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1:2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21:3 그 부친이 저희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인고로 왕위를 주었더니
21:4 여호람이 그 부친의 위에 올라 세력을 얻은 후에 그 모든 아우와 이스라엘 방백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21:5 여호람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니라
21:6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21: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 따로 있다는 거죠. 우리가 살면서 내가 사는 데 얼마나 껄끄러우냐, 만족스럽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생각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평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것이 악한 일이며 그리고 그렇게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속성과 본성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고 해도 나만 편하고 좋으면 되지 그게 무슨 대수냐고 버틴다면, 글쎄요 마지막 심판 때도 과연 그렇게 버틸 수 있는지 정신이 아찔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고 했을 때는 우리가 바짝 긴장을 하고 악한 쪽으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아무리 형편이 어렵고, 경제가 어렵고, 인생살이 자체가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쪽으로 머리를 돌려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것을 명심을 해줘야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악한 왕이 한사람 등장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사밧이라는, 유다나라에서 조금은 괜찮게 통치했다는 여호사밧의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명단이 2절에 보면 7명 나오죠. 그런데 거기에 제일 맏이가 여호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악한 것이냐, 여호람이 장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해서 왕이 되고 난 뒤에 그 동생을 다 죽였습니다. 가만히 있는 동생들을 왜 죽입니까? 거참, 이상하지요. 자, 여기 동생을 죽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마는 그런 악한 일을 하는 동기가 나와 있습니다. 6절에 보니까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낯선 사람 이름이라든지 명단이 자주 나올 때는 우리가 성경 보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제가 그 배경을 대충 설명하면, 이스라엘 나라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북쪽 나라는 제대로의 나라가 아닙니다. 비정상 이예요. 북쪽은,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살고 있지만 그 정신은 이미 이방민족과 동일한 정신으로 기울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남쪽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맹세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남쪽에 있는 여호람이라는 이 왕마저 북쪽의 영향을 입어 가지고 완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도발적인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아들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줬는데, 3절 말씀을 보면 "그 부친이 저희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인 고로 왕위를 주었더니" 라고, 이렇게 되어있으니까 여기서 보면 동생들도 빈털터리 된 것이 아니고 그 나라에서 요직과 막강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왕이 되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되면 욕심이라는 것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절제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절제시켜 주지 않으면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본인의 힘으로는 절제가 안됩니다. 동생들이 요직과 막강한 재산을 갖게되니까 왕이 된 맏형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와 이스라엘 방백 중 몇 사람을 죽였습니다.
자, 이것이 누구로부터 사주를 받았느냐하는 것이 오늘 설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북쪽 나라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한창 하나님의 대적하는 권력층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북쪽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는 행세를 남쪽 왕인 여호람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 남쪽 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간주하십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배후에서 여호람을 조종했던 것입니다. 그 여자는 아합의 딸이었는데 아합은 북쪽의 왕입니다. 그러니까 아합이 장인어른이고, 장모님은 이세벨이며 자기 아내 이름은 아달랴입니다. 아합, 이세벨, 아달랴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쪽이 아니고 최고의 자리는 힘이 최고로 세야 권위가 선다는 그 철칙에 의해서 힘으로 모든 것을 자기 수하에 두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쪽 계통입니다. 특히 이세벨과 아달랴는 바알 신을 믿었습니다. 힘을 모으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고, 많은 힘을 가져야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그러한 기복적인 이방종교의 신봉자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똑 같잖아요.
자, 이방여자의 이러한 정신사고가 왜 하나님이 계시는 이 남쪽나라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할 수밖에 없고 허락할 수 없는가? 그 내막이 좀 어렵습니다만, 역대하 8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솔로몬 왕의 말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 왕이라고 하는 자가 일천번제를 드려서 하나님께 응답 받아 이스라엘을 최강의 나라로 만든 축복 받은 왕의 대명사 아닙니까. 인류역사상 솔로몬 왕만큼 축복 받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축복이 솔로몬의 마음가짐을 변화시켰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많은 소유와 많은 축복이 결코 솔로몬의 마음까지 완전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지 가진 재산을 보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재산 내놓았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가 있느냐, 지옥에 가 있느냐, 어디로 향하느냐가 결정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세상에 가 있다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할지라도 지옥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와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새사람 가는 데에 주력해야지, 남들 가진 만큼 나도 끌어 모아야 되겠다든지, 남들 힘쓴 만큼 나도 힘을 발휘해서 기죽지 않게 한 번 살아 보겠다든지 하는, 이러한 야심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면 그것은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고 절간에 나온 것입니다.
역대하 8장 끝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 그러니까 이방종교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러나 그 왕비가 살 장소가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 안의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하기 때문에 이방여자, 다른 나라에서 시집 온 여자는 거룩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여자는 거룩한 곳에 함께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사랑하고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몇 명이냐 하면 후비가 700명이고 빈장이 300명이라, 합해서 1000명이죠. 왕비까지 1001명 아닙니까. 그 많은 여자들마다 자기 친정에서 믿던 신들을 총집합을 한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의 마음이 여호와로부터 자기 아내들이 믿던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됩니다. 이쪽 신을 믿어 볼까, 저쪽 신을 믿어 이렇게 복 받았나, 복 받는데는 여호와 아니어도 다른 신을 믿어도 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거예요. 이 땅에 살아가는 데 한해서 꼭 여호와께만 매달린다든지 그분에게만 의지한다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생각의 폭을 넓힌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역대하 8장에 보면 솔로몬이 그래도 하나 지킨 게 있는데, 신명기에 보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총회, 즉 하늘나라 총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어떤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 이미 잘린 인간입니다. 지옥의 자식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수요 설교시간에 산당과 그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과의 차이점이 뭐냐고 했습니까? 산당과 같은 갓바위처럼 산에서 복을 비는 기복적인 그러한 종교시설 단체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건물과 차이점이 뭐냐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차이가 난다고 했습니다. 산당에는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신을 달래기 위한 우상만 있는 반면에 성전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그 언약궤와 거룩한 피의 만남이죠. 7월 10일날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대로 하면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아야만 마땅하지만, 그러나 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에다가 일년에 한 차례씩 거룩한 하나님의 자기희생, 하나님의 피가 묻힐 때, 그 피를 믿는 자는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점은 왕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우냐, 얼마나 키가 크냐,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네 부인이 진정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네 여자가, 또는 네 자신이 하나님이 언약궤를 통해서 내려준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면서 이 약속에 의해서 용서받고 사죄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네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느냐의 여부를 하나님께서 늘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부에서 수입한 자기 아내들이, 그러니까 북쪽에 있는 아내들이죠, 남쪽 남편과 북쪽에서 온 아내들이 관심 있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나라가 유지된다는 이 자체를 자신들은 믿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왕은 하나님의 허수아비가 되니까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니까 아마 그런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할 리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믿음도 있어야되고 행함도 있어야 된다고 많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내가 행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찾는 재미에 살고 싶지, 내가 행하지도 않은데 다른 예수란 분의 행함으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난다고 하는 이것이 나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못 믿겠다고 나오게 되거든요. 바로 이것이 바알 종교며 일반들의 보통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든, 교회든, 선교단체든, 선교사가 되었든, 목사가 되었든 관계없습니다. 하여튼 간에 "나는 죄인중의 괴수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이 소리가 듣기 싫다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이방종교의 특색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앉아 있어도, 혹은 솔로몬이 많은 축복을 받더라도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언제고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매순간 순간마다 우리에게 유혹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눈만 뜨면 유혹입니다. 무슨 힘으로 저것을 가지지? 내가 얼마나 돈을 벌어야 저 모피를 살 수 있지, 저 아파트를 살 수 있지, 우리는 늘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내 노력에 의해서 내 힘으로 저 것들을 축적할 수 있느냐는 것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혹거리 입니다. 힘이 없어서 저것을 못 가지지, 힘만 키운다면 저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하고, 나는 아파트를 가지든, 무엇을 가지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나는 죽어야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지 내 공로와 내 노력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고 받아드리는 것하고 어느 것이 우리들의 심성에 자연스럽게 다가옵니까. 우리가 이 아달랴를 비난하고 여호람을 비난하기 이전에 우리자신이 우리 자신을 한 번 비난해 봅시다.
드라마 "왕과 비"에 보면 이방원이 동생들 다 죽이는 것 나오지요. 왜 죽이는 겁니까? 여러분, 권력이라는 것이 도박이고 노름과 같은 것인데, 어디 권력의 정치 세계만 그러합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노름이 아닙니까?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더 많이 차지해야 속이 차고 만족스러운 우리의 탐욕, 이것을 지금 여호람이라는 자가 우리를 대신해서 다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란 것은 이런 놈이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아버지가 정치를 잘했고 신앙생활 잘 했으면 아들도 본 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유다 나라에 최고의 선정을 베풀고 믿음으로 생활했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하는 것을 다 지켜본 그 맏이가 유다 나라 최악의 나쁜 놈으로 이렇게 전락했다는 말은, 둘 중에 나쁜 쪽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이고,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거룩한 곳에 어떻게 감히 이렇게 여호람과 같은 나쁜 놈들이 천국에 갑니까.
저는 신앙생활 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더러운 나 자신이 천사들이 살고있는 깨끗한 천국, 거룩한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내가 설교하고 헌금하고 전도한다고 그것이 성사됩니까?
찬양한다고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언약의 피, 그 피로 씻음 받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 말은 지금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듯이 유다 나라도 같이 망해야 마땅한데, 하지만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 하셨음이더라" 이 등불이 뭐냐하면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기 때문에 봐줘서 멸하지 않는 거예요. 다윗과 언약을 맺었단 말이죠.
그러면 지금은 누구와 언약을 맺었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이 새 언약인데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하고 맺은 자기 피와 자기 살을 대가로 맺은 그 약속에 의해서, 그 예수님이 택한 자와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지금도 베풀어 주셔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꺼지지 않는 등불입니다. 제가 분명히 장담합니다마는 마지막 심판 받을 때에 네 속에 꺼지지 않는 예수님의 등불이 있는가? 그것을 살피십니다. 네가 얼마나 잘났고 훌륭하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얼마나 성화가 되고 착한 인간이 되야 한다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용서의 등불, 따뜻한 등불, 사랑의 등불이 우리가 잘나서 꺼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맺어진 그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거룩한 곳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을 통해서 다른 사람 욕할게 아니라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멈추지 않는 탐욕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어떻게 거룩한 천사들과 합류가 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되게 하시는 것은, 꺼지지 않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이 더러운 죄인 중의 괴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로서 우리를 구원의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자든, 여자든 인간의 욕심은 한결같고 젊은 아이든 나이가 많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탐욕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저희들의 모습을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번 살핍니다. 정말 죄인 중에 괴수 이지만 놀랍게도 그것을 용서해 주시는 거룩한 피, 주님의 피를 사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