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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 제 10 구간 산행기
(공덕재 ~ 하풍고개)
1. 산행일자 : 2007년 9월 2일 (일요일)
2. 산 행 지 : 오서산 금자봉(539m) - 충남 홍성
3. 출발일시 : 9월 2일(일) 04시
4. 산행계획
(1) 산행 거리 : 총산행 약 19.6km(+3.4km, 오서산왕복)
(2) 소요 시간 : 11시간(+2시간, 오서산왕복) 정도
(3) 구간별 거리
공덕재--2.6km--백월산(565m)--2.4km--스무고개(120m)--1.0km--은고개(170m)--1.9km--물편이재(610번도로,120m)--2.4km--우수고개(220m)--2.5km--가루고개(370m)--0.3km--금자봉(539m)--1.0km--공덕고개(330m)--2.5km--하풍고개(80m)--1.2km-- 꽃밭굴도로(70m)--1.8km--생미고개(96번도로,60m)
(4) 구간별 소요시간
① 수원(04:00)∼서해안고속∼광천(06:10/아침/06:40)∼용천∼619번∼공덕재(07:10)
② 공덕재(07:20) → 백월산(08:50) → 시온산수양원(10:10) → 스무고개(10:40) → 스무고개(08:10) → 금계동안부 십자로(11:10) → 물편이고개(12:20/점심/12:50)→ 새말안부(13:05) →상월안부(13:50) → 위수고개(14:10) → 가루고개(14:50) → 금자봉(15:10) → 공덕고개(15:30) → 임도(15:55) → 하풍고개(17:00) → 꽃발굴고개/화계리1구(17:25) → 생미고개(18:30)
③생미고개(18:40)∼장곡면(19:10/저녁식사/20:00)∼광천IC∼서해안고속도로∼수원(22:30)
④ 탈 출 로 : 택시(041-641-2047, 011-433-3131)
○ 아침식사 : 광천읍 백마식당(041-641-2607),
○ 점심식사 : 화성면 대흥갈비 내장탕(041-942-4006)
○ 저녁식사 : 홍성군 장곡면 예당큰집한정식(041-642-3833),
5. 산행의 실제 (산악대장 제공 자료)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약 20.0km(오서산 왕복 3.4km 포함), 10시간 45분정도
(2) 일정 및 소요시간
①수원(04:20)∼영동.서해안고속∼광천(05:40/06:20)∼생미고개(06:30)∼공덕재(06:50)
② 공덕재(06:58) → 백월산(08:12/08:31) → 시온산수양원(09:12/09:33) → 스무고개(09:53) → 금계동 안부사거리(10:21) → 물편이고개(11:10/화성에서 점심/12:30) → 새말안부(12:45/12:52) → 위수고개(13:52) → 가루고개(14:34) → 금자봉삼거리(14:54)[ → 내원사사거리(15:12) → 오서산(15:43) → 금자봉삼거리(16:20)] → 공덕고개(16:34) → 상풍고개(17:15) → 하풍고개(17:44)
③ 신풍리 하풍마을(18:15)∼장곡면(18:30/저녁식사/19:45)∼청양∼천안∼수원(22:00)
(3) 날 씨 : 비(산행 시작부터 온 종일 비가 내림)
6. 산 행 기
[1] 山行 前 會員들의 動靜과 準備
지난 8월 25일(토요일) 연일 暴炎 注意報가 내려진 가운데도 惡戰苦鬪를 하며 금북정맥 9구간(학당고개 ~ 공덕재)을 산행 했고 한 주 건너 또 10구간(공덕재~생미고개) 산행을 하게 되었다.
박상호사장 일찌감치 명단을 올렸고 강동규사장도 로타리클럽 회원들과 산행이 있는데도 참가를 해 보겠다고 한다. 그런데 노부장, 지난 산행 때 잡목과 가시덤불로 어려움을 겪고 벌에 쏘인 충격이 심했던지 불참 한다하고 누구보다 금북정맥 완주에 집착을 보였던 장부장,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는지 이번 산행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처음으로 참가했던 강영재부장도 다른 산행(사량도 지리산)이 있어 갈 수 없다고 한다.
윤사장, “일요일 예식장 가기를 취소하고 정맥 10구간 갑니다. 사실은 참가 인원이 너무 적어 나까지 불참하면 ...........그 놈에 의리가 뭔지”라며 참여 하겠다고 한다.
다른 회원이 가겠다고 하면 지난 산행에 참가했던 회원이 빠져 매회 마다 금북정맥 참가 인원은 6,7명을 넘지 못한다. 장기간, 장거리, 장시간에 걸쳐 진행하는 산행이라 열일을 제쳐 놓고 맥을 이어 보겠다는 의지가 없고서는 완주를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산악대장만 남았는데 빠진 부분을 개별로 보충해 마지막 구간 때 완주한 대원이 늘었으면 좋겠다.
8월 31일과 9월 1일, 카페의 금북정맥 리풀란에 산악대장의 글이 올라 와 있다.
○ 9월 2일 정맥산행지인 홍성지방 비 올 확률 37% 이고, 이제 무더위는 점차 수그러들어 비교적 선선해지는 기온으로 산행할 만 한 날씨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이번 구간이 모처럼 비교적 긴 구간이므로 도시락 없이 필요 장비만 잘 챙기셔서 가볍게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 백월산 오름과 오후 오서산 금자봉 오름이 고비입니다.(8월 31일)
○ 9월 2일 비올 확률 오전 65%, 12시 이후 40% 입니다. 대비하세요.(9월 1일)
점심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비가 온다고 하니 걱정이다. 세상사가 塞翁之馬요 好事多魔라 하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9월 1일 새벽부터 시작한 비가 오후 늦도록 그치지를 않는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내일 우중 산행을 대비해 한동안 잊고 있던 스팻치도 꺼내고 우의도 챙겼다. 간편한 신발 덮개도 만들고 ---.
[2] 산행 당일 출발과 산행 전의 상황
9월 2일, 03 : 00시 알람 소리에 급히 눈을 떴다. 물, 간식, 우의, 등산복, 산행 후 갈아입을 옷 등을 챙겨 배낭에 넣고 산행 갈 채비를 했다. 박사장, 전화. 5분 후에 집 앞으로 나오란다.
밖에 나와 보니 비는 그쳤지만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었는지 사방이 캄캄하다. 승차, 가다 한일 아주머니(이정연씨) 태우고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에 도착했다. 강동규사장 못나온다 하고 안교장, 약속시간 보다 20여분 늦어 도착했다.
6시경,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미리 예약해 둔 광천읍 백마식당(041-641-2607) 앞에 도착했다. 邑, 외곽지역이어서인지 아침 손님으로 우리 밖에 없다. 소내장탕으로 아침 식사 후 오늘 산행의 종착지, 생미고개에 인접한 장곡 농협 마당에 주차를 시키고 택시를 불렀다.
광천 IC를 통과하면서 조금씩 뿌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다. 기상 예보가 틀렸으면 했는데 그렇지 않다. 우중 산행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난 9구간 때 흘린 땀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 내리는 비라는 생각도 든다. 우선은 더위를 식혀 주는 비요, 물 무게를 덜어주는 비요 먼지로 찌든 산색을 선명하게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3] 공덕재, 산행 시작
장곡면 옥계리, 화성면 정자리(619번 도로)를 거쳐 오늘 산행 출발지 『공덕재』에 도착(06 : 50분경)했다. 빗속에 산행하자면 고생을 하겠다며 잘 다녀오라는 덕담을 남기고 두 분 기사는 떠나고 우리는 곧바로 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빗줄기가 더 굵고 세차게 내린다. 신발 덮개와 스펫치를 차고 雨衣도 꺼내 입었다. 1회용 비닐 雨衣라 산행 중 잘 버텨 줄지 모르겠다.
07 : 10분경, 출발을 했다. 이번 산행은 지난 산행 때 계획만 세우고 오르지 못한 『백월산』부터 힘겹게 올라야 한다. 백월산은 금북정맥상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공덕재에서 백월산까지는 350여m의 고도를 높이며 힘들게 올라야 하고, 가루봉에서 금자봉까지 170여m 정도 올라 마루금에서 약 1.7km 벗어나 있으나 금자봉 주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정맥상 최고봉인 오서산(790.7m)을 산행 끝머리에서 올라야 한다. 처음과 끝이 하나같이 힘들게 하는 산행이다. 옛말에 ‘매도 먼저 맞으라.’ 말 같이 다리 힘이 충만할 때 첫 산행 고비를 넘길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4] 백월산 등정
(1) 백월산 가는 길
아스팔트길을 건너 잠시 진행하다 도로 옹벽을 짚고 올라 절개지를 오르는 것으로 산행이 시작 된다. 절개지 능선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틀어 임도 따라가다 갈림길에서 숲 속 좁은 길로 들어선다. 묘를 지나고 임도 삼거리도 지난다. 지난번 산행 때와 마찬가지로 잡목과 가시나무가 서로 엉켜 헤치고 지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더하여 억새가 키보다 높게 자랐는데 비를 흠뻑 맞은 상태라 헤치고 지날 때마다 얼굴에 스치고 온 몸에 물이 튄다. 오늘은 始終 빗물과의 힘겨루기를 해야 할 것 같다.
(2) 백월산 오름 길
잡목과 가시나무, 억새와 칡넝쿨을 헤치고 나가니 오름길이 급해진다. 안개가 끼고 비가 많이 쏟아지는 터라 산 높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백월산 오름 길이 시작된 것 같다. 오르고 올라도 송림에 가린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경사각도 급하고 비에 젖은 땅이라 눈길을 오르듯 미끄럽다. 가능하면 젖은 낙엽을 밟고 스틱에 힘을 주며 오르다보니 팔까지 저려온다.
산봉 중간쯤 올라 잠시 휴식을 가졌다. 땅이 젖어 있어 앉아 쉬기는 어려웠지만 우의 끝자락을 방석삼아 고단한 다리품을 풀고 거친 숨을 고르다보니 찬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든다. 휴식도 오래 가질 수 없어 다시 급경사 산봉을 오르기 위해 다리에 힘을 모아본다.
(3) 백월산 정상
08 : 15분경, 백월산 능선에 올랐다. 꽉 막혔던 숨이 일시에 툭 터지는 것 같다. 산 능선에 올라보니 보기 어렵던 바위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모양이 특이하다. 하나같이 매끄러운 바다 돌을 날라다 시멘트를 이겨 만든 것 같다.
이러한 바위를 「역암」이라고 하는데 「역암」이란 바다로 흘러 들어간 자갈사이에 모래나 진흙이 채워져 함께 굳어져 만들어진 퇴적암으로 오랜 세월 습곡작용으로 횡압력을 받아온 바다지각이 서서히 융기해 백월산의 정상을 이룬 것이라 한다. <출처 : 먼곳에의 동경, 금북정맥 종주기, http://blog.daum.net/mk490/1193332 중에서>
바위지대를 따라 3분여를 더 가니 『배문』이라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가 지시한 쪽을 보니 안부를 형성한 능선 아래로 깊은 협곡을 이루었고 급경사로 오르내리기는 힘들어 보인다. 배가 드나들 수 있는 門 같이 생긴 협곡의 지형에 착안하여 붙인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배문』에서 다시 2분 정도 더 진행하니 『줄바위』 이정표가 나오는데 산 능선에 앞서 본 크고 작은「역암」이 열을 서듯 널려 있다.
『줄바위』를 지나 도착한 곳이 『백월산(570m)』 정상이다. 정산에는 남양 산악회와 만수 산악회에서 설치한 두 개의 표지석과 백월산 ․ 성태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정상을 오른 사람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마루도 마련해 놓았는데 먼저 온 대원들이 후미 팀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4) 백월산! 어떤 산?
『白月山(570m)』은 청라면소재지에서 북동방향으로 36번 국도를 따라 화성 쪽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백월산이 보인다. 상봉(백월산 정상을 부르는 이름) 남쪽으로 360m높이의 월치(月峙)(다리재)를 사이에 두고, 높이 631m의 성태산(星台山)과 이어지고 이 산줄기는 다시 서쪽으로 문봉산과 성주산(聖住山)으로, 다시 서남방향으로 옥마산으로 이어져 내린다.
백월산은 보령시 청라면과 청양군 남양면의 경계를 이루는 높이 570m의 높고 험준한 산이다. 보령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보령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일반인들이 그리 쉽게 찾아 오를 수 있는 산도 아니다. 위치적으로 볼 때 보령에서는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산이고, 산세가 비교적 험준하며 접근하는 교통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쉽게 찾아지는 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부터 흰 달이 떠오른다고 해서 「백월티, 백월산」이라 하였는데 그저 「月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래 동네 이름도 조선시대부터 다리티(월티)마을이라 하였다. 윌치(다리재)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리고 『다리틔(월티)』마을 동(東)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다리재」또는 월티(月峙)라고 하며 백월산(白月山)줄기에 있고 나원리(蘿院里)에서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된다. 조선(朝鮮)때 김시습(金時習)이 한(恨)을 품고 넘었던 고개로 매월당(梅月堂)을 추모하는 노래가 숨어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고개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고개 지명(地名)따라「다리틔」라고 부르고 또한 「월티」라고도 부른다. <출처 : 보령시청 홈페이지>
이 백월산은 금북정맥의 최 남단으로 금북정맥이 남단으로 내려오다가 방향을 틀어 서북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장소가 되는 곳이다. 따라서 금북정맥은 백월산에서 내려서다 오서산으로 향하지 않고 직진하여 성태산(624m), 조공산(399m). 월하산(423m), 월명산(544m), 옥녀봉(38m), 봉림산(346m), 오석산(127m), 남산(147m), 서대산(104m), 중대산(102m)을 지나 장항 앞 바다 금강 하구에서 끝을 맺는 또 하나의 산줄기를 이룬다.(이를 금북기맥(錦北岐脈) 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공식명칭이 아니고 그냥 편의상 붙인 이름이며 도상거리가 69.4km이다.) <퍼온 글>
그리고 백월산이 용봉산에 비해 바위가 없는 편인데 전설에 따르면 백월산과 용봉산에 각각 힘이 센 장수가 살았다고 한다. 용봉산과 백월산사이의 마을에 마음씨가 곱고 예쁜 소향이란 아가씨가 있었는데 두 장수 모두 소향의 마음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두 장수는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서로 상대방을 향해 바위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싸움이 끝났을 때 백월산에 있던 바위들은 모두 용봉산으로 던져졌고 백월산의 장수는 싸움에 이겨 소향이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로 백월산 산세가 북쪽 화성쪽으로 머리를 숙이는 모양이어서 화성면에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 백월산의 기점과 종점으로 이용되는 마을 금곡은 '거문고 골짜기' 라는 뜻으로, 마을 지형이 거문고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백금리도 '하얀 거문고' 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늘 산행의 첫 고비 백월산 높은 봉(570m)에 올랐으나 쉼 없이 내리는 비와 안개로 주변 경광을 조망할 수가 없다. 산의 精氣도 받고 浩然之氣도 길러야 했는데 간식과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산정의 감회를 대신하고 하산의 걸음을 옮겼다.
[5] 스무고개
백월산 정상을 오를 때 코가 땅에 닫도록 힘을 쓰며 올랐는데 내림 길도 만만치가 않다. 급경사로 땅이 비에 젖어 미끄럼을 타듯 미끄러져 내린다. 스틱으로 버티고 한 다리를 내 밀고 힘을 주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한 바퀴를 구른다. 길을 벗어나 낙엽을 밟고 조심조심 내려오니 팔다리가 뻐근하다.
힘들게 백월산을 내려서니 평지 능선으로 이어지고 좀더 진행하니 갈림길, 우측으로 90도로 꺾어 봉(429m)에 올랐다 다시 15분 정도를 내려오니 마을도 있고 농로 가장자리로 창고 건물이 있다.(09 : 15분경)
잠시 비도 피하고 휴식을 갖기 위해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농기구와 벌통, 더럼 통 등을 보관해 두는 창고다.
10여분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 농로를 따라 가노라니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정맥 표시기가 대나무 숲 속으로 매달려 있다. 몸을 움츠려 대나무 숲을 빠져 나와 임도--->밭 가장자리---> 숲 속 길로 약 8분여 진행, 능선이 분기 봉(165.2봉)에서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니 지난 산행 때 차를 주차해 두었던 36번 국도가 나타난다. 도로 양편으로 「청양군-안녕히 가십시오 / 한국제일의 청정지역, 고추-구기자의 고장 」, 「보령시 청라면」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스무고개』에 도착(09 : 55분경)한 것이다.
『스무고개』는 보령시 청라면 소양리.「양지편」동북(東北)쪽에서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된다. 이 고개에서는 예산(禮山)까지 40리(里) 장항(長項)까지 八十里(팔심리)가 되는 높은 고개다. 고개가 험해서 옛날에는 도적과 산적(山賊)이 우굴 거렸다고 하며 산을 넘어 다니는 행인(行人)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을 때는 장정들 20여명(餘名)씩 몰려서 넘었기 때문에 『스무고개』라고 불렀으며 고개 아래에 마을도 스무고개 아래에 있기 때문에 고개 지명(地名)에 따라「스무고개」라고 부른다. 一名「입티」,「입재」,「입티리」라 부르기도 한다.
「스무고개」에서 100m쯤 아래로 내려가면 바위 아래 말을 묻었다는 『말바위』가 있다. 조선(조선)때 광산김씨(光山金氏) 문중에서 무예가 뛰어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한양(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중「말바위」근처에서 다른 곳으로부터 과거를 보러가는 여러 장수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만나서 내기를 하게 되었었다. 내기인 즉 장수들이 화살을 하늘에 대고 쏘아 올리면 그 화살이 떨어질 때 자기가 타고 온 말이 입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화살을 하늘에 쏘아올리고 잽싸게 받았는데 김씨(김씨)말만 화살을 못 받았으므로 이대로 가다가는 과거에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고 단 칼에 목을 쳐서 바위를 들치고 말을 묻었다 한다. 그래서「말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스무고개는 차량의 왕래가 매우 잦다. 특히 고개 마루에서 보령으로 넘어가는 길이 휘어져 도로를 횡단 할 때는 좌우를 살피며 신속히 건너야 할 곳이다.
[6] 물편이재
도로를 횡단하여 표지기를 따라 무성한 잡목과 풀을 헤치고 송림이 울창한 숲속으로 진입, 소로 안부를 지나고 묘, 묘 갈림 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십자로 안부가 나온다. 산행 후 지도를 확인해 보니「금계동(청양군 화성면)」과 신대마을(보령시 청라면 음현리)을 이어주는 『은고개』로 표시되 있다.
10 : 43분경, 무명봉에 올라 휴식. 3시간여를 땀에 젖고 비를 맞은 탓으로 옷도 다 젖고 신발도 질퍽거린다. 우의를 입고 신발 덮개를 한 것도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초반에는 선채로 쉬었는데 아예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마음 편하게 쉬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어진 현실을 따르는 것도 현명한 생활의 방식이 아닌가 싶다.
다시 출발. 망주석(望柱石, 望頭石, 華表柱 : 무덤 앞에 세우는 여덟 모로 깎은 한 쌍의 돌기둥)이 있는 무덤을 통과하고 안부 사거리, 56번 송전탑을 지나(11 : 05분경) 밭 가장자리를 벗어나니 2차선 포장도로(610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도로 건너편으로 「대천 해수욕장」을 알리는 대형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고추를 심어 놓은 비닐하우스도 눈에 들어온다. 도로에 내려서서(11 : 10분경) 고개 마루를 향해 10여m를 오르니 「보령시 청라면」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도로 아래로(우) 2, 30m는 됨직한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鷄糞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곳이 오늘 산행 중 점심을 배달시켜 먹기로 한 『물편고개』가 된다.
『물편이재』는 보령시 청라면 신산리에 있는 고개로 청양군 화성면을 연결시켜 주는 고개다. 「물펴니」는 「멀미(물펴니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뒷산의 산형이 머리처럼 생겼으며 산이 꽃으로 덮이는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는 마을이라 하여 <멀미><원산><화산>이라 부름)」 남서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물펴니」라 부르는데 화강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물이 많아 편편하게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항상 물이 땅속에서 용솟음치기 때문에 물이 흔한 마을이라 「물펴니」또는 「용강」이라 부른다고 한다.
[7] 대흥 숯불갈비 집
산악대장,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전화를 한다. 비가 오기 때문에 밖에서 식사를 할 수 없으니 차를 보내달라는 전화다.
차가 도착되는 동안 기념촬영. 계분 냄새가 너무 심하여 잠시 지체하기도 어렵다. 날이 청명하여 점심을 날 왔더라면 계분을 곁들인 점심상이 될 뻔 했다. 산행에 불편을 준 비였지만 이런 때는 轉禍爲福의 役을 맡아 준 고마운 비란 생각이 든다.
잠시 후 곱상한 아주머니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배달이 밀려 너무 바쁘단다. 5, 6분을 급하게 달려 식당(대흥 숯불갈비, 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 187-1번지, ☎ (041) 942 - 4006 / H.P 010-6475-3022, 금경숙)에 도착했다.
우선 급한 데로 빗물로, 수돗물로 바지와 신발에 묻은 흙을 닦아 내고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된 손발과 얼굴을 씻은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묵은 지(김치의 방언)에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인 전골에 몇 가지 찬을 곁들여 밥상을 차려 놓는다. 떨리고 출출하던 참이라 뜨거운 국물로 날래 손이 간다. 소주도 한 병 곁들이고, 김치찌개도 모자라고 밥도 부족하다. 덤으로 더 시켜 먹고 나니 자리를 뜨기가 싫다. 쉼 없이 내리는 비, 얼큰한 김치찌개, 쌉쌀한 소주가 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식 후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고 다시 등산 채비를 하여 식당 문을 나섰다. 당연히 원위치(물편고개)로 이동시켜 줄줄 알았던 아주머니, 배달이 너무 밀려 데려다 줄 수 없다며 택시를 타고 가란다. 참 난감한 일이다. 손사래를 치는 아주머니를 더 조르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으나 차가 없어 지나가는 트럭을 잡고 사정을 해 물편고개로 이동을 했다.
[8] 위수고개
물편고개까지 이동시켜 준 기사분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비닐하우스 옆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오후 산행을 시작(12 : 32분경)했다.
숲 속을 빠져 나와 보니 정맥 표지기가 보이지 않는다. 선두로 선 박사장, 우측 묘를 지나 부지런히 앞서간다. 산악대장, 방향이 잘못 된 것 같다며 정맥 標識旗를 찾는다. 대장 부르는 소리, 길을 찾은 모양이다.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진행하니 비포장 임도가 나오고 임도와 맞닿은 포장도로도 보인다.
안부를 지나 낮은 봉에 올라 휴식,
다시 출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이 되 있고 우측은 비포장 林道인 「새말 안부」를 지난다.
계속 내리는 비와 잡목, 가시나무, 칡덩굴로 주변을 살피기도 어렵고 가는 길을 조사해 온 자료도 꺼낼 수가 없다. 우중에도 휴식을 취할 때 지나온 길과 가는 길을 획인하고 간단히 메모를 하는 정도다.
산악대장 오서산 정상을 들렸다 오기 위해 멀찌감치 앞서 나가고 윤사장도 그 뒤를 바짝 따라 간다. 오후 산행이 진행되면서 앞서 가고 뒤따르는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숲 길, 얕을 봉, 높은 봉을 오르내리고 안부를 지나니 철망으로 둘레를 친 곳이 나타난다. 철망 모서리를 돌아 나가니 절개지 아래로 2차선 포장도로가 보인다. 절개지 능선 안쪽으로 설치된 철망을 잡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 하며 도로로 내려선다. 2차선 포장도로가 1차선으로 좁아지는 『위수고개』에 도착(14 : 10분경)을 했다.
이 고개(위수고개)는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長峴里)에서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화암리로 넘어가는 곳으로 운대(雲垈) 북(北)쪽에 있는 고개다. 고개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고개 지명(地名)따라 「위수고개」또는 위현(渭峴)이라고도 부른다.
※ 전설 : 雲 垈(운대)
옛날 운대(雲垈) 마을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으나 그는 글을 읽는 사람이라 마을에선 그를 선비라고 불렀다.
그가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고 한양으로 떠나는데 집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은 그를 크게 환송해 주었다.
헌데 한양으로 올라간 그는 삼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나 그의 부모들은 울상이었는데 하루는 삼년 만에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 편지를 읽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편지를 들고 거리에서 서 있었다. 때마침 선비 한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갔다. 그에게 편지 좀 읽어 달라고 했다. 이 사람도 옷차림만 선비이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편지를 들더니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다가
“반갑지 않은 편지”올시다 하고 떠나갔다.
마침 「우수고개(마을)」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편지도 못 읽는 주제에 무슨 선비야” 하고 웃었다. 그 후에도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내어 웃었다.
선비가 한양으로 떠난 마을(雲垈) 사람들은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울면서 살았다하여「울틔」라 부르고「우수고개」사람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웃으며 지냈다 해서「우수고개」라 불렀다 한다.
그후에도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소식도 없고 통 소식이 없었다 한다.
※ 「울틔」
「위장밭」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운대(雲垈)라고 부른다. 구름에 가끔 가리는 자리에 마을이 생겨서 명당(明堂)이 자리한 곳이라 한다. 「울틔」라고도 부르며「명대」,「명대리」라고도 부른다.
※ 육소나무
「위수고개」동(東)쪽으로 소나무가 있는데 이 소나무를「육소나무」라고 부른다. 소나무 나무가지가 소나무 밑 둥에서 나와서 많은 가지가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다.
<출처>보령시청 홈페이지, 청라면 장현리 지명유래
[9] 가루고개
『위수고개』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시멘트 옹벽을 타고 올라 임도를 따라 10여분, 38번 송전탑을 지나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다 숲 속으로 들어서니 가파른 오름길로 이어진다. 숨을 몰아쉬며 능선 봉에 올라 철탑이 있는 곳에 도착(14 : 37분경)을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남겨 둔 계란으로 출출한 배를 달랬다. 후미로 따라 오던 박사장, 곧 따라 붙었는데 5분여가 지나도록 한일아파트 아주머니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다. 박사장, 불안했던지 「한배」를 왜치며 왔던 길을 되돌아 급히 간다. 3분여를 더 지체하다 박사장을 믿고 다시 출발. 완만한 능선을 따라 12, 3분을 더 진행하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모롱이를 5m 정도 따라 나가니 차단기가 설치되 있다. 『가루고개』에 도착(15 : 05분경)을 했다.
가루고개는 통골(靑所面 野峴里) 남서(南西)쪽에 있는 조그만 고개다. 원래 풍수학(風水學)으로 渴牛飮水形(목마른 소가 물을 마시는 형용)이란 뜻에서 「갈우고개」라고 불러왔다.
이 고개 南쪽에 한 처녀(處女)가 고개북쪽에 사는 한 선비를 짝사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죽을 때에 내가 죽거든 갈우고개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기 때문에 그 부모(父母)는 이 고개에 시체를 가로 묻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고개다.
<출처>보령시 홈,靑所面 野峴里
[10] 금자봉과 오서산
가루고개 임도를 가로 질러 진행하니 光山 金公의 묘가 나타난다.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반대 방향에서 혼자 금북정맥을 종주하고 있는 남자 한 분이 지도를 살피며 내려온다. 우중 정맥 산행에 만나는 산꾼이라 생면부지면서도 너무 반갑다. 생미고개에서 출발하여 금자봉을 지나 물편고개까지 가는데 금자봉 아래에서 길을 찾느라 너무 헤매 다녔다고 한다. 후미로 오는 남녀분을 만나면 급히 따라 오라 당부를 하고 각자 물편고개로, 금자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루고개의 고도가 370m고 금자봉이 539m, 거리는 0.3km로 이제 170여 m만 오르면 오늘 산행의 고단함을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금자봉』에 오르게 된다. 막바지로 한 번 더 숨을 몰아쉬며 다리에 힘을 모아 본다. 대장과 윤사장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서산으로 갔는지, 아니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며 금자봉 정상에서 후미를 기다리고 있을라나 --- ?
15 : 25분, 마지막 힘든 고비를 오른다는 안도감인가? 금자봉 정상을 50여m 앞두고 휴식, 다시 힘을 모아 금자봉 능선 정상에 올랐다. 산 정상이라기보다는 오서산으로 분기하는 능선 삼거리다. 이정표(←오서산1.7km, ↓휴양림주차장0.9km, →광성주차장4.0km)가 세워져 있고『금자봉』표지판도 나무에 매달려 있다.
금자봉에서 오서산 정상 까지는 1.7km로 마루금 주능선에서 비켜나 있지만 주능선에 포함되는 산이기 때문에 정맥을 산행하는 산꾼들은 오서산을 다녀오기도 하는데 산행 시작 때 대장만 다녀오기로 하고 나머지는 하산을 했다가 합류하기로 했었다.
안교장과 정상에 도착(15 : 40분경) 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대장도, 윤사장도 보이지 않고 「한배산악회」표지기만이 나무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다. 핸드폰으로 몇 차례 통화를 시도 해 보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뒤따라오는 박사장도 정상에서 10여분울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계속되는 비와 바람으로 寒氣가 들어 더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정표가 지시하는 광성주차장으로 방향을 잡아 하산을 했다.
[11] 금자봉 하산 길(공덕고개)
비탈길을 조심하며 내려오니 또 하나의 이정표, 광성주차장 1.3km 지점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0.4km를 진행, 돌무더기가 있고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공덕재』 0.4km라 표시되 있다. 좀 전에 지나온 광성주차장 1.3km 지점이 『공덕재』였던 모양이다. 공덕재는 보령시 장곡면 광성리에 있는 고개로 고개를 올라 다니기가 가팔라 힘이 든다하여 공들여서 넘어 다니는 고개라 공덕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정표가 세워진 고개 마루에 올라서 보니 시멘트로 포장된 넓은 길이 나타나고 나무에 노란 표지기도 매달려 있다. 넓은 도로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진행, 자갈길로 바뀌고 2, 3분을 더 가다보니 절개지 터널 같은 잡목 넝쿨 속에 노란 표시기가 하나가 매달려 있다. 왜 이곳에 난데없는 정맥 표시기인가? 아마도 마루금을 벗어나 내려왓던 것 같다. 산악대장에게 전화,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 된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가? 금자봉 정상, 아니면 광성주차장 1.3km 지점 ---?
모를 일이다. 세심하게 살피지 않고 편한 길만 따르다 생긴 不祥事다. 7분여를 되돌아 마루에 올라(16 : 20분경) 살펴보니 이정표와 여러 개의 표지기가 비에 젖어 있다.
[12] 길 찾기 참 어렵다.
박사장 도착하도록 대기, 박사장과 합류하여 도로아래(좌측)로 내려서서 숲속으로 약 4분간 진행, 農路가 나온다. 좌로 진행, 묘 1기, 골짜기의 작은 계곡이 눈에 띈다. 또 길을 잘못 들었다. 다시 걸음을 되돌려 갈대를 헤치며 빠져 나가보니 또다시 정맥 길이 五里霧中이다.
더 이상 마루금을 찾아 진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한참 계곡 물막이 공사가 진행 중인 내를 건너 포장도로로 올라섰다. 대형 산행 지도판도 있고 넓게 광장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이 광성주차장인가? 위치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도로변에 설치된 원두막에 비를 피하며 휴식, 대장과 윤사장에게 전화도 하고 아침에 이용했던 택시도 불렀다.
[13] 끝내 완주를 못하고 ---.
대장, 윤사장 전화 통화를 했으나 연결이 잘 되지 않아 아침에 주차시켜 둔 장곡면 농협으로 이동했다.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 하루 종일 비에 젖은 몸도 말리고 후미 팀을 기다리기 위해 농협 앞에 있는 「상록수 식당, ☎ 642-5021」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 식사 때와 같은 김치찌개로 안주를 차리고 소주잔을 몇 순배를 돌리니 일시에 더운 기운이 돌며 몸이 나른해 진다.
17 : 40분경, 산악대장 전화, 『하풍고개』로 와 달란다.
18 : 10분경, 윤사장, 대장 도착. 삼겹살과 소주를 추가 주문하는 것으로 산행 뒤풀이를 했다. 이번 산행도 결국 계획대로 완주를 하지 못한 채 『생미고개』를 한 시간 앞두고『하풍고개』에서 산행을 끝내야 했다.
[14] 오늘 산행은
○ 원거리(19.6km - 3km = 16.6km), 금북정맥에서 가장 높은 봉(백월산, 금자봉-오서산)을 오르내린 산행이었다.
○ 하루 종일 비를 맞아본 산행이었다.
○ 야산지대 산행으로 길 찾기가 힘들었던 산행이었다.
○ 모처럼 도시락 없이 식당에서 점심상을 받아본 산행이었다.
○ 아주 오랜만에 트럭으로 이동을 해 본 산행이었다.
○ 지난 산행(9구간)과는 극과 극을 이룬 산행이었다.
어려운 가운데도 계획된 구간을 묵묵히 완주하는 한배 산꾼들이 자랑스럽다. 전날 祭祀로 잠을 설쳤는데도 끝까지 산행에 참가하고 산행 후에도 차를 운행해 준 박사장의 노고가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산행 때마다 산행 자료 제공과 길라잡이, 대원들에게 식사 제공 장소를 안내해 주고도 곱살스런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하는 대장, 그러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 한배산악회 회원들을 끝까지 안내를 해 주는 산악대장도 너무고맙다.
현재까지 금북정맥 완주자가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안흥진 도착 전 채움 산행을 해서 당초 참여했던 대원 모두가 완주의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혼자가 힘들면 덤 산행이나 품앗이 산행으로 빠진 곳을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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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靑 蘿 面 (청라면)
本面(본면)은 古百濟新村縣(고백제신촌현)에 屬(속)하였고 그후 新羅(신라)가 百濟(백제)를 統一(통일))한 후 熊川(웅천)(公州(공주)) 潔城縣(결성현) 新邑(신읍)이라 부르다가 그후 高麗時代(고려시대)에 이르러 河南道保寧縣(하남도보령현)에 屬(속)하였으며 또한 運州(운주)(洪州(홍주))에도 屬(속)하였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高灣(고려)(周浦(주포))에 첨사진을 設置(설치)한 后(후) 수사영으로 되어 이 영 관할에 屬(속)하였고 太宗(태종) 13年, 高宗(고종) 32年에 保寧縣(보령현) 保寧郡(보령군)에 編入(편입)되어 西紀(서기)1914年 面制改革(면제개혁)에 의하여 吾三田面(오삼전면)과 靑蘿面(청라면)이 統合(통합) 靑羅面(청라면)이라 稱(칭)하게 되었다. 地勢(지세)는 북쪽에 烏棲山(오서산) 東南(동남)쪽에 聖住山(성주산), 동쪽에는 白月山(백월산), 서쪽에는 五峰山(오봉산)으로 둘러있어서 盆地(분지)가 되어있고 칙과 당대미가 많았으므로 靑蘿面(청라면)이라 하며 現在(현재)는 11個里(개리) 20個區域(개구역) 蘿院里(나원리)(遠遇上中(원우상중)), 昭陽里(소양리)(丁山(정산), 屯垈(둔대)), 內峴里(내현리)(常內白峴(상내백현)), 蟻坪里(의평리)(元蟻(원의), 坪亭(평정), 鑛山村(광산촌)), 香泉里(향천리), 長山里(장산리)(長谷(장곡), 墻門(장문)), 玉溪里(옥계리)(貞洞西村(정동서촌)), 黃龍里(황룡리)(龍頭(용두), 松中(송중)), 長峴里(장현리)(長田嗚垈(장전오대)), 新山里(신산리) 및 奄峴里(엄현리)로 分割(분할)되어 管轄(관할)하고 있음.
69.89㎞의 面積(면적)과 1~2千餘名(천여명)의 人口(인구)가 살고 있다. 도 참설에는 內浦(내포)땅에 二代天子之地(이대천자지지)와 萬年榮華之地(만년영화지지)가 있다고 한다. 이중 북쪽에 있는 天子之地(천자지지)는 興宣大院君(홍선대원군)이 차지하고 남쪽에 있는 萬年榮華之地(만년영화지지)는 아직 主人(주인)이 안나타나고 있는데, 그 名堂(명당)이 바로 이곳이라는 설로 有名(유명)한 곳이 이 고장 靑蘿(청라)이다.
慾心(욕심)이 많았던 흥선대원군은 오서산을 나라에서 몽땅 차지해버려 그 후 묘도 못쓰게 했다고 한다. 이같은 연유때문인지는 몰라 청라지방에는 많은 兩班(양반)들이 落鄕(낙향) 士族(사족)이 많은 것이 特徵(특징)의 하나이다.
靑羅(청라)를 가리켜 三多鄕(삼다향)이라고 부르는데 兩班(양반)(班多(반다)), 돌(石多(석다)), 말이 많은 것(言多(언다)) 때문이라고 한다. 班多(반다)는 많은 人士(인사)가 배출되었고, 돌이 많은 것은 有名(유명)한 烏石(오석)이 이곳 인근에서 나오고 있음을 뜻하고, 言多는 지조가 굳은 선비들이 살았기 때문에 바른말(直言(직언))과 상소를 많이했기 때문이다.
烏棲之問可活萬人之地(서지문가활만인지지)의 터였던 이 곳에 살던 兩班(양반)들은 지금은 靑蘿貯水池(청라저수지)에 一部(일부)가 묻힌 창벽기슭에서 詩(시)를 짓는등 人生(인생)을 즐겼다. 지금도 창벽에는 玉溪(옥계)라는 글씨가 쓰여있는데 50餘年(여년)전에는 이곳의 선비들이 모여 詩(시)를 지음은 勿論(물론) 國論(국논)도 論議(논의)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이 되었다.
<참고자료 2> 昭陽里(소양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소리동(昭理洞), 둔대리(屯垈里), 승티리(升峙里), 양지리(陽地里), 정산리(丁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소리(昭里)와 양지(陽地)의 이름을 따서 소양리(昭陽里)라 하였다.
<참고자료 3> 屯 垈(둔대)
「소릿골」동북(東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둔대」라고 부른다. 옛날에 나라의 군사가 주둔한 일이 있는 마을이라「屯垈(둔대)」,「屯垈里(둔대리)」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4> 山 祭 堂(산제당)
「양지편」뒤로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부근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편안과 잡귀를 없애기 위해 산제(山祭)를 지내는 당(堂)이다.
<참고자료 5> 소 릿 골
「둔디」서남(西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소릿골」이라고 부른다. 소양리(昭陽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솔이 무성했던 마을이라「솔골」이라 부르던 것이「소릿골」로 변하여 부른다.
<참고자료 6> 양 지 편
「소릿골」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양지편」이라고 부른다. 양지바른곳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양지편」이라고 부른다.
<출처> 보령시청 홈페이지, 청라면 昭陽里
<참고자료 7> 의 낭 (익낭)
라원리(蘿院里)와 소양리(昭陽里)에 걸쳐있는 마을이다. 마을지대가 아름다운 곳으로 뒷산이 丁字(정자)로 생겼다해서 「정산」,「의낭」이라고 부른다. 또 正三品通政大夫井公(정삼품통정대부정공) 齊成墓(제성묘)와 草堂一部(초당일부)가 남아있다.
<참고자료 8> 금계동 청양군 화성면 금계동
<저부리> 북서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금계동> 마을에 금계포난형의 명당이 있다 해서 <금계동>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금닭이 알을 품고 있어서 아이를 얻은 아낙네가 천신께 정성을 드리면 그 아들이 크게 된다는 설화가 있는 마을이다.
※ 저부리
<사천>옆에 있는 마을을 <저부리>라 부른다 광계리에서 으뜸되 는 마을인데 지형이 부리로 되어있다해서 <저부리>라 부른다. 또
한 <취적>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참고자료 9> 奄峴里(음현리), 신대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오삼전면(吾三田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산이 사방(四方)으로 둘러싸고 고개가 많으므로 「음고개」또는「음현(奄峴)」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신대리를 병합하여 음현리(奄峴里)라 해서 청라면(靑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음현리로 되었다.
<참고자료 10> 통 골
「비얏들」의 남쪽에 양쪽 산이 통처럼 된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통(通)같이 생긴 마을이라 해서 「통골」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을 해주오씨(海州吳氏)와 영월신씨(寧越辛氏)가 다같이 세거(世居)하고 있는데 오씨가(吳氏家)에서는 효자(孝子)가 나서 정여(旌閭)를 세웠고, 신씨가(辛氏家)에서는 열여(烈女)가 나서 旌閭(정려)는 세우지 아니하였으나, 그 자손(子孫)이 성균관(成均館)에서 내려온 발선문(跋選文)을 보관하고 있어서 서로 가문을 빛내고 있다. 여기 양가(兩家)의 발문(跋文)을 기록(記錄)한다.
해주오씨효자발문(海州吳氏孝子跋文) : 오재현(吳載顯)은 그 부친(父親)을 계승하여 효행(孝行)에 널리 알려져 있더니 마침 그 모친(母親)이 병(病)이 나매 지성(至誠)으로 봉양하나 효과(效果)가 없더니 그 모친(母親)이 수박을 먹고싶다고 하는데 그때는 마침 겨울임으로 수박을 얻을 도리가 없어서 사방(四方)으로 수박을 얻으려고 돌아다니던중 하늘이 도와주시어 어느 山밑에 낙엽이 쌓인 사이로 수박넝쿨이 말려있으므로 들추어 보았더니 그안에 수박이 한통 잘 익어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 모친(母親)에게 바쳤더니 그후로 모친(母親)의 병이 쾌차하시었다. 당시에 유림(儒林)들이 이 사실(事實)을 알고 추천을 하여 모성공회(母聖公會)의 발천(跋薦)을 얻어 旌閭(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孔夫子誕降(공부자탄강) 2477年 月 日 (西紀(서기) 1926年)
旌閭所在地(정려소재지) 保寧郡(보령군) 靑所面(청소면) 野峴里(야현리)
管理人(관리인) 吳韓益(오한의)(現(현) 靑所副面長(청소부면장) 吳東一(오동일) 父親(부친))
영월신씨가발문(寧越辛氏家跋文)
보령군 청소면 야현리(保寧郡 靑所面 野峴里) 열녀창원황씨(烈女昌原黃氏)는 辛允敎(신윤교)의 처(妻)로 그 성품이 본시 정숙하고 부도(婦道)가 완비(完備)하더니, 그 남편이 병들어 병세가 침중하매 장차 급한지라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입에 흘려 넣으니, 이로부터 회생(回生)하여 삼년을 더 살다가 병으로 누워 급하니 다시 손가락을 잘라 흘려 넣었으나 이미 천명이 다한지라 별세(別世), 부인이 심히 애통해 하며 초종장례(初終葬禮)를 극진히 치르고 삼년복상중(三年服喪中) 얼굴을 씻지 아니하고 머리를 빗지 아니하였으며, 一生(일생)동안 근신(謹愼)하고 종신(終身) 토록 변(變)치 아니하였으므로 儒林(유림)들이 알고 문묘(文廟)에 전달(傳達)하여 跋文(발문)을 내리어 정려(旌閭)을 세울 것을 전하노라. 이 발문보관자(跋文保管者)는 孔夫子誕降(공부자탄강) 2474年 癸亥(계해) 四月(사월) 日 (서기1923年) 前(전) 靑所面(청소면) 副面長(부면장) 辛奎鉉(신규현)(黃氏(황씨)의 子)
<참고자료 11> 따 불
통골 남(南)쪽 산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 따불이라고 부른다. 진당산(眞堂山)은 옛날에는 이 山이 서해고급봉화초삼진(西海告急烽火硝三鎭)이라해서 산봉(山峰)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아래에 조그만 마을로 옛날에는 진당산당각시를 위하는 산제당(山祭堂)집이 있었다고 한다. 山골이라 따부를 일러먹는 마을이라 하여 따부골 즉 따불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12-1> 오서산
○ 위치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청라면 - 청양군 화성면, 홍성군 광천읍, 장곡면
오서산은 백두대간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다. 금북정맥은 속리산에서 비롯되어 가지를 칠 때는 이름이 한남금북정맥이었다가 죽산의 칠현산에서 금북정맥이 되어 남서로 방향을 트는데 서해안에 가까워지면서 지도상에서는 지리멸렬, 곧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지만 서해안 바로 옆에서 정신을 차려 문득 고봉을 치켜세웠으니 이산이 오서산이다. 금북정맥은 오서산 이후로도 110km나 북으로 또는 서쪽으로 행진하다가 서산의 태안반도 끝머리에 가서야 여맥을 서해 푸른 바다 속에 잠재운다. 오서산은 이름 그대로 하자면 까치가 깃들어 사는 산이다. 주능선에 오르면 서해안이 가까워 서해일원의 낙도와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의 형세가 육산이어서 유순한 인상을 주는 오서산은 정상능선의 드넓은 억새밭에 억새가 피는 가을이면 보석 같은 빛을 발한다.
<출처> www.kormt.co.kr/oseu.html
<참고자료 12-2> 오서산
○ 충남 보령 청라, 홍성 광천, 청양화성
오서산은 보령을 대표하는 산으로, 우리나라 서해 연안의 산 중에서는 가장 높으며 백두대간 차령산맥 끝자락인 금북정맥의 최고봉(790.7m)이다. 보령시(保寧市)를 비롯하여 홍성군(洪城郡), 청양군(靑陽郡)에 걸쳐 3개 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서, 울창한 숲과 깊고 맑은 물이 어우러져 천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정상에서 보면, 수채화처럼 펼쳐진 억새 물결과 서해의 수평선 그리고 서해 낙조를 조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성주산, 북으로는 가야산, 동으로는 칠갑산, 계룡산까지 관망할 수 있어 육.해.공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가는 소중하고 진귀한 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서산은 이름 그대로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깃들어 사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보령 주변의 여러 명칭이 이에 유래한 것이 많다. 또한 육중한 무게감을 바탕으로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산세와 굽이치는 듯한 능선 그리고 완만하게 펼쳐진 정상부는 명산의 요건을 빠짐없이 두루 갖추고 있어 등산 매니아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특히 서해 바닷길의 길잡이로서 ‘서해의 등대’라 불리기도 하며(일설에 의하면 서해바다 멀리 외연도쪽에서 바라보면 검게 보이는 산이라서 오서산이라 하였다는 말도 있음). 가을 정취를 한껏 뽐내는 은빛 억새능선이 유명하다.
<출처 : 보령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