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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어로 빨갱이 사상은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말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유물론과 기독교 신학은 전혀 어울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신학과 마르크스의 무신론 사상이 혼합되는 기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쩌면 이것은 기독교로 위장한 마르크스주의의 종교적 사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엇이 윤창열의 굿모님시티 상가 사기 분양 사건인가? 그것은 큰소리로 거짓말을 하여 피해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통일교 교주 문선명의 사기인가? 그것은 자기가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무엇이 민중신학의 사기인가? 그것은 파업 노조원들이 세계 화해를 위해 고난당하는 민중이요 따라서 해방의 메시야라는 그릇된 논리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학으로 위장하고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으로 한국 사회에 침투하는 사기 전술이 있어 보인다.
사실 1980년 5.18 광주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김대중 집단이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 위해 5월 22일을 전국적 민중 봉기의 거사일로 잡은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리 정부에서 5.18 전국계엄확대를 실시하여 김대중 지지 민중봉기를 막아도 이미 봉기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봇물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가요 광주의 혁명가인 윤상원이 5월 18일에 아침 10시에 폭동 점화를 함으로 5.18 광주사태라는 민중 봉기의 봇물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본래 5월 22일로 예정되었던 이 민중봉기의 주동 세력 중에 문익환 등 민중신학 계열 정치목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봉기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익환 등 민중신학자들은 동학혁명을 일으킨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학혁명이 일본에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주권을 수탈하는 빌미를 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
어리석은 좌익의 눈에는 한국 민중이 해방의 메시야라는 민중신학자들의 엉터리 주장이 민족주의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헛소리 이론은 기독교의 구원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지난 목요일(2003년 7월 17일) 평소 카드빚 독촉에 시달리던 인천 서구의 손 여인이 세 자녀를 아파트 14층 계단밖으로 내던지며 동반 자살하였을 때, 그리고 휴일인 같은 날 비슷한 시각 서울 잠실의 한 상가건물 지하 2층 공사장에서 막노동 아버지 돕던 고교생이 아버지와 함께 질식 사망하였을 때 그들은 분명 고통당하는 민중이었다. 안병무의 주장대로 그들이 고통당하는 한국 민중이기에 세계 만민을 구원한다면 그들은 누가 구원하는가? 이런 엉터리 이론으로 학위받고 교수가 된 민중신학자들과는 달리 사회적 구원은 커녕 영혼 구원도 못 누리는 서민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민중신학의 출발점은 기독교 성경이 아니라, 해방신학과 마르크스 사관과 한국 좌익 이데올로기이다. 간혹 빨갱이 소리를 듣는 한상렬과 홍근수 외에도 범대위에 여러 민중신학자들이 포진하고 있을 만큼 민중신학은 좌익 이데올로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 만일 우리가 좀 더 깊이 분석한다면 오늘날 한반도의 북핵 위기도 이들이 통일신학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 중 그 누구가 통일을 원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를 저버린 적화통일인가? 반미촛불시위를 선동하는 민중신학 계열 목사들이 때로 김정일의 적화통일 전략을 지지하는 성명을 낸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는 그들을 기독교 목사요 대한민국 시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출발점은 마르크스 사관과 한국 좌익 이데올로기이다. 사람들이 가끔 그들을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북미불가침 조약과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등 드러내놓고 북한의 적화통일 전술에 맞장구치구 있기에 김정일의 남침 야욕을 동구며 북핵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유물론은 무신론적 세계관이기에 결코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한 지붕 밑에서 양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민중신학은 한국 내 친공산주의 세력 선봉에 서있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사실 민중신학은 용어만 다를 뿐 여러 면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닮은꼴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처럼 민중신학도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 그 뿌리가 있다. 인민 대신 민중이라 부를 뿐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론을 한(恨)이라는 민속 심리에 접목시킨 것도 닮은꼴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라 용어 대신 사회 구원이란 말을 썼을 뿐 영혼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 역시 닮은꼴이다.
1968년에 도시산업선교라는 이름으로 동장한 노동운동의 사생아가 민주노총이다.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노동운동을 1975년에 안병무가 처음 이론화한 것이 민중신학이다. 민중신학은 기독교 신학보다는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처음부터 복음 전도가 아니라 노동 파업 선동이 그 목적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노조가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강성 노조인 이유는 단지 한국 국민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이론과 동학혁명 사상을 조합한 민중신학은 과격 파업 시위자를 자본주의 착취와 싸우는 해방의 메시야라고 추켜세웠다.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주범 중 하나인 민중신학을 기독교 정치 신학으로 혼동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성경 마가복음 10장 17절에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귀족이요 부자였던 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불사초를 구하던 동양의 진시황처럼 영생을 추구하던 이 청년이 길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달려와 무릎끊고 물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가서 너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였다. 기독교의 천국 복음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분배 방식상 공산주의와 민중신학은 닮은꼴이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농민과 노동자 등 가난한 자들을 위한 분배를 약속했었기에 혁명 초기에 러시아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기독교 사상인 줄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방법에 있어서 기독교의 복음과 공산주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실 때 그것은 자발적인 나눔 공동체 형성을 위한 도전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부자의 것을 다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자"고 할 때 그것은 강압적인 공산사회 건설이다. 기독교의 자발적인 나눔은 사랑의 나눔이요, 공산주의자들의 강압적인 나눔은 무력에 의한 분배이다. 공산당 군대가 진격하는 곳에 유산계급 처형이 있다. 그런데 민중신학도 빼앗음에 의한 분배를 주장한다.
그러나 부의 분배에 대한 미국 복음주의 메시지와 한국 민중신학의 주장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미국의 설교자들은 기업인들에게 부의 환원을, 기업의 기독교적 윤리를 설교하였다. 미국 목사님들은 한국의 민중신학 계열 목사들처럼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조 파업을 선동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기업가들에게 자발적인 나눔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부시 정부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그 댓가를 보상받도록 상속세 폐지 법안을 내놓아도 미국 갑부들이 오히려 결사 반대하는 나라이다. 미국의 기업인들은 계속 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학교 건물과 병원과 연구소들 중에서도 미국 민간인의 기증으로 지어진 것들이 많이 있다. 일본 경영의 장점은 고용주와 근로자가 한결같이 자기 회사에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는 것이요, 미국 기업의 장점은 자발적인 사회 환원이다.
오히려 동네의 두레를 서로 나누며 서로 자기 것처럼 아끼는 두레 정신은 한국 사회에 있었다. 사람은 보람을 위하여 산다. 갓입대한 훈련병 초봉이 천원을 조금 넘었던 시절이 있었다. 허기진 훈병이 백원짜라 아이스크림 열 개 사먹을 돈밖에 안되지만 그럼에도 그 보람과 그 희열은 엄청난 것이었다. 사람은 소속감과 일의 보람을 느낄 때 행복하다.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에 근로자들은 소속감과 자기 회사를 위해 일하는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휴일인 지난 제헌절에 세 자녀와 동반자살한 손 여인네에는 그런 소속감과 보람이 없었다. 누가 한국 서민들에게서 소속감과 일하는 보람을 빼앗아 갔는가? 두레 공동체를 이루던 서민의 일터를 투쟁장으로 만든 민중신학 계열 목사들 책임이 크다. 강성 노조가 많은 만큼 일터는 줄어든다.
민중신학이 사회구조악을 개선하겠다고 나서서 노동 운동을 부추겼을 때 오히려 사회구조악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도시산업선교의 파업 선동으로 즉시 도산한 기업들도 있었고 서서히 도산한 기업들도 있었다. 양김씨가 집권하던 1990년대에는 섬유산업 등 한국 제조업 수출 시장을 점차로 중국에 빼앗기던 기간이었다. 섬유산업 등 비교적 생산 공정이 단순한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은 가격이 좌우한다. 따라서 노동 임금이 인상되는 만큼 수출 시장은 줄어들고 공장들은 문을 닫으며 서민들의 일자리도 줄어든다. 한편에서 고급 기술 인력은 부를 증식하는데 비교적 단순 노동자들에게는 일터가 없어졌다. 이때 경제적 빈곤에 겹치는 것이 일하는 보람을 느낄 기회의 상실이다. 적은 수입이라도 자기 일이 있는 사람은 범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자리를 구할 희망을 상실한 서민들의 생활고가 범죄 동기를 유발하는 환경이 되었다. 우리는 민중신학자들에게 이런 구조악을 초래하는 것이 어째서 사회 구원이라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민중신학자들은 스스로 진보 신학임을 자처하지만 마침내 그 이단성이 최근에 드러났다. 독일 튀빙겐(Tuebingen) 대학의 몰트만 박사는 본래 안병무와 서남동 등 한국의 대표적 민중신학자와 절친한 학자이다. 그가 2차대전 중 3년간 연합군 포로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형성된 그의 정치 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형성에 영항을 미쳤다. 그도 처음에는 민중신학이 한국적 정치신학이라는 말을 곧이 듣고 25년간 후원해 오다가 몇년 전에 민중신학이 이단에 가깝댜는 사실을 밝혀냈다.
몰트만 박사가 민중신학에서 발견한 가장 큰 문제점은 자유와 인권을 위한 민중의 투쟁을 메시야적으로 과장하는 문제이다. 안병무는 사람들의 무리 혹은 서민이란 뜻의 그리스어 ochlos를 민중으로 번역하기를 고집한다. 갈릴리 무리와 한국 민중은 다르기에 오역이지만 이 글에서 잠시 민중이란 단어를 사용해 보자.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메시야의 해방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안에 있는 구원으로 이끌어간다. 이 역사적 해방 속에서 민중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그의 미래를 발견한다. 그러나 민중이 투쟁에 성공하였을 때 메시아적 희망이 성취된다는 안병무의 주장과 달리 성서적 메시야 희망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펼쳐진 희망이다.
몰트만 박사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이단성이 있음을 처음 알아차렸을 떼의 충격을 이렇게 표현한다: "서광선의 집에서 있었던 대화에서 안병무가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면서 요한복음 1:29의 '하나님의 어린 양'과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의 종이 한국 민중임을 시사하였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랐다." 이사야 53장과 신약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이야기는 우리를 대리하여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죄를 "짊어지심," 죄를 "도말하심"이 지닌 구원의 의미를 말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고난에 구원의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민중이 고난 당하는 백성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안병무의 주장은 기독론에 대한 문제를 야기한다.
몰트만 박사는 이어 한국 민중이 바로 메시야라는 안병무의 주장은 구원론의 문제도 제기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과 같이 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민중이 그의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한다면, 이 고난 자체를 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민중은 어떻게 투쟁할 수 있는가? 민중이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자 하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누가 민중에게 질문한 일이 있는가?"
그리고 몰트만은 예수가 곧 한국 민중의 상징이라는 안병무의 주장이 지니는 신학적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집단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지 않는다. 고난의 종은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가 고침을 받은"(53:5)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은 신적인 존재(divine figure)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개인"도 아니고, 그 자신 속에 머물러 있는 개체적 "인격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백성으로부터, 백성과 함께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인격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우리-그"의 대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53:6). "그들의 죄를 지심으로써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그 의로운 분은(53:11)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죄를 "짊어지고" 백성들의 짐을 제거함으로써 속죄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근로자를 조국 근대화를 위한 산업전사로 보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민중신학자들은 근로자로서의 민중이 파업하다가 공권력과 충돌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동일한 고난이라는 논리를 폈다. 여기서 몰트만 박사는 하나님만 감당하실 수 있는 속죄의 고난과 극복되어야 할 백성의 고난은 구분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파업하며 노동 운동하는 근로자들을 해방의 메시야와 동일시하는 민중신학의 또 한가지 특징은 소위 그들이 통일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반미주의는 본래 민중신학의 출발점이 마르크스주의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민중신학과 좌익이 손잡은 민주화 운동은 퇴보적인 민주화, 즉 자본주의 경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민중신학 계열의 목사들이 그토록 극성스럽게 북한 정권의 적화통일 전략을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하는지도 모른다.
진보신학을 자처하는 민중신학은 다행히 지금 쇠퇴기에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겪는 시련들이 전적으로 민중신학 책임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민중신학이 끼친 영향의 파급 효과는 지금 한국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갓 걸음을 시작하여 수출 경쟁에 뛰어든 한국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그 생산 현장에서부터 부정하는 것이 사회 구원인가? 훨씬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었는데 살기 힘든 나라로 만든 것이 사회 구원인가? 민중신학자들은 영혼 구원을 위해 사역하는 목사님들을 기독교 수구세력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아니하고, 마르크스 사관과 좌익 이데올로기가 성경 본문을 지배하는 잘못된 성경 해석이 진보인가? 민중신학을 한국적 신학으로 너그로이 받아들이며 지난 25년간 후원했던 몰트만 박사가 보기에도 민중신학은 이단성이 가득하다. 영혼 구원을 부정하고 사회구원만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며, 경제를 모르면서 파업 선동으로 경제를 휘저어 놓는 것은 사회 구원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며, 기독교의 선교는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야 하며, 가난한 자의 보살핌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사랑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essay/minjung-theology.htm
첫댓글 제가 2003년 여름에 쓴 글인 듯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영혼 구원과 가난한자의 보살핌은 다릅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은 가난을 퇴치하는 것이 민중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그래서 폭력적인 투쟁도 불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