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폭(江幅) 48 미터. 좁다. 그러나 이 개천 같은 물길은 지옥의 묵시록이자 지옥이 끝나는 경계선, 그리고 지옥 탈출의 출발점이다. 압록강 변 혜산진. 거기 지옥의 주민들이 숨어든다. 무리 꽃제비, 쌍(雙)제비, 어린 제비, 노(老)제비. 강을 건너 만주로 넘어가려는 필사의 행렬이다.
오래 전 강을 건너던 일가족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살아남은 아들은 혼자 빙판을 건넜고 어린 여동생은 주민에게 구출돼 그 집에서 자랐다. 그 여인이 돈을 받고 도강(渡江)을 안내하는 야박한 ‘꾼’이 되었다. 그녀는 몰랐다. 그녀의 오빠가 자신을 구출하려고 다시 입국했다는 것을. 오빠 역시 그녀를 몰라본 채 다시 도강 팀에 합류했다. 그녀는 도강을 시켜준 다음에야 오빠가 빙판에 떨어뜨리고 간 가족사진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총탄에 쓰러진다.
장마당에서 “동생을 200원에 팝니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서있는 소년 꽃제비.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슬픈 군인, 그는 얼마 전 중국에 왔다 갔다 하는 처녀를 발견하고서도 눈감아 주었다. 그는 어린 소녀가 강아지를 따라 48 미터를 반쯤 건너자마자 동료 군인의 총탄에 맞아죽는 것도 목격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자신이 도강을 묵인해 주었던 처녀가 빙판에 시신으로 누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를 돌무덤으로 덮어주면서 그는 결심한다. 넘어가자, 저 48미터를.
어찌 나치의 아우슈비츠만 이야기 하는가? 어찌 나치 점령 하의 폴란드 유태인들의 고난만 이야기하는가? 그런 지옥은 한반도,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다. 이 사실과 진실이 어제(7/9) 영상물 속에서, 여의도 IFC 빌딩 지하 CGV 상영관에서 시사회로 선보였다. 그것을 보는 마음은 자괴(自愧)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과 저곳이 너무나, 너무나 잔인하게 다르지 않은가? 왜 우리는 저 죽음, 저 슬픔, 저 아픔, 저 핍박, 저 고문(拷問)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가? 아니, 하지 않는가?
우리는 게오르규의 ‘25시’를 말하고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는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시베리아 유형(流刑)을 알고 있고 게슈타포의 학살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도 아닌 혜산진 압록강 변의 생생한 인간 참상에 대해 알고 있는가?
우리에겐 인간 보편의 양심이 있다. 그 양심의 눈을 뜨고 저 강폭 48 미터의 빙판을 바라보자. 거기엔 삶과 죽음을 비롯한 인간실존의 모든 비극적 국면들이 벌거벗은 채 나둥그러져 있다. 그걸 보지 않은 채 먼 아우슈비츠만 말한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걸 보지 않은 채 “한반도 문제 어쩌고...” 하는 것은 더욱 죄스럽기까지 한 헛발질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거창한 철학을 이야기하지 말자. 인간은 정말 무엇으로 사는가? 굶주리고, 강 건너다 총에 맞아죽고, 붙잡혀 고문당하고, 곁에 있는 식구가 어느 결에 시체로 굳어진 것을 발견하는, 그런 일만 없어도 인간은 얼마든지 산다. 그 이상은 벌써 사치스럽다. 48 미터는 이걸 말해준다.
48 미터는 픽션이 아니다. 픽션으로 조립된 생생한 현실이다. 이걸 우리는 모르고 산다. 우리에게 그걸 ‘모를 권리’가 있을까? 우리에겐 그걸 ‘알 의무’가 있다. 우리가 한 조각 심장을 가지고 사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