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복싱]퀴즈-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경기 관련자료:없음 [2805]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3-27 11:37 조회:476
토요일인데.... 퀴즈 하나 내 볼까요??? (토요일인거 하고 퀴즈 내는거 하고는 별
상관은 없는거 같군....--;)
요즘 세계 타이틀전은 12회 경기로 치러지죠. 하지만 프로복싱의 초창기에는 특별
히 라운드 수에 대한 규정은 없었던 것 같아요. 뭐 21회 KO승이 있는가 하면, 20회
판정승도 있더군요. 아마, 쌍방 선수간의 계약에 따라서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었
었나...추정됩니다.
그럼. 문제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경기는 누구와 누구의 경기였을가요?
(힌트 : 넌센스퀴즈, 경기시간을 시작종 울렸을때부터 판정이 내려지기까지로
정의합니다.)
다음 페이지에 답이 있습니다.
답 : 1983년 12월 4일에 벌어진 , 신설 IBF J 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인 한국의
"서성인"선수와 필리핀의 "보비 베르나"선수와의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에서 서성인 선수의 눈부상으로 인하여 10회에 경기가 중단되는데, 의료진
과 집행위원간의 판정이 엇갈렸고(제가 알고 있기로는, 의료진은 경기를 중단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눈부상이 가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경기가 중
단될 경우 베르나 선수의 TKO승이 선언될 것을 우려해서 집행위원쪽에서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객석의 관중들과 양 코너에 선수들을 한시간 이상 세워둔
채 말쌈을 벌이다가, 결국 "판정유보"라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이 경기를 생중계 하던 방송사 측은 , 계속 광고만 내 보내면서 간간히 코너
에 멍청히 서있는 선수들만 보여주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방송을 끝내
버리는 웃지못할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IBF측은 약 열흘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베르나 선수의 TKO을 선언하였으며
챔피언으로 인정함으로써 열흘 가까운 경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행정력이 부족한 신설 기구의 한계를 여지없이 보여준 경기였으며, 이 사상 초유
의 "판정유보"사건은 수준낮은 IBF챔피언의 난립과 권순천 선수의 "가짜 도전자
사건"등과 함께 한국프로복싱을 침체기로 끌고 가는 촉매 역할을 하엿습니다.
그 이듬해-그러니까 84년 4월 15일, 서성인 선수는 베르나 선수와 재대결을 벌
여 10회 KO승으로 설욕하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지만, 85년 1월 3일
벌어진 2차 방어전에서 한국의 "김지원"선수에게 10회 KO패하면서 타이틀을 상
실 합니다. 서성인 선수 "10"하고는 굉장히 인연이 있군요. 그 후에 김지원
선수에게 다시 도전하지만 체중조절 실패로 1회 KO패하고 링을 떠납니다.
"잭 뎀프시"는 "스포츠"라는 분야에서 배출된 영웅으로써 거의 시초라 할 것입니다.
그의 공격적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그를 야구의 "베이브 루드"와
같은 대중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링 위에서, 뎀프시는 정력이 넘치는 플레이를 보였습니다. 그는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 양 주먹을 적당하게 내 밀어 상대와 거리를 유지하는 기존의 스타일(아마
옛날 복서들의 사진에서 많이 보셨을겁니다)에서 탈피하여,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추는 크라우칭 스타일을 바탕으로 격렬한 보빙과 위빙으로 상대에게 접근하여
공격을 펴는... 당시로써는 대단히 호전적인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위압적으로 접근을 하였고 가차없는 공격으로 상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또한 가공할 만한 파워를 가지고 있어서, 상대를 단 14초와 18초 만에 꺾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80전을 싸우면서 49차례KO승을 거두었으며, 그 중에는 무려
스물 다섯차례의 1회 KO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895년 6월 24일생인 그는 콜로라도에서 11형제의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였으며,
본명은 "윌리엄 해리스 뎀프시"입니다.
그는 16세에 집을 나와 화물기차의 노무자로 일하다가, 탄광촌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뎀프시에게 있어서 어떻게 해야 링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론이 완성된 시기라 할 것입니다. 뎀프시는 메니저 "잭 칸"을
만나면서 일대 전기를 맞이합니다. 그의 아래서, 뎀프시는 "짐 플린""프레드
풀턴"그리고 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베틀링 레빈스키"와 "건보트 스미스"를
차례로 넉 아웃 시키는 호조를 보입니다.
1919년 7월 4일, 뎀프시는 "톨라도"의 야외 링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 "호세
윌라드"에게 도전합니다. 그날 링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거웠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뎀프시는 예의 호전적이고 분노에 찬 경기로 윌라드를 1회에만
무려 일곱차례나 다운시킵니다. 그 경기는 4회에 윌라드가 기권을 하면서 뎀프시의
승리로 끝납니다.
챔피언이 된 그는 "빌리 미스크""빌 브레넌""토니 기븐스"를 간단히 제압하고
타이틀을 방어합니다. 뎀프시와 기븐스의 경기는 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달러의
입장수익을 올리는 경기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1923년 9월 14일은 뎀프시의 전력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남긴 날입니다. 그는
"루이스 안젤로 파르포"와 뉴욕의 폴로 그라운드에서 맞섰습니다. 뎀프시는
"팸파스의 야생들소"라는 별명으로 악명높았던 파르포를 1회에만 일곱차례 다운을
시킵니다
그러나 라운드가 끝나기 전, 1회가 끝나기 직전, 한 방의 라이트 펀치로 뎀프시를
링 밖으로 날려 버립니다. 순간 8만의 관중들은 숨을 죽였고, 뎀프시는 간신히
심판의 카운터가 끝나기 전에 코너로 돌아갑니다. 경기는 2회 57초만에 뎀프시의
KO승으로 끝납니다.
1927년 7월, 뎀프시는 훗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잭 샤키"에게 7회 KO패를
당합니다. 두 달 후, 뎀프시는 시카코의 솔져필드에서 터니와 만났습니다. 무려
10만4943명이 운집한 이 경기에서 두 선수는 무승부를 기록하였으며, 입장수익은
무려 2백6십5만불에 이르렀습니다.
뎀프시는 터니와 다시 경기를 벌리게 됩니다. 이 경기 전에 약속된 규칙 중에는
오늘날 복싱경기에서 볼 수 있는 규칙. 그러니까, 넉 아웃 시킨 선수는 카운트 도중
중립 코너로 가야 하는 규정이 새로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터니가 다운 되었을 때, 뎀프시는 처음 레프리의 지시를 무시하고, 터니의
주변을 돌아다녔고, 레프리의 재차 지시에 따라서 중립코너로 물러선 후 카운트를
시작하였을 때는 무려 14초 이상이 지난 후여서 터니가 회복할 충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충격에서 벗어난 터니에게 뎀프시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마치
타이슨과 더글러스 전의 롱 카운트 사건 처럼 -이 롱 카운트 사건은 오랫동안
논쟁거리로 남았습니다.
뎀프시는 이 경기가 끝난 후 은퇴하였으며, 1983년 5월 31일 사망하였습니다.
통산전적 80전 60승 8무 6패 50KO 6무판정시합.
웰터급...아니 세계 프로복싱의 춘추 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시대가
바로 80년대 초반입니다. 그 당시 세계 프로복싱의 인기는 요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죠. 그 선풍적 인기의 주역을 맡았던 선수들은 천재복서
"슈거레이 레너드"를 필두로 하여 디트로이트의 코브라 "토머스 헌즈" 최연소
챔피언 "윌프레도 베니테즈" 턱 분쇄기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입니다. 이들을
동시대에 볼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행운의 시대였죠.........
두란 - 레너드 1차전
"몬트리올의 대격전"으로 명명된 이 경기는 단순한 한 경기의 복싱경기의 의미를
뛰어넘어 전 세계 적으로 센세이션을 몰고 온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웰터급의
"알리 대 프레이져"의 경기라고 비유가 되기도 하는데요. 바로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였던 슈거레이 레너드와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으로써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자랑하던 "로베르토 두란"과의 경기였습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레너드는 빠른 푸트웍과 불꽃같은 연타를 바탕으로 하는
기교파 복서이며, 두란은 "돌주먹"이라는 별명으로도 알 수 있듯이, 펀치력을
바탕으로 한 파이터 였습니다. 그렇다고 두란이 기교는 부실한 반쪽짜리
선수였는가...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두란의 수비력은 역대 라이트급 챔프 중에서도
최고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선수였습니다.
이 두 선수사이의 경기는 1980년 5월 20일에 몬트리올 올림픽 경기장에서 사만
육천여명의 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두란은 종전의 스타일과는 달리
레너드를 자신의 사정거리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택합니다. 자신의 푸트웍을 과신한
레너드는 희롱하듯 두란의 주위를 돌다가 2회에는 두란의 동물적인 펀치를 맞고
크게 흔들리기도 하며 고전합니다. 초반부터 착실하게 우세를 잡아가던 두란은 결국
146-144, 145-144, 148-147의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2체급 석권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레너드는 그의 전적에 처음이자 실질적인 마지막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물론, 두차례 더 패하기는 하지만, 별 의미없는 경기라는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이 두 선수는 1년 후 다시 재 대결을 벌이는데, 이번에는 레너드가 두란의 전술에
넘어가지 않으며 우세를 잡습니다. 링의 면적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영리한 복싱을
펼치며 두란이 던져둔 미끼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경기를 운영합니다.
8회에 두란은 경기를 벌이다 말고 갑자기 "NO MAS"를 외치며 경기를 포기했는데요.
두란은 레너드와의 3차전에서 승리를 거두면 그 이유를 밝히겠다고 하지만 판정패
함으로써 그 사건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레너드 - 헌즈 1차전
특히 레너드와 헌즈는 "환 나폴레스"가 은퇴한 이래 최강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나란히 WBC(레너드), WBA(헌즈)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면서 진정한 최강을
결정짓는 경기를 팬들이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20세기를 20년이나
남겨놓은 시점에서 "20세기 최후의 승부"로 명명된 이 두 선수간의 경기가 1981년
9월 16일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경기 초반,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레너드는 예의 빠른 푸트웍과 연타로 초반 우세를
잡습니다만 중반 이후부터 헌즈의 스트레이트성 레프트 잽을 연달아 허용하며
역전을 당하고 계속 불리한 경기를 펼칩니다. 레너드는 눈이 완전히 부어올라
있었으며 체력도 많이 고갈된 상태였으나, 데뷔 초부터 대부분의 경기를 10회
이전에 끝내버린 헌즈의 그것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결국 14회전에 들어서면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한 레너드의 연타가 헌즈에게 작렬하며 당시 레프리였던
"데비 펄"에 의해 경기가 중단되며 레너드의 14회 TKO승이 선언됩니다.
이 두 선수는 8년 뒤인 1989년 슈퍼미들급에서 다시 만나서 재대결을 벌입니다만,
레너드는 두 번이나 다운을 당하고서도 무승부가 선언되어 주위의 빈축을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대결에서 누가 이겼느냐를 떠나서.... 경기 자체역시
과거 두 선수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던 아쉬운 경기였습니다.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와 게르만의 상징 "막스 슈멜링"의 2차전은 복싱의 한계를
뛰어넘어 정치적인 의미가 더 강한 경기였습니다. 루이스로 대변되는 자유진영과
호전적인 나치즘의 상징인 슈멜링간의 싸움으로..... 그것은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경기는 단 124초만에 끝났지만,
이 경기의 영향은 정말 대단했었다고 합니다.
1938년 당시 세계는 2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통치자 "아돌프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는 1935년부터 시작된 인종청소- '홀로
코스트'(대학살)-로 이어지면서 세계적인 비난의 초점이 되었고 , 1938년 봄에
마침내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인점국가인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강제
합병시키면서 세계대전을 일으킬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히틀러의 인종청소와 침략주의는 근본적으로 "아리안족의 우월성"에 그 근원을 두고
있었는데, 그 근원의 상징으로 바로 막스 슈멜링이 있었습니다.
슈멜링은 독일의 반덴부르그 출신입니다. 그는 1930년 6월 3일 공석중인 헤비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잭 샤키"를 4회 KO로 꺾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단 두차례의 경기만을 마치고 타이틀을 상실하여 단명 챔피언에 그쳤지만, 전
독일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복싱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 "죠니
리스코""영 스트리블링""미키 워커"를 연파하고, 1936년 6월 19일에는 흑백을
초월한 전미국인의 자존심이자 무패의 강타자 조 루이스를 12회 KO로 꺾는 대
파란을 연출합니다. 루이스가 무릎을 꿇고 미국은 마치 대통령이 사망한 것
이상으로 침통한 분위기에 쌓였고, 독일인들은 환희에 쌓였습니다. "히틀러"는
"세계제일의 아리안족이 3등 민족에게 이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치하하며
의기양양 했었다고 합니다.
이 경기 후 루이스는, 복수의 칼을 갈며 재대결을 노리게 됩니다. 1937년 6월
22일에 정상의 자리에 오른 루이스는 세차례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며 그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긴 슈멜링과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제대결의 몇주전, 루이스는 백악관을 방문하여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납니다.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던 그 시대에 흑인이 백악관을 방문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조 ! 우리는 독일을 물리칠 수 있는 당신의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라는 루즈벨트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백악관 방문을
머릿기사에 올립니다.
슈멜링이 뉴욕에 도착하여 숙소인 세인트 모리츠 호텔에 투숙했을 때, 호텔 앞은
나치의 침략주의를 항의 하는 인파로 들끓었으며, 슈멜링의 파이트머니도 결국
독일군대를 무장시키는 비용으로 쓰일 것이라며 나치즘을 강력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실제로 슈멜링 자신은 대단히 신사적이고 스포츠맨쉽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지만,
상황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24세의 루이스와 38세의 슈멜링의 역사적인 재대결은 1938년 6월 22일, 무려
7만여명이 운집한 뉴욕의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장을
직접 찾지 않은 전 미국인들은 모두 라디오앞에 모여 앉아서 경기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경기는 영어, 독일어, 포루투갈어, 스페인어의
4개국어로 생중계 되기도 하였습니다.
시작종이 울리자, 루이스는 슈멜링을 몰아부쳤습니다. 루이스의 분노에 찬
연타공격이 터지자 슈멜링은 오른쪽 발에 허공에 붕~ 뜰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으며 로프를 등지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였습니다. 슈멜링은 결사적으로
레프트를 뻗어서 루이스의 공격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루이스는 이를 가볍게
흘려버리고 불꽃같은 연타공격을 슈멜링의 안면에 작렬 시킵니다.
슈멜링은 완전히 경기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레프리 "아서
도노반"은 경기를 중단 시키고 카운트를 합니다만, 슈멜링은 초인적인 의지로 계속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경기는 다시 진행됩니다.
슈멜링은 비틀거리면서도 루이스에게 다가섰지만, 강력한 라이트 카운트를 맞고
다시 다운이 되고, 카운트 다섯을 세었을 때, 슈멜링의 코너에서 수건이 날라들면서
경기는 루이스의 승리로 끝납니다. 슈멜링은 루이스의 파이팅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단 두 번의 펀치를 날리고는 KO패 당하고 맙니다.
그 후 루이스는 1949년까지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려 25차례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여 이 부문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은 기록의 보유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슈멜링은 독일 내에서 여섯차례 경기를 더 가진 후 링을 떠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루이스와 슈멜링은 각자 입대하여 참전합니다. 슈멜링은 독일의
낙하산 병으로 참전하였는데 1941년 크레타섬에서 부상을 당하고, 그 후에는
병영내의 친선경기 형식의 복싱경기를 몇차레 벌리기도 했습니다.
루이스는 타이틀을 보유한 상태로 4년간 링을 떠나서 미육군에 자원하여
참전하였습니다. 그 역시 병영 내에서 친선경기 형식의 경기를 갖기도 하였고 약
10만불의 재산을 군대에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두 선수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두 선수에 대한 기록을 본
게시판에 올려 놓았습니다. 부실하지만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제 목:[복싱] 최초의 흑인챔피언 "잭 존슨" 관련자료:없음 [3140]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4-25 19:37 조회:338
20세기들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최초의 헤비급 세계 타이틀 매치는 1910년
7월 4일 리노에서 벌어진 "잭 존슨"과 전 챔피언 "짐 제프리스"와의 경기였습니다.
잭 존슨은 7번째 헤비급 챔피언이기도 하지요.
존슨의 상대 제프리스는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은퇴하한 전
세계챔피언이었습니다.
세계챔피언의 계보가 제프리스에서 별로 개성이 없던 "마빈 허트"와 "타미 번스"로
이어지면서 인기도 시들해 지고 말았는데, 존슨이 번스로부터 타이틀을 획득한
다음부터는 달라졌습니다. 복싱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말은 ..... 어패가 있구요...
관심이 높아졌다는 말이 정확하겠죠. 그 이유는 존슨이 바로...... 예전 여섯명의
챔피언과는 달리.... "흑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최초의 흑인 챔피언이었죠.
존슨이 호주 시드니에서 번즈를 물리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
국민들의 반응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존슨에게 쏟아진 것은 환영과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질시와 중상모략으로 점철된 여론 뿐이었습니다. 그가 흑인인
까닭이었겠죠. 그가 인간성도 엉망이고 매춘부하고 놀아나는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모략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존슨이 항상 백인 여성하고만 잠자리를 한다는 풍문은
모든 백인들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으며, 그를 혐오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흑인들의 인권이란 거의 밑바닥 수준이었죠. 흑인이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던 시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존슨의 비참한 패배를 기다렸지만, 존슨은 타이틀을 획득한 후
1년동안 무려 다섯차례나 타이틀을 방어해 냅니다. 물론 도전자들은 모두
백인이었죠. 사람들은 존슨을 속 시원히 두들겨 줄 백인 선수를 찾았고 모든 백인의
희망으로 떠오른 선수가 바로 제프리스입니다. 제프리스는 은퇴한 상태였고
농장주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으며, 체중도 거의 300파운드가 넘을 정도로 불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프리스의 전성기시절 체중은 210파운드였습니다. 그는
존슨과의 경기를 그다지 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세인들의 압력은 정말
대단했죠. 결국 1909년 말, 제프리스는 존슨과 이듬해인 1910년 여름에 경기를
갖기로 약속합니다. 팬들의 압력도 압력이었지만, 결정적으로 제프리스를 링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바로 존슨이 흑인이었던 까닭이었다고들 합니다. 제프리스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단 한차례도 흑인과 싸운 적이 없었지만, 무관 시절
흑인 선수에게 몇차례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복수심으로
대결을 허락했다는 후설도 나왔었습니다. 또한, 제프리스의 형도 복싱선수였는데,
그 형이 1902년에 존슨에게 패배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죠.
원래 이 경기는 센프란시스코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지만, 복싱경기혐오론자들이
주정부에 압력을 넣어 결국 리노에서 벌리기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이 경기가 있기 전부터, 제프리스는 모든 백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존슨에게 쏟아진 중상모략과 압력은 점점 더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존슨에게
협박을 하는 인종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존슨이 상당한 압력을 받았던 것은 뻔 하지요. 심지어 존슨은 공개 석상에서 "난
결코 제프리스를 이길 수 없다"라고 말하기 까지 하였지만, 백인들의 중상모략은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사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존슨의
압도적인 우세를 점치고 있었기 때문이죠.
만약 존슨이 승리했을 경우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동을 막기 위하여 경기장 내에서는
술을 팔지 않기로 결정되었고 소방관과 경찰이 배치되었습니다. 약 300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폭염이 쏟아지는 야외특설링에서 두 선수는 경기를 갖게
됩니다. 당시 제프리스는 약 70여 파운드의 체중을 뽑고 경기에 임하여 그 집념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초반, 존슨과 제프리스는 조심스럽게 경기를 펼쳐 나갑니다. 제프리스는 의욕을
보였지만... 사실 6년간의 은퇴기간이 너무 길었고, 나이도 서른다섯살이나
되었었기 때문에 좀처럼 경기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었고 경기는 제프리스에게
비관적이었습니다.
반면 서른두살의 존슨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며 초반
6라운드동안 우세를 점합니다. 제프리스는 좀처럼 존슨을 맞추지 못하였고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제프리스는 코너에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을 뿐"이라며
여유를 보이기는 했지만, 초반 6라운드를 보던 관중들은 절망적인 기분에
쌓였습니다.
존슨은 7회 시작종이 울리자 마자 튕겨져 나가면서 초반과는 달리 적극적인 공세로
나옵니다. 강력한 라이트가 제프리스의 턱에 작렬하자 제프리스는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연이어서 안면에 연타가 터지자 제프리스는 코너로
몰렸고 눈은 완전히 부어올랐습니다.
확실한 우세를 잡은 존슨은 그 후부터 착실한 공격으로 제프리스를 압도했고
제프리스는 존슨의 주먹을 고스란히 다 받아내며 14라운드까지 근근히 경기를 끌고
나갔습니다.
문제의 14라운드., 존슨은 결국 제프리스를 무려 세차례나 캔버스에 눕힙니다.
제프리스로는 선수생활 통틀어 최초로 경험하는 다운이었으며 결국 제프리스의
코너에서는 타올이 날아듭니다.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물론 미국내 많은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결국 몇몇 사람이 사망하는 불상사로까지 번지게 됩니다.
경기가 끝난 후 제프리스는 "오늘 나의 기량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였다. 6년전의 나
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것"이라고 말하며 완전한 은퇴를 선언합니다.
불행하게도 세상은 존슨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인 여자와 음란한
짓을 했다는 명목으로 두차례 기소를 당하였고, 한차례 유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존슨을 음해하려는 공작은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존슨은 1913년 유럽으로 이주하게 되고 1920년 그곳에서 추방될 때 까지 살게
됩니다. 그는 두 차례 타이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는데요. 그 중 한
경기는 "짐 존슨"과의 경기입니다. 짐 존슨역시 흑인이었죠. 그러니까, 짐 존슨은
사상 두 번째로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흑인이 되는 것이고 "잭 존슨"과 "짐
존슨"과의 경기는 최초로 흑인끼리 벌린 세계 타이틀전이 되는 셈입니다.
존슨은 1915년 큐바의 하바나에서 벌어진 타이틀전에서 "호세 윌라드"에게 패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그 후 1920년에는 과거 유죄를 선고받았던 사실 때문에
1년정도 교도소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제프리스는 존슨에게 패하였다는 사실이 영영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됩니다.
그는 항상 존슨에게 패한 선수로만 남게 되었으며, 비운의 챔피언 잭 존슨은 훗날
"역대 헤비급 선수중 가장 수비가 좋았던 선수"로 인정받으면서 어느정도나마 명예
회복을 하게 됩니다.
1954년 5월 23일생인 마빈 헤글러는 미들급 선수입니다. 그의 경기는 항상
"파이터란 이렇게 싸우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터프하고 흥미 진진했죠.
찬스를 노릴때는 신중했지만, 기회를 잡으면 마치 후진기어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저돌적으로 밀어부치는 ... 관중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복싱을 하는
선수였습니다.
헤글러는 세계챔피언이 되기 이전부터 동급 선수들의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50전을 싸울 때 까지 좀처럼 타이틀 도전 기회를 잡지 못하였죠.
1979년에 어렵사리 첫 번째 기회가 왔습니다. 상대는 "비토 안투오팔모"라는
선수였는데, 그만 무승부를 기록함으로써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고 말죠.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1년 뒤 영국으로 원정하여 챔피언 "알란 민터"를 3회 KO로
일축하고 대망의 WBC 세계 타이틀 획득에 성공합니다.
타이틀을 획득한 헤글러는 동급강호들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며 타이틀을 방어해
나갑니다. 그의 타이틀 방어에 재물이 된 선수는 무승부를 기록하였던 전 챔피언
안투오팔모 외에 "무스타파 햄쇼" 그리고 한국의 박종팔, 백인철등과 싸웠던
"풀헨시오 오벨메이아스"등이 있었고.... 많은 팬들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로베르토 두란""존 무가비""토머스 헌즈"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디트로이트의 저격수 헌즈를 3회에 '끝장내버린 경기는 그의
타이틀 방어전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고 있습니다. 수비에만 급급하던 헌즈에게
종잡을 수 없는 각도에서 펀치를 뻗으면서 그 주먹들이 하나의 빗나감도 없이
헌즈의 빈자리에 꽂아 넣는 가공할 연타력을 선보였죠.
무가비와의 대전도 아직까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경기입니다. 경기전 무가비가
힘과 파괴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힘으로 부딛쳐 무가비를
9회 KO로 무너뜨린 경기는 많은 사람들을 완전히 반하게 할 정도로 멋진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가 끝나고 전문가들은 "헤글러의 기량은 별것이 아닌 것
같은데도, 화려한 선수들이 그와 맞서면 모두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쳐럼
사그러진다"며 경악하기도 했습니다.
헤글러의 마지막 경기는 1987년 천재복서 "슈거 레이 레너드"와의 경기였습니다.
전문가들은 3년여의 공백을 갖고 링에 복귀한 레너드가 헤글러를 잡기는 무리이며,
헤글러는 레너드를 뛰어넘어 "카를로스 몬존"이 가지고 있던 미들급
최다방어기록(14차)을 깰 것으로 믿어의심치 않았으나, 부진한 경기 끝에 판정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이 경기가 끝나고 그 결과에 상당한 논란이
있었으며, 많은 팬들이 재대결을 요구했지만, 헤글러는 다시 링으로 돌아오지 않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은퇴 후에는 사업과 영화배우로 변신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통산전적 67전 62승 2무 3패 52KO
제 목:[기사/복싱] 조인주 방어전 연기 관련자료:없음 [3153]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4-26 15:03 조회:261
국내 유일의 챔피언 조인주 선수의 방어전이 연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충실히 연습해서 부디 명예회복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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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19990421 154458
제 목 : 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전…'조인주'2防 일정 변경
국내 유일의 복싱세계챔피언인 WBC슈퍼플라이급 왕자 조인주(30 풍산체육관)의
2차방어전 일정과 상대가 변경됐다.
풍산프로모션 이거성사장은 21일 조인주가 "오는 6월13일 서울 워커힐호텔
특설링에서 동급 6위인 태국의 폰 사엥모라콧(26)과 방어전을 갖는다"고
발표했다.챔피언은 8천만원,도전자는 1만달러(약 1천2백만원)의 대전료를 각
각 받는다.
풍산측은 당초 5월23일 서울에서 아르헨티나의 동급 12위 호엘 라파엘 소사
(30)와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협상이 난항을 겪는 바람에 도전자를 바꿨
다.
조인주의 상대인 사엥모라콧은 96년 4월 프로에 데뷔한 이래 18전전승(6KO)
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태국 경량급의 기대주.오른손잡이로 다양한 펀
치를 구사할 수 있는 테크니션 복서겸 파이터다.그는 이번 한국나들이가 첫
해외원정경기다.
조인주는 "사엥모라콧이 지난 2월17일 제이미 바르셀로나와 경기하는 비디
오를 최근 봤는데 전승의 선수이긴 하지만 해볼만 하다"며 "스피드와 체력
을 꾸준히 보완해온 만큼 이번 경기는 중반 KO승으로 장식하고 싶다"고 말
했다.
지난 1월, 1차방어전(호엘 루나 사라테에 판정승)에서 졸전을 펼쳤던 그는
이번 대결을 앞두고 지난 1~10일 제주도 한라산 산악훈련을 실시했고 최근
120라운드를 목표로 같은 체급의 전 한국챔피언 조용인을 상대로 실전같은
스파링에 돌입했다.
"제임스.J.콜버트"는 "존.J.설리번"과는 대조되는 선수입니다. 19세기의 말
미에, 미국내에서 바야흐로 '복싱'이라는 종목이 싹을 뻗고 있었으니, 그 자
양분이 되었던 선수가 바로 설리번 선수입니다. 설리번은 사실 현대적인 개
념의 "선수"로는 빵점인 선수였습니다. 그는 술 주정뱅이였고, 링매너는 무
례하기 짝이 없었으며, 글러브를 착용하지 않고 경리를 하는-이른바 베어 복
싱의 - 거친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설리번
의 이런 야수같은 모습에 매료되어 그의 경기를 찾았고, 따라서 복싱이라는
종목이 점점 인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설리번은 1850년대에 아일랜드에서 보스턴으로 이주한 이주민의 자식이었습
니다. 그는 "패디 라이언"을 9회 KO로 눕히고 베어너클 헤비급 챔피언이 되
었습니다. 베어너클 챔피언이 된 설리번은 1885년 "도미니크 맥커프리"를 6
회 KO로 물리치고 퀸스베리 헤비급 챔피언의 자리에도 오릅니다. 하지만, 설
리번은 그 대부분의 경기를 베어너클 경기로 가졌습니다.
반면, 콜버트는 복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훈련한, 말 그대로 제대
로 만들어진 선수였습니다. 콜버트는 가정도 중산층으로 그리 부족함이 없는
집안이었고, 은행서기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의 기반도 탄탄한 편이었
습니다. 그런 집안과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는 드물게 복싱에 매료된 콜버트
는 서부의 한 "스파링 클럽"에서 복싱에 대한 노하우를 배웁니다. 그는 "퀸
스베리 규칙"에 입각한 신사적인 경기를 펼쳐서, 사람들로부터 "핸섬 짐""짐
백작""젠틀맨 짐"등의 별명을 얻습니다.
당시 복싱의 주류는 크게 "Bare Knuckle Boxing"과 "Marquess of
Queensberry Boxing"로 크게 양분되는 추세였는데, 퀸스베리 복싱은 글러브
를 착용하고 비교적 상세한 규칙에 입각하여 벌리는 경기였고, 베어너클 복
싱은 말 그대로 글러브를 끼지 않고 경기를 갖는 야만적인(복싱 자체가 사실
야만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경향이 강한 경기였습니다. "퀸스베리
규칙"이란 퀸스베리 후작 이라는 사람이 설정한 여러 가지 복싱의 규칙을 말
합니다. 상식적으로 알아두셔도 좋겠네요. 퀸스베리 규칙의 내용은 "1라운드
3분, 라운드 사이에 1분 휴식, 쓰러진 선수에게는 카운트 열을 세어 경기 복
귀 의사가 없으면 넉 아웃으로 처리"한다는 등의 규정입니다.
그 시기에, 복싱경기는 대부분 불법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공개적인 스파링등
은 허용되기도 하였지만, 실제 경기는 인적이 드문 숲 속에서 벌어지거나,
심지어는 배 위에서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1890년에, 뉴올리언즈에서는 퀸
스베리 복싱에 한해서는 경기를 해도 좋다는 법안이 통과가 됩니다.
이 법안의 통과에 의하여 퀸스베리의 최고수 콜버트와 베어너클의 최고수 설
리번의 대결이 가능해 졌습니다. 이 경기가 바로 역사적인...... 최초의 헤
비급 타이틀 매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1885년 설리번과 멕
커프리의 경기를 최초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지만, 그 경기는 법
적인 허가 없이 벌어졌던 경기였기 때문에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콜버트는 "조 코인스키"와 "킬레인'을 꺾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피터 잭슨"
(영화감독이름하고 똑 같네요)과의 4시간 61라운드간의 대접전 끝에 무승부
를 기록하며 설리번과의 일전을 기다립니다. 설리번과 콜버트는 뉴 올리언즈
의 올림픽클럽에서 경기를 갖기로 약속합니다. 이 두 선수의 경기는 3일간에
걸친 타이틀전 퍼레이드의 한 경기로 기획되었습니다.
1892년 9월 5일부터 시작된 타이틀전 퍼레이드에서 첫날에는 라이트급 챔피
언 "잭 맥알리프"가 "빌리 마이어"를 4회 KO로 꺾으면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
했고, 다음날인 6일에는 페더급 챔피언인 "조지 딕슨"이 "잭 스컬리"를 8회
KO로 꺾으면서 역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9월 7일, 바로 3일간의 타이틀전의 매인 이벤트격인 설리번과 콜버트의 경기
가 벌어집니다. 당시 입장료는 5달러에서 15달러 수준이었으며, 비교적 비싼
값임에도 불구하고 만여명의 복싱팬들이 운집하여 경기에 대한 관심이 지대
함을 보여줬습니다. 당시 설리번의 나이는 33세였으며 도전자격인 콜버트는
26세였습니다.
경기장에는, 첫날 경기를 가졌던 배어너클 복싱의 추종자 맥알루프가 설리번
의 코너에 나타나 설리번을 격려했습니다. 반면 콜버트의 코너에는 한때 미
들급 정상의 선수였으며, 과학적인 복싱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마
이크 도노반"이 나와서 콜버트를 응원했습니다. 이 것으로도 두 선수의 경기
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 종이 울리고 설리번은 자신의 스타일 그대로, 처음 두 라운드를 저돌적
으로 대쉬했지만, 콜버트는 민첩한 사이드 스텝으로 이를 저지합니다. 3회에
콜버트는 레프트를 설리번의 안면에 적중시켰고 설리번은 코가 주저앉으면서
코피를 쏟으며 나머지 라운드를 버팁니다.
도노반의 응원에 힘입은 콜버트는 공세로 돌아서서 레프트와 라이트를 연달
아 설리번의 몸통에 퍼부었습니다. 14회에는 콜버트는 거의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으며, 설리번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이 경
기는 마치 투우와 투우사의 싸움과 같았다고 합니다. 설리번은 공격일변도로
콜버트를 몰아부쳤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설리번의 공격을 사이드 스
텝으로 적절하게 저지하면한 콜버트의 경기운영은 대단히 효과적이었습니다.
21회 들어 설리번의 체력은 완전히 고갈되었습니다. 콜버트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설리번을 계속해서 윽박질렀고, 엄청난 출혈과 함께 체력의 고갈을 느
낀 설리번은 대책없이 코너로 밀리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상단로프를 붙들고
간신히 버티고 섰습니다. 그는 손으로 커버링할 힘 조차 남아있지 않았고,
오른쪽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
해 반격을 하려고 하였지만, 용서없는 콜버트의 주먹이 안면에 연달아 터지
면서 결국 경기를 포기하고 맙니다. KO패.
19세기에 종지부를 찍고 20세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에,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현대적 복싱의 태동을 알리는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일 시 : 19990422 140346
제 목 : [종합] '헝그리 스포츠' 복싱 인기 기지개
90년대 들어 `3D 스포츠'로 분류돼 사양길을 걷고있던 복싱이 IMF
영향으로 선수층이 두터워지면서 침체의 터널을 벗어날 조짐을 보이
고 있다.
지난 3월 제31회 신인복싱선수권대회의 참가자수는 300여명에 이
르러 지난해의 220명보다 36%나 증가했고, 지난 19일부터 전북 남원
학생체육관에서 펼쳐지고 있는 제10회 회장배 중고복싱대회의 참가자
수도 지난해의 420명에서 올해는 480명으로 14%가 늘어났다.
올해 대한아마복싱연맹에 등록된 선수는 총 2600명. 지난해에 비
해 400명 정도 증가한 수치다.
특히 국내대회에 한번도 출전하지 못했던 신인들의 등용문인 신인
복싱선수권대회의 참가자 숫자가 늘어난 것은 복싱의 인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복싱 관계자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이는 IMF로 국내경제가 위축되면서 청소년들의 도전정신이 강해져
가장 터프한 스포츠인 복싱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또한 일부 인기 스포츠와는 달리 운동을 하는데 비용이 적게들고
체력단련 효과가 큰데다 생활스포츠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복싱의 선
수층 확대에 일조했다는 평.
연맹의 김옥태회장은 "이같은 여세를 몰아 내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는 꼭 금메달을 따내 복싱이 다시 한번 인기스포츠로 도약하는 발판
을 마련하겠다"면서 "실업팀의 창단도 적극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김옥태회장은 복싱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최근
남북교류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대회 참여의 선수가 늘어난다는 것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고, 관계자들이 의욕을
갖게 된 것도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한가를 치고 있는 복싱을 하루
아침에 과거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무리수를 두면 오히려 거품으로 그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훌륭한 선수가 나와서 많은 팬을 확보하는 것도 좋고, 좋은 경기가
많이 벌어져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복싱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사회체육으로의 인식이 전환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 우선과제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것.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기반부터 단단히 다져나가야 겠습니다. 한 명의 평범한 젊은이가
복싱을 통해서 심신을 다지는 것이 열명의 세계 챔피언을 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되어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재대로 내리면 가지는 알아서 뻗게 되어 있는 법이지요. 최소한 저번처럼
"TV에서 너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해서 복싱경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라는
울화통터지는 소리가 나오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제 목:[복싱] J플라이급의 역사 (1) 관련자료:없음 [3168]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4-28 12:55 조회:381
1975년, 세계양대 복싱 기구에서 체급과 체급간에 J 체급을 신설하면서 탄생한 J
플라이급. 지금은 스트로급(혹은 미니멈급)이라는 체급이 J 플라이급 아래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당시로써는 최경량 체급이었습니다. 프로복싱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체급에 적합한 선수를 많이
보유한 남미, 동남아, 극동 지역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며, 한국과도 상당히
인연이 많은 체급입니다.
1975년 4월 4일에 WBC 챔피언 "프랑코 우델라"와 8월 23일에 WBA 챔피언 "제이미
리오스"를 탄생시키면서 시작된 J 플라이급의 역사는 처음에는 여느 신설체급이
그렇듯이 뚜렷한 강자가 없이 타이틀이 옮겨다니는 형국이었습니다. 단명 챔피언이
속출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J 플라이급의 맹주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일본의
복싱영웅 "구시켄 요코"입니다.
76년 10월 10일. "후안 구즈만"을 15회 판정으로 물리치고 WBA 정상에 오른
구시켄은 5년간 13차례 방어를 해 내며 롱런합니다. 사람들이 당시를 일컬어
"구시켄의 시대"라고 할 만큼 절대강자로 군림한 구시켄. 한국 선수로는 김용현
선수가10차 방어전에 도전하였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선수가 J플라이급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때는 80년 1월 3일 김성준선수가
"네트로이 보라싱'을 3회에 라이트 어퍼컷 한방으로 꺾고 WBC 정상에 올랐을때
였습니다. 김성준 선수는 사실 세계 챔피언으로는 두드러진 특징이 없는
선수였습니다만, 두둑한 맷집과 잡초같은 근성으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타이틀
3차 방어를 넘어선 선수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신장 170으로 J 플라이급으로는
굉장히 장신인 김성준 선수는 항상 체중 조절에 곤란을 겪었으며, 경기내용은
팬들에게 어필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4차 방어전 일본원정경기에서 일본의
"나까지마 시게요"선수에게 판정패하면서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선수생활 은퇴
후에는 꽃집등을 운영하면서 사회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투신
자살함으로써 세상을 떠납니다.
김성준에서 나카지마에게로 넘어간 타이틀은 또 한사람의 빼놓을 수 없는
명복서에게로 넘어갑니다. 그 선수가 바로 파나마의 작은 악마 "일라리오 사파타"
선수입니다. 강한 펀치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화려한 테크닉과 푸트웍,
경기장악력등이 탁월한 이 선수는 "경량급의 레너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화려한 테크닉을 보유한 선수였습니다. 당시 파나마에는 "악마"별명을 가진 두
신인선수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방금 언급한 일라리오 사파타 선수이고 다른 한
명은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진 "헥토르 카라스키야"
선수입니다. 파나마 국내에서는 사파타 보다 카라스키야를 더욱 유망한 선수로
평가했으나, 아시다시파 카라스키야는 한국의 홍수환에게 패하면서 챔피언 등극에
실패하였고 사파타는 세계 정상에 자리에 올랐으며 선수로써도 오랜 기간
활동하였습니다.
1981년 3월 8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태산이 무너졌으니, 바로 일본의 구시켄
요코가 비교적 이름이 없었던 랭커 "페드로 플로레스"에게 12회 KO패를 당한
사건입니다. 페드로 플로레스는 연타와 힘을 바탕으로 한 선수로 한국의 유명우
선수와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입니다. 물론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말이지 격이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격은 한참 떨어지죠. 여하튼 구시켄의 패배는 전 일본에 충격을
안겨줬으며, 그 후 터져나온 - 구시켄을 맡은 프로모션에서 상대 선수에게 경기전
약물을 먹였다는 내용의 -"카네다 스캔들"(카네다가 맞나? 기억이 확실치
않음--;)이 불거지면서 일본은 다시한번 충격에 쌓입니다.
맹주 구시켄으로부터 격이 낮은 플로레스에게 넘어간 WBA 타이틀은 다시 한번
난립한 군웅들의 손에 옮겨 나니게 됩니다. 플로레스는 타이틀 획득 3개월 후
한국의 "김환진"에게 13회 KO패 함으로써 무관으로 내려앉습니다. 한국선수로는
두번째 J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김환진 선수는 신장이 겨우 152밖에 되지
않는(일설에 의하면 그보다 더 작다고 합니다)단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철같이 단단한
체구와 격렬한 보빙으로 인파이팅을 펼쳐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선수입니다.
'작은 타잔"이라는 별명으로 더 뮤명했던 김환진 선수는 1차 방어전에서 테크니션
"알폰소 로페스"를 판정으로 제압하면서 롱런의 가능성을 보이지만, 2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도카시키 가쓰오"에게 패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도카시키는 몇차례
타이틀 방어에는 성공하나, 다시 "루페 마데라"에게 패하였고, 마데라는
"프란시스코 키로스'에게 타이틀을 상실 하였으며, 키로스는 다시 미국의 "조이
올리보"에게 패하였습니다.
테크니션 사파타의 장기집권이 예상되던 WBC 역시 파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파타는 완벽한 선수였으나 맷집... 특히 턱이 약하였고 체중조절에 어려움을 겪던
선수였습니다. 결국, "아마도 우루수아"에게 2회 KO로 패하면서 무관이 됩니다.
우루수아는 다시 일본의 "토모리 다다시"에게 패하였고, '토모리 다다시'는 다시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판정패 합니다. 사파타는 J 플라이급 사상 최초로 타이틀에
재등극한 선수가 됩니다.
------ 계속 이어집니다.
제 목:[복싱] J 플라이급의 역사 (2) 관련자료:없음 [3169]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4-28 13:11 조회:516
자..... 타이틀이 WBC 사파타 WBA 올리보까지 넘어왔습니다. 다음에 나올 선수가
누구인지는 복싱팬 들이라면 아시겠지요. 파란을 겪던 J 플라이급에 무적의 두
한국선수가 나타납니다.
83년 7월 10일 대구에서 한국의 "장정구'는 사파타를 3회 KO로 물리치고 WBC 정상에
오릅니다. 앞선 한 차례 대결에서 초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판정패 한 장정구는
두번째 대결에서 ... 역시 체중 조절에 실패한 사파타를 윽박질러 승리를
거두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 경기 전부터 승패가 결정나 있었다고 할
만큼 사파타는 체중조절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습니다. 여하튼.... 시작은 조금
찝찝했지만, 장정구는 챔피언이 된 이후 빛을 발합니다. 매경기 10kg 가까운 체중을
감량하고도 무려 열여섯차레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는 것은 경이적인 기록입니다.
강철같은 턱, 상대를 자기 스타일로 끌어들이는 경기 장악력,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임기응변과 상대를 현혹시키는 변칙 스타일, 근성.... 복서로써 치명적인
몇가지 단점을 가진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장점을 극대화 시켜 세계
정상을 정복하고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장정구의 장기집권에 재물이
된 선수는 경량급의 돌주먹 "헤르만 토레스""이시돌 페레스" 전 챔피언 "도카시키
가쓰오" 훗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소트 치탈라다", 역시 훗날 두 체급을
석권하는 "오하시 히데유키"등등이 있습니다.
장정구가 타이틀을 석권하고 한창 주가를 올리던 88년 12월 11일, 또 한명의 위대한
챔피언이 탄생하니 그가 바로 "유명우" 입니다. 미국 최초의 J 플라이급 챔피언
"조이 올리보'와 맞선 유명우는 3분 15라운드를 변함없는 체력으로 압도하며
판정승을 거두고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말 그대로 체력의 화신.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에게 불의의 1패를 당했을 때와 은퇴 직전 가진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는
예전같은 체력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끝없이 샘솟는듯한 체력과 불꽃같은 연타로
동급강호를 불태워버린 선수였습니다. 특히 파나마의 검은나비 "베네딕토
무릴로"와의 경기 15회에서 활화산같은 안면연타로 무릴로를 실신시킨 그 경기는
잊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을겁니다. 그 외에도 "호세 데 헤수스""루돌프
블랑코""살라자르"등과 싸우고 타이틀 재 탈환 후 자진 반납하고 은퇴합니다.
장정구, 유명우가 타이틀을 자진반납한 후 태산의 그늘속에 가려져 있던 한국의
묘목 선수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합니다. 또한 신설체급 IBF의 등장으로 선수들의
설 자리가 많아진 것도 도전의식을 자극한 하나의 계기가 되어줬습니다.
사실 IBF는 유명우가 챔피언이 되기 전인 1985년 12월 8일에 "도디 페날로사"를
초대 챔피언으로 출범한 상황이었습니다. 페날로사가 타이틀을 반납하고 공석이 된
IBF타이틀을 놓고 한국의 "최점환'선수와 "박조운"선수가 결정전을 벌리게 되는데,
J플라이급 사상 최초로 한국선수끼리 벌린 타이틀 결정전이 되는 셈입니다. 이
경기에서 최점환이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IBF 2대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89년 필리핀의 "타시 마칼로스"에게 패하고 한 체급을 낮춰, 훗날 스트로급
정상의 자리에도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90년 장정구가 반납한 타이틀을 놓고 한국의 "강순중"과 "헤르만 토레스"가 격돌을
벌여 토레스가 12회 판정승을 거두고 꿈에 그리던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혹자는
토레스를 두고 "장정구의 천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토레스 경기때 장정구가
약간 고전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세번싸워 세번 다 패한 선수를 천적이라고
부르는 건 어패가 있는 것 같네요. 여하간 정상의 문턱에서 번번히 좌절한
토레스에게는 얼마나 기쁜일 이었겠습니까...마는....그 기쁨도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91년 3월 25일. "포스트 장정구"로 주목을 받던 극동 프로모션의
"이열우"에게 9회 KO패 당함으로써 단명에 그칩니다.
이 뒤의 내용은..... 좀 건너뛰렵니다.
잘라 말해서 이열우는 움베르토 곤잘레스에게 패하고 곤잘레스가 미국의 "마이클
카바잘"이라는 선수하고 숙명적인 대결을 벌리는데....
졸라리 기분나쁜게 뭐냐 하면....
인터넷 어디를 뒤져봐도 곤잘레스나 카바잘에 대한 기록은 흔하지만 장정구나
유명우에 대한 기록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 말씀입니다. 이건 복싱
전문사이트에 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정구 유명우는 끼지도 못합니다. 기량으로는
한 수 아래요, J 플라이급에서 쌓은 업적으로는 두세수 아래의 선수들이 완전히 "J
플라이급의 알리"쯤 되는 것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 쒸펄~ 그래서 이 다음 시기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후에.... 한국의 "최희용"선수가 "레오 가메즈"를 12회 판정으로 누르고 WBA 타이틀
정상에 오르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선수가 J 플라이급과 가진 인연의 마지막입니다.
에궁~~~힘들다...
제 목:[복싱] 밴텀급의 역사 관련자료:없음 [3177]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4-29 09:53 조회:506
복싱에는 스트로급에서 헤비급까지 모두 열일곱개 체급이 세분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체급의 인기가 다 같은 건 아니지요. 유독 상품성 높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체급이 한정되어 있는 편인데, 보편적으로 인기 체급이라 하면 무거울 중
중량급의 헤비급, 가운데 중 중량급의 미들급 웰터급 라이트급, 그리고 경량급의
밴텀급입니다.
밴텀급은 예로부터 명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체급입니다. 남미나 동남아, 그리고
극동지역 선수들의 체형을 고려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체급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키 165-70정도의 선수가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임할 수 있는 체중이
보통 밴텀급 정도가 되는 까닭인 것 같습니다.
밴텀급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 되었습니다. 1890년 1월 31일 뉴욕에서 "토미 캘리"가
"쵸피 모란"을 10회 KO로 제압하고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이 시초로 되어 있으니
100년 하고도 10년 정도 시간이 더 흐른 셈이군요.
어차피 복싱의 초창기.... 그러니까 20세기 전반기까지는 대부분의 경기가 미국에서
벌어졌고, 미국인들의 체형에는 사실 밴텀급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서 그리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밴텀급의 주가가 치솟은 때는 60년대 들어서 부터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밴텀급의 인기 상승의 한 가운데에는 바로 "에델 조프레"가
있었습니다.
"에델 조프레"에 대해서는 부족하나마 제가 전에 올려둔 글이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참조 하시구요. 간단한게 말씀 드리자면, 조프레는 밴텀급 역대 최강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중 한 명입니다. 브라질 출신으로 밴텀급 답지 않은 하드 펀쳐 였었죠.
조프레가 1960년 11월 18일 LA에서 "엘로이 산체스"를 6회 KO로 격파하고 정상에
오르고 뒤에어 62년 1월 18일에는 "조니 칼디웰"을 10회 KO로 꺾으면서 통합
챔피언이 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비록 65년 5월에 나고야경기를 포함해서
일본의 "파이팅 하라다"에게 2연패 당하면서 스타일을 구기기는 했지만, 그의
스타일은 팬들을 매료 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에델 조프레 다음은 "루벤 올리바레스"의 시대였습니다. 역시 강타자로 맥시코에서
지금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올리바레스는 파이팅 하라다를 꺾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라이오넬 로즈"를 5회만에 깨끗하게 손보고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때가 69년 8월 22일. "쿠쵸 카스틸로"에게 14회 KO패 당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하기도 하지만, 재대결에서 판정승으로 타이틀을 재탈환 합니다. 그 후 72년
3월까지 정상을 지킵니다.
강타자 올리바레스를 꺾은 선수는 "라파엘 에레라"였습니다. 그러나 올리바레스를
꺾은 선수답지 않게 1차 방어전에서 파나마의 "엔리크 핀더"에게 판정패하며 단명에
그칩니다. 핀더는 다시 "로메오 아나야"에게 패하고 아나야는 "아놀드 테일러"에게
패면서 타이틀은 마치 고무공처럼 강호들의 손을 튀어다니게 됩니다.
1974년 7월 3일, 한국 선수가 처음으로 밴텀급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 선수가
바로 "홍수환"입니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 남아공 더반으로 원정한 홍수환은
하드펀처 "아놀드 테일러"를 무려 네 차례나 다운 시키면서 원사이드한 경기 끝에
판정승을 거둡니다. 이는 한국 최초로 원정경기를 통하여 세계 타이틀을 획득한
쾌거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육군 일병이었던 홍수환은 육군 창설사상 처음으로,
사병의 신분으로 사열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얼마전까지 CF에 나왔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그래 !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전화 내용은... 홍수환
선수의 4전 5기 경기 후의 통화내용이 아니라, 테일러를 물리치고 나서 통화한
내용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양상을 보이던 밴텀급을 홍수환 선수가 롱런하면서 평정을 했었으면
참 좋았겠습니다..마는...홍수환 선수역시 단명에 그치고 말게 되니...75년 3월
14일 LA에서 "알폰소 자모라"에게 4회 KO패 당하면서 단명 챔피언이 되고 말지요.
밴텀급 평정의 위업은 홍수환이 아닌 자모라의 손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뒤이어, 밴텀급의 가치를 급상승 시키는 자모라의 호적수가 나타나게 되니..그가
바로 "카를로스 사라테" 선수입니다. 사라테는 76년 5월 8일 "루돌포 마르티네즈"를
9회 KO로 격파하며, 바야흐로 밴텀급의 "z-boy " 시대를 엽니다. 이때가 아마
밴텀급 100년사에 가장 인기 있었던 시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밴텀급으로써 거의 적수가 없었던 두 선수의 대결은 사라테의 4회 KO승으로 싱겁게
막을 내려버립니다. 그 경기에 대한 내용은 제가 전에 올렸던 사라테에 관한
게시물에 있습니다. 사라테에게 충격적인 1패를 당하면서 하향길을 걷기 시작했던
자모라는 파나마의 "호르헤 루한"에게 10회 KO패 당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또
롱런하던 사라테 역시 79년 6월 3일 "루페 핀토르"에게 15회 판정패 당하면서
밴텀급을 떠납니다. 한 체급 위의 고메즈에게 당한 1패의 충격이 컷음에 틀림
없습니다.
자모라와 사라테에 의해서 조용하던 밴텀급에, 양웅이 사라지자 다시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듭니다. 절대 강자가 없는 시대. 하지만, 그것은 도토리
키재기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라면 챔피언이 되고도 남을 선수들이
수두룩한 ... 한마디로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였습니다. 한국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이승훈" 선수도 핀토르에게 도전장을 던지기도 하였지만, KO패로
물러서고 맙니다.
84년 IBF가 창설되고 4월 7일에 일본의 '싱까끼 사토시"가 초대 챔피언으로
탄생합니다만, 이 선수 역시 급조된 챔피언이었고, 진짜는 두번째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호주의 "제프 페네치" 선수입니다. 이 선수는 싱카키를 9회 KO로 누르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데, 87년까지 롱런하면서 훗날 J페더와 페더급까지 석권하여
3체급 석권복서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 선수는 펀치력과 함께 용모도 준수하여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홍수환의 손을 떠났던 밴텀급 타이틀이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은 1987년 10월 4일,
"박찬영"선수에 의해서 였습니다. 당시 지명도전자의 자격으로 일본으로 원정한
박찬영은 챔피언 "무구루마 다쿠야"를 거의 죽지않을만큼 두들겨주면서 11회 TKO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섭니다. 하지만 이도 잠시... 푸에르토리코의 강타자
"윌프레도 바스케스"에게 10회 KO패를 당하면서 단명에 그칩니다. 바스케스 역시
훗날 세 체급 석권복서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홍수환이나 박찬영... 모두 정상의
기량을 가진 선수였지만....운이 너무 없었지요. 원래 세계 챔피언이 되면, 1,2차
방어전 정도는 조금 가벼운 상대를 골라서 들뜬 맘을 가라앉히고 강자들과 겨루는
것이 좋은데, 1차 방어전에서 그렇게 강한 상대하고 싸웠으니....
바스케스에게 넘어간 타이틀은 한국팬들에게도 낯익은 태국의 쌍동이 복서 "카오코
갤럭시"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카오코는 J 밴텀급의 최강자 "카오사이 갤럭시"의
쌍동이 형 이기도 하지요. 88년 10월 29일에 밴텀급은 다시 한번 한국의 품에
안깁니다. 바로 아마 최고의 강타자 "문성길"선수에 의해서죠. 카오코 갤럭시를
홈링으로 불러들인 문성길은 시종 유리한 경기를 펼치다가 6회 버팅에 의한
채점승을 거두고 정상의 자리에 섭니다. 물론 91년 9월 19일에 벌어진 재대결에서
두 차례 다운을 당한 끝에 판정패 하기는 하지만, 1차 방어의 벽도 넘기지 못했던
박찬영에 비교하면, 지뢰밭같은 밴텀급에서 롱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카오코 갤럭시를 1회 KO로 꺾고 챔피언에 등극한 필리핀의 "루이시토
에스피노자' 그리고 강타자 "나나 코나두"등의 챔피언을 배출하기였고, 한국도
"변정일"이 "빅토르 루베날레스"를 판정으로 꺾고 정상에 서기도 하였으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7,80년대의 황금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90년대는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복싱이 침체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2000년대에는 화려했던 밴텀급의 황금기가 재래하기를 바라며, 그 중심에
한국이 서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제 목:[복싱] J 밴텀급의 역사 (1) 관련자료:없음 [3188]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4-30 10:24 조회:402
J 밴텀급입니다. 저도 복싱 전문가가 아니라서, 19세기 말 부터 역사가 이어져
내려온 타 체급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는 상당히 부담이 있는데, J 밴텀급은 상당히
역사가 짧습니다. 또한 한국선수를 비롯한 일본 동남아 복서들의 이름이 다른
복싱팬들에게도 상당히 익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조금 가벼운 맘으로 적어
볼랍니다.
WBC와 WBA 양대 기구에서 J 밴텀급을 창설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 입니다. 1980년
2월 1일에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역사적인 첫 챔피언을 탄생시키는 결정전이
벌어졌죠. "라파엘 오로노" 대 한국의 18세 소년 "이승훈"의 대결이었습니다.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서 원정한 이승훈은 어린 소년답지 않은 두둑한 배짱과 뛰어난
플레이로 명승부전을 펼치지만, 오로노의 스트레이트성 잽과 노련하면서도 힘있는
경기 운영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죠. 오로노는 이승훈을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WBC J 밴텀급 초대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오로노는 펀치력이나 기량면에서 워낙 탁월한 선수였기 때문에 그의 시대가
당분간은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을 예상하지요. 하지만, 이승훈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한국에서는 또 한명의 자객이 오로노를 노리고 달려갑니다.
77년도 신인왕 출신의 "김철호"선수입니다. 체력이 좋고 파워도 제법있는 선수이긴
했지만 기량면에서 오로노를 잡기는 무리라는 판단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복싱팬들도 그의 베네주엘라 원정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느날 조간
신문에 새 챔피언이 탄생했다는 기사가 뜨기 전까지는 아무로 몰랐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네주엘라의 산크리스토발 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김철호는 5회까지는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를 벌립니다. 4회에는 코너에 몰려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아내는 형국까지 밀리게 되지요. 하지만 6회 들어서면서 부터 점차 자신감을
회복하고 힘과 체력에서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7회에는 일방적인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으며 운명의 9회에 코너로 몰아부친 오로노의 복부와 옆구리에 연타 세발이
꽂히면서 경기를 마무리 짓습니다.
WBA는 WBC보다 1년 이상 지난 뒤에 첫 챔피언을 탄생시킵니다. 81년 9월 12일
벌어진 챔피언 결정전에서 한국은 "배석철"선수를 보내어 김철호와 함께 양대기구
석권을 노리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배석철은 주먹한번 못
써보고 "구스타보 바야스"선수에게 일방적으로 공략당한 끝에 8회 KO패로 무릎을
꿇습니다.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단 한번도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무기력한 경기였죠.
이후 J 밴텀 체급은 난전양상을 보이며, 난세를 평정할 맹주를 기다리게 됩니다.
김철호는 파죽의 5차 방어에 성공하며 롱런의 기미를 보였지만 82년 11월 28일
오로노와의 리턴매치에서 6회 KO패 함으로써 무관으로 전락합니다. 오로노는 다시
"풍타라트 파야오"라는 태국 선수에게 판정패하여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WBA 초대
챔피언인 바야스 역시 타이틀 획득 3개월만에 "라바엘 페드로사"에게 패하고
말지요. 이 후 J 밴텀의 맹주가 나타나니 바로 일본의 "와타나베 지로"입니다.
와타나베는 김철호의 1차 방어전에서 10전도 안돼는 일천한 전적으로 도전하여
선전하였으나 15회 판정패 하고 맙니다. 그러나 82년 4월 8일 오사카에서 벌어진
라파엘 페드로사와의 경기에서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왕좌에 오른 후 84년에는
태국의 파야오까지 잡아먹고 J 밴텀급 최초의 WBC WBA 통합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84년 11월 21일, 명실상부한 J 밴텀급 역대 최강의 선수가 나타납니다.
일본의 와타나베 지로가 반납한 타이틀을 놓고 "에우제비오 에스피날"과 태국의
무시무시하게 생긴 선수가 결정전을 벌리게 되는데, 이 태국선수는 가공할 파괴력과
상대를 압도하는 경기운영으로 에스피날을 6회 KO로 잠재우고 정상의 자리에 올라
92년도까지 무려 8년간을 부동의 챔피언으로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이 선수가 바로
태국의 "카오사이 갤럭시"입니다.
---- 다음에 계속
제 목:[복싱] J 밴텀급의 역사 (2) 관련자료:없음 [3193]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01 09:22 조회:385
"카오사이 갤럭시"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타나기 직전인 83년 12월 10일, 신설기구인
IBF가 창설되면서 새로운 챔피언을 내게 됩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는 한국의 "전주도"선수가 일본의 "카스가이 캔"을 5회 KO로 일축하면서
초대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전주도 선수는 사실 국내 팬들에게도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기 전의 선수였으며, 속칭 "얼치기"복서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사기도 했지만, 이듬해인 84년도에 가진 다섯차례의 방어전을 모조리 KO로
장식하면서 84년 최고의 신인으로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84년 말, 카오사이 갤럭시가 WBA를 석권하고 독주체제를 갖추지만, WBC와 IBF는
일대 파란을 겪게 됩니다. 전주도는 당시 인도네시아의 신성 "엘리 피칼"과의
경기에서 8회 KO로 무너지면서 타이틀을 상실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와타나베의 아성도 테크니션 "길베르트 로만"에게 판정패 함으로써 무너져
버립니다. 전주도와 싸웠던 "엘리 피칼"은 당시 국내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로, 급상승세를 타던 전주도가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자신있게 원정 방어전에 나섰던 것인데 의외의 패배를 당하면서, 국내에서는 "역시
전주도는 얼치기였다"는 자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죠. 하지만, 그 뒤 피칼은
J밴텀과 밴텀급에서 만만찮은 실력을 선보이면서 전주도가 얼치기였던 것이 아니라
피칼이 원체 강호였었던 탓... 이라는 것이 반증되기도 했습니다. 피칼은 "세자르
폴랑코"에게 판정패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하기도 하지만, 45일 뒤에 벌어진
리턴매치에서 3회 KO로 설욕하면서 타이틀을 재탈환합니다. 그 후 87년 타이틀을
자진 반납할때까지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냅니다.
와타나베 지로를 누른 "길베르트 로만"은, 선수로써 생활만 건실하게 하였다면
갤럭시에 필적할만한 명 챔피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선수입니다. 파괴력이 약간
떨어진다는 것 이외에는 완벽한 테크닉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파괴력도 일발필도가
약하다는 말이지 연타나 정확성에서는 거의 나무랄 곳이 없는 선수였죠. KO율도
거의 70%를 넘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하지만, 와타나베를 누르고 난 후 세계랭커
시절과 같은 경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다가 결국은 87년 5월 16일
"산토스 라시아르"에게 11회 KO패 하고 말지요. 훗날, 문성길이 챔피언일때
도전하기도 했지만 한심한 모습만 보이다가 KO패 했습니다.
피칼이 내 놓은 IBF타이틀을 놓고 한국의 "장태일"과 "권순천"이 결정전을 벌여
장태일이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새로운 챔피언이됩니다만, 2개월 뒤 돌아온
피칼에게 다시 타이틀을 돌려줍니다. WBC의 라시아르는 "슈거 로하스"에게 타이틀을
상실하고 로하스는 다시 전 챔피언 길베르트 로만에게 판정패 하면서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로만을 꺾은 선수가 바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나나
코나두"입니다. 현 세계 챔피언이기도 하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이 괴력의 강타자
코나두는 한국산 강타자 "문성길"에게 타이틀을 상실하지요. 90년 1월 20일의
일이었습니다.
92년, 노쇄기미를 보이던 불세출의 강타자 "카오사이 갤럭시"가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면서 WBA도 춘추전국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해 4월 10일날
벌어진 타이틀 결정전에서 일본의 "오니즈카 가츠야"는 태국의 "타놈삭 시트보비"를
판정으로 누르고 이 체급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합니다. 오니즈카는 테크닉도
뛰어나고 외모도 수려해서 일본 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하였었습니다.
영화배우로 진출한다는 설이 있었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정말 영화에 출연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93년 코나두, 로만, 그리고 J플라이급부터 월장해 온 "일라리오 사파타"까지
연파하면서 9차 방어까지 성공하던 한국의 "문성길"이 10차 방어전에서 "호세
루이스 부에노"에게 판정패 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합니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한차례 다운을 빼앗는 등, 문성길의 정확한 주먹은 녹슬지
않았었지만, 프로 전향 후 지나치게 맞는 복싱을 구사한 까닭인지 말미엔 턱과 눈에
문제가 생긴듯한 모습을 보였었죠. 전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문성길의 프로전향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그래서 조금 더 프로에서 경험을 쌓고
정상에 도전했으면 갤럭시에 전혀 밑질 것 없는.... 그리고 나아가 역대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문성길의 타이틀 상실로 실망에 쌓은 한국 복싱계에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으니,
바로 "이형철"선수입니다. 이형철 선수는 94년 9월 18일 일본 원정경기에서
오니츠가 가츠야를 일방적인 경기 끝에 9회 KO로 누르고 꿈에 그리던 타이틀을
쟁취합니다. 경기를 위하여 일본으로 출발하기 직전 불치의 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를 문병하던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모든 권투팬을 찡~ 하게
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온 국민의 응원도 헛되이 이듬해인 95년 7월 22일
"알이미 고이치아"에게 허무하게 4회 KO패 함으로써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말죠.
그 이후에도 챔피언의 명맥이 계속 이어지기는 했지만, 별로 주목할 만한 사항은
없네요. 80년대 말, 한국에는 정말 좋은 선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정병관,
장태일, 허준, 문성길, 강기열, 박찬영등등... 물론 몇몇 선수는 세계 챔피언이
되기도 하였지만, 아쉽게 사라진 선수들도 너무 많지요. 허준 선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요즘같은 시기에 허준 만한 선수만 나와준다면 챔피언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어쩌면 가장 일본적인 복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먹이 조금
묵직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뭐 그다지 큰 특징도 없고.... 그렇지만 복서로써
갖춰야할 여러가지 조건들 중에서 이거 조금 저거 조금... 여하간 골고루 다 갖춘
복서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집념 하나만은 최고로 쳐 줄만한
복서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는 분들은 이 선수가 얼마나 끈적끈적하며
징그러운 선수인지 느끼실 수 있을겁니다.
오꾸마는 1951년 7월 22일 생이며 일본 코리야마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1970년
12월 26일 자국의 "켄지 요시다"를 1회 KO로 꺾고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오꾸마는
6전만에 "카와카미 마사쿠니"에게 4회 판정패를 당하며 검은별을 달지만 그 후
파죽의 13연승을 달리며 쾌조를 보입니다. 단박에 세계 랭커로 뛰어오른 오꾸마는
세계랭커인 "바칠리오 곤잘레스"에게 10회 판정패를 당하면서 연승에 제동이
걸리지만, 테크니션 "미구엘 칸토"를 누르고 챔피언이 되어 돌아온 곤잘레스와 자국
도쿄에서 가진 WBC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서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대망의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때가 1974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듬해 1월 8일에 벌인 1차 방어전에서 평생의 천적 "미구엘
칸토"에게 판정패 당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보통 챔피언에서 하야한 선수는
그 상처가 매우 깊어서 오랜기간 치유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3개월만에
재기전을 가져서 KO 승을 거두는 집념을 보입니다. 재기전 포함 4연속 KO승을
거두며 자신감을 회복한 오꾸마는 WBA 플라이급 챔피언이자 훗날 "김환진"의 1차
방어전 상대가 되었던 "알폰소 로페스"에게 도전장을 던집니다만 15회 판정패로
좌절합니다. 오꾸마는 이번에도 패배 후 3개월만에 재기전을 갖습니다. 한국의
"임동태"를 4회 KO로 누르고 재기한 오꾸마는 2연속 KO승을 거두지만 자국의
"키미오 후루사와"에게 충격의 8회 KO 패를 당하면서 선수로써의 생명은 완전히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오꾸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점이 나타납니다. 일본
정상의 선수이자 세계 챔피언까지 지냈던 선수가 자국의 재기전 상대에게 KO패를
당했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씻을 수 없는 수치이자 선수생활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단 2개월만에 다시 재기전을
가집니다. 한국의 터프가이 이자 훗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김성준"을
10회 판정으로 누르고, 자국의 파이터 "푸마 고야"마저 5회 KO로 제압한 오꾸마는
자신을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미구엘 칸토"에게 복수를 준비합니다.
1978년 1월 4일, 복수에 칼을 갈던 오꾸마는 칸토를 고향인 코리야마로 불러들여
복수전을 벌리지만 칸토는 여전히 강했습니다. 칸토의 스피드를 잡지 못하던
오꾸마는 결국 15회 판정패를 당하고 맙니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오꾸마는
다시 4월 18일에 도쿄로 칸토를 불러들여 재경기를 갖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15회 판정패.
오꾸마로써는 땅을 칠 노릇이었겠지만, 반면 엄연한 실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해 9월 푸마 고야를 누르고 재기한 오꾸마는 이듬해인 1979년,
상대전적 1승1패를 기록하고 있었고 WBA챔피언으로 있었던 "바칠리오 곤잘레스"에게
도전장을 냅니다. 79년 1월 28일 벌어진 곤잘레스와의 경기에서 접전을 벌리지만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합니다. 비록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무승부를 기록함으로써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확신을 가진 오꾸마는
그해 7월 다시 곤잘레스를 불러들이지만 이번에는 12회 KO패로 패하고 맙니다.
전 세계 챔피언이었으나 1차 방어에서 실패하였고, 그 후 자국에서 벌어진 세계
타이틀 전에서 5번이나 실패한 선수를 팬들이 받아 줄 리 만무하였습니다. 이제
오꾸마는 끝났다라는 세평이 자자 했으며 오꾸마도 이를 느낀 듯 전에 없는 긴
공백을 가지다가 조용히 한국을 향해 날아듭니다.
당시 한국에는, 오꾸마 자신은 평생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칸토를 제압하고
정상에 올라 파죽의 5차 방어에 성공하고 있던 '박찬희"가 있었습니다. 파괴력은
빈약했으나 칸토를 능가하는 스피드를 가지고 있는 선수로, 한국에서는 박찬희가
퇴물복서 오꾸마를 손쉽게 물리칠 것으로 기대하였고 일본 내에서도 비관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경기도 초반까지 이러한 분위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만, 4회부터 오꾸마의 묵직한 복부공격을 박찬희가 허용하면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오꾸마는 9회 KO승을 거두며 꿈에 그리던 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980년 10월 18일. 오꾸마는 박찬희와 재경기를 갖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오꾸마가 박찬희를 누른 것은 요행이라는 중평이었고, 박찬희도 경기전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임합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복싱경기에서 양선수는 똑같은 트렁크를 입지 않습니다.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함이지요. 그 경기에서 챔피언인 오꾸마가 검은색 트렁크를
입기로 되어 있었는데, 박찬희도 똑같은 검은색 트렁크를 준비하여 갔다가,
트렁크에 하얀 줄을 추가로 새겨넣는 헤프닝을 연출합니다. 챔피언과 같은 색의
트렁크를 도전자가 착용하면 벌금을 물거든요. 사람들이 박찬희에게 "왜 챔피언과
같이 검은색 트렁크를 준비하였느냐"고 묻자 박찬희는 "내가 아직 챔피언인줄
알았다"며 웃었다고 하지요.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만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오꾸마의 1차 방어전은 완벽한 박찬희에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편파판정에
의해서 어이없이 오꾸마의 손이 올라가지요. 당연히 WBC측에 한국은 강력하게
항의를 했고 1981년 2월 3일 오꾸마와 박찬희간의 3차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는 오꾸마가 10회 이후 압도하며 완승을 거둠으로써 오꾸마는
박찬희와의 세차례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타이틀 3차 방어에 성공합니다.
박찬희와의 연전이 끝난 후에야 진정한 챔피언으로 인정을 받은 오꾸마 였지만,
그해 5월 10일에 벌어진 "안토니오 아베랄"과의 3차 방어전에서 7회 KO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꾸마는 여기에도 굴하지 않고 1982년 2월 다시 재기를 선언하며 한국의
신성 "박찬영"과 6월에는 한국의 "김철호"선수의 3차 방어전 상대였던 "자칼
마루야마"를 각각 판정으로 제압하며 다시한번 세계 정상을 노리게 됩니다만, 11월
11일에 한 체급 올려 벌어진 자국의 "와타나베 지로"와의 경기에서 12회 KO패
함으로써 선수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일본 선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오꾸마 쇼지"라는 선수의 집념을 보며 느끼는
바가 큽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오꾸마는 행운의 선수이지요. 세계 정상에 도전할
기회를 무려 여덟차례나 가지기가 쉽지는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행운이
결코 거저 온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순간도 정체해 있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정상에 대한 욕망을 간직한 오꾸마의 집념의 결산이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