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신비(神秘)와 문학적 비의(秘義)
―김종윤 시인의 시세계
리헌석
1. 김종윤의 성채 들어서기
김종윤 시인의 문학적 성채를 들어서면서, 그의 많은 작품에서 피어오르는 향내를 체험한다. 은은하고 아련한 향내가 피어올라 온 몸을 휘감는다. 작품에서 우러난 향내는 상상력의 바람을 타고 심방인(尋訪人)의 가슴에 고운 무지개를 짓는다. 때로는 성당이나 사찰에서 퍼지는 경건함의 메아리를 만든다.
그는 자연과 상상력, 체험과 상상력, 현실과 상상력, 관념과 상상력의 슬기로운 조화를 통해 작품을 빚는다.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기도 하고, 자신의 작은 체험에서 새로운 우주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정의로운 지향을 모색하기도 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관념적 실체에 상상력을 투사하여 새로운 감동을 생성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형상화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바탕에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결합하여 도출된 산물이다.
김종윤 시인의 작품에서 번지는 문향(文香)은 소재의 독특함보다 표현의 멋스러움 때문으로 보인다. 작품을 이루는 소재는 평범하고, 주제 역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작고 큰 감동을 형성하고, 그 감동의 울림이 메아리처럼 번지는 것은 표현에 있어서의 미적 성취에 기인한다.
남향 창문 좁은 틈새로
흔들리는 맑은 햇살의 속눈썹
두 겹의 창문을 열고
햇살의 누드를 맞는다
방 안 가득 옹그리던
빈 커피 잔의 향기가 문턱을 넘고
사붓이 들어온 송화(松花)가
자리를 잡는다
사월의 빈 잔을 채우는
연초록 기도가 소지로 오르는
대추나무 가지 끝마다
산청개구리가 날개를 편다
―「빈 잔」 전문
소재나 주제가 평범한 12행의 단형에 시인의 상상력으로 아름다운 건축이 세워진다. 일견(一見)할 때, 4월의 푸근한 서경이 잡힌다. 재독․정독을 하면서 시인의 내면에 들어 있는 서정(抒情)과 비의(秘義)가 드러나고, 그로 인해 새로운 감동을 공유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현실성의 바탕에 시인의 예술적 프리즘이 작용하여 빚어낸 절창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현실의 구체성과 시인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형성한 미적 구조물이다. 특히 구체적 사물에 상상력이 투영되어 살아 있는 비유와 상징을 보인다. 1연의 <햇살의 속눈썹>, <햇살의 누드>, 2연의 <방 안 가득 옹그리던 빈 커피 잔의 향기>와 <문턱을 넘는 향기>, <사붓이 들어온 송화>, 3연의 <사월의 빈 잔>, <연초록 기도>, <소지로 오르는 연초록 기도>, <날개를 펴는 산청개구리> 등의 감각적 비유는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력으로 작용한다.
시인의 예술적 감각은 렌즈나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 렌즈에 따라 가깝고 멀게 보이며, 크고 작게 보이기도 하고. 실상의 모양을 변환시켜 보이게도 한다. 프리즘도 빛의 투입 각도에 따라 전혀 새로운 색깔로 투사된다. 이렇듯이 시인의 예술적 감각은 작품의 개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각각의 작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확인하기로 한다.
2. 금강에서 세상 보기
김종윤 시인은 체험에 바탕한 진실성을 지향한다. 책상 앞에서 원고지 칸을 메우는 것이 아니고, 절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언어의 구조물을 축조한다. 말하자면 체험이 뼈대를 형성하고, 작품의 기둥․도리․대들보․서까래를 이룬다. 그 바탕에 시인은 벽도 쌓아 올리고, 창문도 내며, 조화롭게 치장하고 마감을 한다. 이런 과정이 그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는데, 그 중심에 금강(錦江)이 위치한다.
금강(錦江)의 상류인 금산(錦山)이 그의 고향이고, 그곳에서 그는 교육자의 사명을 다하는 중이다. 그의 고향에는 ‘비단강’이라고 불리는 ‘금강(錦江)’이 흐른다. 이 금강은 시인에게 있어 유년기의 놀이터였을 것이고, 청소년기의 꿈을 키우는 ‘꿈의 궁전’이었을 터이다. 이제 장년에 이르러 금강은 시인에게 있어 향수의 근원이자 서정의 원천으로 기능한다.
노래를 부르랴
耳鳴의 새벽 물안개 속에 누운 처녀야
푸르고 부드러운 피부와
에덴의 배암처럼 투명한
마력의 눈동자에 취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랴
나는 너의 어미를 알지
선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몸조차 공양하고 둥글게
둥글게 살다가 하나님의 귀 밑
군산의 후미진 고샅에서
좌판 아주메의 몸뻬처럼
소금기로 서걱이다가 끝내
미쳐 풀어진 너의 어미를 알지
노래를 부르랴
앞산 뒷산 길 열어준 심산 계곡을 굽돌아
오지 않는 시간의 매력처럼 요염하게
흐르며 흐르며 몸을 여는
나부의 처녀야
미리암의 예언으로
출애굽의 노래를 불러주랴
―「금강 상류에서」 전문
김종윤 시인에게 있어 금강은 사랑으로 노래할 대상, 봉사와 희생의 주체, 시인의 꿈이요 소망으로서의 매체로 자리한다. 즉 시인에게 있어 금강은 삶의 부분이자 전체로 수용된다.
첫째로, 금강은 시인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이다. 금강은 <耳鳴의 새벽 물안개 속에 누운 처녀>로 인식되고 있는데, <푸르고 부드러운 피부와/ 에덴의 배암처럼 투명한/ 마력의 눈동자에 취해/ 사랑의 노래>를 부를 대상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아직은 수줍게 순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다.
둘째로, 금강은 희생과 봉사의 주체로 인식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몸조차 공양하고 둥글게/ 둥글게 살다가 하나님의 귀 밑>에까지 흘러가서 미쳐 풀어진 금강 하류는 <처녀>의 <어미>이다. 그 어미는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해 위대한 봉사를 하고 바다에 묻혀 버린, 희생양으로서의 금강이다.
셋째로, 금강은 시인에게 있어 거듭날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앞산 뒷산 길 열어준 심산 계곡을 굽돌아/ 오지 않는 시간의 매력처럼 요염하게/ 흐르며 흐르며 몸을 여는/ 나부의 처녀>에게 시인은 <미리암의 예언으로/ 출애굽의 노래>를 헌정(獻呈)하고자 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꿈이요 소망이었던 것에 근거한다면, 시인에게 있어 금강 역시 꿈이요 소망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금강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이별의 정서는 절절한 형상화로 드러난다. 금강을 떠나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금강에 의탁했는지, 금강의 흐름에 대한 원론적인 깨달음인지, 분명하게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은 ‘이별’의 서정을 절절하게 노래하기도 한다.
소사나무 숲을 지나 검은 여를 휘돌아
굽이쳐 흐르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내밀한 약속 살섞어 만났던 사랑을
하얀 포말로 남기고 축축한 기억을 지우며
저녁 해 속으로 떠나는 금강아
우리의 삶 또한 흘러야 하리니
온갖 상념의 언어를 이끌어
어디로든 떠나야 하리니
거친 등줄기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깊은 골 멀리 사라지는 금강아
그리운 이름 찾아
어두운 산길 더듬어 예까지 왔는데
너는 또 어느 꿈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냐
―「금강아」 전문
금강을 매체로 한 본보기 글에 해당한다. 금강을 통한 이별의 정서가 이보다 간절할 수가 없을 터이다. 그러나 덧 설명은 군더더기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생략한다.
금강을 사랑하는 김종윤 시인은 서재에서도 금강을 체험하고자 한다. 「떠나기」에서 시인은 <밤늦게 소주로 가슴 데우고/ 책 곰팡내가 스멀대는 서재>에서 생각을 통해 금강을 만난다. 상상 속에서 시인은 <금강을 끌어다 이불로 덥고/ 차가운 물줄기에 둥둥 몸을 띄우고/ 꿈도 가만 불러본다/ 금강아 너, 금강아!> 옆에 있는 것처럼 부른다. 그리하여 <내 가슴 속 핏줄로 깊어져 붉게> 흘러 보라고 한다. <천리 길 한 보름> 흘러 보라고 한다.
또한 시인은 「금강의 하루」에서 편안한 일상을 노래하기도 한다. <산그늘 얇아지는 강목인데/ 발이 묶인 아이는 파아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줄배를 기다린다 이윽고/ 마을은 아이를 안고 강을 건너고/ 가슴 봉긋한 언덕 너머로/ 아이는 사라진다>라고 금강 상류 마을의 도강(渡江) 정경을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강을 통해 세상의 부정과 오염을 씻고자 한다. 「홍수」에서 시인은 <빗물은 불어 불어 흙빛이 되고/ 마침내 흙 위에 올라서서/ 매장된 부정과 비밀>을 들추어내기를 소망한다. 들추어진 <쓰레기와/ 죽은 나무 죽은 마음들/ 버려야 할 것 모두 쓸어안고 깨끗한/ 한 빛으로 흐르는 흙빛 강>을 노래한다. <장항선 철길이 터져서 열차야 가고 못 가고/ 오염된 땅 한몸>으로 쓸어서 지구의 종착역에 보내기를 염원한다.
이처럼 김종윤 시인에게 있어 강은 추억의 산실이기도 하고,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며, 세상의 오염을 쓸어내는 절대적 존재로까지 인식된다. 이러한 내면이 작품에 투영되어 아름다운 서정을 빚는다.
3. 일상에서 의미 찾기
김종윤 시인은 생활 속의 작은 단서에 집중할 줄 안다. 사소한 사물도 시인의 언어에 의해 거듭날 때, 위대한 사랑과 우주의 진리를 담는다. 시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교육자로서의 생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생활, 시인으로서의 생활 등이 주요한 것 같다.
그는 「실습시간에」 목재를 대패질하는 학습지도를 하면서 <아이들아/ 인생이란 것이 이 미송의 목재처럼/ 제 삶의 부스러기를 버리고 버려서/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 목재 같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심장 옆 살이라도 떼어버릴 줄 아는/ 수심의 꼿꼿함으로 새로운 꿈>을 꾸라고 주문한다. 그는 또한 교육 현장에서 찾은 작은 에피소드에서 교육자의 자세를 가다듬기도 하고, 그 생활에서 우러난 교육관과 개성적 서정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팔베개한 채 엎드린 버릇을 고치려
심판관처럼 16절지 제도 용지를
살펴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놓고 돌아섰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여닫이 문 하나에 창문 하나
방 가운데 가슴 뚫린 구멍 같은
백열 전구 하나
신발 다섯 켤레!
수업 준비 못했다고 손바닥 때리던
아픔이 벼락처럼 내려앉고
얼굴 화끈하여 말없이 교실을 나섰다
―「제도시간에」 일부
고등학교 학생인 ‘남규’에 대한 에피소드를 시로 빚은 작품이다. 전기와 관련한 옥내 배선을 그리는 기술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자기 집 평면을 생각하며 도면을 그린다. 아파트 베란다도 그리고, 넓은 창도 그리고, 샹들리에도 그린다.
그러나 남규는 앞의 시처럼 간단하게 그린다. 이 그림을 보고 시인은 학생의 생활을 유추하게 된다. 그 순간 시인은 <수업 준비 못했다고 손바닥 때리던/ 아픔>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얼굴 화끈하여> 말없이 교실을 나선다. 시인은 제도 그림 1점을 보고, 학생의 고단한 생활을 감지한다. 그로 인해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고, 그 반성하는 내면을 삽화적 구성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이런 내면의 변화는 언뜻 보기에 사소한 것 같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소중한 발견이자, 위대한 사랑의 발현이다.
학교와 연계된 작품으로, 표현의 멋이 살아나는 작품에 「보리밭」이 있다. 시인은 <고지식하고 외골수의 선생>이기 때문에 보리밭의 보리들이 손들고 벌서는 것으로 본다. <노랗게 여문 황금 팔뚝 사이로/ 청보릿대 한줌/ 짧은 팔 슬쩍 헛손 들고 있다>고 노래한다. 이 부분은 보리밭에 대한 사실적 묘사일 수도 있지만, ‘한 줌 청보릿대’는 교육 현장에서 목격하게 되는 ‘문제아’를 상징하기도 한다. 보리들이 <분명 벌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인은 유년의 추억을 떠올린다. <양짓말 보리밭 헤쳐/ 산 꿩알 두 손 가득 품고 나오다/ 밭주인에게 들켜 혼쭐나던/ 배꼽 까만 유년이 저기 저 청보릿대 틈/ 눈물 반 웃음 반 손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청보릿대’ 틈에서 자신의 일탈된 유년을 추억하는 것은 ‘청보릿대’가 바로 ‘문제아’를 상징하고 있음을 재차 확인시킨다.
자신의 유년을 청보릿대로 비유한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비유와 상징도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람 입 벌어진 외곳 기슭에
하늘밥도둑 한 마리 호올로
침묵의 땅 껍질을 벗기고 있다
흙감태기가 되어 흔들고 두드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침묵 인생 육십 년
쌀 한 가마 지게에 지고
이십 리 길을 걷던 발자취 뒤로
아스팔트 길이 열리고
개미 행렬처럼 유원지를 오르는
사람들 사이로 멀리
영농모자 눌러 쓴 모습 외로워
거짓 없는 흙에 평생 투자하고도
흙에서 졸업하지 못한 땅강아지가
가난의 껍질을 벗기듯
흙밥 정결히 봄 논을 갈고 있다
―「아버지와 논」 전문
육십 평생을 농사에 전념한 아버지의 생활 단면을 그리고 있다. 세상이 변해도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初志一貫) 농사에 전념하는 자세에 대한 경건함이 들어 있다. 한편 ‘아버지’를 ‘땅강아지(하늘밥도둑)’로 비유한 것은 관념상 비하(卑下)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직접적인 비하가 아니다. 아버지의 <영농모자 눌러 쓴 모습>이 외로워 보이고, <거짓 없는 흙에 평생 투자하고도/ 흙에서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 <흙감태기>가 된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안타까운 내면의 투영이다. 이 내면에 엉겨 있는 저항의식이 은연중 작품에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것은 봄 논을 쟁기로 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땅강아지가 겉 땅을 파는 모습이 동일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향이 아닌 ‘외곳’에서 침묵의 땅 껍질을 벗기는 땅강아지처럼 시인의 아버지도 땅을 경작하며 평생을 보냈을 터, 이에 대한 연민이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가난의 껍질을 벗기듯/ 흙밥 정결히 봄 논을 갈고 있다>라는 표현에서, 농사에 대한 긍정성․경건성을 보이기도 한다.
땅은 생명을 잉태하는 모성으로 그려진다. 「텃밭, 새로운 시작」에서 <대지(大地)의 살갗 속에서/ 촉수를 올린 실부추 한 무리> <감나무 밑 하수구 틈새에서 새순을 올린/ 미나리의 부지런함> 등에서 <농사(農事)하지 않아도 숨 터 오는/ 삶의 노래>를 찾는다.
4. 길에서 길을 찾기
김종윤 시인은 구도(求道)하는 자세로 문학을 창작한다. 살아 있는 시간 모두를 구도하듯이 엄격(嚴格)․치밀(緻密)․가열(苛烈)하게 집중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특정 분야, 특정 시간, 특정 대상에 집중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는 일상 생활 모두 성실하게 영위하겠지만, 특히 문학 창작에 있어서는 구도의 자세를 견지한다.
구도(求道)는 참선이나 기도를 통해 얻는 종교적 비의(秘義)를 말하기도 하지만, 가치 있는 일에 대해 욕심 없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포괄한다.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삶의 이치를 천착하는 과정도 이에 속한다.
부산 양산 가는 길이 이 길 맞는가
경부고속도로 옥천 톨게이트
길의 허리께로 파고들며 길에게 물었다
자리 하나를 내준 길이 말이 없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핏줄로 연결된 하나인데
제 몸 속 가는 길도 모르나보다
이 길이 맞는가
이미 지나온 나에게 묻는다
인생의 허리께 지나왔는데
가야할 길 보여지는 길은 없다
오직 지나온 길뿐
청맹과니 하룻길을 또 더듬어 간다
―「길에게 길을 묻다」 전문
시인은 경부고속도로 옥천 톨게이트에서 부산, 양산 가는 길을 묻는다. 그러나 이 물음은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부산이나 양산이 아니고, 시인이 추구하는 내면의 지향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핏줄로 연결된 하나인데/ 제 몸 속 가는 길>도 모른다는 혼돈을 바탕으로, 구체적 길과 내면의 길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는다. 즉 ‘길’이라는 중심어를 통해 <나>를 찾는 형이상학적 위상으로 발전한다.
시인은 현실에 대해 <가야할 길 보여지는 길은 없다>고 절망한다. 아는 것은 <오직 지나온 길뿐>이라는 자각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만 용이하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청맹과니 하룻길>을 더듬어 간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시인에게 있어 구체적인 길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내면이 지향하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은 구체적 ‘길’에서 추상적 ‘길’을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가지 못한 길」에서 시인은 <솔숲으로 사라진 환한 오르막길> <아지랑이 흙길 따라/ 넘어 가보고 싶은 길>을 바라본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낯익은 농장이 살 것 같고/ 보릿단 묶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보리쌀 갈던 말들>을 만날 것 같다. 그러나 <환한 풍경의 오름 길/ 아직은, 가지 못한 길>이어서 동경하게 된다. 그 길은 또한 ‘금강’과 연결되어 간절한 서정을 잉태한다. <돌아오고픈 물길 천리/ 꿈엣 길, 반쯤 미쳐서 가보고 싶은/ 금강, 너 금강>을 찾아 <가보고 싶은 길/ 아직은, 가지 못한 길>을 찾는다.
한 사랑의 속앓이여라
발정의 가슴
안으로 불 태워
꽃 빛으로 부르는 노래
기나긴 침묵의 세월을
몸 가르는 아픔으로 탈피하여
황혼의 심장보다
더 붉은 가슴으로
노래하는 사랑이 있다
온갖, 소리 있는 물상들의 속살스러움
만개한 계절은
꽃
비로
내리고
채 피우지 못한 언어를 삼키는
소리 없는 날개여!
―「벙어리 매미」 전문
이 작품의 ‘벙어리 매미’는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 보인다. 그는 <발정의 가슴/ 안으로 불 태워/ 꽃 빛>으로 노래하고자 한다. 그러나 <침묵의 세월>에 갇힌 그는 <피우지 못한 언어>를 안으로 삭혀야만 한다. 울지 못하는 매미, 그것은 곧 <소리 없는 날개>이면서, <몸 가르는 아픔으로 탈피하여/ 황혼의 심장보다/ 더 붉은 가슴>으로 <한 사랑의 속앓이>를 하는 시인의 내면이다.
<한 사랑의 속앓이>는 상징성으로 인해 다양성을 갖는다. 「그림자」에서는 <안돼! 넌 갈 수 없어/ 학교에 가야하고 커피 한 잔 마셔야 하고/ 춘란에 물 주어야 하고/……/ 젖가슴에 얼굴 묻고 마지막 들숨이/ 무너지는 절대의 환희 속에서/ 그래, 난 갈 수 없어>라는 상황도 동질적이다. 물론 <구속이 행복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역설의 원용으로 보인다. 「새벽에 우는 새」에서는 <무거운 이 아침에/ 즐거운 노래든지 슬픈 노래든지/ 한 소절의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은 <홀로 깨어 우는 새>로서 자신을 <괜찮다 괜찮아> 달래고 있지만, 이것도 ‘한 사랑의 속앓이’에 해당한다.
5. 김종윤의 성채 나서기
김종윤 시인의 성채 안에 들어가 여러 곳, 여러 작품을 살펴보았다. 눈에 번쩍 뜨이는 것,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포착되었을 터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생명력을 가다듬고 있는 더 많은 작품들이 숨겨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김종윤 시인의 문학적 성채에 들어가면서 밝힌 바이지만, 그는 언어의 마술사라고 부를 정도로 시적 재능을 발휘한다. 작품마다 언어와 언어의 결합으로 오묘한 이미지를 생성한다. 또한 보잘 것 없는 사물이나 작은 사건을, 특별한 언어 구사를 통해, 아름답고 훌륭한 구조물로 탄생시킨다.
「산행」의 <사랑은 햇살보다 환하고 아름다운 것/ 부끄러 말아라/ 산지기 바람은 여행 중이다>라는 표현은 가히 절창이다. 「속리산 갈참나무」의 <산그늘 질흙 속에 발등을 묻은 갈참나무는/ 몸통이나 우듬지가 아닌 뿌리 끝에 귀를 열고 산다/ 문장대를 넘어 쓸어오는 소소리바람에 옷 벗고/ 여린 가지 숨통마다 빨판을 심은 겨우살이의/ 푸른빛으로 하여 아직 살아있음을 타전하는/ 갈참나무는 생명수를 두레박질하던/ 주름진 혈관마저 닫았다>는 표현은 경탄의 ‘휘모리’에 빠지게 한다.
벙어리 속내 어찌 알았을까
차갑게 식은 몸뚱이
그 위로 번지는 울음 빛 바다
서러움이 벙글어
그저 속으로 운 것뿐인데
깊숙이 바늘 찌른 듯
그리하여
안으로 밖으로 온통
뜨거운 것들이 터져 나와
피 빛으로 번지는
불 받은 이 어살궂이여
속눈썹의 떨림에서
가슴 속 천 근의 무게
아니 저 앞산의 암애(巖崖)까지
하나로 보듬어 사르고
종내는 끈적거리는
후련한 몸뚱이 하나 지우며
꽃잎, 꽃잎이 지누나
―「석양」(사랑을 위한 변명) 전문
‘석양’ 자체를 아름다운 구조물로 노래한 것이지만, 시인의 내면이 투영되어 더욱 안타까운 절창을 이룬다. 이 작품에는 ‘석양’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과 언어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절창의 구조를 이룬다. 그 중에서 <불 받은 이 어살궂이여>는 강열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어살’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 속에 나무를 죽 세워 고기를 들게 하는 나무 울’을 말한다. 빨갛게 어린 바다의 노을과 어울린 이 어살의 출렁임이 ‘궂’처럼 보였다는 표현은 김종윤만의 형상화라 하겠다. 이런 형상화는 「황사 내리는 마을」의 <사람 들어 사는 집 한 채 건너/ 빈 집 한 채/ 함부로 버려진 추억들>과 <농사하지 않아도 좋은 것으로 주시는/ 신의 섭리가 아카시아 개망초에 은혜로 내려/ 온 밭 가득 꽃잔치>가 질펀하다는 역설에서도 나타난다.
시 창작에 대한 내면의 반향에서도 미적 구조는 산견된다. 「비 오는 밤」의 <오고 또 가는 일이/ 비처럼 거침이 없어야지/ 드난살이 하룻밤이 또 기울고/ 몇 줄의 詩가 속마음을 숨긴 채/ 가을비 속에서 옷을 벗는다>는 노래가 그러하다. 「비 속에서 빛나는 매화」의 <나는 얼마나 단순한 짐승이냐/ 낙화 분분 내려앉는 비 속의 산란/ 뜨거운 하혈, 그 하혈의 고통만큼/ 가슴 부서지도록 3월을 그러안고 산화하는/ 네 숨결>을 노래함이 그러하다.
그러나 김종윤 시인은 「묘와 밭이 있는 풍경」에서처럼, <개망초 아카시아 새순이 키 재는/ 홀 묘에 검은 비석/ 가장 오랜 비석 하나 깊은 음지에서/ 남근으로 일어서고 남근 위/ 붉은 장끼 한 마리>와 같이 우뚝하게 솟아오르는 시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무수한 상형문자의 화석들>을 ‘만들고 부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그것이 시인에게 씌워진 책무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