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백산과 월악산 사이에 우뚝한 바위산
미끄러운 마사토 길과 낡은 고정로프 주의해야
전날 예보와 달리 국지성호우 소식과 함께 사흘 내리 비가 온다는 예보다. 벗들과의 통화 끝에 산행을 강행하기로 한다. 올산(858.2m)의 도상거리가 짧아 잘하면 비를 피하겠다는 계산과 여름산에서 만나는 장쾌한 빗발과 조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래저래 발끝이 짜릿해진다.
새벽 6시, 지독한 습도를 체감하며 비안개를 헤치고 단양으로 달린다. 한 달 만에 만난 벗들과 밀린 안부를 나누는 사이 단양IC를 빠져나간 차는 927지방도를 타고 깎아지른 사인암 앞을 지난다. 예천 방향을 향해 얼마가지 않아 산행기점인 미노교가 보인다. 미노교 직전의 서울가든모텔 맞은편 빈터에 주차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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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운무가 황홀경을 자아내고 있는 810봉. 발아래는 깎아지른 벼랑이다. (아래)전 구간의 암릉에 설치된 로프가 많이 삭아 있어서 시급한 교체가 필요하다. 로프가 교체될 때까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우뚝할 올(兀)자를 쓴 올산(兀山)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예천군 상리면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북으로 약 4km에 위치한 산이다. 소백산과 황장산, 도락산, 흰봉산 등 주변의 큰 산에 가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큰 산에 못지않게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웅장하다.
올산을 찾는 사람들은 흔히 올산리고개를 들머리로, 미노교를 날머리로 삼는다. 해발 580m의 올산리고개에서 출발할 경우 약 30분이면 어렵지 않게 정상에 닿고 미노교까지 넉넉잡아 3시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반대로 해발고도가 낮은 미노교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시간과 힘이 훨씬 더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국지성호우가 예보된 상황에 수십 길 바위를 타며 미끄러운 마사토 길로 하산하는 것은 위험하다. 전날 지도를 보며 윤태동(충북등산학교 강사)씨와 논의한 대로 미노교를 기점 삼아 산을 오른다.
미노교를 건너 오른쪽 포장도로로 들어선다. 비구름이 자욱한 칠월의 산촌, 절정을 달리는 녹음이 낭자하다. 여름산행은 어차피 젖기 마련. 땀에 젖으나 비에 젖으나 젖는 건 마찬가지다. 산세와 지형을 미리 숙지하고 우장을 잘 갖춘다면 여름 우중산행의 매력을 유감없이 즐길 수 있다. 경험과 안전 확보를 바탕으로 했을 때의 얘기다.
분지골로 들어서자 왼편 언덕 위에 두꺼비 바위가 보인다. 올산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 측면에서 보는 것보다 정면에서 봤을 때 두꺼비의 형상이 더 뚜렷하다. 바위 위에는 분재 같은 소나무가 한 그루 솟아 있다.
멀리 분지골 골짜기 끝으로 보이는 산세가 범상치 않다. 사방이 첩첩산중이다. 오늘 안으로 이 깊은 산중을 벗어날 수 있을지 살짝 두려움이 몰려든다. 낮게 드리운 비구름 탓이다. 사과밭과 사방댐 표지석을 지나 오른쪽으로 개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든다. 여기서 개울을 건너지 않고 분지골을 계속 따라 오르면 옥석산업 현장사무실터와 채석장터를 지나 올산 정상으로 오르게 되나, 숲이 깊고 이정표가 없어 자칫 고생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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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산행 후 돌아본 사인암. 2. 사인암 앞 계곡 암반에 새겨진 장기판과 바둑판. 3. 바위굴을 지난다. 일명 산부인과바위라고도 부른다. 여러 개의 거대한 바위가 서로 엇갈리며 층을 이뤄 만들어진 바위. 배낭을 벗어야만 몸을 뺄 수 있다. 4. 악천후를 뚫고 정상에 오른 기쁨에 함박웃음을 웃고 있는 일행들.
- 시작부터 입자가 굵은 마사토가 발밑에서 구슬처럼 굴러 길은 내내 미끄럽다. 미노교→올산리 코스는 5~6시간이 소요되지만 중요한 건 다만 올산을 다녀가는 게 아니라 느릿느릿 유감없이 산을 즐기는 거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위를 안고 산을 오르는 편이 낫겠다는 윤의 권유를 따르기를 잘했다. 비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사위가 어둡다.
553봉을 앞에 두고 이종려, 나순결씨는 553봉을 직등하고 오늘 처음 합류한 이영순(유통업)씨와 윤과 나는 553봉을 오른편으로 끼고 우회한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우회 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한참 만에 만난 두 사람에게 전망이 어떻던가를 물으니 세상에 다시없는 전망이었다는 당연한 대답을 한다.
맞은편 분지골 위로 채석장터가 보인다. 흰 속살을 드러낸 채석장터는 제 스스로 제 상처를 싸매고 있는 중이다. 몇 해 가지 않아 적당한 수목으로 속살을 가릴 것 같다. 짧은 숲길과 탁 트인 암릉 위를 번갈아 지나는 산길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으나 어두운 하늘과 짙은 운무로 인해 주변의 큰 산 조망이 어렵다.
안부를 지나 일명 산부인과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굴 앞에서 잠시 당황한다. 암릉 위로 그대로 진행하다가 되돌아선다. 분명 바위굴이 이쯤일 텐데… 살펴보니 바위 아래로 급하게 길이 나 있다. 바위굴을 통과하며 산부인과 바위라고 불리는 이유를 살펴본다. 초입에 모태 안의 아기가 산도를 빠져나오며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써야 하는 좁은 문 같은 곳이 있다. 배낭을 벗어야만 몸이 빠져나간다.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 다시 모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인가. 바위굴은 일자형이다가 삼각형이다가 사선으로 길게 뚫려 있기도 하다. 굴 밖 세상이 자못 궁금해지게 생겼다. 바위상단으로 올라가 이 멋진 바위의 전체적인 윤곽을 확인하고 싶지만 무서운 기세로 몰려드는 비구름에 쫓겨 발길을 재촉한다.
바위굴을 통과한 후 완만한 경사의 숲을 걷는다. 울창한 수목으로 인해 숲속엔 바람 한 점 없다. 팥죽 같은 땀이 줄줄 흐른다. 20여 분 이어지는 숲길에 발걸음이 한정 없이 늘어질 때 산마루에 당도한다. 바람이 부니 살 것 같다.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쉼터는 나오고 바람은 달려와 땀을 식혀준다. 이 맛에 산을 오르는가.
잠시 쉬자고 앉았던 자리에서 아예 도시락을 꺼낸다. 상추쌈과 곰취쌈으로 점심을 먹고 뜨거운 커피까지 한 잔씩 하고 나서 비옷을 찾아 입는다. 오래 참았다는 듯 드디어 비가 쏟아진다. 비 오는 날에도 산에 가냐고 묻던 영순씨는 물 만난 고기처럼 빗속을 유영하듯 매끄럽게 앞장서고 있다. 비 내리는 산의 속삭임에 홀려 다들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