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의 여성들이 입는 전통복장은 대체로 얼굴과 몸을 가리는 형태를 하고 있다. 더운 날씨에 보기에도 답답해 보이는 중동 특유의 여성 복장인 베일. 그것은 중동지역 문화의 주류인 이슬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또한 이 지역의 역사에서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고 색다른 의미를 지녀왔다. 본 글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아온 베일에 관하여 그 문화적·역사적 의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로 보수적인 이슬람 가문의 여성이 사용하는 베일은 안면의 일부 또는 전체를 가리는 것이다. 이 복장은 아랍어로 히잡, 부르꾸으, 니깝이라는 다양한 용어로 불리운다. 또한 터키에서는 페체와 차르샤프, 이란에서는 차도르(chador)로 불리운다. 이것은 다양한 색깔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검은 색이며 실크나 양모 천으로 만들어진다.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무슬림 소녀는 자신의 베일을 손수 만들며, 대개 이것을 처음 쓰는 의식은 결혼 기간 중 행해진다. 베일쓰기는 소녀에서 성숙한 여성의 단계로의 발전을 나타내는 통과의례로 순결과 정숙함을 상징한다. 무슬림 여성은 두 경우 곧 예배를 드릴 때와, 남편을 비롯해 그녀와 관련된 혈족의 남성과 함께 있을 때에만 베일을 벗는다.
초기 이슬람 시대 몇세기간 여성의 베일쓰기와, 보통 하렘(harem)으로 알려진 여성격리의 관습은 제도화되면서 부유층에 전적으로 도입되었다.
이후 13∼16세기경 이집트 맘룩(Mamluk) 시대에 베일과 격리는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당시 맘룩국의 지배가문과 군부의 고위층은 대규모의 하렘을 두어 그곳에 부인들과 첩, 그리고 에디오피아 등지에서 온 여자 노예들을 거하게 하였다. 곧 이러한 여성의 격리와 베일쓰기는 정치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18세기 무렵 여성의 베일은 가문의 경제·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순결과 처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사회에서 성공한 중류층은 상류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본부인과 첩을 두었고, 그들 또한 상류층 여성과 마찬가지로 베일을 썼고 격리된 처소에 거하였다. 그러나 베일쓰기가 자유민 중류층 여성들에게까지 확산되자 이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여자노예와 결혼하거나 그를 구매하는데 있어 처녀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에 반하여, 중류계층의 여성과 결혼하는 데서 그것은 중요 사안이었다. 여성의 베일쓰기와 격리 및 제한된 행동은 여성의 순결성에 대한 남성의 우려에서 비롯된 관습이 되었으며 또한 그것은 가문의 명예를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이슬람교의 해석에 따르면 남녀 공히 성욕을 지닌 존재로, 성욕은 결혼생활을 통해 향유할만한 바람직한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러한 생각은 곡해되어 여성은 특히 성욕이 강하고 조절능력이 떨어진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남성의 성적 탈선은 여성의 유혹(fitna)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로써 베일을 쓰지않는 여성은 남자를 타락시키는 죄를 짓는 것이며, 그 여성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겸손한 품행과 몸을 가리는 단정한 옷차림만이 남성의 성욕을 제어하거나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초 베일쓰기는 아랍이 서구의 식민정책을 겪는 과정에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당시 중동에서 3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식민정책은 여성에 대한 이슬람의 규제를 완화시켰고 여성복장 및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왔으나, 프랑스가 철수하자 곧 그 변화에 대한 보수 무슬림들로부터 반발작용이 있었다. 또한 1892년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자들이 행정과 공무에서 요직을 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까심 아민Qassim Amin은 1899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에서 이집트의 현대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여성 초등교육의 필요성과 일부다처제에 관한 법률개정 및 베일착용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집트를 서구화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베일을 벗게함으로써 여성을 해방시키자는 까심 아민의 운동은 이집트내 여성해방운동가들의 호응을 받았다. 1923년경 이집트 여성들은 공공 생활에서 베일을 착용하지 않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까심 아민과 그 지지자들의 현대화 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족주의·보수주의 진영은 당연히 이슬람 관습의 방어를 들고 나왔다. 양측은 아내의 본질적 의무는 가족을 위하여 충실히 일하는 데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였지만, 여성 복장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을 보였다.
한편 서구의 식민정책자들은, 식민지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학대해왔다고 선전함으로써 자신들의 식민지 고유문화 말살정책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아랍국가에서 베일 문제는 식민주의에 맞선 저항운동을 상징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무렵 현대화 운동은 약화되었고 보수진영과 원리주의 두 진영은 정치와 사상면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1967년 戰後의 시기는 이슬람 부흥 시기와 일치하였다. 이슬람 부흥은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아랍의 충격적인 패배와 직접 연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가속화된 원리주의 운동의 지지자들은 이슬람 부흥의 일환책으로 여성의 베일착용과 가사에로의 복귀를 주장하였으며, 이는 과거 여성의 임무에 관한 이슬람 전통을 재확인하는 상징적 표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원리주의에 따른 여성들의 베일착용이 다양한 사회계층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서민계층과 시골 출신의 중하류 계층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란과 터키에서도 유입된 서구문화와 토착 이슬람문화간의 갈등이 본격화되고 특히 세속정권과 이슬람 세력간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여성의 베일착용에 대해 끊임없는 논란이 일어났었다. 이란에서는 서구화를 지향했던 팔레비가 1930년대에 강제로 여성의 베일착용을 금지시켰다가, 1970년대말 호메이니의 주도하에 이란이 이슬람 국가로 회귀하면서 이슬람의 상징으로 여성의 베일착용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터키에서는 현대화와 서구화를 지향했던 케말파샤의 정책을 기점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정책을 고수하는 입장과 보수 이슬람 세력 간에 여성의 베일착용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결국 중동여성의 베일은 이슬람문화의 산물로서 속세에서 여성격리의 표시였고 순결을 의미했으며, 동서양 문명의 충돌 구도에서는 동양문화의 상징이었다. 감추어진 것은 아름다우며 바로 이것은 동양문화의 한 특징일 것이다. 베일을 쓴 중동여성의 신비로움은 동양 특유의 정서를 여전히 베일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