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이수광의 묘. 경기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 묘비에는 탄흔도 보인다. | |
지봉(芝峰) 이수광(1563~1628)은 안으로는 붕당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치세력간의 정쟁이 본격화되고,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북방 여진족의 흥기로 말미암아 국제적인 세력 판도가 점차 재편되어가는 시기를 살아가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의 중흥을 위한 사회경제 정책을 수립하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으며, 실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물
이수광의 본관은 전주이다. 왕족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4대 동안 관직 진출이 막혔다가 그의 아버지 이희검(1516-1579)에 이르러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희검은 명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초에는 판서를 지냈고 청백리에도 뽑혔다.
이수광은 어린 시절을 동대문 밖에서 살았다. 그의 호 지봉은 집 부근에 있는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에서 따온 것으로 그가 평생 동안 이곳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창덕궁 서쪽의 계곡인 침류대(枕流臺) 일대에서 유희경, 차천로, 신흠, 유몽인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수광은 '비록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있다'라는 뜻으로 '성시산림(成市山林)'을 자처하였으며, '음악과 여색, 이욕(利慾)에 대해서 담담한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선비 학자의 풍모를 보였다.
이수광의 학문 형성에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중국으로의 사행 경험이다. 이수광은 외교력과 문장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49세 때인 1611년(광해군 3)에 세번째로 각각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보고 배운 문화 경험과, 세 차례의 使行을 통해 안남(安南:베트남), 유구(琉球:오키나와), 섬라(暹羅:Siam, 타이)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광해군 대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이수광은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직에 다시 복귀하여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628년 이조판서로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장흥리에 있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상
조선조에 과거 보러 상경한 선비들이 반드시 찾아보는 집 중의 하나였던 비우당은 이수광이 살았던 오두막집이다. 그 이름을 달고 새로 생긴 청계천의 비우당교. | |
그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였지만, 성리학만을 신념화하지 않고 성리학에서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강조하는가 하면 성리학 이념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체계의 수용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가 양명학과 도가, 불교 등에 대해서도 개방적 입장을 취한 것은 이들 사상이 가지는 긍정적인 기능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지봉유설'의 문장부와 같은 글에서는 시인을 소개하는 항목에서 사대부 학자 뿐만 아니라, 방외인, 승려, 천인, 규수, 기첩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시까지 소개하는 신분적 개방성을 보여 주었다.
이수광은 사행의 경험을 통하여 외국의 문물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봉유설'을 통해서 외국의 많은 나라를 소개했던 까닭은 외국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비추어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립되고 폐쇄된 국가 조선이 아니라 진취적이고 개방적으로 발전해 갈 조선을 상정하고 그 모델들을 외국의 사례에서 구해 본 것으로 여겨진다.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백과 사전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손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나이 52세 때인 1614년(광해군 6)에 탈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앞 부분에는 편찬 원칙을 밝힌 3칙의 '범례'가 수록되어 있는데, 범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루고 있는 항목이 3435조에 달한다는 것, 가능한 전거를 밝혔다는 것과 인용된 서적이 348가(家)이며 유교경전에서 최신의 자료까지 활용했던 것 등이다. 그만큼 자료 조사에 치밀성을 기하고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이수광이 편찬한 백과사전 '지봉유설' 표지와 내용. 이 책은 조선에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 |
각 항목에 대해서는 중국과 우리의 역대 사례를 중심으로 그 항목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자료를 최대한 활용, 고증하고 있다.
이수광은 서문에서 '우리 동방의 나라는 예의로써 중국에 알려지고 박아(博雅)한 선비가 뒤를 이어 나타났으되 전기가 없음이 많고 문헌이 찾을만한 것이 적으니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니랴. 내가 보잘 것 없는 지식을 가지고 한 두 가지씩을 적어 두었다'라고 해 우리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행적이 뛰어난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데 '지봉유설'의 편찬동기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서문의 정신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본국'에는 각종 자료를 이용하여 우리나라가 군자국이라는 점과 동방은 전통적으로 착한 품성을 가진 곳임을 강조하고, '중국인들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보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소개하여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에 자부심을 보였다. 언어부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의 일로서 중국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부녀자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을 쏘는 재주를 들었다. 이이에 우리나라에는 나고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경면지, 황모필, 화문석을 소개하는 등 우리의 좋은 전통이나 물산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지봉 이수광은…
- 양명학·도교 개방적 태도
- 동남아·유럽 객관적 고찰
성리학을 보다 탄력적으로 수용하고 양명학·도교 등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인 이수광의 사상은 당시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인 외국에 대한 인식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봉유설' 권2의 '외국'조에는 안남에서 시작하여 유구, 섬라, 일본, 대마도, 진랍국(眞臘國:캄보디아), 방갈자(榜葛刺:방글라데시)) 등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역사, 문화, 종교에 대한 정보들과 함께 아라비아(回回國) 및 불랑기국(佛浪機國:포루투갈), 남번국(南番國:네덜란드), 영길리국(永吉利國:영국) 등 유럽에 대한 정보까지 소개되고 있다.
이들 국가에 대해서는 자연환경, 경제 상황, 역사, 문화, 종교 등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보다 실용적인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불랑기국에 대해서는 '섬라(暹羅)의 서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서양의 큰 나라다. 그 나라의 화기(火器)를 불랑기라고 부르니, 지금 병가(兵家)에서 쓰고 있다. 또 서양포(西洋布)라는 베는 지극히 가볍고 가늘기가 매미의 날개와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포르투갈이나 영국에 대해서는 이들 국가가 보유한 군함이나 화포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여 국방력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며, 이탈리아에 대한 항목에서는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천주실의'를 소개했다는 내용이 주목을 끈다. 세계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졌던 이수광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