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잉 하고 콧소리를 내며 날 바라보는 얼굴이 약간 찌푸려지는 걸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나는 급히 그녀를 안고 침대로 가서 부랴부랴
이불로 꼭 싸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배시시 웃는 걸 보니 한시름
놓은 것 같아 저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어머? 웬 한숨?"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정말 우리 안 깨진 거지?"
"바보. 반지나 줘요."
갑자기 반지는 또 왜 달라고 하는지 뜬금 없이 불안해졌다. 설마 저렇
게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반지를 다시 빼앗고 메몰차게 가버리려는 거
아냐? 내가 손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제느는 흘깃 날
노려보더니 내가 움찔 놀라는 사이에 팔을 낚아 채 손에서 반지를 빼
갔다. 그리곤 광구 하나를 만들어서 방을 밝히더니 내게 반지를 보여
주었다. 밝게 드러난 방안에서 본 반지는 금이 가 있고 껴있던 보석이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에? 깨졌잖아?"
"멍청한 사람. 내가 절대 반지를 빼지 말라고 말했건만 빼 가지고 왜
나한테 상처를 줘요? 당신이 반지를 뺐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요?"
"저기…악!"
"이런 아픔 따위는 차라리 행복할 정도로 갈가리 찢겨졌어요. 나쁜 사
람. 당신도 그대로 당해봐야 돼."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뾰족한 손톱이 살을 찔러서 무척이나 아팠지만
그런 것 따위 오히려 행복했다. 제느가 죽었다면 이런 투정조차 듣지
못하게 됐을 테니까. 내 살을 쥐어뜯으며 재잘재잘 구박하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잡고 시선을 맞췄다. 비록 매일 구박 당하
고 끌려 다니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소중해져버린 그녀. 제느도 입을
다물더니 파란 눈동자로 날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프면…나도 가슴 아파. 그러니까 다시는 그러지마. 알았지?
그대로 죽는 줄 알고…너무 무서워서 미치는 것 같았어."
"아유. 그랬어요?"
"나 장난하는 거 아니란 말이야."
마치 어린애 놀리는 것 같이 제느가 말하기에 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해서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그렇지만 제느는 오히려
까르르 웃더니 날 빤히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에 어린 눈빛이 장난
기에 가득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뭐…뭐야?"
"아니 그냥. 귀여워서."
"내가 어디가 귀엽다고…."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뭐든지 귀여운 법이에요."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해지고 그녀를 바라보기가 괜히 무안해져서 고개를 돌렸
다. 방금 전 반짝반짝 빛나던 눈빛이 보기가 좀 부담스러웠다. 제느가
다시 까르르 웃기에 헛기침을 몇 번 한 나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
"그런데 이 반지 어떡해?"
"어떻게 하긴요? 다시 껴야죠."
"하지만 부서졌잖아."
"다시 고치면 돼요. 자 팔 내밀어요."
뜬금없이 팔을 내밀라며 으흐흐 웃는 제느 때문에 등골로 서늘한 느낌
이 지나가는 듯 했다. 또 뭘 하려고 팔을 내밀려는 거야? 주저주저하
다가 반지를 들이대며 싸늘한 눈빛을 보내는 바람에 팔을 내밀자 제느
는 내 손목을 잡더니 반지를 든 손으로 팔 한가운데를 쓱 그었다. 손
톱으로 단순히 살을 긋길래 또 이상한 짓 한다 했더니 갑자기 굉장하
게 쓰려오며 그녀가 그은 부분이 쩍 갈라지더니 피가 솟구쳤다.
"아야야야! 무슨 짓이야!"
"이런 짓."
내 팔을 그어 엄청나게 많은 피를 내어놓고도 제느는 태연하게 내 말
에 대답하곤 반지를 상처에 갖다댔다. 전에 난도질당할 때 죽을 만큼
아파서 아픈거는 진저리가 쳐지지만 제느가 워낙 내 손목을 꽉 잡고
있어서 아무리 힘을 줘도 뺄 수가 없었다. 아까 예쁘다고 한걸 다 취
소하고 싶을 정도로 제느는 사악했다. 피가 많이 났지만 제느가 반지
를 갖다대자 신기하게도 흘러내리던 그 피들이 중력을 무시하고 다시
팔 위로 올라오더니 그녀가 반지를 상처에 대고 옮기는 대로 쭉쭉 반
지에 빨려 들어갔다. 끔찍하게도 살이 쩍 갈라졌던 상처도 반지가 지
나감에 따라 아물어갔지만 이미 너무 아파서 울고 싶을 정도였다.
"아…아아악…."
"흥. 엄살은."
"쳇. 안 잡는 건데."
"어머…. 그럼 여기서 혼자 잘 살아봐요."
"앗! 어딜가 제느야!"
그냥 불평한 거 가지고 진짜 갈 것까진 없는데 너무하다. 억울하단 생
각이 들었지만 제느가 나가려고 시늉을 하니까 가슴이 또 철렁 내려앉
아서 급히 그녀를 잡아 다시 엉덩이를 침대에 붙이게 했다. 그리고 툴
툴거리며 나 삐쳤다고 노골적으로 얼굴에 써 붙인 제느를 달래느라 한
참동안 토닥여주며 온갖 약점을 다 잡혀야 했다.
"호호호.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쳇…."
"어머. 이번엔 진짜 나갈까요?"
"아, 아냐! 그냥 실없이 한 소리니까 신경 쓰지마. 우선 자기 반지부
터 고쳐야지. 안 그래? 아하핫…."
억지로 말을 돌리는 나를 한번 노려본 제느는 내 너스레에 고개를 숙
이고 작게 피식 웃더니 나에게 했던 것처럼 자기 팔을 그어 피를 냈다
. 살이 갈라진 상처가 쩍 벌어지고 피가 배어 나오는데도 제느의 표정
은 처음에 약간 찌푸려졌을 뿐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곤 반지를
상처에 대고 쓱 긁자 마찬가지로 피가 반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상처가 사라졌다. 정말 저렇게 자기 팔에 바늘로 꿰메도 몇십 바늘은
나올 것 같은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는 사람은 처음 본다. 혹시
고통을 이상하게 느끼는 그런 성격은 아니겠지?
"하아…."
그러고 나서 반지를 손가락에 낀 제느는 갑자기 몸을 쭉 펴며 숨을 들
이켰다가 길게 내쉬더니 앞쪽으로 내려와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을 뒤로 넘기며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방금 전보다 활력
이 배는 더 많이 차 있는 것 같았다. 생기가 가득해졌다…랄까? 아무
튼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난 걸로 봐서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렇
게 날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게 안겼다.
"이제…아프지 않지?"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다…."
그렇게 토닥거려주면서 한참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그녀의
몸이 너무 안쓰러워서 마냥 끌어안고 따뜻하게만 해주고 싶었다. 끌어
안고 차가운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려 몸을 문지르고 있는데 문득
제느가 피를 많이 흘린 사실이 생각났다. 그냥 보기에도 가슴에 뚫렸
던 구멍에선 몇 사발은 될 듯한 피가 흘러나왔는데 괜찮을리가 만무했
다. 얼굴의 혈색이나 눈빛 같은 건 좋아 보였지만 알 수 없는 게 사람
의 몸이니까. 그래서 쓰다듬어주다 말고 괜찮냐고 물어보았더니 제느
는 한참 날 바라보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을리…없잖아요. 피를 많이 쏟아서…어지러워요…."
"아앗! 제느야!"
방금 까지만 해도 조금 핼쑥할 뿐 혈색이 좋던 제느가 기어가듯 그렇
게 말하며 스르르 눈을 감고는 모로 쓰러졌다. 몸이 차갑긴 했어도 혈
색이 좋아서 괜찮다 싶었는데 영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다급히 껴안고 몸을 흔들어봤지만 정신을 잃은 제느는 깨어나질 않았
다. 자기 아픈 걸 전혀 내색도 않고 참다가 갑자기 쓰러지니 참 황당
하고 놀래서 정신이 없었지만 우선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눕히고 이불
을 덮어주었다. 제느가 정신을 잃음과 동시에 방을 환하게 밝혀주던
빛도 사라져서 갑작스레 어두워진 방안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끙끙거려
야 했다. 그리고, 한번 자리를 펴고 누운 제느는 다음날 아침에도 일
어나지 않았고 후로 사흘동안을 내리 잤다. 얼굴색은 좋지만 내가 눕
힌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만 내쉬며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니 안타까워서 한숨만 푹푹 나왔다. 만약 한숨 한방에 1m씩 꺼진다
면 벌써 이 별이 뚫어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사흘동안을 내리 한숨만
쉬면서 간호했다. 뭐 간호라고 해보았자 그녀가 온기를 잃지 않게 옆
에서 감싸주고 벽난로의 불빛만 바라보는 정도였지만 갑작스레 혼자서
덩그라니 남은 것 같다보니 정말 미칠 정도로 심심했다. 전엔 집에서
혼자 있어도 별로 그렇게 외롭지 않더니만 이젠 제느가 옆에서 불러
도 대답 없이 잠에만 빠져있으니 외롭고 적막해서 한숨만 더 늘어만
갔다. 사흘째 되는 날 언제 깨어날지 몰라 그 날도 입맛도 없이 혼자
서 점심을 먹었다. 밥도 제느랑 같이 안 먹으니 입맛이 전혀 나질 않
았다. 참 신기한 게 대판 싸우고 둘이 방 한 개씩 잡아서 따로 놀 때
는 얼굴만 마주쳐도 보기 싫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밥도 잘 넘어갔
는데 다시 화해하고 저렇게 누워있는 걸 놔두고 혼자 식사를 하려니
음식이 목구멍에서 메어서 내려가질 않는 것이…사람 마음이란 게 정
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
"아르벤. 점심은 잘 먹었어요?"
"응."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올라오니 제느가 침대에 앉아 손거울을 보
며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사 잘 했냐고 물어보기에 건성으로 대답한 나는 침대에 가서 걸터
앉았다. 빗을 따라 가지런히 정리되는 금빛 머리카락이 예뻤다. 아,
지금 나는 놀라야 하는 상황인데.
"아앗! 언제 일어난 거야?!"
"어머? 새삼스럽게 놀라지 말아요. 방금 전에 일어났어요."
"그…그래?"
꼭 하룻밤 잘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행동하는 제느 때문에 그녀가 삼
일을 내리 자고 일어난 거라는 사실이 실감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
렇게 실감이 안 간다고 해도 사흘을 나 혼자 외롭게 지낸 건 여지없는
사실이라 제느가 일어나 앉아서 머리카락을 빗는 모습만으로도 눈물
이 솟아 나왔다.
"제느야!"
"으앗! 머리 빗잖아요!"
당황한 제느가 덮치는 나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정말 눈물나게 좋아서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대로 날 밀치려는 두 팔을 붙잡고 그녀를
넘어트린 다음 꼭 끌어안았다. 내 밑에 깔린 제느가 버둥거렸지만 그
런 움직임도, 따뜻한 체온도 정말 좋았다.
"으윽. 수…숨막혀요."
"응? 아…미안."
내가 머쓱하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자 제느는 잠시 그대로 누워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일어나 앉았다. 방금 전 빗은 머리카락을 손
으로 뒤로 쓸어 내리는 걸 보니 또 울컥하고 목이 메이며 껴안고 싶었
지만 그냥 꾹 참았다. 그리고 긴 머리카락을 정리한 그녀는 날 바라보
더니 팔을 벌려 내 목을 감고 가슴에 품어주었다.
"나 자는 동안 울지 않고 잘 지냈어요?"
"놀리지마. 안 울었어."
"놀리는 거 아니에요."
제느의 따뜻한 품에 대고 얼굴을 부볐다. 나를 안고 있던 그녀가 간지
러운 듯 쿠쿡거리며 웃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
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와 닿았다. 따뜻한 품과 편안한 살내음, 부드
러운 손길.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머릿결이 많이 상했네요. 후훗. 당신 내 걱정 많이 했어요?"
"당연하지 바보야. 그렇게 쓰러져서 삼일동안 잠만 퍼 자는데 누가 걱
정 안 해."
"미안해요."
"응?"
"사람 마음 같은 걸 시험하면 안 되는 건데…난 아직 많이 모자란가봐
요. 미안해요."
그동안 콧대 높은 아가씨인줄로만 알았던 제느가 자진해서 나한테 사
과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지만 또한 사실이었다. 잔뜩 미안해하는 억
양이 가득 담긴 음성을 듣고 나니 한동안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자꾸
웃음만 새어나왔다. 뭔가 그녀한테 이긴 것 같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하면 안될 일이지만, 그녀가 꼼짝 못할 약점을 잡은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쳇. 알면 됐어. 그런데 왜 혼자 나가려고 했던 거야? 그때 돈주머니
던지고 혼자 가버릴 때, 나 정말 황당하고 기분 나빴어."
"그게…."
갑자기 내가 일어나 화난 것처럼 무뚝뚝하게 묻자 제느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나마 기어가는 목소리를 내던 입을 꾹 다물
고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
라있는 게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양을 보니 재미있어서
다시 그녀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그게 뭐?"
"그, 그게 하루만 지나면…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안 오니까
괜히 화가 나버려서…."
"우욱. 푸하핫!"
얼굴을 사과처럼 잔뜩 붉힌 채 내 눈치를 살살 보아가며 하는 말이 너
무 웃겼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단 말
이야? 서로 싸운 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그렇게 가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자기 방으로 가지 않아서 화가 나버렸다니, 너무 웃겨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왜 웃어요! 나…나 혼자 자려니까 서러워서 그랬는데!"
"그, 그랬어? 아하하핫! 그랬단 말이지? 큭큭큭…."
"우, 웃지 말아요…. 흑흑. 으아아앙!"
내가 계속 웃자 제느는 놀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푹 숙인 그
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처음엔 내가 죽을 것처럼 웃으니까 일부러 우
는 척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치마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
어지는 것 아닌가. 갑자기 가라앉는 기분에 웃음이 쏙 들어갔다. 울어
대는 제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천
천히 들어 올려보았다. 의외로 제느는 별로 힘을 주지 않았고 나는 울
음으로 잔뜩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흑흑. 우웅…. 흑흑."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미워 보였다. 이렇게 울리기보단 웃음을 지
을 수 있도록 잘 해줘야 하는데 매일 울리기만 하니 나는 남자로서는
영 빵점인가 보다. 그래도, 이렇게 울렸지만 지금이라도 우는 건 그치
게 해줘야지. 작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을 훔쳐주고 팔을 벌렸다. 그
러자 그녀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내 몸을 팔로 꼭 감곤 매달렸다. 훌
쩍거리며 안겨오는 그 모습이 굉장히 귀여워 왠지 모르게 슬그머니 장
난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슬쩍 말했다.
"나는…한 삼일 지났으니까 제느가 못 참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흑. 난 하룻밤 지나도 안 와서 실망했다고요."
"…설마 덮쳐주기라도 바란거야?"
제느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대답을 않고 고개를 푹 숙
였다. 그렇지만 목덜미까지 빨갛게 붉히는 걸 보니 정말인가 보다. 이
거 큰일날 여자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진짜로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
래도 너무 황당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인거야?"
"사람이 생각하는 게 왜 그 따위예요?! 혼자 자려니까 옛날 생각나서
서럽기도 하고 외로워서 화가 났던 거라고요!"
"그럼 오지 그랬어?"
"나도…자존심은 있다고요. 그렇게 싸워놓고 내가 왜 가요? 바보."
"쳇. 그러면서 나보고 안 왔다고 화내? 흥이다."
자기만 자존심 있고 나는 없나. 제느가 하는 말에 짜증이 나서 그녀를
밀치곤 돌아앉았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내 등에 매달리더니 징징징
거리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아앙. 미안해요. 그때는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서웠단 말이에요."
"헤에…. 제느가 무서운 것도 다 있단 말이야?"
"나…혼자 있는 건 정말 싫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싸우고 잠
이 오겠어요? 나 마음 많이 아팠으니까, 그러니까 용서해줘요."
"…앞으로 잘 하면 조금 용서해줄게."
뒤에 매달려 징징 울먹이며 아예 애원을 하다시피 하는데 딱 잘라서
말하기가 좀 미안했다. 아무리 잘못 했다고 해도 자기도 혼자 자려니
까 서럽고 마음 아팠다는데 용서해 줘야지. 좀 내가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중에 내가 불리할 때 이걸로 약점 잡으면 꽤나 유용할
것 같다. 그리고 무작정 용서해주기는 싫어서 그냥 그렇게 말을 얼버
무렸더니 내 뒤에 매달려 있던 제느가 잽싸게 내 앞으로 오더니 내 두
손을 마주잡고는 속삭였다. 얼굴에 나 불만 있소 라고 아예 써있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용서해줬으면 했지 조금이라니. 앞으로 나 잘
할 테니까 용서해줘요. 네?"
"싫…."
싫다고 말하려는 순간 제느의 표정이 남자한테 차이고 꺼이꺼이 우는
여자의 얼굴로 변해버렸다. 그 표정을 보자 말문이 막혀 첫 음절만 입
밖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입안에서 맴돌다가 도로 목구멍으로 쏙 들어
갔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 표정이 이 세상 아픔을 모두다
지고 있는 사람같이 느껴지는데 금방이라도 자살할 것처럼 위험스레
보였다. 자기가 무슨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줄 아나? 라고 한심하
게 바라보며 말해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그런 표정 짓는다고 용서 해줄 줄 알아…."
"아르벤…."
"으윽. 아…알았어. 용서해 줄 테니까 그런 표정 그만 지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제느의 표정이 더 없이 밝아지더니 무척이나
기쁜 듯 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안겨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뒤로 쓰러트리더니 내 위에 엎드려 얼굴을 마주 부비며 계속 기분 좋
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 웃음소리가 꽤나 사악하게
들렸다. 결국 뭐가 어찌됐건 표정하나에 그대로 항복하고 만 셈이니
말이다. 그렇게 그려려니 하며 다 포기하고 누워있으려니 처음에 좋아
라 얼굴만 부비던 제느의 몸짓이 점점 대담해 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나서는 제느에게 말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출발해야지. 이제 다 온 것 같은데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하지 않아?"
"…시간은 많아요."
"갈 길은 멀고 험해."
"좀 늦게 가도 상관없잖아요. 그건 누가 함부로 만지지 못할 물건이라
어디 달아나는 것도 아니라고요."
"그럼 대낮부터 이러는 거 양심에 찔리지 않아?"
제느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굉장히 아니꼬운 듯 차가운 눈으로
날 노려보던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숨결이 느껴
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파란 눈동자에 어린 눈빛이 등
골을 꽤나 오싹하게 했다.
"내가 대낮부터 당신이랑 키스하면 양심에 찔리는 이유를 100가지 들
어봐요."
"응? 키스하려던 거였어?"
"그럼 키스하지 뭘 해요?"
"아, 아니야! 키스하자. 빨리 이리와."
"쳇."
내가 오해한 것 때문에 툴툴거리며 슬슬 떨어지던 제느는 내가 뒤늦게
나마 붙잡자 싫지만 마지못한 듯 눈을 흘기며 안겼다. 그래도 내게 안
기니 자기도 기분 좋은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꼭 껴안았다. 나는 그
녀의 귀에 살짝 키스하고 끌어안은 작은 몸을 토닥였다. 겨우 3일인데
이 따뜻한 체온이 그렇게도 그리운지는 정말 몰랐다. 사람들이 누누
이 말하던 있을 때 잘 하란 말이 제느가 차디찬 몸으로 누워있을 때
어찌나 절실하게 가슴에 닿아오는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정작 하자는 키스는 하지도 않고 한동안 끌어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으음. 그렇게 피를 쏟았는데 어째 살이 안 빠졌다…."
"…무슨 뜻이에요?"
"응 몰라?"
"마음 안 읽기로 했으니까 몰라요. 그런데 살이 안 빠졌다니 무슨 뜻
이에요? 혹시 당신 내 몸매 가지고 살쪘다고 하는 건…."
"엑.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 같으면서 무슨 살이 쪘다는 거야. 난 그
저…."
"그저?"
"모, 몰라도 돼. 그리고 이제 그만 출발해야지. 해 떨어지고 나서 갈
…거야?"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제느는 온몸을 나에게 휘감고 찰싹 달라붙
었다. 가만 보고 있자니 죽어도 떨어지기 싫다는 눈치다. 걸어갈 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손잡고 꼭 붙어 다니면서 왜 안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시 바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게 내 마음인데…. 더구나
여기는 너무나 춥다. 숨을 쉬면 하얗게 나오는 김이 곧바로 서리가 돼
서 옷에 달라붙을 정도로 강추위였다. 지도나 전에 카엘이 보여주었던
영상을 보면 벌써 남반구든 북반구든 반쪽을 건넌 셈인데 왜 이렇게
한결같이 추운지 모르겠다. 그렇게 몸을 내맡긴 채 있다가 잠깐 하늘
을 바라보니 벌써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와 별로 그렇
게 차이가 많이 나진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제느의 응석을 받아주고
있다간 정말로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제느를
설득하려고 떼어놓았다.
"히잉…."
내가 몸을 잡고 약간 떼어내자마자 제느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
을 일그러트렸다. 한번 속지 두번 속냐고 마음 약해지는 걸 다잡았지
만 그녀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으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
다. 그래도 마냥 이렇게 눌러 앉을 수는 없는 일. 울먹이는 얼굴이 안
통하니 이젠 입을 삐죽 내밀고 노골적으로 불만스럽다고 바라보는 그
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헤 하니 금방 풀어지는 얼굴이 나를
꽤나 어이없게 만들었다.
"제느야."
"응?"
"여기서 자는 거 불편하지 않아?"
"헷. 3만년 동안 하계를 돌아다녀 보니까 자갈밭에서 자도 잠 잘 오던
데요?"
"…그럼 나랑 잘 때도 그런 거였어?"
"아잉. 그거야 당연히 당신이랑 같이 자려고 편한 거 마다한 거죠. 나
혼자 자면 외롭다고 했잖아요."
"하, 하여튼 제느도 빨리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지? 빨리 끝내고 돌아
가서 놀러 다니고 하면 좋잖아. 안 그래?"
"나는 당신하고의 하룻밤이 더 중요해요."
옛날이라면 여자한테 그런 말을 들은 순간 헛것을 들었구나 하며 치부
해버릴 테지만 제느가 하는 말이라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느는
여자로서는 상상도 못할 말을 해버린 뒤에도 별 표정 변화도 없이 굉
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훅훅 덮쳐오는 열기
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고 그래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 다…당연한 거라니…."
"어머나.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당연히 오고가는 말인데요?"
"그,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말을…."
내가 여전히 충격 받은 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니까 제느는 눈을 약
간 가늘게 뜨더니 가까이 붙어와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그런 말도 못하나요? 섭섭해요 아르벤. 그리고…나는 인간이
아니라고요. 그럼, 이제 하룻밤을 더 묵고 갈 생각이 생겼나요?"
"그, 알았어…."
결국 항복하고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잊고 있었던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까, 보통 여자라면 꺼내지도 못할 것 같은 그런
대담한 말을 할 수도 있는 거겠지. 6만년을 살아온 만큼, 내가 상상
도 못해보았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곳
을 다녔을테니 내 생각으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도 그녀의 입
장에서는 당연한 일 일수도 있는 것이다. 전에도 단지 앞에 나타났다
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어 보이는 소녀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팬 적도 있었으니까. 아무리 죄를 지어 타락해 날개가 검게 물든 타락
천사라 해도 무작정 그렇게 패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아 보였지만 그때
는 제느의 얼굴이 너무 살벌했으니까 말리지도 못했다. 그래도 제느가
이렇게나 대담한 건 역시 생명의 여신이라서 그럴려나? 전에 이야기
해주길 남녀관계도 꽤나 많이 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뭐해요? 빨리 와요. 나 일주일이나 키스도 못했다고요.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렇게 망연자실하게 생각에 빠져있을 때 제느가 내 목에 가는 팔을
걸더니 배시시 웃으며 품에 안겨들었다. 기분은 좋지만, 오늘도 떠나
긴 다 틀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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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헤....그럼 다음 편으로.....
첫댓글 다시 정주행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