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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 신학 ]
1992,11,30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어떻게 보는고 하니, 첫날에 빛을 만들었고, 그리고 대기의 먼지가 한 곳에 모여서 중력이 생기고 수소가 발생하고 온도가 올라가는데, 그래서 모든 에너지원을 제공하는 핵융합 반응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최초의 것을 '빅뱅'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산소가 없다는 것이다. 산소는 식물이 있어야 하는데, 최초의 식물은 플랑크톤으로 드디어 산소가 만들어지고 오존층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오존층이 만들어지면 자외선이 차단되고, 드디어 땅에는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셋째 날에 식물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외선이 있기에 물 속의 동물들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해서 천지창조가 이루어졌고, 지금은 45억년 내지 200억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주장하는 것이 창조과학협회라는 것이다. 또 어떤 주장이 있는고 하니까, 24시간만에 모두 다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도 있고 말이다.
* 그러나 이런 과학자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연을 제 아무리 관찰을 하고 연구를 해도 어떤 인물이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풀어보겠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하늘을 훑어보아도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찾으려면 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 로마서 1장에서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라고 되어있는 것은, 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자연을 통해서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경구절이 자연과는 상관이 있지만, 과학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광주카톨릭대학에서 '신학전망' 이라는 신학전문 잡지로 매달 나오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 대해 말하기를, 과학자들은 관객언어를 사용하고 신학자들은 배우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나온 표현 중에서 제일 좋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 사실 이것도 그렇게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아닌데, 사실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자기들은 과학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학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무인격에서 도대체 뭐가 나오겠는가? 그러나 과학적 창조론은 유신론적 철학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왔으니 말이다.
*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는가? 목사는 목회를 통해서, 그리고 과학자는 과학을 통해서 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는 다 일반 은총(?)이 있다고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반 은총은 왜곡된 하나님 형상이라는 것이다.
◈ 직업은 나의 잘못됨을 깨닫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
* 그래서 이 세상에 거룩한 직업이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만 거룩한 것이고, 우리는 직업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달아야 하나는 것이다. 즉, 직업은 나의 잘못됨을 깨닫는 또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 흔히들, '칼빈주의 문화관' 이라고 해서, 모든 직업은 성스럽다는 식으로 나가니까 안 된다는 것이다. 주의 일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주의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잘못을 깨닫고, '왜, 오직 그리스도 만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에 보면, 하나는 심판이고 또 하나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 프로이드라는 사람이 '꿈의 해석' 이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은 성(性)에 대해 억압되었다' 라고 했는데, 서양에서는 이것이 맞을지 몰라도 동양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동서양을 총괄해서 다 알면 안 되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단지 얼마 안 되는 자기 눈에 보이는 영역만 고수하지 말이다. 사돈에 팔촌까지만 알지 말이다.
* 이것이 바로 오늘 살펴보려는 '전도서' 라는 것이다. 그 원리는 간단한데, 연못에 빠진 인간은 연못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전도서에서는 '연못' 이라고 하지 않고, '해 아래'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 이 전도서에는 '여호와' 라는 말이 없는데, 여호와란 전쟁을 하시는 직선적인(?) 신인데, 사람은 바다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인데, 그런데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그런 질서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창조질서를 깨는데, 이것이 바로 '희생' 이라는 것이다.
◈ 여호와 - 창조질서를 스스로 깨트리시는 전쟁의 신(神) !!
* 그러므로 무에서 유를 만드는 말씀으로 창조하는 그 창조능력보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시는 구원의 능력이 더 큰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질서에 대한 대변혁(?)을 이루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라는 것이다.
* 그래서 여호와라는 신의 특징은, 기존의 것은 부정해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자기 희생으로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완성' 인데, 이것을 7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7일, 7월 7일, 7년 등, 이런 식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기 노동으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기에, 인간은 노동을 하면 안 되고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여호와 전쟁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같다 붙여주시는 것만 차지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것을 '붙이시매'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나머지는 모두 진멸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다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을 죽이는데, 사닥다리를 높고 그보다 키가 큰놈은 다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키 큰 것이 유죄인가?
* 이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이 참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약속의 땅에서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씨를 말려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쪽이 은혜를 모르는 쪽을 진멸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전쟁이고, 여호와 전쟁이라는 것이다.
* 이것을 히브리인들의 직선적인 신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헬라의 순환적인 신관에 대비해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해서 돌고 돌아가는데, 이렇게 해서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농사를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바알신' 이라는 것이다. 대지가 이렇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에너지를 두고서 김용옥은 '기(氣)철학' 이라고 하고 말이다.
*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여호와' 라는 신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러한 자연 순환에서부터 '탈출'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완성의 때를 향해서 앞으로만 줄기차게 달려가는데, 이것이 바로 참 안식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모든 희생 제사는 '나는 바보입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제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상한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속(代贖) 개념이 생기는데, 하나님은 죄인을 받지 않는데, 그럼으로 말미암아 누군가가 대신해서 바쳐지는데, 이것이 바로 희생제사라는 것이다. 이런 희생사상이 없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의 희생을 높여드린다면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포도나무의 열매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열매를 원하시고 말이다.
* 노아의 홍수 때에도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부정결한 짐승도 무사하게(?) 되는데, 이러한 노아 홍수는 아벨의 복수로서, 아벨의 드린 제사를 그대로 흉내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예배' 라고 하는데, 즉, 예배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흉내를 내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말이다.
* 이것을 '약속의 구체화' 라고 하는데, 신약시대의 예배는 중심이 십자가인데, 이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모두 십자가와 부활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그 이후에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시간이 거룩하다는 기존의 안식일을 고발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장소도 어떤 특정 지역을 거부함으로서,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공간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예배순서도 당신의 유대인들의 예배와도 다른데, 이것은 최갑종 교수의 논문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뭔가 구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장 차이가 난 것이 바로 성만찬인데,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재현하는 차원에서 주님의 몸을 재현함으로, 그리고 자기의 몸을 바침으로 말미암아서, 예배라는 것이 몸과 몸이 부딪친다는 것이다. 같이 먹고 같이 마신다는 것이다. 즉, 이미 하나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롯유다도 먹었는데, 이것은 언약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나중에 이 자리에 '맛디아' 라는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 전도서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바로 솔로몬이 엘로힘의 입장에서 인간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볼 때에 인간 세계는 자기 한계뿐 아니라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책)
* 엘로힘의 입장이란, 창조의 입장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은 일종의 인간의 폐쇄회로인데, 빠져 나오고 싶어도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그런 뱅뱅 도는 닫힌 회로라는 것이다.
* 이것을 흔히 자유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것도 '순환론' 이라고도 하는데,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자유주의자들 :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 근본주의자들 : 예, 성경에 있습니다.
* 자유주의자들 : 그러면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누가 말했습니까?
* 근본주의자들 : 예, 그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말이 되는가? [이발소는 어디 있습니까? - 예, 미장원 앞에 있습니다. - 그러면, 미장원은 어디 있습니까? - 예, 이발소 뒤에 있습니다] 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전도서에 나온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제 아무리 공부해도 뺑뺑이를 도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제자리 뛰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자유주의자들도 자기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그런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유주의자들 : 성경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 근본주의자들 : 아니, 오류가 있음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 자유주의자들 : 예, 저의 이성(理性)으로 알았습니다.
* 근본주의자들 : 그렇다면, 이성 자체가 오류가 있으면, 이성 자체도 엉터리가 아닙니까?
* 자유주의자들 : 예, 그렇습니다.
* 근본주의자들 : 그런데 이성이 이런 오류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 자유주의자들 : 예, 저의 직관(直觀)으로 압니다.
* 근본주의자들 : 그렇다면, 직관은 오류가 없습니까?
* 자유주의자들 : 예, 있습니다.
* 근본주의자들 : 그렇다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것도 오류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 자유주의자들 : 예, 그렇다면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바꾸겠습니다.
*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가? 결국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진리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진리를 찾아 가보자는 것이다. 진리의 확신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진리를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
* 전도서에는 이렇게 인간의 실존을 박살내는 것이 많이 나오는데, '잔치집 보다는 초상집에 가라' 라는 것도, 초상집에 먹을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초상집에 가서 인간의 그 허무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고서, 바로 이것이 네 자신의 모습인줄 알라는 것이다.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 그리고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울 때도 있고 웃을 때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너희들은 인생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그러므로 전도서를 해석하면서 너무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렵지만 일관성이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앞에서 한 말이 뒤에 가면 거짓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새로움에 대한 창조력이 상실되었다고 했을 때 이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 못하는 세대는 새로움이 상실된 세대이며 허무한 세대라는 것이 솔로몬의 생각이었습니다(1:1-11).
* 여기서 '세대' 라는 말이 중요한데, 그리고 '허무' 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지를 못하는 '죽은 상태' 라는 것이다. 즉, 헛되고 헛되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여담이지만,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은혜를 받았다 싶으면,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이미 중세 때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 말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것이 없는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외부에서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3:13), 결국은 허무한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 심각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입니까? 그것이 인간들이 경외라는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쪽으로 해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3:14/12: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5:19) 폐단화시키게(6:1) 된 것을 회복하는데는 역시 지혜밖에 없습니다(7:4-12). 그런데 엘로힘 하나님의 세계에서 볼 때 지혜라는 것은 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8:17).
⊙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 밑에서는 자신의 한계와 허무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로힘을 바로 알고 있는 자, 즉 지혜자의 특징입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에 대한 발견이 바로 지혜입니다(12:13-14).
19. 전 도 서
전도서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바로 솔로몬이 엘로힘의 입장에서 인간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볼 때에 인간 세계는 자기 한계뿐 아니라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에게 새로움에 대한 창조력이 상실되었다고 했을 때 이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 못하는 세대는 새로움이 상실된 세대이며 허무한 세대라는 것이 솔로몬의 생각이었습니다(1:1-1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 (3:13) 결국은 허무한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 심각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입니까? 그것이 인간들이 경외라는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쪽으로 해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3:14/12: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5:19) 폐단화 시키게(6:1) 된 것을 회복하는데는 역시 지혜밖에 없습니다(7:4-12). 그런데 엘로힘 하나님의 세계에서 볼 때 지혜라는 것은 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8:17).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 밑에서는 자신의 한계와 허무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로힘을 바로 알고 있는 자 즉 지혜자의 특징입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에 대한 발견이 바로 지혜입니다(1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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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강해
헛되고 헛되다
전도서 1:1-2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명칭상 여호와 말고 다른 호칭을 갖고 있는 신을 배격하기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나 잠언에 보면 ‘지혜’를 따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것으로 뭔가 부족하고 지혜를 가지고 채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구원이 되지 못하고 거기에다 잠언이나 전도서에서 나오는 지혜를 따로 챙겨야 구원되는 겁니까? 아니면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지혜만 탐구해서 실천에 옮기면 구원될까요?
바로 이런 구원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 자체가 인간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고 그 요건이 구비했을 때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숙제로서 자신이 구원할 자를 먼저 찾아오셔서 인도하시면서 이런 태도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이방종교를 신봉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냥 일방적으로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이 바로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데려가시면서 자신이 어떤 하나님이심을 차츰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사야 45:8절에 보면,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떤 내용물을 가지고 부르든지 간에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망이 담기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계속 ‘숨어계셔야 될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기에 인간이 아무리 찾아내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는 상태로 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이미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와’란 이름을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는지를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즉 “인간들아 너희들이 알고 있는 내용으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를 채울 생각을 말아라”라는 겁니다. 이런 취지를 간단하게 말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끝에 보면, ‘모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헛되지 않을 것이 나올 가능성을 전혀 없음을 확실하게 결정짓고 나서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합당한 내용은, 절대로 인간 쪽에서 제공될 선한 것이 일체 가미되지 않는 방향으로 알려진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마냥 헛되지 만은 않고 뭔가 의미있는 것이 간혹 나올 수 있다’라는 생각은 애초에 먹지 말아라는 겁니다. 행여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그 무엇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각을 전면 차단시키려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냥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속성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허무란, 자기 분을 삭이지 못해서 나온 나름대로의 마음 정리를 뜻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욕망은 때마다 충족되기를 요청하는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즉 욕망은 그냥 생겨난 욕망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채워달라고 아우성치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봐서 이 욕망은 다 채워지지를 못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분통을 삼키면서 “그래 헛되고 헛된거야”라고 자기 마음 정리에 나섭니다.
이것이 바로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허무주의입니다. 허무주의란 옛날부터 인간 사회에 유행되어왔습니다. 욕망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허무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욕망이 없다면 허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허무’라고 했을 때는 우상에 대해서 평가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여전히 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무슨 효력을 기대하게 됩니다.
신에게 효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인간의 ‘자기 긍정’을 기반으로해서 일어나는 마음현상입니다. 즉 자신이 신에게 뭔가를 기대해도 좋을 만큼 자기는 당당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건만 신이 원활하게 안들어주면 여기서 허무가 발생하는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상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 ‘자기 긍정’을 바탕으로해서 요구하고 싶어하는 그 인간 자체가 허무한 것입니다.
바로 전도서는 세상에 대한 허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해서 뭔가 기대를 걸고 희망을 거는 그 인간 자체가 허무하다고 보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세상과 예수님을 보는 다른 견해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십자가가 빠져 있는 그런 마음상태에서 평소에 하나님과 그 분의 메시야를 생각해 왔었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과 베드로가 가만 있지 않고 들고 나섭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네들이 엄연히 살아있는 이상 그런 수모가 주님에게 닥치는 것을 그냥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이 베드로 자신에게 허무가 될 수 밖에 없을 일이라는 점에서 예수님과 다른 방식의 생각을 하고 왔다는 것이 들통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허무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에게 체포되어 모든 일들이 공중분해 되어버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보고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단이란 바로 그 깊은 허무 속에서 어쨌거나 희망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희망이란 과거와는 다른 새로움이 뭔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새로움이야 말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지혜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 보면, 새로운 지혜라는 것은 이 인간 사회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이 새로운 피조물로 채워지는 것에 보탬이 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환란가운데 있어야 비로소 소망을 발견하게끔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들 세계를 허무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그래야 진정한 새로운 세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9-21에 보면,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만이 헛되지 않는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아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헛되지 않다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말씀에 어긋나는 사고방식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대와 세대
전도서 1:3-8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에서 ‘헛되다’고 이야기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신약과 연결시키고 않고 대뜸, “그래 이왕 헛된 세상, 막가는 식으로 내 마음대로 살래”라는 쪽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이란 이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닌 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점은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타고난 성격상 이 세상이 예수 중심으로 모아진다는 것을 곱게 수긍하며 살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들의 모든 수고로움은 마치 세상을 자기 중심인 양 간주하면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시는 식으로 그 수고의 대가를 얻으려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람이나 강물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람이나 강물처럼 세상 만사가 다 사람들이 자기 소유로 삼을 대상이 될 수 없고, 그것들은 지정된 자기 자리를 그냥 돌고 순환하는 식으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강물은 바다로, 바람은 이리저리 위치를 변경하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인간들이 도중에 나서서 낚아채는 식으로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에 좁아서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어제 동대구역 내에 정차했던, 주한미군의 탱크에 올라갔던 어린이가 감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럴 경우, 그 어린이는 부모는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습니다. “대구시의 예산을 몽땅 동대구역 내의 감전사를 방지하는데 투입하고, 그리고 주한미군은 당장 이 땅에서 물러가라!”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 주장이 옳은 주장일까요? 만약에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면 역 내에 정차되어 있는 탱크 위에는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린이는 아직 세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모르는채 그저 탱크 타고 싶은 자기 마음에만 충실해서 탱크가 그냥 올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은 처음과 그 중간과 끝부분 전부를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본능에 충실하면서 살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장차 예수님 중심과 비교해서 ‘다 헛되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골로새서 1:16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중심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만물은 다 그 중심점을 증거하는 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중심점을 기어이 자기 자신 쪽으로 쏟아지게 하고자 하니 그 수고가 얼마나 헛되고 괴로운 일인지 다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전도서의 내용은 일반 세상 지혜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연관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허무를 느낍니다. 자연의 변화무쌍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대자연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과 관계성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헛됨’이란 기껏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식이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더불어 어떤 한 사마리아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냅니다. “나는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 길어오는 일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전체 인생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6명 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중입니다. 그만큼 그 여인은 자신의 수고를 그런 쪽으로 대가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바는, 결코 인간이 스스로 수고해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3: 14-19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나를 사랑하여 나의 수고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을 얻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차고 넘치도록 제공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중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헛됨’이 ‘허무주의’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푹 잠김으로 이어지는 그런 ‘헛됨’을 전도서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면서 ‘헛되다’고 한들 하나님은 그 고백조차 가치있는 것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어이 인간의 의견을 듣고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주시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규정하신 그 규정에 준해서 세상을 그냥 그렇게 진행되고 진척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대는 세대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점차 철이든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보면 그 인생관은 어디까지 계속 자기 것으로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즉 30대에 속한 사람을 보고, 어느 40대에 속한 사람이 딱하듯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고 칩시다. “네가 지금 세상을 그렇게 보지만 나처럼 40대가 되어보면,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 말해도
실제로 그 30대가 40대 되는 순간에서도 전에 40대가 느낀 그 세계관을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은 결코 남에게 전이되지 않는 자기만의 고유의 세대관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의 시간을 느끼는 감각도 동시대에 속한 사람들 하고도 또 달리 독자적인 시간층을 따로 갖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모든 수고는 본인에게만 적합한 의미와 보람을 기대하면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남이 감히 동참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모습도 역사 예수님이 보는 세상관과 시간관이 아니기에 결국 헛되고 헛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중심점에서 본 시선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그 어떤 행위를 해도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헛됨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아하, 세상의 중심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확정된 바 되었구나”라는 사실을 접수하시면 자신의 헛됨을 즐기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행복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행복한 의미를 수립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생의 수고
전도서 1:12-15
(전 1:12)『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부로 고생시키십니다. 이 땅에서 평안한 삶을 애초부터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난데없는 난관들이 자꾸만 들이닥칩니다.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우리 자신들을 그냥 놔버려두고 지나가는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도 수시고 사태와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과 사태들이 사람들에게 고생스럽게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것을 자기화 시키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사건으로 일하시는데 인간들은 그 사건을 고정시켜서 자기 것으로 확정지으려고 시도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는 것은 불만과 불평 뿐입니다.
15절에 보면,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이 땅에 태어난 점을 이유로 삼아 이 세상을 자기를 위한 세상이라고 간주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한 세계 구축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 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의 눈에는 모든 일들이 구부러진 사건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곧고 펴고 싶어 환장하게 됩니다. 왜 세상이 자기 마음 먹은대로 안되느냐고 분노합니다. 하나하나가 마음이 안들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인간들이 자기 것이라고 확정지어 것들을 점차 닳아지고 사라지고 없어지도록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점차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셈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허탈스러운 일입니다. 인생을 좌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고를 쉬지 않습니다.
날아다니는 사건을 자기 것을 삼고자 하지만 실은 그 잡고자 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바람을 잡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스라엘 왕이 알려주는 신앙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도서를 소개하는 이스라엘 왕이 갖는 신앙과 동일한 신앙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이 당하는 수고는 그냥 헛된 수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하나님의 일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잡혀들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사무엘상 2:6-8에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의도하는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누구든지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을 잉태케 하시는데도 하나님께서 임의로 마리아를 통해서 임신케 했습니다. 사전에 마리아와 의논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나오고 난 뒤에 다니엘을 집어넣은 바벨론 왕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니엘로 하여금 사자굴에 넣은 것도 하나님이시고 다니엘로 하여금 그 사자굴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구축하는 왕국이 인간들에 의해서 조금도 방해받지도 않을뿐더러 침해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모든 사건은 다 일방적입니다.
그리고 확고한 중심점에서 나오는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간들의 자기 구축성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안심시키기 위해 갖가지 가상 현실들을 예상하고 꾸며내고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위해 수시로 자신이 가진 것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게 됩니다.
이러한 셈을 통해서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는 소망을 구체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로마서 8:24-25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만약 보이는 것이 탐이 나거든 더 이상 그것은 진실된 소망이라고 간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소망이라고 여기던 것도 주님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항상 뭉개질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소망 뿐만아니라 믿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다가는 항상 큰 코 다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도를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외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필요한 사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마구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런 사건들을 자기 소유로 흡착시키기 위해서 끌어당긴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으로 낭패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들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간주하는 것도 이런 허점을 갖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현재의 ‘행복감’이라는 느낌으로 늘 고정시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 즉 복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한 곳에 모이도록 부름받은 자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한데 모으시는 이 사건을 우리는 소망과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을 임의대로 사자굴에 집어넣으시고, 임의대로 빼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혜
전도서 1:16-18
(전 1: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사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찌르는 고통이요 근심이라는 것을 안다면 무엇 때문에 더 공부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인간의 지식욕구는 자기 힘으로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고 근심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자연스럽게 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는 기관차처럼 인간들은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멈춤이 없습니다. 보다 더 명확하고 확실한 진리가 자신의 마음을 더욱 더 가볍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다 부질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과 진리가 엉터리라서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 인간은 뭔가 고장 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진리와 관해서 인간은 어디서 고장 났는지를 요한복음 18:36-38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는 이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는 반드시 진리를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빌라는 악한 역할을 통해서 ‘진리 만들기’에 가담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 나라를 나라답게 하기 위한 통용되는 진리체제가 따로 있고, 또한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그 쪽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진리체제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물음은 이 땅에서 통용되는 진리에서 수립된 것입니다. 즉 빌라도는 지금 이 세상의 왕입니다. 자신의 왕됨을 포기하지 않은채 그 위대함을 그대로 견지하면서 예수님의 세계까지 탐을 낸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필히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세계에서만 통하는 진리는 이 세상 진리체제와 충돌을 야기하는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열왕기상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왕은 모든 인간 가운데 최고로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의 자질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1천 번제를 드린 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웃 나라의 여왕도 솔로몬의 지혜가 현란할 지경이라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솔로몬왕의 지혜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나오는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기 아들에 관한 재판입니다. 시작은 여인 두 사람이 각각 아들을 낳았지만 남아 있는 아들은 현재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는 둘인데 자식은 하나이다? 분명 둘 중의 하나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그 아들의 진짜 어머니는 두 창기 중의 누구일까요?
솔로몬이 행사하는 지혜는 그냥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에게 출처가 있음을 보이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솔로몬 밖에 있는 겁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밖에 있음을 알고 밖에 찾습니다. 그 밖이라는 것은 바로 그 여인 중의 하나입니다. 진실은 둘 중 하나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까요?
그것은 진실이 밖으로 나올 때는 반드시 ‘자기 위대함 포기’라는 모습으로 비진리와 차별화를 드러낸다는 겁니다. 즉 비진리는 반드시 ‘자기 위대함’을 추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을 잃은 여인은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기 비참함을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기 비참함을 보충할 요량을 본능적으로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 방에 같이 잠을 자던 남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바꿔치기 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비참을 다소나마 가리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난 뒤에 한 행동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런 인간의 시도를 오히려 까발리는 양상으로 진리를 드러나게 됩니다.
솔로몬은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두 여인의 말을 다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밖으로 나올 때 제대로 ‘자기 희생’으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솔로몬은 가졌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그는 선지자입니다.
요한복음 8:32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진리가 과연 어떻게 작용해서 인간을 자유케 한단 말입니까? 그 앞의 사건을 보면 어떤 여인이 일단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갇혀 있는 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여인을 정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인은 그 율법의 정죄에서 빠져나올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사람을 거뜬히 구출하는 그런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진리란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지유로울 수 없는 자를 자유케 하시는 일을 감행하기 위해서 ‘자기 포기’와 ‘자기 희생’을 감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공하신 결과로 남은 것은 바로 십자가의 보혈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자신의 처지의 비참함을 메우기 위해서 남은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삼는 인간들의 본능적인 태도와 정 반대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란 ‘자신의 위대함을 성사시킬 모든 것’입니다. 일종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라고 보면 됩니다. 자기 포기가 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악마가 심어진 진리를 가지고 진리되시는 예수님을 반복적으로 살해하는 살해행위라고 보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위대하는 것이 더욱 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웃음
전도서 2:1-2
(전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전 2:2)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웃음이 미친 짓이고, 즐거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벗어납니다. 사람들이 사는 것은 웃음과 즐거움을 얻기 위함입니다. 만약 웃음이 미친 짓이고 즐거움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과연 사람 사는 이유와 목적이 어디 있는지 남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이 들어오는 시점은 말씀이 들어오는 시점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깨고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그 전까지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상식이 얼마나 성경 말씀과 틀리는가를 분명히 지적하시면서 침투해 들어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웃음에 관한 우리의 상식이 너무 틀립니다.
찬송가 234장 2절 가사에 보면,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 임금 다윗 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을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니엘’, 혹은 ‘다윗 왕’ 혹은 ‘엘리야’ 그리고 3절 가사에 나오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이 모든 분들은 신앙적으로 사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온갖 경우가 생기면, 이들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현재 자신이 무가치한 일을 골라서 가며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웃음이란 바로 자신이 가치가 확인인데서 오는 상쾌함의 표현입니다.
웃음이란 자신이 계획한대로 곧장 이루어졌음을 자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지어놓고서는 그것을 위장한 노력의 결실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목적해서 벌리시는 일이지, 인간이 자기 목적을 달성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웃음과 기쁨과 즐거움을 제거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시편 2:2-4에 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무산시키고 자신들의 웃음과 기쁨을 영원토록 지속시키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을 공격하시는 겁니다. 잠언 1:26에 보면,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웃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신약에서 주님께서 즐거워하시는 경우는 주님께서 친히 준비해 놓으신 천국 혼인잔치에 우리를 참여시킬 때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6:20-26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 세계에 대한 전복을 의미합니다. 혼인 잔치가 이미 배설해 있기에 세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천국 잔치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식이 됩니다. 누가복음 14:16-24에 보면,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쁨이란 인간들이 자기 인생 목적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만의 기쁨이 우리 자신에게 주입될 때 발생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배설하는 잔치에 자기 장가가는 기쁨으로 인하여 천국의 기쁨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이 있기에 주님은 그런 세상적인 기쁨을 공격하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이야기이요 다른 이야기는,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는 잃어버린 탕자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이란, 지옥 갈 자를 다시 건져내시는 그 기쁨을 두고 말합니다.
또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기에 하나님은 그 세계가 인간들의 웃음에 의해서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4에서 말하기를,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목적에 가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 13)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목적이 침투하여 우리의 기존의 상식을 무너뜨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즐거움
전도서 2:3-8
(전 2: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전 2: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전 2: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전 2: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전 2: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전 2: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사람의 육체에는 원천이 있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원천은 아담의 신체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의 신체는 이미 이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충분히 즐거움과 만족을 가질 수 없는 그런 신체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과연 인간이 고립적으로 자기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와같은 질문에 따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자는 평생을 통해 실험에 나서게 됩니다. 즉 ‘나의 신체’가 과연 최종적인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느냐를 파악하려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실험의 결론은 신약성경에서는 판정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3-4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광과 즐거움은 인간의 육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찾아주셔야 되는 겁니다. 만약 인간들이 자력으로 그 영광을 알려고 한다면 이는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 힘에 인간의 육체는 버텨낼 수가 없어 힘없이 굴복하고 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인류는 아담의 몸을 전수받기에 그 어떤 식으로도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몸을 기초로해서 욕망이 나오지만 그 욕망이란 항상 죄를 지향하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들이 죄 속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죄라는 것은 항상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즐거움은 끈기가 없습니다. 오래 가지를 못하고 곧장 다른 즐거울 것을 찾아나서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죄라는 것은 감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범위로 확산됩니다. 따라서 즐거움도 감각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즐거움 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의 영역에서는 인간을 좌절케 하고 낙심케 하는 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입맛 가운데는 술에 의해 현혹되는 맛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맛도 있습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은 늘 매혹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동네 포장마차에 가서 꽁치 대가리로 안주삼아 소주 맛을 음미하려고 할 때에, 마침 나이가 어린 자들이 우루르 들어와서는 꼼장어라든지, 곱창이라든지, 오징어 두루치기라든지 비싼 안주를 수북히 시켜놓고 술을 마시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술맛을 음미하는 즐거움은 순식간에 좌절로 변합니다.
갑자기 자기 신세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살 맛을 잃어버립니다. 술로서 사는 재미를 느끼려는 원래의 목적이 정신적으로 타인의 행위을 관찰하는 순간은 욕망의 한계선이 허물어지고 더욱 깊숙하고 먼 곳을 바라보게 하므로서 현재의 만족감에서 곧장 떠나게 만들어버립니다.
또다시 만족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 있고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만족을 향하여 달리도록 자신을 더욱 분발하도록 제촉합니다. 거기로 가는 길은 만족보다도 피곤을 낳습니다. 시달려야하고 양보해야 하고 손해봐야 하고 굴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만족이 아니라 자꾸만 자기 안에 불만족만 누적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혼자만의 즐거움이 타인에 의해서 방해받는 그런 환경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기 영역을 크게 확장하겠다는 시도는 본인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도 자기와 똑같은 목표를 향하여 경쟁을 유발하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서 시도하는 것처럼 인간들은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자기만의 만족을 오랫동안 품기 위해서 정원을 만들고, 집을 만들고, 과수원을 만들고 각종 과수와 수목들을 지어보지만 문제는 타인들에 의해서 그런 시도들도 언제가는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의 토양이나 자연환경은 인간들의 애쓰고 노력한만큼의 만족스러운 수확물을 내지를 못하고 도리어 반대로 애쓰고 노력한 만큼 토양은 다음에 더 큰 힘을 요구해야 전의 만큼의 수확을 냅니다. 그렇게 되니 농부들은 전에 예상한 만족도를 위해 자연을 보호하는 식이 아니라 자연을 수탈하는 공격적 경작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미국 몬태나 주의 늙은 농부들은 과거 자신의 젊을 때의 우유 값과 오늘날의 우유 값이 별 변동이 없다는 점에 한숨을 쉽니다. 왜냐하면 그 우유를 생산하는데 들어간 장비값은 옛날보다 훌쩍 몇 배나 뛰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젖소 두 마리 잡으면 트럭 한 대를 살 수 있었지만 지금 젖소 25마리를 팔아야 트럭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자신은 자기 앞 뜰에 재배해 놓은 아스파라가스를 반찬삼아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신의 후손들은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들어있으면 영화만을 전문으로 방영하는 채널에 가입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타인의 욕망에 경쟁적으로 물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광산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리를 채광하는 광산이 파산하는 이유는, 남미 칠레에서 보다 더 값싼 구리가 채광되니 미국의 구리 광산업은 수지가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소박하게 자기만의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애를 써도 이 사회는
그것을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신체가 발산하는 욕망이 정신적으로 남을 누리고 이기는 경쟁 속에서만 일시적인 만족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많은 아내를 두었다고 합니다. 남자나 여자의 기본 욕망은 자손번식에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복제하려는 이치로 인해 남성이나 여성은 성이 다른 상대에 끌리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이치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습니까! 솔로몬왕은 후비가 700명이요 빈장이 300명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합이 1000명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종족번식의 욕구는 만족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이처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육체는 지금 새로운 육체로 덧입을 때까지 해결책은 없습니다. 성도는 장차 새로운 하늘의 육신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다 채우질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이 육체는 아닌 것입니다. 이 지혜를 외부의 능력, 즉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하여금 현재의 만족보다 주님으로부터 주신 선물의 귀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분 복
전도서 2:9-11
(전 2: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전 2:10)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전 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도서를 가만히 보면, 전도자가 흔히 일상적인 인간들의 즐거움과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고서는 곧 얼마 안가서 “이것도 바람잡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흘러버립니다. 따라서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 한껏 동조를 하고 동의를 했던 자들이 맥이 쏙 빠져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란 말이야 라는 식으로 나오도록 만듭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보면, 과거로부터 미래로 다가서는 식의 인생은 결국 ‘모든 수고가 다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결론 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끼어있는 것, 즉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라는 나름대로 행복감도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사람의 즐거움이란 자신이 손수 투자한 수고에 대해 예상한 대로의 결과가 주어질 때 생깁니다. 즉 “나는 오늘 신이 보시기에도 정당한 일을 했다. 그러니까 이런 수고의 대가가 복으로 주어지는 거야”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 즐거운 법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이 현재 고생할 만큼 결코 그런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너무 과하게 고생시킨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즉 내가 평소에 기대한 수고에 따른 분복이나 보람을 왜 하나님쪽에서 방해하고 나서느냐 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억지와 억지로 뭉쳐지게 됩니다. 사실 인간의 이런 면에 대해서 충분히 실험하고 시도한 분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전도자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충분한 즐거움을 누리는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일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을 다른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번 십자가 마을의 여름 수련회의 주제를 ‘끝을 기억하라;고 정했습니다. 보통 ‘끝’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라’ ‘예상하라’ ‘고대하라’ ‘대망하라’라는 식으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다 미래에 대해 환상을 끊임없이 유발하고 있기에 참된 성도의 끝과 구별되지 아니합니다. 성도는 끝을 나중에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을 받아서 그 ‘끝’의 처할 상황으로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끝’은 받은 자가 과연 누구냐를 서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끝’을 기억하라]라는 식으로 주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끝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최종 결론납니다. 즉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선 인간의 ‘끝’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혹독한 저주를 받는 양상으로 끝이 난다는 점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자신들에게 행운과 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라면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심판받으신 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심판을 언급하면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자기에게 주어진 ‘수고의 보람이나 분복’이 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제가 지금 하는 행동이 참 잘했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일을 팍팍 밀어줄거죠?”라는 식으로 수고의 대가를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만약 심판이 여기에 개입해 버리면 자신은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고 할 근거가 날아가버리니까 이것은 자신이 기대한 수고의 대가도 같이 날아가 버릴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심판을 받았기에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끝을 미리 앞당겨 알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즉 인간들이 이 땅에서 무슨 착한 일을 하든지, 무슨 악한 일을 하든지 간에 결국 끝에 가서 심판받을 재료들에 불과하다는 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수고의 대가를 고대할 것이 아니라 바람잡는 일에 불과함을 더욱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태가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미리 알려졌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끝에 서서, 즉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가서 자신의 전 인생을 보게 되면 몽땅 헛되고 헛된 과거사에 해당되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면 첫 봉급의 즐거움을 누릴 때에는 십자가의 심판에서 나오는 영생의 즐거움을 놓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즐거움과 생의 보람을 느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돌아서면 곧장 무익한 일들이며 그 즐거움에 계속 이어지지 못할 수 밖에 없는 성격임을 압니다. 이것은 인간이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 정당함과 의로움을 갖출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어 사적인 생활과 율법 생활을 상호 엉기게 되어 있는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가 율법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자기가 행한 세세한 일조차 늘 판단해 법조항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즉 오직 하나의 행위에서만 적용되는 법이 오로지 하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 하나에 문제삼으려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다 내동댕이쳤던 바리새인들은 ‘간음’말고 다른 것으로 인해 예수님 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주님 앞에서 결코 온전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는 동시에 그것을 피한다고해서 어떤 문제 해결이 될 수가 없음을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기 위해 오신 예수님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지적 받는 상황에서 빠져 나갈 구멍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과연 인간의 행위가 이를진데 즐거움이란 주어질 만무합니다. 복도 인간의 수고의 대가로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누리는 복과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로마서 4:4-8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일한 것도 없는 복’을 받았기에 성도는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님을 그들만이 알고 있습니다. 과연 성도의 즐거움은 어디있을까요? 요한복음 4:36-37에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영생을 아무런 대가없이 얻은자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기쁨을 전달하는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순간적인 이익을 영원한 즐거움이라고 여기지 말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매자와 지혜자
전도서 2:12-17
(전 2: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전 2: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전 2:14)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전 2: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전 2: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전 2: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이 세상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곧장 사회적인 차별로 확장하려는 의도는 누구에게나 가질 수 있는 성향입니다. 오늘날의 민주 사회가 되기 전의 고대 사람들은 사회 내에서 죄를 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식해서 죄짓는다고 보았습니다. 무식한 만큼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말이라고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서 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알고 똑똑하면 그만큼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공식이 수립됩니다. 즉 사람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지만 안다면 항상 나쁜 짓을 선택하기보다는 착한 일 하기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는 겁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흔히들 있지만 이런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바는, 자신들의 착함에 대한 합당한 사회적 권위나 인기나 칭찬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 점에 대해서 이유 없이 화가 나고 허무를 느낀다는 점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이러한 난제를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믿습니다. 하지만 그 운명은 어디까지나 자기하기 나름이요 자기 마음먹기 나름이다 는 겁니다. 즉 운명의 주인을 자기 자신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세력 앞에서 다 헛되게 허물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엄연히 이 자연의 이치요 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이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대단히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끝’이 자기를 맞이하면서 자신을 아예 애초에 없었던 존재로 뭉개버린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매하지 않기 위해 애썼고, 착하기 위해 자기 절제하면서 인내했던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육의 한계입니다. 육으로서 육을 아는 바의 경계선입니다. 곧 ‘죽음으로 끝난다’는 말이 ‘헛되게 끝난다’ 말과 같이 해석되는 이유는, 죽음이 지니고 있는 내용을 구약 때는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내막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주위의 사람들과 조상들이 다 그렇고 그런 죽을 운명 안에 놓여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하늘에 사시던 분이 이 땅에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3:31-34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늘에서 누군가가 오셨습니다. 인간은 다같이 땅이라는 지평선 안목에 머물기 때문에 지평선의 끝을 무한정 늘이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저 지평선 끝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면 지금까지 생각해 놓은 모든 것을 수정할 판입니다. 항상 오류로 마감할 가능성을 품고 무작정 갈 데까지 가보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서 사시던 분이십니다. 시작도 그분이 하셨고 끝도 그분이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을 믿습니다. 처음이요 과정이요 끝이심을 믿습니다. 그 예수님에 의해서 죽음이 품고 있는 본질이 드러납니다. 이런 것을 위하여 마태, 마가, 누가, 복음 복음이 있고 또한 그 뒤로 사도들의 편지들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1:24-26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전도서에서의 인생이란 늘 죽음을 품고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지만, 신약 성경에 와서는 그 죽음은 ‘악마 들림’, ‘귀신 들림’으로 표현될 수가 있습니다. 즉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추방하고 할 수 없듯이 귀신이나 악마에 대해서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에베소서 2:1-3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귀신을 추방한다든지, 악마를 추방한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우리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조치가 내려집니까? 갈라디아서 6:8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체를 위하여 심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육체에 대한 과도한 기대성과 투자성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이미 육체에 투자하고 기대하는 그런 시기는 넘어섰다는 말입니다. 만약 여전히 육체에 신경쓴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악령의 열매가 맺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육체성이 늘 이런 본성을 감출 길 없이 드러내지만 이러한 정과 육체성을 십자가에 늘 못 박아 버리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또한 성령님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육체로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열매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허무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영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죽음 위에 놓여 있지 않고 십자가 위에 놓여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실망
전도서2:18-20
(전 2:18)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전 2: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2: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사람이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자기의 기분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외에 모든 사람이 다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진리요 옳은 일이라면 왜 이 세상에서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뭉텅이로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나 외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한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런 타입의 사람들도 많다는 말은 우리 자신들이 나 중심적으로 사는 사고방식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실망합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으로 제대로 자기가 의도했던 행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해 실망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부분적입니다.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바로 신약 성경으로 나아가서 “나는 온전한 것을 다 알았다”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구약을 통과하면서 부분적으로 아는 그 앎으로 인해 평소에 우리가 매일같이 얼마나 자기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통해 깊은 절망감으로 실망하는지를 겪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정의로움이나 사랑이라는 것도 실은 부분적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모두 다 나 중심적으로 생각한 정의요 사랑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애써서 벌어놓은 것을 남들이 홀라당 다 가져갈 때, 우리는 세상 자체에 대해서 실망하고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나지를 않습니다. 정의로움이 이 세계에서 떠나버렸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온전하시고 온전하신 예수님은 엄연히 이 세상 안에서 사셨습니다. 세상이 불의하다는 이유로 인해 이 세상 안에서 자살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더럽다는 것을 빌미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자신을 대하면서 온전한 것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온전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 9-13에 보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온전한 사랑이 없다는 말은 곧 자기 위주로 살아간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위주로 산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비교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지혜자는 자기와 타인과 계속 비교해봅니다. 자기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자손이나 혹은 자기로 인해 공짜로 갑부가 된 자를 보면서 뭔가 자꾸만 불합리를 느끼고 실망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과연 이러한 비교를 어떤 식으로 해결지워야 할까요? 한 좋은 예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있던 무리 앞으로 어떤 장님이 지나가니까 제자들이 너무 측은해 보였든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의 죄로 인해 장님이 되었습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지금 비교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신들과 건강치 못한 그 사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행복한데 비해서 저 장님은 분명히 불행할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즉 죄가 없는 자신들은 행복한 것이 마땅하고 죄많은 저 소경은 불행한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 위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나온 결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저 소경이 소경된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요 자기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하여 소경이 되었다. 따라서 자신이 소경이 아니라는 자는 소경에서, 자신이 소경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소경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옆에 있는 퍼즐의 조각처럼 타 부분과 우위를 논하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모나리자라고 하는 그림 퍼즐이 있는데 만약 우리가 눈 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포개진 손 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 자신이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해서 남과 비교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해야 합니까?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온전한 것을 향하여 이 부분적인 것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시편 90:10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지금 신속히 날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만약에 그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우리 인생을 중간에 포착해서 손에 놓고 평가한다면 그 인생에서 나올 것은 수고와 슬픔 뿐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그냥 날아가게 놔두어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따져서 가치를 논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분명히 흙으로 만들어졌고 창세기 3장에 보면, 우리 인생은 분명히 흙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우리가 흙 덩어리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됩니까? 관 속에 묻혀서 썩어봐야 압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나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요 여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있는 것은 서로 친하게 지내라고 있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다 필요해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 사이나 교회 내에서, 상호 비교하지 말고 도리어 온전한 사랑으로 남을 배려하고 용납해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상대방과 비교해서 자신을 규정하고자 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자신에게 수고와 슬픔 뿐임만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본 모습을 늘 감추고 들켜서 괜찮은 것은 늘 바깥으로 내어놓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전도자는 자신이 고이 감추고 있는 그것마저 꽝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과 비교하지 말고 그들의 존재와 역할도 다 온전한 사랑을 위해 온전하게 나타나야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득
전도서 2:21-23
(전 2:21)『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전 2: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전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나의 수고로움의 가치를 타인이 알아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막대한 유산을 자식에게 남겨주면 자식들이 부모의 수고로움의 가치를 알아줄까요? 전도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전도서는 이런 세상의 상황들을 보고 깊이 탄식합니다. 헛되다고 말입니다. 왜 자신의 수고로움에 타인이 같이 호응하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내막을 보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수고들은 각자 자신의 가치로만 멈추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타인에게로 전달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유산을 남긴다 할지라도 수고한 사람의 가치마저 고스란히 넘겨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유독 악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이 하실 일마저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9:23-24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너무 놀라서 다음과 같이 응수합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즉 지금 예수님은 인간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겠답니다. 낙타를 바늘 구멍 속으로 통과시키는 일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수님의 수고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마냥 '왜 나의 수고가 그 가치를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가 한탄스럽다’라고만 합니다. 어떤 특정인이 수고가 타인의 혜택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뿐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23-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에게만 그 희생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의 것으로 넘어보게 됩니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만약 저의 아버지께서 십자가 지시고 자식된 나는 그 아버지의 희생의 대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입은 메시야에 국한해서 적용되는 원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고 봅시다.
예를 들어 저의 성씨가 이(李)가니까 제 이름을 잠시 ‘이(李)브라함’이라고 봅시다. 그런데 제가 사는 앞집에 아브라함이 살고 있다고 칩시다. 저는 새벽 4시부터 밤 늦도록 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상스럽게 저의 수고의 가치를 앞 집에 사는 아브라함이 안 알아주게 하십니다.
그런데 도리어 앞집에 사시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앞 집에 사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네가 복을 받고 만약 무시하면 너에게 저주가 임한다”고 말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왜 저는 안되고 아브라함은 됩니까? 저의 수고와 아브라함의 수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언약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하나님의 일들이, 그 분의 일이 하나님이 언약의 일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으로 복을 받도록 조처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언약적인 수고는 자기 수고의 가치가 자기 수고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혜택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언약의 사람말고 일반인들은 자신의 수고는 남들이 안 알아주고 하나님도 안 알아주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의 내막은 19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신적인 혁명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소위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이 혁명의 취지는 간단히 말해서, 수고한 대가를 수고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중간에 가로채이는 경우가 생기지 않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그들안 노동자들의 수고를 착취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그들이 자본가들이라고 합니다. 그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애써 수고한 것은 교환가치로 보지 않고 사용가치를 따져서 본래의 값어치를 하락시키고 거기서 나오는 잉여가치를 불로소득처럼 자신의 자본 증식에 꾀했다는 겁니다.
이 증식된 자본은 또다시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원인제공으로 작용해서 날이갈수록 수탈의 폭을 넓어진다는 겁니다. 원래 인간의 가치란 국왕이 있던 시대에서는 정체되어 있는 토지의 가치처럼 신분상 타 신분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에 훼손하게 자신의 신분마저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즉 땅 주인인 귀족이 농부의 고유한 노동 가치에 의존하는 식으로 신분이 유지되고 이로 인해 국가가 질서를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노동의 가치는 공급의 과다로 인해 하락하게 되었고 이러한 하락을 부추긴 것은, 이자 이상의 소득을 획득하려는 자본가들의 욕심이 그렇게 유도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 주도의 정치질서가 경제구조에 따라 경제의 힘에 편승한 정치 질서로 재편되는 겁니다.
역사란 실제적인 노동력에 의해서 진보, 발전하게 되어있기에 이제는 노동자들의 역사를 진보시키는 주체자가 되기 위해서 그동안 자본가들 손에 맡긴 이 사회에 대 구조개편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들이 결코 노동 자체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라 신나게 노는 것에 희망을 걸고 사는 인간들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수고는 줄이고 마음껏 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힘과 힘의 부딪침을 통해 나의 흥겨운 놀이는 곧 타인의 수고의 밑거름 위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즉 내가 편하기 쉬기 위해서 남의 휴식을 깨는 도발을 저질러야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수고의 가치를 뺏지 않고서는 나에게 휴식이라는 것은 없고 도리어 호시탐탐 남의 안일을 위해 배나 수고해야 될 노예가 되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인간 환경은 창세기 3장 이후 인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들은 죽도록 일해야 하는 것은 그 수고의 가치가 예수님의 수고의 가치에 미치지 못함을 알리기 위햐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든 인생살이 가운데서도 거저 주신 영생의 가치를 잊지 말고 주님이 수고를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8
(전 3:1)『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때를 놓고서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인간들은 말하기를, 자신이 내심 목적으로 두고 있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것이 생기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꾸만 인간들의 그들의 때를 피해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나고 싶지 않을 때에 나게 하시고, 죽고 싶지 않을 때에 죽게 하시고, 심고 싶지 않을 때가 심게 하시고, 뽑고 싶지 않을 때에 뽑게 하십니다. 죽이고 싶지 않을 때에 죽이게 하시고, 치료시키고 싶지 않을 때에 치료시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에 사랑하게 하시고, 헤어지고 싶지 않을 때에 헤어지게 하십니다.
인간들이 보아서 세상의 모든 변화는 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하고 싶어 하고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램은 개개인마다 터지고 있는 자기 감정과 충동과 욕심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즉 나에게 이익되는 것이 남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이익되니 만사가 원만하게 잘 되었다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신의 뜻대로=나에게 유리한대’로 라는 원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원합니다. 자기에게 신뢰성이 가는 진리를 원합니다. ‘때’라고 확정짓는 방식이 너무나도 일방적입니다. 자기가 납득이 되면 진리라고 보고 그 진리가 등장하는 것을 ‘의미있는 때’라고 잡고 싶은 겁니다.
이것도 곧 인간들이 짐작도 못하는 ‘때’는 세상에 생겨나서는 아니 된다고 우기는 것을 전제고 하는 논리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짐작도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자신들이 당황하게 되고, 자신들이 당황하게 되면 그동안 인간의 힘으로 수립된 모든 가치들이 함몰되며 그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를 사용하실 때는 이처럼 이 세상의 원래 목적을 위해 인간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비록 인간들이 두려워하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 정하심은 숱한 세상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하고, 그들의 기도능력을 고려해서 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한 분의 인간만을 고려해서 ‘때’를 지정하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면 그 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등장하시는 때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목적을 향하여 쏠리게 되어 있는 때입니다. 이로서 이 세상에서 많고 많은 개인적인 ‘때’와 ‘목적’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버립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목적이 있든지 개인적으로 어떤 소망이 있든지 상관없이 예수님 앞에서는 의미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동안 알고자 하고 또 붙잡기 위해서 아등바등했던 그 때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 ‘때’의 전부를 다 하나의 때 속에 다 집어넣어버렸습니다. 에베소서 2:2-3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것은 전부 다 ‘그 때’ 안으로 일괄적으로 쓸어 담겨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한마디로 말해서 ‘악 영에 사로잡혀 있던 때’입니다. 즉 인간들은 그동안 악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각가지 소원이나 소망을 하늘을 향해 열심과 정성으로 기도했지만 그 부질없는 짓들을 한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인간의 가치가 헛됨을 노출시키는 새로운 때 개시되었습니다. 인간들의 타고난 감정과 충동이 죄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새로운 때를 발진시켰습니다. 이 예수님의 때를 인간의 시간관점에서 바라보면, 마치 순서와 순서로 되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입니다.
로마서 8:29-30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완료된 신분이라는 겁니다.
아직 시간적인 다음 때가 남아 있어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시간관념의 한계 때문에 이미 완료된 상황에 대해서 완료로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별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보게 되지만 우리가 아직 보지도 못한 별들도 우리가 보기 이전부터 이미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순서적 시간관념이 예수님의 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원리 앞에서 보면, 율법 아래 갇혀 있는 인간들은 그 모든 율법을 하나하나 지켜나가는 것에서 자신이 더욱더 훌륭해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때를 몰고 오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런 시도가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 지킴의 시간적 순서와 상관없는 자리로 우리를 건져 올리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8-11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는 오로지 이미 완료된 것으로만 꽉 차 있습니다.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때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우리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도적같이 오십니다. 이미 완료된 것을 믿는 자에게만 재림을 반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인간의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인간 속에 이미 들어있는 엉터리 인생 목적을 폭로시켜 그것을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된 그 약속의 내용만이 우리 성도의 진정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매사가 감사할 뿐입니다. 심지어 죽는 것까지!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뜻대로 일하시지 않는 것을 우리가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알 수 없도다
전도서 3:9-11
(전 3: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전 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일하는 자는 일을 할 때, 반드시 그 수고의 대가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얻어지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일은 자기가 했는데 남이 그 공로를 가로채거나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살이라고 하시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이 영원의 세계의 내막과 원리를 모르기에 막무가내로 자신이 수고한 대가가 자기에게 남김없이 돌아와야 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모든 수고의 공로자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때를 조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은 세상의 때를 자기를 위한 때라고 일단 간주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거기서 행한 수고도 오로지 자기 몫으로만 돌아와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한 조치로서 자기 애씀이 자기 업적이나 공로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즉 영원의 세계는 자기 수고의 대가를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을 길게 무한대로 늘어뜨린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이 아닙니다. 시간을 시간이라고 느끼는 것은 실은 인간의 신체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긴 시간을 보내더라도 어느 장소, 어느 세월을 가져도 그 시간을 느끼는 인간의 신체가 동일한 신체이기에 영원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이러한 긴 시간관을 깨뜨리고 시간 자체가 무용지물임을 밝히는 능력이 곧 영원히 개입한 결과입니다. 영원 안에는 ‘전․ 후’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즉 결과와 원인이 구분되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준비해 놓은 때요 시기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동의 대가를 얻기 위한 때라는 것은 없습니다.
또 영원의 세계에서는 ‘자아’라는 것을 용납해주지를 않습니다. 즉 ‘내가 한 수고’라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한 분이신 예수님이 행하신 그 수고의 혜택을 우리 성도들이 그저 누리고 있는 관계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분열되고 분리될 때 발생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까지는 그저 한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죄하고 난 뒤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으로 간주할 정도로 명확히 자아성을 구축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아성과 자기 수고에 대한 대가 추구가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크게 충돌 되느냐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구약 요나 선지자의 경우입니다. 요나 4:10-11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성에 대한 심판 선포 계획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진행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니느웨성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들러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요나 선지자가 알 리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할 정도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실망을 느꼈습니다.
즉 자신이 친히 수고한 대가가 요나 자신의 영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되레 반대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것으로 다가온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인생을 살고픈 마음조차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요나가 고국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니느웨성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요나는 필히 그렇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 예언에 착오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요나는 그 말씀을 해석하는 본인의 마음에 착오가 있음을 예감하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성 멸망 선포에서 자신이 빠지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전하나 아니 전하나 니느웨성은 필히 멸망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하나님은 도망치는 요나를 기어이 체포해서 니느웨성 해변가까지 부려놓습니다. 요나는 무성의하게 마지못해 니느웨성 사람들에게 멸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가 도저히 예상치도 못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80도로 그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그들은 크게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현실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취할 태도는 오직 살려달라고 비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철회해서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삐져버린 자는 요나 선지자입니다.
자신이 예상하면서 수고한 결과가 실제 현실과 부합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위신이 형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존재 가치가 없음을 안 요나는 자결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나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개란 반드시 은총을 입은 나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요나의 곁에 난데없이 박넝쿨이 속성으로 자라라서 죽으려는 요나를 시원하게 해주자, 요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왕 죽을 것 시원하게 죽는구나 라고 생각날 만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늘을 제공하던 그 박 넝쿨을 말라 죽게 하자, 이번에는 요나가 더워서 죽겠다고 불평입니다.
즉 조금 전에 박 넝쿨의 혜택을 약간이라도 맛을 보았기에 그 혜택과 은총이 사라지는 아품이 얼마나 큰 것임을 새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제사 나타나셔서 요나를 꾸짖습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피어난 박 넝쿨이 요나를 얼마나 기분좋게 하고, 반대로 그 박 넝쿨이 말아죽을 때에 얼마나 요나를 섭섭하게 했는지를 친히 경험케 합니다.
이로 인해 요나가 보다 더 큰 은총의 증거로서 니느웨성을 바라보기를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큰 은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서만 쓰여진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에게 화를 낸 것은 아직도 본인이 모르고 있는 은총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하나님이 준비 하신 더 깊은 은총을 새삼 요나에게 더 알리기 위한 조치로서 하나님은 니느웨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의 세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한 배치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아가 일방적으로 예상한 결과만을 고집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선물
전도서 3:12-15
(전 3:12)『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 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농사짓는 농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집요한 목적하는 바가 분명히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밭으로 보시고 그 밭에다 온갖 것들을 뿌려놓으시고, 그 뿌려진 것들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회수하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경외하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경외한다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즉 자기 생각에 몰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신이 판단하게 되면 하나님께 경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군중들이 어린아이들이 이 나라에 드디어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거리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식한 성직자들이 판단하기에는 대규모 심리적 여파로 인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군중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약속을 구체화 시킬 메시야가 자기 기대에 등장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등장할 때의 광경을 소선지서에 근거해서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연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제자들은 나귀를 타고서 말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비이성적이고 판단력이 흐려진 벌어진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성적인 그 당시 성직자들이 군중들의 행태를 비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즉 군중들이 나의 메시야적 입성을 환호하지 아니하면 길에 있는 돌들이 일어나서 나를 환호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메시야 앞에서의 인간들은 바른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경외를 하면서 자아를 잃어버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물’로서의 인간입니다. 즉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인간 따로 선물 따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말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선물이 되려면 그렇게 먹고 마실 수 밖에 없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일 경우에 국한합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면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 말씀을 잘못 생각해서 오해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즉 “현재 내가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 다 주님의 은혜요 뜻이니까 내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간섭하지 말라 내 자유다!”라는 식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심이 날아가 버린 결과입니다. 사람이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면서 낙을 얻든지 간에 자기 좋아라고 하나님께서 그런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일어나는 일이라도 이미 옛적에 다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란 하나님이 쳐놓은 시간이라는 벽 속에 갇혀있다는 말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이 느꼈던 행복감을 근거나 과거 사람들의 불행을 말하기 싶상입니다.
오늘날 자신들이 놀고 있는 장난감이라든지, 골프라든지, 컴퓨터 게임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맛보지 못한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보내었느냐는 식으로 안일하게 판단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낙이라는 것은 특정 물건이나 특정 사건이 자동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물건을 모르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나름대로 소박한 행복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제공하셨습니다. 사람 사는 낙이라는 것은 소득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지 못하면 늘 행복이라는 목표점에 농락당하는 식으로 인생을 불행에 끌려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지 아니하면 본인은 어느새 권력자가 됩니다. 권력자란, 늘 자가 증식을 일어나지 아니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서 더 큰 권력에 늘 새롭게 포섭되지 아니하면 불만족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선물로서의 질적 하락을 야기시킨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질적으로 못하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하나님의 경외하심에 과연 질적 차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자기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하나님만 경외하는 상태에 대해서 차이지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1000원을 헌금하든지 십만원을 헌금하든지 질적으로 떨어지는 헌금이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천만원을 헌금하면서 하나님의 경외가 빠지고 자신의 행동이 강하게 의식될 때, 바로 이러한 상태가 질적으로 떨어진 행복일 뿐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삶이란 강한 본인 의식이 있어서는 선물로서 의식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풀려났다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베드로후서 3:4-8에 보면,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보전은 모두 농사짓는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 즉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배치물들인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선물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심판자
전도서 3:16-21
(전 3: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전 3: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전 3: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 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해 아래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기 세계의 유지와 보존과 운영입니다. 보다 정의롭게 운영하면 이 세상의 허무가 해소되리라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자연 속에서 자꾸만 자기 것을 꾸미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구성해놓은 작은 세상을 따로 챙기고 싶어합니다. 작게는 가정이 그러하고 크게는 국가가 그러합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짐승의 수준에서 점차 벗어난다고 여깁니다. 국가적으로 이 세상 사회에는 보통 세 가지의 차이나는 분류와 구별됩니다. 하나는 왕입니다. 다른 한 그룹은 보통 평민들입니다. 또 하나의 그룹은 짐승에 가까이 못난 죄인들이요 가난한 자들입니다. 보통 평민들과 가난하고 죄많은 자들의 왕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통치를 받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지배해 달라고 그들을 원해서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란 고대로부터 최종 재판을 거행하는 자입니다. 재판이란 의로움과 악함을 구별하는 자리입니다. 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 왕으로 있기를 원할까요? 그것은 신께서 의로운 자에게 특별한 은혜와 혜택을 더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은 왕이 착하기 때문에 신께서 왕 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왕으로 권력을 쥐고 있으니 할 수 없이 그냥 착하기만을 고대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오늘 특별한 행운을 고대합니다. 그래서 신과 인간들 사이에 초월적인 인간이 중간에 자리잡아서 신으로부터는 복을 따내오고 아래로 백성들에게는 그 따낸 복을 대가없이 그저 제공할 수 있는 덕스러운 왕이 오래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소위 영웅인 자가 계속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특별한 능력이 발휘되어 예상못할 기적인 승리를 낚아 채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지도자로 혹은 왕으로 영웅으로 계속 자기를 통치해 주시기 바라게 됩니다. 일반 사업체나 조직체나 공조직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작년보다 위에서 더 많은 예산을 따내오는 능력을 발휘하면 그 사람들은 계속 조직의 장으로 군림할 가능성이 높은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권력의 원천입니다. 권력이란 사람들의 늘 상상하는 행위 가운데서 그것이 현실과 일치된다고 착각하는 지점에 발생됩니다. 즉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영웅 맞습니다”라고 단정하면 그 사람에게는 권력이 임재된 순간입니다.
그 권력을 사람을 신이 내린 권위라고 단정하고 싶은 이유가 신과 자기네들 사이에 그 어떤 공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력을 쥔 사람은 자신이 그동안 획득한 부와 축복의 원칙에 근거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됩니다. 소위 재판을 벌리는 겁니다. 그 조직에 부를 증가시키는 경우는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경우요, 반대로 그 조직에 소유된 부를 감소시키는 경우가 발생하면 그 사람은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조직에 합당치 않는 사람으로 판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판을 감행하는 왕의 성격에 맞지 않는 자는 그 왕이 있는 기간동안 자동적으로 신으로부터 저주받는 인물로 분류될 수 밖에 없을 것이요, 만약에 차기 왕이 자기 성경에 부합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신이 축복에 합당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들이 모두 ‘해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 소용없는 헛되고 헛된 짓이라는 겁니다. 이 해 아래서 하나님께서 행라시는 바는 심판입니다. 심판이란 누구누구의 팔을 들어주면서 “당신이 이번 일의 승리자요” 선언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누구든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그 원래성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안정된 운영과 미래의 번영을 추구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묻는 바는 “네가 누군지를 아느냐?”입니다. 교회나 세상은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내가 누군지에 관심없으면 그런 세계는 자신을 코디하고 꾸미는 허상의 세계를 바라 볼 뿐입니다.
사람 곁에 짐승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인간의 정체와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시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은 바르게 재판해도 그 재판 과정 속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즉 “짐승같은 인간들끼리 무슨 패가름을 하느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공중의 새를 바라보고, 들에 핀 이름없는 들풀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뉴월에 따뜻한 햇빛 쬐이는 곳에 나가서 벌러덩 사지 벌려놓고 잠을 자고 있는 개를 보세요. 그들에게 있어 인간들의 정치 사정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심지어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 개를 잡아 먹는다 할지라도 그 개는 그날 쬐고 싶은 햇빛은 고민없이 만낏하며 쬐게 됩니다.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진정 자기 본색을 아는 순간은 자신이 짐승과 마찬가지 운명이라는 것을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짐승되면 안된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짐승과 같은 길을 가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동의해야 하는 겁니다.
짐승보다 더 높은 가치를 얹었다면 그 얹힌 가치는 모두 인간이 조작한 것입니다. 심판받을 대상입니다. 가장된 것이고 과장된 것들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하는 바와 억지로 연결시키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예를 들면, 재판하는 과정에 부정에 개입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자신이 나서서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정의 실천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 인간보고 사회 개혁하는 영웅적인 업적을 남기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원래 자리가 바로 짐승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봉사입니다. 자신이 짐승에 불과함을 알 때 비로소 봉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짐승같은 우리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를 지상에 남기십니다. 그 능력 발휘를 위해 우리는 계속 짐승으로 남아야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자신을 과장되게 꾸미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학대
전도서 4:1-3
(전 4: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2)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전 4:3)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흔히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무덤에 있는 자도 무덤을 열어제치시고 구원하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누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하는 주체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그냥 교통사고로 누가 죽으면 그냥 팔자소관을 돌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웃집 사람이 의도적으로 지목한 자를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죽이려고 한다면 이럴 경우에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죽음을 제공한 주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단순히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어야하며 누가 죽여야 하는지까지 파악되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에 관해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중요합니다. 거기에 보면 단순한 죽음의 분위가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연관한 자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압박이 주어질 수 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 장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을 학대할 수 밖에 없는 바로왕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적인 부의 창출은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충당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최고 행정관으로 당연한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솔직함을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여호와라는 신이 누군데 내가 그 신의 말을 들어야 하나?”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기계처럼 부리지 아니하면 막대한 노동은 다른 사람이 대체되어야 합니다. 즉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노예는 완벽하게 노예임을 자각시키는 방식이 병행된체 노동을 강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예가 아니라면 개별적인 종교라든지 인격이라든지 세계관도 존중되어야 할 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 좋아라’하는 노동을 과도히 하는 그 정당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기계는 기계답게 노예는 노예다워야 거대한 국가 조직체는 돌아가게 됩니다. 노예들의 신을 행정관이 옹호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생산물이 감소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면 이는 왕이 왕답게 처신 못하는게 됩니다. 국가라는 사회란 보편성이 개별성을 이기는 사회입니다. 학대받는 개별자의 비명소리를 다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학대하는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학대받는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학대하는 자나 학대받는 자는 모두 다같이 그런 구조의 틀에서 출생한 자들이요 그 구조적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어느 인간이든지 자신의 부모를 본인이 선택해서 부모삼은 것이 아니듯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으로 던져진 존재들이요 그 나머지는 오로지 순응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곧 그 어느 누구도 항시 학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남들로부터 학대받는 경우는 대단한 세상 부조리로 간주하면서 막상 자신이 남을 학대는 전혀 의식조차 하지를 못합니다.
소위 본의아니게 인간은 나의 존재에만 관심두다 보면 그것으로 인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마련입니다. 한 도시에 있는 아파트 가격 담합 현상이 전체적으로 전세값의 상승으로 이어져 전세값을 미처 마련하지 못해 다음해에는 쫓겨나가야 될 가구수를 증가시킨다든지 아니면 전세값을 마저 채우기 위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사태를 확산시킬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한 사람만 계속해서 학대받는 경우도 없고, 특별히 한 사람만 계속해서 학대하는 경우도 없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도 않는 팔자가 최고라는 겁니다. 그만큼 세상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사실은 또다른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때의 경제학자들은 부의 증식에 있어 불합리한 중상주의, 즉 상업을 중요시 하는 경제정책보다 중농주의, 즉 농업을 중요한 하는 정책을 대안으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있어 부의 증식이 단순히 돈의 흐름이나 화폐의 교환으로 없는데서 생겨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공장에서 물품을 생산하는 것도, 단지 인간의 노동을 물질의 변형에서 투자했지 그것이 전체적인 새로운 이익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돈 버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돈을 날린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 정산해보면 결국 0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농주의자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부의 증식이 화폐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지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습니다.
토지에다 인간들이 노동이 가미되면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햇빛과 공기를 무상으로 포획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가치 이상의 가치가 거기에 담겨서 전체적으로 부의 증가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과연 농사짓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에 허무하지 않는 인생으로 전환하는 묘책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자연은 인간편이 아닙니다. 대자연의 변덕에 인간의 모든 수고도 한꺼번에 다 날리고 부도 다 날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야고보서 4:13-16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보고 딴 마음 열심히 살아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비록 자기 삶에만 치중하는 상태에서 살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라는 겁니다. 진정한 이 세상의 해결자는 지금 문 밖의 심판주와 상주해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주님 기다리며 참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결코 나의 자랑거리로 작용할 수 없음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간의 수고
전도서 4:4-6
(전 4: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4:5)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전 4:6)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들은 우리가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헛되고 헛되다라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은 본인이 의도하나 하지 않으나 상관없이 헛되고 헛된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본인만큼은 결코 헛되지 않는 인생이라고 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 전도서의 말씀대로 그대로 실천에 옮겨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자처하고 싶어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란 살다보다 각가지 오해와 질투와 시기를 받기 마련인데 특히 부자에 대한 시기가 대표적입니다. 따라서 남들부터 쓸데없는 비난을 받기 보다는 적당히 사는 것이 두 손 가득 모은 부자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요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너무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해서 너무 부자가 되어 남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기 보다는 적당한 선에게 욕심내지 않고 사는 것이 옳은 삶이다고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곧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라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전도서는 새삼스럽게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간들이 얼마든지 요령껏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하지만 다 헛되고 헛된 인생의 지루한 연속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면은 잠언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잠언은 인생의 헛됨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렇게 하면 반드시 저렇게 됩니다.’라는 확연한 법칙 같은 것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합니다.
즉 사람들이 인생을 역전시킬 멋진 기회나 결과를 얻고 싶은데, 성공적인 인생으로 전환시킬 공식 같은 것이 그리워질 때 잠언을 보면서 안심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잠언 3:16의 경우입니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말 눈에 확 띄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들이 평소에 원하고 또 원하는 바, 오래 사는 것과 부귀 영화를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지혜를 얻는 것으로 좌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혜를 얻는 자는 장수와 부귀도 한꺼번에 다 들어온다는 겁니다. 참으로 즐거운 소식처럼 들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부자 되는 것을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격려하고 조장하시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가난한 쪽보다 부자가 되는 쪽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만 된다면 이 결과가 곧 신의 축복을 받은 정당한 것이 될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런 마음은 평소에 자신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바가 되는 겁니다. 어느 인간치고 힘들고 싶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 아쉬운 것이 없이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구겨서 마음 깊숙한 곳에 집어넣는다고해서 과연 그것이 성경 말씀에 실천에 옮긴 것이 될까요?
하지만 처음 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물러 받은 것이 없어 사회에 나가서 소위 잘 사는 계열에 뛰어들기 위해 분투노력 했지만 아무도 모으고 모아도 그 때 그때 지출해야 하는 것이 자꾸만 생기기에 여전히 빈민층을 못 벗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성경 이해가 자칫 자신을 대단한 신앙인으로 포장하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교회사적으로 봐서 그런 집단들이 숱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부자들을 비난하는 가난한 자들만의 권리 같은 것을 내세웁니다. 즉 가난하기에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가난하기에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구제를 베풀어야 마땅하고 만약에 구제가 자신이 요구한 양만큼 차지 못하면 강탈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들은 청빈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을 참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고위 성직자들과 이 사회에서 좀 산다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것을 강탈하는 것은 정당한 신의 지시한 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자신들은 신의 뜻에 따라 가난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공평하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만 그 소비의 공평함보다 생산이 자체적으로 조달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부자들에게 협박과 공갈을 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고위 성직자들의 하던 행세를 그들도 되풀이하는 하고 있는 겁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구약 성경 잠언에 보면 부자나 혹은 가난하게 됨과 인간 자체의 운명과 별개하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부자 되었다고해서 구원받은 자가 아니요 가난하게 되었다고해서 역시 구원받은 자의 청빈한 표시라는 것도 아니랍니다.
이 땅에서는 분명히 가난한 자나 부자나 함께 섞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항시 부한 자냐 가난한 자냐 하는 그 틈바구니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런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언 23:4에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언 22:1-2에 보면,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인해 뭔가 유세 떨 수 없다는 겁니다. 진정 인간으로서 바라봐야 하는 것은 딴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가난한 분은 없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부자인 분도 없습니다. 24 시간 항상 가난과 부자라는 그 고리 안에서 갇혀 있는 의식을 던져 버려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입장부터 시작하지 말고 주님의 입장부터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수고
전도서 4:7-8
(전 4:7)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전 4: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오늘 본문은, 자신이 수고한 것을 그냥 감사히 받아줄 가까운 인척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인생을 살면서 헛된 일 중의 하나라고 탄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는 이런 경우가 생기지 않는 방향으로 일 하실 게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수고는 그 수고를 받아 줄 자를 겨냥해서 일하시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과 질적으로 정반대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인간 세상에서의 통하는 원리는, 자기가 수고한 것은 수고한 자가 먹는 것이 당연하고 의로운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와 의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한 노동의 가치 외에 더 큰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죄가 되고 만약 사람이 자기가 행한 노동의 양만큼 얻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 도리어 의로운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곧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하지 않는 일에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죄가 아닌데 자기가 그 죄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는 이런 자기 노동 중심주의 사고방식에 따라서 선과 악을 구분짓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런 의식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허무’가 찾아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움직임은 이런 인간들의 생각에 호응해주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다시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대해서 감히 우리 인간들이 ‘지기 노동중심주의적 의식’으로서 덤벼들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어떤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서 영생을 얻어보겠노라고 나섭니다. 자신이 그동안 어릴 적부터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언약인 십계명을 지켜왔노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러한 자기 노동 위주의 생각이 영생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노동으로 인해 그 본인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경우는 도리어 자신의 수고와 애씀의 결과가 터무니없는 인간들에게 홀라당 빼앗겨 버림을 당할 때,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기 노동의 열매에 집착하는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배제되고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처리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인간이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0장에서 보면 어떤 율법사가 자기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하기’ 율법에 도전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이웃’이 누구냐만 제대로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오산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이 세상을 헛된 세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노동중심주의를 가지고서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비유를 가지고 그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지적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마침 제사장이 지나갔지만 그를 피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갔지만 그도 없어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가 가진 귀한 기름과 포도주로서 원기를 북돋아주고서는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에다 모시고, 안정을 취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관주인에게 당부하기를 치료비용이 더 들더라도 자신이 다 댈테니 염려하지 말고 그 강도 만남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데 도와달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래놓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되묻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강도 사건을 보면서, 세상적인 자기 노동중심의 가치관을 한 번 적용해보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을 결코 강도들보다 더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아니라 강도는 엄연히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일에 대해서 구태어 책임지고 나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결코 강도가 아닌 것입니다. 강도는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되면 ‘이웃’이라는 것이 이 상황에서 발생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 비해서 제 3의 인물인 사마리아인은 마치 강도 만난 자에게 자신의 노동의 대가인 비용을 다 집어넣으므로서 이웃을 만난 보람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그동안 노동해서 얻은 것을 빼앗가는 인물이 있다는 사태를 도리어 즐거워하고 반기고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저질은 놓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담당해야만 하는 일로 여긴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새로운 죄관으로 다가옵니다.
즉 무엇이 죄인가요? 그것은 자신이 노동한 것을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는 자에게 홀라당 빼앗기는 사태를 즐거워하고 기쁘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정말 희한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 성취를 보여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그 말씀의 성취자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가능함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5: 21-22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미 독자적인 구원사역에 나설 수 있는 자격자인데 이는 홀로 모든 말씀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요한복음 3:16을 우리가 아무리 믿고 싶어도 우리 힘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조차 예수님이 믿음 주셔야 비로소 우리가 믿고 영생 얻게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죄를 모르고 일이 순탄치 않을 때, 자기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헤아려 달라고 주님께 대들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두 사람의 힘
전도서 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전도서와 잠언의 차이점은, 잠언에는 옳은 일과 옳지 않는 일을 분명히 구분짓고서는 그런 악한 일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바르게 살면 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의 경우에는, 옳고 그름에 관한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인간들이 본성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요령들을 그대로 적고 있으면서 결국에는 그것마저 헛되고 헛되다고 판정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판단하는 옳고 그름이 아무리 치밀하고 빈틈없이 정리한다할지라도 하나님 마음에 합당치 않으신다는 것인데 이는 그 원인이 이미 인간에게는 운명처럼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해도 그 목적하는 바와 의도성이 하나님의 뜻하고는 늘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두 사람이 상호 협력하는 것이 혼자 노력하는 것보다 수고한 대가를 얻는데 유리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협력이며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를 놓고 볼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11:21에 보면,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 끼리 마음 맞는다고 협조가 잘 되어도 도리어 하나님의 징벌을 더 보태는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차라리 의를 따르기 위해 악인을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복받을 만한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벌려놓은 일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성경 말씀을 도용하면 안됩니다.
한 사람이 일을 하다가 좌절하면 그런 자신을 도와줄 다른 동료가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의 진정한 뜻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실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취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4:7-8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몸’을 이루는데 있어 주님께서는 이 전도서 말씀대로 서로 협력하고 협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나가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 이루기’는 결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는 해 내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만약에 인간이 해 낼 수 있다고 시도하게 되면 반드시 오늘 본문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도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당회에서 결정내린 사항을 왜 제직회나 전 교인들이 왜 안 따라주는가? 교회 일하다가 낙심이 되면 비판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용기내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이 전도서의 말씀대로 된 주의 뜻이 아닌가”하는 식으로 곡해하기 십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 가던 아니면 집에 가던 항상 동일한 그 몸뚱아리입니다. 따라서 집에서도 자기를 위한 살던 자라면 교회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 삽니다. 반대로 집에서도 주를 위해 살면 교회에 가서도 주를 위해 살 사람입니다.
이것은 곧 ‘협조’나 ‘협력’이란 주님의 영께서 직접 주선할 문제이지 결코 인간들의 정치적 조직이나 제도를 수립해서 달성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이것은, ‘영적 예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 예배란 같은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내가 받은 신앙이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기적적인 선물로서 생겨버린 신앙이라면 상대방의 신앙도 그런 식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존중이 인간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은 곧 ‘자기를 위한 일하는 것’을 결코 ‘주의 일’로 간주해주고 협조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일하게 되는 성령의 작업이라면 ‘서로’를 누락하지를 않게 됩니다. 즉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 할지라도 인간들은 언제든지 신앙에 대해 회의와 의심을 순간이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마침 교회에 막 등록한 교인 한 사람이 제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자신의 신앙의 문제점도 아울러 밝혀지는 계기를 접하는 경우이기도 합니다.
같은 교인들 끼리 서로서로 권면을 하다보면, 상대방에게 나타난 고민거리가 결코 그 사람에게만 국한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나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깨닫게 하는 방도로 서로를 만나게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운명을 총괄하시는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챙기지 않게’ 하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즉 나를 위한 교회도 아니요 내 구원을 위한 교회도 아니요,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교회도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위한 교회라는 점을 매순간 확실하게 정립케 합니다.
로마서 12:10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서로’를 초월하고 벗어날 수 있는 성도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남들에게 신앙상담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는 기회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라는 기회라고 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붙여준 자를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담 나라 군대장관 나하만이 이스라엘의 어린 여종의 말을 믿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문둥을 낫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선입견을 나하만 장군에서 빼내 주십니다.
하나는, 깨끗한 자연적 조건이 하나님의 병 치료에 유리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둘째는 뭔가 신에게 바쳐야 그 바친 것을 통해서 보다 효력있는 기적을 얻게 된다는 선입견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엘리사 선자자에 의해서 가로막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곧 우리 자신의 죄와 그 한계를 지적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그들의 복음적 고백을 존중하고자 하는 이유는 헛되고 헛된 인간이 그들 자신을 앞장 세우고서는 결코 하나님 말씀이 달성되지 못함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기적인 것처럼 복음적인 신앙을 지난 타인도 주님의 기적을 거저 받는 자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내 위주로 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년과 왕
전도서 4:13-16
[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15]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16]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이 세상 안에서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이라든지 인기라든지 사랑이라는 것은 얼마가지 못가고 헛되게 끝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왕을 원하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 왕을 위한 자신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위한 왕으로 곧장 변해 버린다는 겁니다.
왕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벗겨놓으면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왕이시여”하고 머리 조아리고 무릎을 꿇고 굴복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아니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는 말입니까?
왕이라는 정치 제도가 오늘날에는 매우 이질적으로 들리겠지만, 불과 몇 백년 전만해도 전 세계의 보편적인 질서 양상이 ‘왕 제도’였습니다. 살아있는 왕이 엄연히 있고, 그에게 무조건으로 복종해야 될 백성도 엄연히 있었습니다. 그들이 결코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고 자존심이 없어서 왕에게 엎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요즈음 식으로 자기 재산만으로 ‘가치있는 사람 살기’를 가능하지 않았던 사회입니다. 쉽게 말해서 재산이 전부가 아닌 사회였습니다. 그 때 그 사회는 대자연 속에서 덮쳐오는 권위와 전통이 살아있었습니다. 한 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이요, 한 번 천민은 영원한 천민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질서 의식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질서에 대항해서 자신에게 가진 재산이 있다고 해서 자기 홀로 뒤덮고 싶은 사회가 아니라 도리어 순응하고 싶은 사회입니다. 사람이란 가진 재산만 쳐다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배려를 받는 가운데 사는 겁니다.
즉 양반이 쌍놈에게 배려를 해줄 때에, 쌍놈은 결코 양반의 재산을 일부 양보받았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양반 되시는 분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았다는 그 관계의 돈독함이 더욱더 그 쌍놈으로부터 세상 살아갈 보람을 갖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요즈음처럼 가진 재산으로 가치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있는 사회의 전통과 문화에 즐거이 순응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본 겁니다.
그렇든 사회가 인간가 조밀해지고, 토지 중심으로 그 많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은 발달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물품들을 양산할 수 있었고, 그 여분의 물품들은 더 이상 전통이나 대자연에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질서체제로 유지될 필요성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즉 대자연의 것들이 비록 인류 공동의 재산이지만 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 열심히 땅을 경작하고 나무의 실과를 채집했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소득은 게으른 자가 결코 손대면 아니되는 배타적인 소유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유권은 신이 내린 노동권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기에 곧 그 소유권마저 신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자기만의 재산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국가나 왕이란 백성들과 법적인 계약 관계에만 맺어져서 사람들이 자기 노동권에 의해서 얻어진 소유권을 타인으로부터 부당하게 빼앗기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만 할 뿐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어떤 존경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자비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대세를 쥐고 있는 것은 공동의 대다수가 지지한 법 뿐입니다.
즉 법에 의해서 질서가 잡히고 법에 의해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로소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왕 제도란 명분이나 명목으로만 남아 있지 실질적으로 아무런 실권이 없습니다. 실권이란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그들로부터 법적으로 위임받은 대목만 집행하는 전문 국가 공무원이나 관료들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로 제대로 치안이나 국방이나 조세제도를 운영못하면 언제든지 사유재산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바궈치기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미 운명처럼 익숙해진 민주주의제도란 실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준 정치제도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들이 신의 굴레로부터 해방하고자 시도해서 만들어진 정치 제도입니다. 이 정치 제도 또한 추상적으로 머물지 않고 실질적으로 효과있는 행사되려면 민주주의 제도만 덜렁 남아있어서는 아니되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란 미래의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상품 유통에다 돈을 상품처럼 유통시키는 방식을 말합니다. 즉 교환용으로 쓰일 돈을 가지고 돈 자체에 무슨 사용가치가 특별히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시장 내에서 퍼지게 하는 방식입니다. 즉 상품의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 자체의 증식을 위해 돈을 굴리는 경제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해 더 이상 존경과 권위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자비심이라든지 섬김이라는 것이 사회를 지배할 수는 없고 자본의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본의 증식에 방해되느냐를 놓고서 사회가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런 인간 사회를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인정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이사야 53:10-11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은 저주를 대신 받아내신 분이십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원칙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상과 다릅니다. 자신이 노동한 것은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만 가져가는 사회와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처럼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품고 있는 소년이 하나님의 뜻이 되어 존경받는 왕이 된다할지라도 인간의 죄성은 그 소년에 대한 자비를 곧장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왕되심을 우리가 그냥 쉽게 잊는다면 우리가 멸망의 자식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의 사랑에 굴복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듣는 태도
전도서 5:1-2
[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 담박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전이란 말씀을 전하는 공간이다는 사실과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장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기껏 땅에서나 유통되는 사고방식에 불과하지 결코 하늘 나라에서도 통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냥 잠잠하기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될까요? 유대교인들이나 아니면 육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은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논리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과연 잠잠하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잠잠해야만 할까요? 하박국 2:20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잠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문제는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 땅에 등장하며 어떤 식의 잠잠함을 요구하느냐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오늘날 예배당을 자신의 성전이라고 간주하실까요?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예배 드릴 때 조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잠잠함’이 새로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0:38-42에 보면,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태도는 세상적으로 통하는 소위 ‘귀한 분 대접하기’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성전이 무엇이며 그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어떤 식으로 잠잠해야만 하는가를 표준적인 양상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 듣기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미처 알지 못하는 귀한 하늘의 소식을 예수님을 통해서 듣고 싶어 한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마르다는 예수님이 단지 자신의 정성과 성의를 받아주시는 분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마리아의 태도는 세상적인 규범에 비추어볼 때 별로 칭찬받지 못할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마리아를 꾸중하시기 보다는 칭찬하십니다. 즉 ‘잠잠함’이라는 의미가 단순히 입 다물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죄인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9:4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당연하게 주님 앞에서 죄인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고백을 뜻합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죄인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토나 티를 잡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내가 주님 만나서 죄인에서 의인으로 벗어나려고 하는데 이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마저 죄란 말입니까? 이 노력을 발휘하겠다는 시도가 남이 아니라 나 본인에게서 나오고, 그 나옴이 귀한 일이라면 어떻게 제가 전적으로 주님 앞에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따지고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 자체가 주님 앞에서 ‘잠잠치 못한’ 건방진 태도로서의 죄인 것입니다.
아예 죄인됨을 기정 사실로 여기고 주님을 대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사상이 아무리 깊고, 장엄하고 고상하고 귀하다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땅에 속한 생각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3:31-32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23-24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속했다는 말은 단순히 땅에서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것에다 덧붙이는 새로운 지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적으로 땅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과 대비가 되고 반대되는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그냥 잠잠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이기에 잠잠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서 9:19-23에 보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로마서 11:35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께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차이점을 알고 자기 죄를 안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잠잠해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말
전도서 5:3-7
[3]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6]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하나님께 경외한다는 것을 설명하다면 꿈이 많고 말이 많은 경우와 대비시킵니다. 즉 진정 하나님께 경외하려면 꿈이 적어야 하고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경우의 대비가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낯설어 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경외하는 것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연관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말이 많다는 것은 인간이 나름대로 자기 포부와 계획을 많이 생산해 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 제시하는 많은 계획이 실상은 하나님이 주신 뜻을 못마땅하다는 의사표시일 수가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그렇게 믿덥지 않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지루해서 기다릴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독자적으로 계획을 하는 편이 속 편하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모독하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감사하고 만족 못하고 자신이 따로 생각해놓은 세상이기를 꿈꾸는 것, 이런 모습은 도저히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교회에서 아뭇 소리 안하고 입만 꽉 다물고 있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일까요? 무게있게 처신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태가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을 무겁게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요 많이 많이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처신하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우리 힘으로 이 말씀을 이룰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자체적으로 한계와 위반자로 살아가고 있는 처지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즉 우리는 끊임없이 꿈들을 지어내고 그것들을 입을 통해서 남에게 발설하므로서 하나님에로의 경외하심을 훼방하는 어리석은 자로 처신하고 있음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에서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라는 대목이 이 점이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입을 통해서 쏟아낸 모든 것들을 과연 그 지킬 위인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경외하심을 방해한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33-37에 보면,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경외하심에 대해서 인간의 계획이라든지, 맹세라든지, 다짐이 들어갈 자리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에게 이미 경외가 된 사항을 그냥 수납하고 은혜로 동참받게 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말을 안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전부 다 성취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성에서 인간들이 아예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홀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안에 들어있을 경우에만 구원되는 겁니다. 인간이 만약 예수님 안에 있을 경우에도 인간은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그리스도 밖에서나 있을 수 있는 말을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쳐주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을 많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에 관해서 말을 꼭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3:1-3, 과 6-10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혀에게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겁니다. 언어가 이런 역할을 하는 경우는 예수님의 복음에 관한 내용 뿐입니다. 소위 남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사람은 엄중하게 그리스도 복음에 정확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한 내용을 마치 진리나 계시처럼 가르친다면 그 혀에서 나오는 말의 가르침으로 인해 듣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진정한 축복도 예수님의 복음에서만 나오고 진정한 저주도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서만 지정됩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우기만 자신이 느낀 것,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오 진리인 것처럼 떠벌이기 마련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계시, 다른 복음, 다른 진리가 유포되면서 사람들을 혼란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는 남들보다 더욱 무섭고 엄중한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하라는 겁니다. 즉 참된 성령을 받은 자는 가르치는 자들이 복음으로 전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잘 판가름하게 됩니다.
따라서 거짓으로 가르치면 당연히 반발하게 될 것이고, 이 반발에 대해서 소위 선생이라는 인위적 권위를 가지고 그 사람을 핍박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발 그리스도의 복음 위주로 말을 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복음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도시의 모습
전도서 5:8-9
[8]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9]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오죽했으면 성경에서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니라’라고 되어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대할 때 기대고 의지할 대상으로 상대방을 보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실망하고 낙담하는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가 ‘제발 사람믿지 말고 심지어 네 자신도 믿지 말라’라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대로 표현하자면, ‘높은 자보다 더 높은자’입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를 믿지 않게 되면 자연적으로 낮은 시선으로 자기 주변의 사람을 훑게 됩니다. 혹시 자신이 만만하게 이용해 먹을 어리숙한 인간들이 없나하고 먹이감 찾듯이 찾게 됩니다.
사람들이 흔히 남들로부터 이용당했다고 불평하지만 실은 은연 중에 자신도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남들로부터 학대받도록 조치하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들을 학대하고 있음을 우리보고 깨닫기 하기 위함입니다.
즉 자신이 옳다고 인정받기 위해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를 나간다든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잠재적으로 얼마나 이기주의며 그 이기주의로 인하여 타인들과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많은 욕을 얻어먹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낮은 시선에서 낮은 안목가지고 세상이 더럽다고 판정내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더러운 세상에 뒤지지 않는 더러움을 품고 세상을 살아옴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 이 세상이 편하게 살도록 방치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이제는 옆으로만 보는 시선을 위로 보게도 하십니다. ‘높은 자 위의 높은 자’까지 관계를 맺는 사람이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예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우선 창세기 42:1-5에 보면,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 만하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십 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 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 아들 요셉이 여전히 죽은 인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마 살아서 애굽에서 큰 권세가 되었는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야곱은 그저 그냥 약속의 땅에 죽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방적인 야곱의 뜻은 하나님에 의한 계속적인 가뭄으로 인하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기 뜻을 꺾고 양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비로소 거기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을 산 채로 만나게 됩니다. 만약 야곱이 살던 땅에 기근이 없었더라면 그는 한발국도 옮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양식 구함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구함과 하나님의 약속이 일관성있게 진척됨을 실감하는 감격을 야곱은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거기에 사르밧 과부가 나옵니다. 너무 오랫동안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들어서 그녀는 마지막 양식을 입에 털어넣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는 그 과부를 도와주기는 커녕 그 마지막 남은 양식까지 자기가 홀랑 먹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는 그 과부는 진짜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목숨을 지탱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그릇들을 모아놓아라고 하고서는 그 그릇보다 참기름을 가득 넘치게 해서 그 참기름을 팔아서 기근 때까지 그 과부가 굶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서 이야기가 끝나는게 아닙니다. 후속편이 재미있습니다. 갑자기 멀쩡하던 자기 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죽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엘리야에게 고마움을 갖던 그 여인의 마음은 분노로 급변했습니다. 엘리야를 자기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하는 나쁜 사람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미 죽었던 그 아들마저 살려냅니다. 이렇게 해서 전에 과부의 그릇에 주었던 참기름이 단순히 참기름이 아니라 곧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의 징표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여 살린 것은 단순히 그들을 배불리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 없는 인간은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의 경우나, 엘리야의 경우나 모두, 이 세상에서의 힘든 생활을 통해서 참된 생명은 이 세상 외부에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는 일들입니다.
세 번째로 언급하고자 하는 예는, 야고보서 5장에 나오는 예입니다. 야고보서 5:4, 7-11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에게 욥의 인내와 주님의 낮아지심을 온 몸으로 실감나게 하시려는 겁니다. 우리는 도화지와 같습니다. 도화지까리의 가치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도화지 위에 무슨 그림을 남기느냐 하는 것은 ‘높고 높은 분’의 몫입니다. 그 분으로부터 왕 조차도 도움을 받을 정도니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하신 일을 그냥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만족
전도서 5:10-12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5: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전 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기쁨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족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세상의 무슨 요소가 이런 기쁨을 뺏아가고 마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만족을 따로 챙겨보겠다는 의도 때문입니다. 돈으로 인한 만족은 인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행함으로 인하여 마감되는 만족이라서 항상 여백이 남고 공백을 남깁니다.
이 공백의 허전함을 인간이 무슨 수를 다 써도 채울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는 추락하는 중력을 느껴야 합니다. 즉 한없이 한없이 추락하는 가운데서 그 뚝 떨어진 바닥에서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한 기쁨이 얼마나 실제적인 기쁨인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진작 추락할걸! 진작 높은 곳에서 미끌어질걸! 사람이 만족을 채우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진정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아예 만족을 채워나갈 필요조차 없는 인생이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생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선택하는 인생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자기 본성과 사회가 만들어주는 힘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뭔가 갖지 아니하면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마련입니다. 따라서 예부터 사람들은 소유가 행복의 척도였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행복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인생을 통해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솔로몬왕은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온갖 은과 금으로 만든 것들로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은이 돌처럼 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은과 금이 솔로몬의 영혼을 완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추락했어야 했습니다. 남들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깊게 떨어져야 했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만족이란 돈과 상관없는 식으로 주어지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인간사가 갖고 있는 한계를 말해줍니다. 은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진정한 만족과 행복에 대한 해답은 신약 성경에서 와서 풀릴 수 밖에 없습니다. 돈과 상관없이 인생의 만족은 어디서 오는 가를 말해줍니다.
고린도후서 6:9-10에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가진 것일까요? 최고의 부자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져서 더 이상 불만족이 생길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오로지 미흡함만 가득 차 있다는 뜻인데 어떻게 미흡함이 곧 만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에 해답은 고린도후서 8:9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부요한 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요한 분의 한 식솔로서 초청된 자는 자동적으로 부자집안 사람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마치 문어머리에 달린 문어발이 따로 놀고 있으면 그것을 결코 문어하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진정 문어발이라는 문어머리가 가진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요한 분이시기에 성도는, 비록 아무 것도 갖지 않더라도 이미 부자인 겁니다.
꼭 많은 재물을 개인 소유로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부자 집안 사람이라면 부자 맞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재산이 곧 그 사람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란 현대인들이 취사선택에서 결정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의 가치라는 것은 시장에서 발생됩니다.
타인이 애쓰고 수고한 것을 자기 것으로 전환시키는 곳이 시장입니다. 갖가지 교환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노동보다 훨등하게 많은 수익을 챙기는 곳도 바로 시장입니다. 어떻게 벌었던간에 자신이 벌어드린 재물은 완벽하게 자신만의 소유라고 취급해주는 곳도 시장입니다.
이 시장이 발달해서 근대국가가 발전했습니다. 소위 칼빈주의에 근거해서 근면, 검소해서 확보한 재물은 절대적으로 그 본인의 것으로 간주해주는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능력의 차이가 난다는 요소를 소홀히 취급하여 가진 자는 더욱 가지고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길 판입니다.
이러한 불합리를 보완하기 위해서 기회를 균등하게 주지만 그러나 인간들의 타고난 능력들의 차이들로 인하여 발생된 가난에 대해서는 무한대로 동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예 일어날 기력조차 없는 자들에게는 게으름피지 않을 정도의 도움을 제공해주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돈을 중심으로 인간의 가치에 서열을 매기는 방식의 이야기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도는 모두 한 성령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바있습니다. 그렇다면 혈육에 의해서 조성된 가족보다 예수님의 피을 믿는 가족들이 더 영원한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회를 배척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교회 문제를 밀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시장에서 형성된 개인주의적이고 개별주의적인 성향이 그대로 교회까지 이어져서 그러합니다. 머리가 없는 문어발은 결코 문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고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면,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돈의 미흡으로 인한 불만족성은 없어야 합니다. 이미 부요한 자로서 헌금해야 합니다. 과부의 동전 2개의 헌금은 예수님보시기에 천하의 부자가 낸 막대한 헌금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과부가 천하의 어떤 부자보다 부자라고 간주하셨기 때문입니다. 과부의 만족은 오로지 예수님이지 결코 자신이 낸 헌금 액수와 무관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부자되었기에 더 이상 자신을 가난한 자로 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더라도 부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불만족적 습성으로 인해 예수님의 만족을 훼방하지 않고 동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폐단
전도서 5: 13-17
(전 5: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전 5: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전 5: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전 5: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전 5: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사람이 낭패라고 여기는 것은 그만큼 선입견을 이미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될 것이 마음먹은대로 안되느냐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낼 때 낭패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서 ‘폐단’이라고 간주되는 사례는 곧 인간은 뭘해도 항상 자신만의 선입견을 포기 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재산을 가진 소유주가 자기 재산을 본인이 지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달리 대안이 있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통해서 폐단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폐단은 폐단대로 나온다는 것이 기이한 현상입니다.
그 원인을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에 ‘벌거벗은 채로 나왔다’는 겁니다. 이 점을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비록 인간들은 잊더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말씀대로 인간들을 벗거벗은 채로 죽게 하신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끝까지 갖고자 하여도 용납지 않고 아무 것도 못가진 채 죽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폐단’이란 하나님 생각과 인간과의 생각에 틈이 발생한데서 오는 폐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인간을 상대로 일을 추진하지만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 뜻에 준해서 평가해서 곡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 말씀대로, 평생토록 인간들은 번심과 근심과 병으로 긴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은 인간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인간은 살면서 늘 허무나 폐단이 등장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신약에 와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애써봤자 폐단과 허무를 남기지만 신약에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단, 그 과정에서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을 절감하게 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7-8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지키십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이 말씀을 도저히 지킬 수 없었노라 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족한 줄로 아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제공하시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먹는 것과 입을 것’으로 도저히 만족 못하겠다고 버티는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이 우리 내부에서 충돌하면서,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을 꺽어버리십니다. 누가 주님을 감히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을 이길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적용시키겠다는 것을 막아 설 자가 없습니다. 취소시킬 자도 없습니다. 물론 남들 보기에, 불신자들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도 이런 투의 사상을 펼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서 말씀에서 이 디모데전서의 말씀 사이에 성도라는 특수한 신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겉보기에 불신자들도 ‘무소유 사상’이라는 유사한 생각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변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동의할 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무소유적인 삶을 사는 그 본인을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무소유 삶’을 산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이나 해탈을 위해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3:5-7에 보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목회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는, 자기 마음먹은대로 목회나 전도가 잘 안되면 짜증과 낙담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니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간주하면 안되는 겁니다.
아볼로나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런 인간으로 유지시켜 주십니다. 그들은 단지 주님이 벌리시는 일에 동참시킨 자이고 주님에 의해서 다루심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더욱 깊이,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하게 됩니다.
왜 그들이 그래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3:21-23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인조차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 포함된 내용입니다. 왜 자랑하지 말라야 할까요?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유로 이미 넘겨와 있는 이 현실성을 무시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세상을 넓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좁게 보면, 자신의 구역과 영역 싸움에 몰두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아 절대성에 입각하여 살게 되면 이것은 곧 주님의 뜻과 차이나기에 ‘폐단’을 낳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분은 따로 계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만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닌 자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분복
전도서 5:18-20
(전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 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 5: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사람의 인생이란 자신의 해석한 해석물에 해당됩니다. 사람은 늘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해석내리고, 성공이다든지 실패라든지 단정짓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자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현재 시점에서 해석의 종결을 선언하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자입니다.
이 사람은 따지고 보면 극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만사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자기에게 들이닥치지도 제대로 미리 알지 못하면서 마치 세상을 다 알고 있는양 제멋대로 해석의 종결을 단정해 버린 경솔함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것을 최종 해석으로 단정지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렇다면 최종 진리는 어디서 얻어지는 겁니까?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세상은 이 성경말씀의 범주를 일체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최종 해석은 성경 안에 다 감겨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히 우리보고 뭘 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는 길로 우리가 갈 수 없는 신세임을 통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분복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해석할 권한이 없음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쉬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해석하지만 그 해석을 의지하거나 믿거나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미 다른 해석이 수립되었고, 또한 그 해석에 준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마당에 스스로 자기에게 따로 해석을 가하는 것은 곧 교만이요 자살의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받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청한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몫의 인생일 뿐입니다. 즉 흔히들 나의 인생이 잘 되기 위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옳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비현실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행하셔서 늘여주시는 인생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주시고 또한 쭉쭉 늘여나가시는 인생이 ‘나의 인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에서 우리네 인생은 그 자체로 분복입니다. 인간들은 제각기 피자 한 조각조각들을 각자 부여받은 것처럼 각자의 인생을 분여받은 것입니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된 것도 각자의 몫의 피자 조각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상대방의 주인이 아니고, 또한 상대방이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의 주인이요 생산자는 따로 존재하십니다. 피조 조각은 전체가 아닙니다. 그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체로 행세해야 될 과중한 업무를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일부이기를 우리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성경 전체는 ‘새언약’에 의해 묶여져 있습니다. 새언약이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수용한 통로입니다. 새언약의 성취자는 나도 아니요 여러분들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 새언약의 가치로 인해 모든 가치는 무가치로 들통나 버렸습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인생들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찾을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각자들은 결코 새언약의 성취지가 아니다는 사실에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도 우리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보면, 우리 마음 속에 어두움 속에서 샛별이 떠오르는 듯, 이해의 새로운 관점이 떠오르게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진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해석과 육적 해석으로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육적 해석으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님은 본인이고 책임자도 본인이고 관리자도 본인이기에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의식이 피어나면 필히 ‘남(타인)’이라는 의식도 동시에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되면 그 때부터 이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인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어릴적 학과를 파하고 같은 또래는 아동들이 한데 모여, 동네 공터에서 누가누가 싸움을 제일 잘하는지 결정짓는 주먹다짐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비록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촌스럽게 주먹의 힘으로 우열을 논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학력이나 직장의 질이나 가진 재산이나 직장에서는 승진 속도나, 소유된 권력의 강도나, 친구 자랑이나 배우자의 사회적 품위나 신체의 젊음이나 건장함을 가지고 우열을 논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교 의식과 경쟁 의식은 결코 복을 누리는 식의 인생은 아닙니다. 그저 힘들게 자신의 위산과 자존심을 파수해야 하는 업무을 부여받는 것 밖에 안됩니다. 오뉴월의 처마 밑에서 졸리듯이 길게 하품하는 개처럼 그런 여유로움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어느 이는 50살이 채 못된 나이에 벌써 4급이라는 고급 공직에 근무했지만, 자신의 가치에 흠이 되는 작은 일이 발생되니 가차없이 사표를 내고 그 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것이 과연 인생을 즐기기 위한 분복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위신은 타인 앞에서 타인이 보란듯이 스스로 지키겠다는 심보입니까?
인생에 있어 영원한 의미는 새언약의 몫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이미 새언약으로 완료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함께 십자가 달려죽은 강도가 낙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에게 있어 그것보다 더 고귀하고 대단한 인생의 가치가 또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해석을 나 자신이 내리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해석자는 확정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신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분복이라고 여기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원수가 되지 않고 적으로 달려들고 못살게 굴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