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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쟁의 기사발견
지금부터 90년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3년전부터 先親의 遺業을 시간나는대로 정리해오고 있다. 자료가 부족하여 詩作品외에는 대부분 口傳으로 내려오던 내용들을 정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 동아일보에서 보관해 오던 90년전의 기사내용을 찾게 되어 다행이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선친의 활약상들, 말로만 전해듣던 전설같은 기사내용을 직접 확인 했을 때 받은 충격과 감동은 정말 진한 것이었다. 90년이 흐른 지금까지, 누가있어 이 사건을 기억하겠는가, 자식들마져 찾지않았다면 영원히 뭍힐 뻔 했던 기록들이였다. 이 기사 발견으로 보다 事實的인 家庭事를 엮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것이다.
이 小作爭義 事件은 삼일운동이 있은 직후 일제의 횡포가 날로 포악해져가는 1920년도, 경남 진영읍,조그마한 빈촌에서 배고픔으로 설움받던 소작농민들이 일본인지주에 대항하여 인간성회복을 위하여 일으킨 최초의 항쟁사건이였다. 惡質 일본지주(迫間)를 고발한 사건이였고 동시에 서슬이 시퍼런 점령지 총독부와 관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사건이였다.그들은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주동자들을 회유하고 설득하고 달랬으나 제시한 조건을 수락 할때까지 쟁의를 계속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마지막에 구속까지 당하게된다. 이 사건이 발생하게된 원인은 춘궁기에 草根木皮하던 농민들의 굶주림 때문이였다. 배고픔보다 더 절박한 일이 없었기에 생사를 걸어 놓고 시작한 투쟁이였다.
황해도 오산고보 교직원으로 근무하시던 선친(裵在晃)께서는 심훈의 상록수를 읽어시고 감화를 받는다. 선친은 이 학교 설립자 중의 한분이셨던 姜昇烈 외할아버지의 고명 딸과 결혼하신지 얼마 되지않아 학교를 辭職하게 된다. 교직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황해도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일군다, 그리고 박간으로 부터 고통받는 불쌍한 소작농민들을 대변하고 보호하기위해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일제하 이 운동에 책임자로서 참여하기 위해서는 고난과 핍박을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만 했다.
가정과 가족을 포기 할 비상한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셨다. 결국 예상했던대로 이 사건으로 한가정의 비극이 시작 된것이다. 그 후유증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군사혁명 후 까지 이어졌다.
해방이 되어도 정부는 이 사건을 조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식들마져 자기 살길만 찾아 헤메이다 말로만 전해오던 그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다. 어느듯 자식들도 인생을 마무리할 시점이 온것이다. 평생 가족을 고생시킨 선친의 삶을 부정하며 살아온 자식들이였다. 뒤늦게 깨달은 자식들은 선친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기록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 가정사 기록이 영원히 흘러 국가와 민족이 어려움을 처 할때 자신을 과감하게 던질수있는 후손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선친의 유업을 기리는 일이다.우리는 국가가 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어 보았기 때문에 선친게서 이루시고자 했던 민족독립과 민족통일의 숭고한 뜻을 이제와서 이해하게된 점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는 언젠가 반드시 반복 된다라는 말이 있다. 선친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서는 두번 다시 외세에 굴복하는 민족이 되지 말아야한다. 선친의 뜨거운 피를 이어받은 우리가족들은 항상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세상 어디에서 살아가든지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현명한 후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지주와 대항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것이 지역사회를 위해 자신을 내놓은 일이라고 생각하셨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소작농민들의 단결을 호소하고자 염원하였으나 신문검열등 총독부의 방해로 선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 사건이 발발하자 동아,조선일보 양 신문사도 긴장하였다. 이 사건이 가져올 엄청난 파장을 기대했던 것이다. 기자들을 진영에 상주시키면서 기사를 송고받았다고 한다. 90년전 그 때 그 사건으로 동아일보에 기사화된 수십항중 한편을 올려본다.(상세한 것은 필자가 쓴 배선생 집안 이야기를 참조바란다)
-동아일보에 난 기사내용이다.신문을보니 평양발기사. 평남기사, 남북기사가 동시에 개재된것을 보니 이상 야릇한 생각이드다.-
-구속당한 선친의기사내용 -
註:민족을 사랑한 죄로 가정이 추락한 이야기-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목으로 한글말살정책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국민학교 한글교습시간도 없애버렸다. “한민족의 고유한 말과 글이 없으면 알맹이(민족혼)없는 보리쭉정이와 같은 민족이 되고 말 것이다” 生夫인 晩山 할아버지의 탄식을 들어시고 자신이 언젠가 한글보급을 위해 직접 나설것을 다짐하게된다. 그 준비과정으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배움의 길을 떠난다. 이때가 첫 부인 남평문씨가 세상을 떠난지 9개월되는 때였다. 상경하여 일년만에 주시경 한글학교와 남궁억 경성학원을 졸업한다. 그리고 남궁억 선생의 추천으로 황해도 오산학교 교편생활을 시작하게된다. 아버님 나이 20세가 되던 해이다. 재직중에 심훈의 소설 상록수을 읽고 감명을 받아 귀향을 결심하게된다.
귀향하면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계획을 세워 나갔다.
첮째는 진영의 갈밭을 개간하여 농토를 확장하는 일이였다.
둘째는 빼앗긴 한글을 다시 찾는 일이요, 농민들의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요
셋째가 만주의열단에 가입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일이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한 일이였지만 자신이 계획한일이 더 보람있는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집을 떠날 때 다짐한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학교를 사직하고 깊은 고뇌에 빠진다. 갓 결혼한 강씨 어머님 때문이였다.
육개월 전쯤에 오산학교 설립자이신 姜昇烈 이사장의 무남독녀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대궐같은 넓은 기와집에서 그리고 넉넉한 살림집에서 달콤한 신혼생활에 젖어 있던 어머님은 낙향하자는 아버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는다. 떠나는 날까지 눈물로써 밤을 지새었다고 한다. 정던고향, 정던집, 정던 친구들 남겨놓고 남편따라 낯설고 물설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하는 두려움이 앞섰다.더구나 부양해야 할 부모곁을 떠나야하는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어머님은 결혼 할 때 이 집에서 자식 놓고 부모님과 함께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머님은 아버님의 뜻을 이해한 부모님의 충고를 받아 들인다. 남편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가기 싫어도 떠나가야하는 것이 출가한 여인들이 겪어야 하는 슬픈 운명이 아닌가.
낙향하여 지모씨를 포함한 동지들과 규합하여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경남일대 진해, 웅동, 용지, 창원, 대산, 진영지역 등에 한글학교를 세우고 일헌들의 감시망을 피해 으슥한 야밤에 호롱불 밝혀놓고 일주일에 한 두번 한글학습과 독립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일제말기 까지 지속되었던 한글학교들은 해방이 되자 하나 둘 문을 닫았으며 진해 마천동에 세웠던 개광학교만이 해방 후에 웅동중학교로 개명되어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각 지역마다 학교 책임자를 선임하였다. 그 지역을 책임진 교장과 같은 역활이였다. 매주마다 동지들과 회합을 가져야만 했고 밤이면 마을마다 계획데로 학습을 시켜야만 했다 .이마을에서 저마을로, 여정이 급할 때는 지름길을 택하여 밤에도 험한 산을 넘어 가며 하루에도 수십리길을 걸어서 이동하여야 했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이동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계속된 고난의 행군으로 아버님의 귀가는 점점 뒤로 미루어졌고 불행의 검은 먹구름이 우리집에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농가에도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고 날마다 밤이 찾아온다. 들판의 밤은 더욱더 을씨년 스러웠다. 어머님은 여름밤에 들려오는 지긋지긋한 개구리 울음소리에 귀를 닫아야했고, 엄동설한, 벌판에서 불어오는 살을 애는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가며 긴긴 밤들을 홀로 지새었다. 그리고 방안에 울리는문풍지 떠는 작은 소리에도 혼자라는 두려움에 잠마져 이룰 수 없었다. 선비집 규수로 곱게 자라난 어머님은 아버님이 없는 이런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고 아버님이 돌아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머님은 기다림에, 외로움에 지칠데로 지쳐 버렸다.
별이 총총히 빛나던 칠흙 같은 어두운 초 여름날(5월 7일)밤, 개구리 울음소리가 싫은 어머님은 세살박이 형님을 등에 업고서 집을 나섰다. 행여 오실줄 모르는 아버님 마중하러 나간 것인지 아니면 집안에 있기가 갑갑해서 산보하려고 집을 나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질퍽한 동네 논길을 벗어나 밤 이슬 젖어 있는 풀섶 둑길을 따라 신작로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너들강에서 두 시신이 발견 되었다. 실족사 한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고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이웃과 친척들은 투신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없다.어느쪽이던 본인만이 그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그토록 그리던 황해도 고향땅을 두번 다시 밟아보지도 못하고 한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한 가정의 슬픈 이야기다.
조국을 위해 아버님 한몸만 바치려다 가족 두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며 한 동안 탄식속에 죄의식속에 빠져 술로써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큰 슬픔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츰 잊혀져 갔다.
일제가 미터법을 적용했던 시기라 미터법에 생소했던 소작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당한 피해규모가 매우 심각했을 때였다. 그렇다고 소작농민들은 항의 할 곳도 없었다. 학생들에게 미터법을 가르치고 학생들로 하여금 義信契를 조직케 하여 일제지주들의 알랄한 착취에 합법적으로 대항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주들의 소작료 징수가 너무 높았다. 토지의 등급에 따라 삼칠제 또는 사육제로 구분하여 소작료를 챙겼다. 또 곡식이 떨어지는 봄이오면 높은 이식을 내고 곡식을 빌려야 춘궁기를 초근목피하며 겨우 벗어날수가 있었다. 수확철마다 곡식으로 소작료 와 이식을 내고나면 농민들에게 남는것이 거의 없었다..
이런 악순환이 해마다 반복되었다. 아버님은 농민들의 비참한 사정을 바로 인식하고 소작료 인하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려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시기에 그 많고 많은 독립투사들은 외국에 나가 나라찾는 명분에만 집착하였지 어느 한 사람 농민들 편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 또는 조직이 없었다. 국민들의 일상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열강들의 세력다툼속에 나라가 해방되었지 독립투사들이 해방시킨것은 아닌데도 해방 후 그들이 돌아와 주도권을 잡고 만들어 놓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김일성이와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의 앞잡이 역활을 하다 나라를 두동강으로 갈라 놓았다. 국민들의 가슴속에 천추의 한을 만들어 놓은 그들은 이 완용이 보다 더 나쁜 매국노임에 틀림없다)
소작료 인하운동에는 철저한 준비와 계흭 그리고 명분이 필요했다. 일년정도의 준비기간도 필요했다.
사전에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함께 추진하는 동지들에게 철저한 입단속도 함께 지시했다.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사람으로 태어나서 가장 서러운 일은 배고픔을 참는 일이요.일본경찰이 사실을 알게되면 이 계획은 허사가 될 뿐 아니라 우리는 농민들에게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요. 그들의 배고픔을 막느냐 막지못하느냐 하는것은 우리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요. 그러니 입단속을 하자는 것이요."
운동을 추진하려던 그 해 훙년이 들었다. 소출량은 절반이하로 떨어졌다. 소작농민 대표가 박간(일본지주)을 찾아가 금년은 흉년이 들었으니 소작료를 칠삼제(농민 7 ,지주 3)로 하자고 여러번 설득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박간을 만나고 돌아온 소작농민대표들은 이 과정을 아버님께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아버님은 치를 떨었다. 의신계동지들과 수차례에 걸쳐 회의를 거듭하고 결론을 내렸다. 소작농민들을 모으게하여 그자리에서 " 추수를 해도 굶어죽고, 추수를 하지 않아도 굶어죽을 바엔 차라리 추수를 하지 말고 굶어 죽읍시다. 칠삼제를 챙취 할때까지 추수를 하지 맙시다." 소작농인들은 박수를 치며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했다. "우리가 죽느냐 사는냐 그리고 박간에게 이기고 지는냐도 여러분 뜻에 달려있으니 단 한사람의 낙오자가 있어도 이 운동은 실패하고 만나는 것을 명심하기 바라오."
시월 말이 지나도 지주와 농민들의 줄다리는 계속되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박간은 헌병대를 움직이려 했으나 명분이 없었다.추수를 하지 않는것은 소작농인들의 자유였다. 박간의 농간에 헌병대가 움직일것이라는 동지들의 조언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이 사실을 총독부에 탄원서를 올려 놓고 있었다
"이 운동은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먹고사느냐 굶어죽느냐 하는 생명이 걸린 문제다. 우리는 이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소작농인들과 지주와의 문제인 만큼 총독부와 헌병대는 이 문제를 양자간에 조용히 해결할수 있도록 지켜보아 주길 바란다"
시월 중순이 지날때쯤 벌판에는 하얀서리가 내렸다.북녘에서 날아오는 배고픈 기러기떼들이 그냥 지날칠리가 없다.. 새까맣게 날아드는 기러기때들이 날마다 포식하고 있을 때였다.
박간의 집사가 정종 한병을 들고 아버님을 찾아왔다.
"박간 지주님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라고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아버님 역시 공손한 말로 예를 갖추었다.
"주인께서 이번 일로 매우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어서 일이 마무리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해결되겠소"
"주인께서는 배선생님께서 농민들을 설득하면 해결되리라 믿고있소"
"이미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판에 누굴 설득하러 왔단 말이요. 당신 주인께 전하시요. 우리의 요구가 관철이 되지 않으면 소작농부들 전부가 논에다 불을 지르고 타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다고 전하시요. 굶어 죽으나 불에 타죽으나 죽는것은 마찬가지 아니요"
"다시 한번 생각 해주십시요. 배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주인께서도 가만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박간이 지시한 일종의 협박같은 메세지를 전달했다.
"당신 주인께서 나를 어떻게 한다는 말씀이요"
"헌병대에 고발한다던지, 손해배상을 청구 한다든지, 그런 방법도 있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약속을 하였소. 이 운동에서 한사람이라도 희생을 당하면 수천명이 함께 죽을 각오가 되있다고 당신 주인에게 이야기 하시요"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생각 말이요"
"배선생께서 이 운동에서 빠지면 안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시면 소출 십분지 일을 선물하겠다는 주인의 약조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님은 얼굴은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리고 분노했다.
"분명히 당신주인에게 전하시요.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금년에 흉년이 들어서 일어난 일만은 아니요. 해마다 소출을 바치고 나면 농민들은 봄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당신 주인은 알기나 합니까. 부족한 양식을 빌려오면 가을에 이식을 붙혀 때어가고 , 소출은 소출대로 높은 율로 걷어가지 않았소. 당신 주인의 창고를 해마다 누가 채워주는데 농민들을 이런식으로 취급해도 된단 말이요. 되로주면 말로 갑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드시 춘궁기에 보리살 한대라도 거져 먹으라고 준적이 있소. 그런적 있었다면 농민들이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요 .그리고 그들이 피땀 흘려 거두어 들인 곡식 한알이라도 나는 공짜로 원하지 않으니 돌아가 주시요" 버럭 화를 내며 쫒아 버렸다. 가지고 온 정종까지 돌려보냈다.
아버님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전보를 쳤다. 부산에 있는 도청에서 소작료 인하 투쟁을 할 예정이라는 내용과 함께 기사화를 요청한것이다.
집결지인 진영역에 오전 다섯시에 집결했다. 주먹밥을 허리에 차고 몇백명의 농민들이 모였다. 그들은 결의에 차 있었다.
총독부와 헌병대에 이 사실을 문서로 사전통보하고 합법적인 집회 허가를 받은 후였다.진영역에서 부산에있는 도청까지 도보로 행진하여 열시간만에 오후 세시가 조금 넘어 경남 도청에 집결했다. 서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온 조선,동아 특파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프래카드를 펼쳤다. "배곺아 못 살겠다. 소작료 인하하라"
총독부에서 도청에서 관리들이 그리고 지역 헌벙대장이 달려왔다. 아버지를 헌병대로 압송해갔다. 총독부와 헌병대에서는 이운동의 성격을 파악하느라 동분서주하엿다. 총독부에서는 이 운동이 합법으로 가장한 농민운동이라고 단정짓고 전국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두고 두려워하기 까지했다. 헌병대에서는 투쟁을 하기까지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난 후에 회유작전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도청에 집결한 농민들이 배선생이 오기 까지 단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여 저녁 10시가 넘어도 도청을 점거하고 버티고 앉아있었기 때문이였다. 아버님은 박간이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오늘 저녁이라도 돌아가서 내일 당장 추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이 이루어질때 까지 여기에서 기다리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농민들을 해산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헌병대는 진땀을 흘려야했다. 저녁 12시가 넘어서 헌병대장이 박간의 확인서를 받아왔다. 확인서 내용은 금년에만 국한해서 일률적으로 소작료를 7대3으로 책정한다는 확인서였다. 농민들의 승리였다.
그 다음날 신문을 읽어본 농민들은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였다.선동적이고 상세한 내용은 검열에서 삭제 되었다.아버님은 삭제된 상세 기사내용을 아쉬워 했다. 이 투쟁을 계기로 전국농민들이 소작료인하운동을 할수있도록 도화선에 불을 당기려했던것이였다.
(이 기사내용이 조선일보 마이크로 필름속에 보관되어있는 것을 얼마전에 발견하였다)
아버님은 조국이 해방된 기쁨도 잠시 열강들의 주구들이 벌이던 헤게모니싸움에 아무 이유 없이 희생당한 분이셨다. 김규식 선생의 민족주의이념에 동조하여 반탁을 위한 영남지방 대표로 선임되어 덕수궁에서 연설을 한 것이 씻을 수 없는 죄목이 되었다.
연설내용은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니 미소는 물러가고 조선은 조선인이 통치하여야 훗날에 후회가 없다”였다. 각 지방에서 참가한 청중들로 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하단하던 중 귀빈석에 앉 아 있던 소련대표 스치코프가 갑자기 일어나 유독 아버님에게만 소련식 인사를 하였다. 포옹을 하면서 서로 뺨을 비비는 인사였다.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는 소련사람들도 그런 장면을 연출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 장면이 문제가 될 줄이야. 지금도우리 가족들은 이 장면이우리 가족사에 최악의 불행한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이 동아일보에 기사화 되었으며, 이 기사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의 모리배 김두한 휘하 광복청년단에 의하여 공산주의자로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를 읽고 심각한 사건으로 판단한 아버님은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내려오자 가족이 있는 진영으로 가지 않고 生面不知의 어촌마을인 하단 갈대숲으로 몸을 피신하게 되었다. 일 년 후 진영의 가산을 비밀리에 정리하고 어촌마을 하단에 초가삼간을 짓고 가족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정치와는 인연을 끊고 농사를 지으며 詩作으로 노후를 보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그러나 세상은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를 아니했다.
하단으로 이주 한 후에도 김해경찰서와 광복청년단에서 아버님의 행방을 계속 추적하였다. 아버님 검거에 실패한 경찰은 유인책으로 어머님을 대신 체포하여 김해경찰서에 3개월간 복역하게 하였다. 어머니 나이 37세, 내 나이 4살 때였으며, 여동생 연옥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아버님의 순수한 애국이 외면당한 채 스치코프와 돌발적인 포옹한번으로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정권 말기까지 우리집안의 시련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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