운, 사랑의 마음은 어떻게 닦을 것인가?
자애심은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자애심으로 보호되면 모든 적대적인 혼란과 부정적인 생각이 차단됩니다. 그대는 이제 언제나 참는 자가 되며, 최선을 다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성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자신이 행복의 빛을 발하면서, 일상적인 생활의 과정에서 자애심을 닦으면서,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이 스며들게 할 것입니다.
그대가 평화로 가득 차고 미워하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자애심을 발산하는 것은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이제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개별적 또는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행복하고 고통, 질병, 걱정, 성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자애심을 발산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애로운 생각을 친지와 친구들을 향하여 공평하게 나누어 줍니다. 다음은 자기 자신의 가깝고 사랑하는 자들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도 고통, 질병, 걱정, 성냄에서 벗어나서 평화와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비록 어느 정도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마침내 자애심을 똑같은 방법으로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발산해야 합니다. 자애심을 닦아서 자신에게 적대감을 갖는 사람에게 대해서 친절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면, 그대의 성취는 더욱 자랑스럽고 칭찬할만한 것이 될 것입니다.
2. 연민, 동정심(悲)
숭고한 두 번째 덕은 동정심입니다.
이것은 다른 존재들이 고통을 겪을 때 선한 마음이 감화되거나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의 중요한 특성은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려는 마음가짐입니다. 동정적 마음을 가진 사람은 꽃보다도 더 부드럽습니다. 그들은 고통 받는 존재들을 구재해줄 때까지, 편안하게 쉬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동정적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삽니다. 그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는 고맙다는 인사말도 바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기회를 찾는다.
이 연민, 동정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보다 더 순순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집착 혹은 소유의 성향으로 나아가는 성향이 기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민의 마음은 매우 순수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듯이, 정신적으로 부유한 사람 또한 비록 물질적으로 부유하더라도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을 동정하고 그들을 숭고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유함 하나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물질적 보물이 아니라 정신적인 보물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빈곤 이상으로 질병이 전 세계에 걸쳐서 지배하고 있다. 붓다께서 아픈 비구를 손수 모범을 보이면서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다.
“아픈 자를 돌보는 자는 바로 나를 돌보는 자이다.”
악하고, 잔인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보다도 더 동정을 받을 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어머니가 모든 자식들에게 똑같은 동정심을 갖고 있지만 어머니는 아무래도 아픈 자식에 대해서 더 동정적으로 관심을 가집니다. 마찬가지로 동정심은 정신적으로 아픈 자들에 대해서 쏟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병은 자신의 인격을 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붓다께서는 창녀 암바팔리와 살인자 앙굴리말라에 대해서 큰 동정심을 갖고 있었고, 둘 다 나중에 붓다의 제자가 되어서 다시 자신의 인격을 올바르게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사악해도 그의 마음 깊은 속에는 위대한 선함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어떤 순간에 가슴에 와 닿는 한마디의 말이 그 사람의 모든 삶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3.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
세 번째 숭고한 덕은 함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호의적인 또는 적극적으로 이해해주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직접적인 경계의 대상인 시기심을 제거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반적인 상황을 위험에 처하게 해서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은 질투심입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듣거나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패는 기뻐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도저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칭찬하고 축하해주는 대신에 그를 파멸시키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함께 기뻐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과 더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은 자신을 망치는 질투심을 근절시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면에서 이것은 다른 삶들을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닦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발전과 번영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성공을 기뻐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쟁자의 성공을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쟁자들을 망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장애들을 만들어내면서 기쁨을 찾곤도 합니다.
자애로운 마음과 동정하는 마음을 닦는 것은, 많은 노력과 강력한 자기의지를 요구하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닦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서양의 국가들이 동양의 번영을 기뻐하고 동양은 서양의 번영을 과연 기뻐하고 있을까? 도덕적인 발전을 가치로 내걸고 있는 종교 중에 다른 종교는 물론 다른 종파의 정신적인 발전을 기뻐하는 종교가 있을까?
심지어는 스승이 성공한 제자를 시기하고, 형제나 자매가 다른 형제나 자매를 시기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개인이나 단체들이 자신들을 숭고하게 하고 내적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닦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4. 평정한 마음(捨)
네 번째 숭고한 상태는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upekkhā 평정으로 불립니다. upekkhā는 어원학적 의미는‘공평하게 바라봄’ 이것은 집착이나 혐오가 없으며, 좋아함이나 싫어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경멸과 모욕은 인류에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불행히도 이 세계는 착하고 덕스러운 사람들이 부당하게 비판과 공격을 받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균형적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가히 존경받을 만 합니다.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판, 고통과 행복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여덟 개의 세속적인 조건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이러한 상태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때 동요됩니다. 인간은 칭찬받을 때는 의기양양하고, 비난과 모욕을 받을 때는 침울해집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단단한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고 완전한 평정을 닦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앞의 세 개의 덕목과 함께, 평정심도 직접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집착을 갖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는 무감각하거나 어리석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평정한 마음은 집착과 혐오감을 버립니다. 공평한 태도는 이것의 주요한 특성입니다. 평정을 닦는 자는 바라는 대상에 대해서 이끌리지도 않으며, 바라지 않는 대상을 혐오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죄인과 성인을 똑같이 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차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상기한 바와 같이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애심은 모든 존재를 포용합니다. 동정심은 모든 괴로움을 포용합니다. 기뻐하는 마음은 모든 번영하는 것을 포용합니다. 그리고 평정은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즐거움과 즐겁지 않음을 포용합니다.
사무량심은 수행 밖 수행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적으로는 성실하게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을 ‘알아차림’하면서, 외적으로는 사무량심을 부단히 실현하며 닦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 생에서 수행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