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시와미학 신인상
반성에 대한 표정 외 4편 / 신경희
커튼을 슬쩍 건드려서
가늘고 긴 햇살 한 줄 빌려 와
어둠뭉치 반으로 갈라 앉혔다
이쪽과 저쪽으로 갈린 뭉텅이 어둠조각
빛이 가까운 쪽으로는 바랜 어둠인 것이
빛 쪽으로도 어둠 쪽으로도 섞이지 못한다
커튼이 조금씩 걷어지는 만큼
빛이 어둠을 밀어 붙인다
어둠이 빛으로 화장을 한다
빛이었을 어둠이 제 마음을 돌려 세우고
어둠이었을 빛들 모서리로 물러난다
커튼을 경계로 안쪽과 바깥쪽에서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준
그것들은 애당초 한몸인 사이다
어느 쪽으로 불리어지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
열정과 배반이 한몸인 것처럼
아침에 환하게 저녁에 어둡게 쓰이는
너를 부르는 내 이름
혹독한 휴식에 묶인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착각으로 배부른 창, 문을 열고
수상하게 울 것도 같은
즐거운 사육
신선도는 어린 순서가 아니라 생산일자입니다
오래 삭힐수록 좋은 건 된장 간장 고추장이지만
발효보다는 살아있는 활어의 생기 넘치는 퍼덕임이
확실히 구미당기는 일입니다
털끝만큼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 단서입니다
명심할 것은 ‘생포’에서 출발하는 것이죠
키 작은 콩나무가 구름 위로 줄기를 올리듯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잠복근무가 필요한 일입니다
때로 강짜를 부리고 잠시 묵비권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한심한 냄새를 피우는 건 전략일 수도 있겠으나
만성변비에 대한 고통을 잊기에는 아주 그만입니다
말을 익힐 즈음부터는 곧잘 정확한 표현에 능숙해지기도 하죠
조심스럽게 물음이 많아지면 청신호를 켜도 좋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소유의 경계가 불분명해집니다
집착은 금지어이긴 하지만 제일 난코스이기도 하지요
공통어가 메아리로 시청각을 혼란스럽게 하기 일쑤이니까요
자동제어보다는 훈련이 필요해서 몸살을 각오해야하기도 합니다
어려운가요? 물론 쉬운 일은 절대 아닐테죠
동물성도 식물성도 광물성도 모두 포함되는 상상의 광합성이니까요
이제 겨우 당하고 한숨 돌립니다
유치해서 실없는 웃음도 예고 없이 돌출하는
사. 랑.
치매극장
1막
질기디 질긴 숨결만으로 사는 일은 차라리 희극이다
죽어야겠다는 결심 따위는 재작년 여름에 버렸다
계획 없이 아침은 밝고 저녁도 밝다
어리서리 비치는 사람들은 공중무희로 분주하고
이따금씩 알아차린 언어는 이름 같은 유년일 뿐
웃지도 못할 그로데스크한 정지
그 멈춘 시간 속에서 늙은 아이를 바라보아야하는
우리도 희극입장이다
2막
내가 숨 가쁘게 달려온 건 그저 실없는 다큐멘터리였어요
보상이나 감동은 애초에 준비하지 않는 소품이었다구요
당연히 필요할 눈물에는 설탕을 쳐서 맛을 내지요
찢겨나갈 포스터에 남겨진 이름은 성형 전의 것이니
부디 오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징그럽게 후딱 지나온 바닷길이네요
젖었느냐구요? 주머니에 구겨진 가족관계증명서가
가뭄으로 꼬여 말라비틀어진 걸 보셨군요
자막은 잠겨있어요
깊이 내 쉬는 날숨하나 붙잡고 두드려보세요
큭,
08연대기
인연은 한번 스치는 것으로 살아봐지고
연분은 한번 살아보는 것으로 파토내보고
궁합은 너 잘난 맛에 내가 호강을 하는 거라구
합리적이게도 삐딱한 질서가 핵심인 셈이지
꽃이 져야 열매가 맺는다는 걸 깜빡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가지는 잘라버리거든
공식이 없는 수학문제는 피부노화를 서두르고
무임승차에 떳떳한 나이는 성별이 부적절해진 탓이야
지루한 새벽빛 때문에 관절이 까칠해졌다는 변명도
초경에 대한 적절한 예의라고 입을 맞춰보면 어때
여름 저녁 남산타워에서 철거되는 눈치 없는 자물쇠를 건배하고
육수는 비단뱀이 토해놓은 싱거운 기린 뒷다리로 간을 쳐
장거리 문상은 모텔 방 미지근한 온수로 머리를 수그리고
쿳션 좋은 쇼파를 구르는 당구알의 붉은 연애사를 들어보았니
보통리 저수지 언 물위의 철새가 사람을 구경할 때
얼음을 지치는 모터배주인은 배가 고팠고
발 시린 구경꾼들 총총히 칼국수집으로 달콤한
검은 속을 채우러가고
사람 좋은 사람 보면 도지는 멀미 때문에
오후 내내 사우나로 시말서 쓴다
아듀 참신한 열두 달을 지극히 복잡하게 뜯어내지만
미안하다 사랑한다
생활의 발견
말을 듣기 나쁘게 하는 것도 기술이다
터진 수도관에서 솟구치는 물줄기처럼
말초신경 하나하나를 거침없이 자극하는
놀라운 감동, 달인이다
같은 말이라도 대번에 큰 싸움으로 발전시키는
고난이도의 어휘와 말투는
맞대응할 엄두조차 포기하게 하는데
듣는 순간에서 바로 항복!
우리 말 위력에 진저리를 치며
말과 사람 간에 밀접하게 배신하는 유착관계가 궁금하다
때와 장소 구분 없이 무지막지로 들이대는 저돌성에
저 사람의 배후까지도 궁금하다
말이 사람을 떠미는 것인지
사람이 말을 떠미는 것인지
돌아서며 후회 할 배짱도 궁금하다
사람이 무지한 것을 말이 성질을 내고 있다
사람이 놓친 경우를 말이 앞뒤 모르게 날뛰고 있다
2013년 시와미학 신인상
혀1 외 4편 / 윤인미
손으로 얼굴을 괴고 오래도록 당신을 바라봐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둘은 너무도 먼 나라의 사람들
익숙해지면 쉽게 오해하는 법,
창문으로 들어와 어디론가 뻗어가는 당신의 언어, 지금 막, 내가 쏟아내는 언어 위에 내려와 앉네요
우리 둘은 너무도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
조여 오며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당신의 사랑이
섞일 수 없는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요
포크처럼 포개어져도 나이프처럼 헤어져도
의미 없이 서로 맴도는
당신과 나의 거리는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
그런데
당신의 언어보다 먼저 창을 넘어 온 눈빛은
왜 아직도 제자리에 묶여 있죠
혀 2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 잘 먹는다 한 통속이다 그녀들 중심에 서면 갇힌 바람이 뼈와 골수를 파먹는 소리가 들린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으로 읽히는 것을 싫어한다 피었다 지는 꽃처럼 그러나 이름은 서랍 속에 두고 다닌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生을 과녁으로 인식 한다 과녁은 자신의 결핍을 추궁하는 눈빛. 눈빛이 강할수록 입에서 쏟아지는 화살로 심장을 맞힌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봄볕처럼 킥킥 웃는다 웃음소리는 말에 찍힌 신음소리푸성귀 같은 상처가 여기저기서 웃자란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그에 의해서 보호 받는다 대부분의 그는 중요한 순간에 자리에 없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그녀를 용서해야만 살 수 있다 이름을 호명하며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개괄적으로 용서한다
* 이수명 시인의 『대부분의 그는』에서 빌림
아트 테라피
여기, 눈으로 볼 수 없어도 그려지는 그림이 있어요
붓끝으로 당신과 나의 마음이 모이면 당신의 인생이 걸어 들어와 우린 그림의 한 가운데 놓이게 되지요
당신의 상처. 그 어디 쯤. 색이 가파르고 위험해 보이는 그곳,
홀로 요동치다 잠잠해지는 그림 속으로 생각보다 먼저 내 손가락이 다가가요 부드럽게 학습된 손가락이 당신에겐 날카로운 창이었나봐요 놀란 당신은 발걸음을 붓대처럼 세우고 걸어가네요
가는 선이 눈보라를 맞으며 힘겹게 고갯마루를 넘어가요 빛깔은 잊고 향기가 비슷한 巖梅, 지금 나는 마음 하나를 꺾어들고 향을 지펴요
당신의 상처 속으로
씻김굿
펜을 들어 냉동 창고 바닥에 쓰러진 한 청년의 죽음을 더듬는다
여기는 청년의 고향, 진도 바닷가
옷고름과 수건으로 그를 어르며, 슬픔을 위로한다
그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
아담하게 조여 오는 그의 시간이 밀서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흰 수건으로 허공에 사연을 적는다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향한 걱정들, 어디에도 종결어미가 없다
이자처럼 불어난 원망이 하늘 끝자락을 움켜쥔다 수건을 놓친다
한 발을 앞으로 디딘 채 멈추어 슬픔을 쏟는다
진도 바닷길이 열린다
파도의 어깨가 들리며 춤사위가 가벼워진다
극락왕생이라는 비밀번호로 발목을 잠그고, 모도*에 몸을 가둔
그는 영원히 춤춘다
*진도 신비의 바닷길이 연결되는 섬
젖은 오후
사는 게 팍팍할 때
옥동자 집을 찾아간다
사주 받아 든 점쟁이가
귀퉁이가 털린 만세력*을 들춰
세상의 우글우글한 근심 중에서
내 근심을 찾는다
무엇이든 쌀 수 있는 보자기를
내 면상에 던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바닥만한 말의 보자기 속에 갇혀
말문이 닫힌다
그 많은 근심 중에서 내 고민은 표정이 아니다
단지 시간 위에 자빠진 감정일 뿐이다
다음 손님이 방문을 열자 점쟁이는
젖은 신발 같은 나를
쏟아지는 빗속에 내동댕이친다
창자 같이 미끌거리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빠져 나온다
홀쭉해진 지갑 안에
젖은 나를 구겨 넣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