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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김씨 및 가문의 전통
우리 광산(光山) 김씨(金氏)는 우리나라 대표적(代表的)인 가문(家門)의 하나이다. 지금도 흔히 광 김(光金)하면 알아주는 집안으로 꼽는다. 특히 사계선생(號:沙溪,이름:長 生:1548~1631)자손(子孫)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광산 김은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이기 보다는 대대(代代)로 학석(學碩), 학거유(學巨儒 :유학의 높은 학문)를 많이 배출한 명문(名門)이다.
이러한 훌륭한 가문이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혹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자손들이 많은 것 같아, 이를 후손에게 널리 알리어 명문의 후손답게 훌륭한 사회 일원으로 살아간다면, 조상(祖上)에도 떳떳하고 후손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옛 선조(先祖)들의 생활(生活)과 활동(活動) 범위는 오늘 날과는 달리 극히 제한적 이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러므로 삶의 방식 또한 원시적(原始的)에서 차츰 발전(發展)하여 사회생활(社會生活)이 시작(始作) 되었을 것이고. 여기에는 인간(人間)의 존귀(尊貴)함은 물론, 오늘 날과 같이 생존경쟁(生存競爭)이 극심(克深)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간상호간(人間相互間) 서로 믿음과 존경(尊敬)으로 예(禮)를 다하여 정(情)을 나누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조국(祖國)은 일찍이 중국(中國)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는 칭호를 받았듯이 예(禮)를 중시(重視)하여 나라의 안정(安定)과 질서(秩序)를 바로잡고 유학(儒學:공자를 시초로 하는 중국 고래의 전통적인 政敎一致의 學文)을 국시(國是)로 하여 이조(李祖) 500년을 내려오던 중, 일본(日本)의 침략(侵略)으로 36년간의 치욕의 통치를 받아야 했던 쓰라림을 겪어야 했고, 1945년 8월 15일 세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나라도 해방의 기쁨을 맞이했으나 남북이 분단되어 한민족끼리 전쟁도 겪어야했다.
나라의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 남한은 급속한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 세계 경제 대국(10위권)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좁은 국토(國土)에 많은 인구 속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 심리로 인간관계가 메마르고 도덕과 예의가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인간의 근본(根本)인 자기의 뿌리를 찾아 그 뿌리를 바탕으로 잘못된 사고방식을 바로 잡아야 하겠다.
특히 광산 김 후손(後孫)이라면, 누구나 훌륭한 조상들의 업적을 배우고 익히어 현재(現在)와 미래(未來)를 향(向)하여 더욱 빛나는 가문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
우리 광산 김 씨는 “신라국의 왕자로 태어난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난세를 피하여 지금의 전남 담양군 평장동(全南 潭陽郡 平章洞: 그 당시는 武珍州 西一洞)에 은거하여 자연(自然)을 벗 삼아 살았다” 한다. 대개 시조에 대한 기록은 거의 확실성(確實性)이 없음은 성씨(性氏)의 유래(有來)가 그러하다. 우리 김 씨도 마찬가지 인데, 다만 시조로부터 8세(八世)의 충정 공(忠貞 公) 의원(義元: 1066~1148)의 묘비(墓碑)에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시조 후(後) 그 후손들이 고려조(高麗祖)에 와서 8명의 평장사(平章事: 고려 동반 직으로 中書門下省의 정2품 벼슬)가 배출 되어 후세 사람들이 서일동을 평장동이라 불렀다 한다.
광산 김 씨의 본관(本貫;貫鄕)은 고려 태조(왕건: 918~943)가 시조 김흥광을 광산 부원군(光山 夫院君)에 봉(奉)하게 되어 후손들이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光山은 光州의 별호다).
이조(李祖)에 들어와서도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5명(克成: 1498년燕山4년戊午에 급제하여 우의정, 國光:22世 1441년 문과 좌의정. 陽澤: 1743년 문과 영의정, 相福: 1740년 문과 영의정, 熹: 1773년 문과 우의정)과 대제학(大提學: 弘文館, 藝文館의 정2품 으뜸벼슬로 內府의 經籍, 文翰에 관장한 일을 담당, 이조 벼슬 중 가장 명예로운 직) 7명, 익희(益熙: 29世 1610~1656), 만기(萬基: 30世, 1633~1687), 만중(萬重:30世),진규(鎭圭:31世.만기의子.1658~1716),양택(陽澤:32世,진규의子1720~?),상현(尙鉉:1811~1890,36世 ) 영수(永壽: 37世.고종때,1810년경) 왕비(王妃) 1名(김만기의 女로 19代 숙종 妃로 인경왕후)을 배출 하였으며, 문과 급제자는 265名으로 우리나라 성씨(性氏) 中에서 7위(位)인데, 전주이씨,안동권씨,파평윤씨,남양홍씨,안동김씨, 청주한씨 다음이다.
이조 중기(中期) 예학(禮學)의 태두(泰斗: 泰山北斗의 준말로서 그 방면에서 썩 권위가 있는 사람)요, 성리학(性理學:중국 송(宋:920~1279)나라 때 유학(儒學)의 한 계통으로 본연의 성(性)을 발견하기 위(爲)하여 물(物)에 대(對)한 이(理)를 참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說))의 대가(大家)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광산김씨의 정신적인 지주(支柱)다.
그의 아들 김집(金集)과 함께 유학(儒學)의 입문(入門)이요, 맺음이라 할 예학(禮學)을 집대성(集大成)한 대 학자(大 學者)로서 사후(死後)에 동국(東國:중국에서 우리나라를 호칭) 18현(賢)에 아들 김집과 함께 추앙되어 문묘(文廟: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누렸다. 동국 18현이란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와, 같이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이 깊어 온 백성이 나라의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18명의 명현(名賢)을 말하며, 문묘배향(文廟配享)은 일문일대(一門 一代)만이 아니라, 대대손손(代代孫孫)의 영광(榮光)이며 자랑이요, 더욱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18현(賢)중 한 가문(家門)에서 2名이 배향(配享)되기는 은진(恩津) 송(宋)씨와 광 김(光 金)뿐인데, 부자(父子)가 나란히 배향되기는 광 김(光 金)뿐이고 송씨(宋 氏) 2名은 모두 김장생(金長生)의 수제자(首弟子)들이고 보면 부자(父子),사제(師弟)가 나란히 함께 문묘배향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샘이다. 광산 김은 이조(李祖)에서 대제학 7명을 배출 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김장생의 자손이다. (참고로 이조에서 대제학 7명을 배출한 가문은 왕족 전주이씨와 연안이씨가 있다).
특히 김장생은 이율곡과 송 구봉(호: 익필)의 수제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가(大家)이다. 사계 김장생은 서울 정동(貞洞), 현재의 법원 청사 부근에서 태어나 13살 때 송구봉의 제자로 입문(入門), 예학(禮學)을 전수 받아 우리나라 유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난세(亂世)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 잡는 예(禮)로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김장생 예학의 근본이다. 장생(長生:1548~1631)의 생존기인 16세기 중렵 부터 17세기 중렵 까지는 사대사화로 정쟁(政爭)이 끈일 날이 없었고 중종, 인조 반정(反政:나쁜 임금을 폐하고 새로운 임금을 세우는 일)에 이어 임진왜란(1592~1598)과 정유 제란(1597), 정묘호란(1627년), 등 외란(外亂) 마저 겹쳐 정치, 경제가 극도로 혼란했고 사회(社會)의 부조리와 가치관이 흔들려 혼미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는 학문을 바탕으로 현실에 알맞은 구체적인 윤리강령과 행동 규범인 예학(禮學)을 발전 시켰던 것이다.
김장생은 이조중기 광해군의 횡포가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충남 논산 군 연산면 고정 리 로 내려와 초야에 묻혀 은거했다. 장생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우암 송시열(1607∼1689), 동춘 송준길(1606~1672) 등 후학을 길러 내었다.
광김(光金)은 고려의 패망과 이조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꾸준히 가문의 번영을 누려온 것은 “禮를 근본으로 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 하는 가문의 생활 철학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광산 김 후손들은 이러한 조상의 얼을 깊이 새기어 예의 바르고 정의롭고 깨끗한 인격 수양으로 훌륭한 후손이 되길 바란다.
시조 이후 선조들의 거주지는 고려, 이조를 통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경기 고양과 서울주변으로 살아 온 것 같고, 이조 개국(開國) 공신(貢臣) 17世 천리(天利)의 둘째 아들 무(務:제용소감)가 안동으로 내려와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다.
2005년 10월 일 ~ 35世 石橋 魯慶 書 ~
시조 (始祖) 흥광 (興光) ㅡ 825년경 출생 예상.
신라 국 김씨(新羅國 金氏: 경주김씨)의 왕자(王子)로 국말(國末)에 태어나 나라가 어지러움에 무주(武州) 서일동(西一洞)에 우거(寓居)하니 이곳이 후에 광주 평장동(光州 平章洞)이며 광산 김 씨가 이에서 비롯되었고 자손이 연이어 8대에 걸쳐서 평장사(平章事 :고려 중서문하성의 정2품 )를 지냈으니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 일컬었다. 삼가 살펴 보건대 왕자 공(王子 公)의 휘(諱)는 흥광(興光)이니 성덕왕(聖德王:33대왕)의 휘자(諱字)와 동일(同一)하며 8世 충정 공 의원(忠貞公 義元)의 묘지 비문(墓地 碑文)에 난세를 피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고, 또 길(佶:3世)로부터 그 윗대는 구속(舊俗:낡은 풍속)에 족보(族譜)가 없으니 모두 실명(失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왕자공도 아울러 실명했음이 분명(分明)하고 모두라는 표현(表現)으로 미루어 단지 1,2대만 실명 된 것이 아님을 짐작 할 수 있다. 45대 신무왕자(申武王子), 49대 헌강왕자(憲康王子)라고도 하는데 모두 다 증거(證據)한바가 없고 또한 사승연대(史乘年代)와 지문사실(誌文事實)등이 일치(一致)되지 않으므로 감히 모(某)왕의 아들이라 하지는 못하고 후일의 정확한 고증(考證)을 기다리기로 한다.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옛 광주 평장동) 76번지 산(山)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享祀)한다.(45대 신무왕의 3자가 확실 할 듯함.)
二世 식 (軾) ㅡ 850년 전후 출생 예상.
각간(角干)이니 곧 평장사와(平章事)와 같은 질(秩)이다.
삼가 구보(舊譜)를 살펴보면 왕자공의 자(子)는 식(軾)이요, 식(軾)의 자(子)는 길(佶)로 되어있으나 8世 충정공 의원(義元)의 묘비에 길(佶)로부터 이상은 모두 실명 하였다고 하였으니 모두라는 뜻은 1,2대(代=世)만이 실명된 것이 아님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세대가 현원(玄遠:까마득히 멀어서)하고 문헌(文獻)이 무미(無微:없거나 아주 작음)하니 기묘 장성 대동보(己卯 長城 大同譜)에 준(準)하여 식(軾)과 길(佶)의 두 분 휘자(諱字) 상(上)에 자(子)를 쓰지 않고 세수(世數)만을 쓰고 길(佶)자(字)는 새로 기층(起層)하여 삼가 후일의 고증(考證)을 기다린다.
三世 길(佶 ? ~ 918 ~ 934 ~ ?) ㅡ 875년경 전후 출생 예상.
삼중대광 사공(三重大匡 司空)이니 고려 태조(高麗 太祖, 918년) 통합시(統合時)에 기위지책(奇偉之策)으로 왕업(王業)을 도와 이룩하여 공신(功臣)의 칭호(稱號)를 받았다. 중국사서 “책부원귀”에 휘 길 선조께서 934년 8월에 고려국의 사신으로 중국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개국 공신 (신라 BC 57~935년. 878년간 지속).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 문과 품계로 정1품, 좌복야(左僕射)는 직책(職責)으로서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종1품인 상서령(尙書令)이 있고, 그 밑에 정2품인 좌복야, 우복야가 있다. 후에 벽상삼한삼중대광이다 ※ 射(쏠 사, 벼슬 이름 야, 맞칠 석, 싫을 역)
사공(司空) : 고려 동반(문관) 직으로 3公의 하나로 정1품 (三空 : 太衛. 司徒. 司空 이다)
시호(諡號) : 사(死) 후, 생전의 행적(行蹟)에 의하여 지어줌
四世 준(峻) ㅡ 905년경 전후 출생 예상.
삼중대광 좌복야(三重大匡 左僕射)이다. 준(峻)은 구보(舊譜)에 순자(順字)였으나, 충 정공(忠貞公) 의원(義元)의 묘비(墓碑)에 의(依)하여 고쳐 기록 하였다.
五世 책(策: ~ 964 ~) ㅡ 934년경 전후 출생 예상. 고려 광종(光宗: 949~975, 4대) 15년 갑자(甲子:964)년 3월에 한림학사(翰林學士)조익(趙翌)을 상시관(上試官: 과거 시험관)으로 하는 과장(科場)에서 뽑혀 등제함에 임금이 천덕전(天德殿)에 나가 어사연(御賜宴)을 배풀고 특히 의봉문(儀鳳門)을 열어 말을 타고 나가도록 하였다. 후에 좌복야(左僕射)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射 : 벼슬이름 야.
고려 광종(949~975,4대) 9년(958년)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였고( 9, 11, 12, 15, 17, 23, 24, 25년) 그 후로 8번의 과거를 실시하였으니 5世 김책(金策)은 고려에서 네 번째 치른 과거 에 장원(광종 15년, 964년)했던 것이다. 김책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 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의 정3품 벼슬로 판선. 도서 편찬을 맡아 보는 일.
※서희(徐熙:942~998) :조익, 김책과 함께 3대 문인(文人)으로 이름 난 사람.
六世 정준(廷俊: 벼슬기간: 1035~1059, 24년간) ㅡ 1남 1녀, 990년경 출생 예상.
고려 정종(靖宗: 1034~1046, 10代) 원년(元年) 을해(乙亥: 1035)년 정월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정6품)요, 6년 경진(庚辰: 1040년) 2월에 사부원외랑(史部員外郞) 승선(承宣)이며, 문종(文宗: 1046~1083, 11代) 3년 기축(己丑: 1049)년에 추밀원사(樞密院事)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요, 7년 계사(癸巳: 1053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며 9년 을미(乙未: 1055)년에 내사시랑(內史侍郞) 평장사(平章事)요, 13년 기해(己亥:1059)년 에 수사도 문하시랑평장사(守司徒 門下侍郞 平章事)에 이르렀다.
廷은 구보(舊譜)에 정자(貞字)였으나 忠貞公 義元 墓誌文에 依하여 고쳐 기록 했다.
※전중성(殿中省) : 고려 7대 목종 때 족속(族屬), 보첩, 등에 관한 사무 관청으로 문 종때 전중시(殿中侍)로 개정함.
어사대(御史臺) : 사헌부의 개칭 명으로 으뜸 벼슬은 어사대부(御史臺夫)며 정3품 벼 슬로 왕의 잘못을 간하고 백관의 과오를 규탄 한다.
승선(承宣) : 중추원의 정3품 벼슬.
상서도성(尙書都省) : 행정 기관의 최고 기관으로 6부(六部)를 감독하고 대정(大政) 을 총리 한다. 종1품의 장관 상서령(尙書令). 정2품에 좌우복야가 있다.
뒤에 첨의부(중서문하성과 합병 명칭) 상서성으로 개칭되었음.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 平章事): 내사문하성의 벼슬. 문하시중 다음 성종이 설치. 문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고침.
七世 양감(良監: 벼슬기간 : 1051~1086, 35년간)ㅡ 2남 1녀. 1020년경 출생 예상.
고려 문종(文宗: 1046~1083. 11대) 5년 신묘(申卯: 1051)년에 문과에 급제(及第)하여 경술(庚戌: 1070)년에 상서우승(尙書右承)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였으며 신해(申亥: 1071)년에 어사대사(御史臺史)가 되었고 임자(壬子: 1072)년에 태복경(太僕卿)이 되어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갑인(甲寅: 1074)년에 태묘(太廟:제왕의 위폐를 모신 사당)와 태학(太學:성균관)의 도표(圖表)를 모사(模寫)하여 돌아 왔다. (경전을 들여옴). 12월에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고 정사(丁巳: 1077)년에 중추원사(中樞院使)며 무오(戊午: 1078)년에 송(宋)나라 사신(使臣)이 올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의 직분으로 접반사(接伴使)가 되었고 신유(辛酉: 1081)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상서 병부사(判尙書兵部事) 겸(兼) 서경 유수사 주국(西京 留守使 柱國)을 하고 계해(癸亥: 1083)년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로 시정(時政)의 득실을 진주(陳奏)하였으며, 선종(宣宗: 1083~1094, 13대)3년 병인(丙寅: 1086)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로 다시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 하였고 5월에 판상서호부사(判上書戶部事)요 12월에 수태위(守太尉)로 누천(累遷)하여 수 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守 太保 門下侍中 監修國史) 종1품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안공(文安公). 화동서원(華東書院)에 철향(腏享)하다. 배(配)는 증(贈) 서해군(西海郡)대부인( 大夫人)최씨다. 父는 상서우복사중추원사(尙書右僕射中樞院事) 정하(廷嘏)다. 양경(良鏡)~? 良監의 弟. 자손미전(子孫未傳)
※ 화동서원: 문안공(양감)을 주벽(主壁)으로 전리판서 인우(仁雨: 光利의 長子).사온 승길(沙隱承吉:인우의子).매은 오행(梅隱五行: 승길의子)4선생을 봉향(奉享)하며 전북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교동에 있다. (享祀 음력, 3월.2일.正午)
尙書省:고려 때 백관을 총령(總領)하던 관청. 어사도성, 상서도성, 첨의부, 三司등 으로 개칭. 장관을 상서령, 다음을 상서 좌, 우복야,(정2품. 상서 좌, 우승 칭함)
상서(尙書):고려 정3품의 관직으로 6部의 수석. 성종 14년 어사로 개칭, 그 후 판 서, 전서로 개칭,( 6部는 호. 예. 병. 형. 이, 공, 이다.)
御使侍中: 어사도성의 으뜸 벼슬. 太僕侍 : 궁중의 승여(수례), 마필, 목장을 관장.
戶部尙書: 호부의 長 ,지부사, 시랑, 낭중 등이 있고 인구, 세금, 화폐 등을 관장.
中樞院使: 중추원의 종2품으로 밀직사사, 출밀원사로 개칭. 원사 아래 부 원사,
숙위를 장악 하던 관청. 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문하성의 종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 고려 때 중서문하성(중서성과 문하성의 합친 명 칭; 3성의 2성 합침)에 속하던 벼슬로 임금의 조칙을 발표 하던 곳. 내사문하 성의 문하시랑평장사를 고쳤던 이름. 후에 첨의찬성사로 개칭.
첨의부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통합하여 만든 명칭. 후에 도첨의사사로 개칭.
僉尉 : 의빈부의 정, 종 3품 벼슬.(왕자의 서출 녀 와 혼인한 사람에게 주는 벼슬).
감수국사: 고려 춘추관에서으뜸 벼슬(종1품)ㅡ국가의 역사 편찬하는 부서로 후중 추원, 추밀원, 밀직사로 바뀌었고 왕의 자문에 응하고 조명(詔命)을 맏음 태묘(太廟) : 왕의 위패를 모신 곳. 國子圖 : 공자의 사당이니 학교이다.
八世 약온(若溫: 1059~1140, 81세 생) 1남 1녀.
⑧의영(義英:장자) ~ ⑨○○ ~ ⑩위(位) ~ ⑪元義.
구명(舊名)은 의문(義文)이요, 字는 유승(柔勝)이요, 고려 문종(文宗: 1046~1083, 11代)13년 기해(己亥: 1059)년에 태어나 문과에 올라 인종(仁宗: 1122~1146, 17代) 원년(1122)년에 평장사 검교사도(平章事 檢校司徒)와 수사공 상주국(守司空 上柱國)을 지냈고 기미(己未: 1139)년에 수태전 문하시중 판호부사(守太傳 門下侍中 判戶部事)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여 경신(庚申: 1140)년 2월에 줄(卒)하니 82세요 시호(諡號)는 사정공(思靖公)이다(사정공파 중시조다) 공의 성품이 공검(恭儉)하고 겸정(兼正)하여 일찍이 부귀로 남에게 교태(驕態: 교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니 사실이 고려사 열전에 있다. 구보에 공의 형제 서차(序次)가 상위(相違)되어 충정 공 묘지에 의해 타정(打正)했다.
※ 檢校 : 고려, 이조 초기에 정원 이 외에 벼슬자리를 임시로 늘리거나 行公하던 일이 없이 이름만 가지게 할 때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이던 말. 교태(驕態):교만한 태도.
군기감(軍器監): 병기, 기치, 융장 따위의 영조를 맡아 관리 하던 곳.(군기시로 바꿈).
監察御使: 감찰사로 후에 고침. 시정 논란, 풍속 교정, 백관규찰, 탄핵 등 담당.
上柱國: 고려 첫째 등급의 훈위(勳位)로 문종 때 정2품으로 제정. 주서: 정7품.
將仕郞: 고려 종9품의 문관 벼슬. 主簿: 정6품~정8품. 給事:정9품. 녹사: 정8품.
비서성: 왕 측근에서 문서를 다루고 봉행하는 기관으로 長은 監이다.
三司使: 삼사의 정 3품 벼슬. 종 1품 판사, 정3품은 使, 종4품에 知司事, 副事정5품.
태자태사 : 동궁에 속한 종1품 벼슬. 恭儉: 공손하고 검소함. 兼正:올바름을 겸함.
판중추부사 : 중추원의 으뜸 벼슬 정2품으로 판추밀원사로 판밀직사사로 바뀜.
사헌부: 어사대, 금오대, 사헌대, 관찰사로 바뀜. 논집, 풍속교정, 규탄, 탄핵기관.
금오위: 고려6위의 하나로 상장군, 대장군이 통솔. 서반 관직으로 중랑장은 정5품.
의원(義元: 1066~1148, 82세 생) 3남 2녀(光中이 부친 의원 묘지명을 지음)
약온의 제(弟)로서 문종(文宗:1046~1083, 11代) 20년 병오(丙午:1066)년에 태어나 임술(壬戌: 1082,17세)년에 김근(金覲)을 상시관으로 하는 성균시(成均試)에 등과(登科)하여 문안공(文安公: 義元의 父)의 음덕(蔭德)으로 장사랑(將仕郞)과 군기시 주부동정(軍器侍 主簿同正)이 되고. 선종(宣宗:1083~1094, 13代) 무진(戊辰:1088)년에 술어도감 판관(戌御都監 判官)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이르렀고 예종(睿宗 : 1105 ~1122,16代) 4년 기축(己丑:1109,44세)년에 길주 관외(吉州 關外)에서 여진적(女眞賊)을 공격 하여 그 철갑(鐵甲)과 우마(牛馬)를 많이 노획 하였고 계사(癸巳, 1113,48세)년에 형부시랑(兄夫侍郞)으로 요동에 가서 아국(我國)에 조제(弔祭)한데 대한 사례를 하였다. 인종(仁宗:1122~1146,17代) 원년 계묘(癸卯: 1123)년에 예부시랑 지어사대사(禮部侍郞 知御使臺事)요, 병오(丙午: 1126)년에 호부상서 지추밀원사(戶部尙書 知樞密院事)요, 임자(壬子: 1132,65세)년에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삼사사(三司使)를 겸하고 금자광록대부 검교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檢校 太子太師)를 더하였으며 특진하여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 받았고 의종(毅宗: 1146~1170, 18代)2년 무진(戊辰: 1148)년 12월에 줄(卒)하니 향년 83세요. 시호(諡號)는 충정 공(忠貞 公)이다. ※호부(戶部):고려 때 상서성 소속의 6부 중 하나.
墓는 경기도 장단군 강산 면 구화 리 상 능동 인좌 원 이러니 연대는 미상이나 중간에 실전(失傳)하였으나 이조(李朝) 순종(純宗: 1907~1910, 27代) 경술(庚戌:1910)년에 도변(盜變)으로 인하여 지석(誌石)이 출현되어 이 지문(誌文)이 충정공 묘 지문인지라 이에 봉축(封築)을 개수(改修)하고 다시 수호(守護)한다. 배(配)는 李 氏니, 父는 좨주(祭酒) 석(碩)이며, 一女를 生하였고. 배(配) 李氏의 父는 예부상서(禮部尙書) 자인(資仁)이며,3남 4녀를 生하다.
※ 문하시중(門下侍中):고려 관직의 하나. 국정을 총찰 하던 대신. 6대 성종이 제정. 문종이 한사람으로 정하였음. (종1품). 1275년(충열왕 1년) 첨의중찬 이라 고쳐 좌우 각1명씩 둠. 知樞密院事: 추밀원에 속한 벼슬. 知御史臺事: 어사대에 속한 벼슬. 戶部上書:호부의 정1품 판사 1명 정2품 상서1명 등이 있었다.
병마사(兵馬使); 고려 때 외직의 하나. 동북면과 서북면에 설치 3품관으로 옥대와 자 금을 달게 했고. 왕이 친히 부월을 주어서 지방의 진에 나가 곤외를 전하게 함.
군을 장악한 군관으로 국경지대를 경비 하는 한편 그 곳의 성을 다스렸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지방의 병마를 지휘, 담당 하던 사령관, 종2품의 무관으로 임명,(경기1, 충청2, 경상3, 전라2, 황해1, 강원1, 함경3, 평안2명씩 각각 배치했음).
비서성(秘書省): 경적과 축문을 주관, 내서성, 비서감, 전교서, 등으로 고침.(종3품 비 서감).
九世 광중(光中: ? ~1170) 1남 0녀, 1120년경 생으로 추정
고려 의종(毅宗: 1146~1170, 18代) 17년 계미(癸未: 1163)년에 급사(給事)로 병마부사(兵馬副使)에 승천(昇薦: 천거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되어 실지(失地)를 회복 하려고 발병(發兵)하여 금(金)나라를 공격하고 그 로사(蘆舍)를 불살라 버리고 방수(防水)하는 둔전(屯田)을 두었다. 의종(毅宗) 24년 경인(庚寅: 1170)년에 비서감(秘書監:종3품)이 되었고 8월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줄(卒)하니 사실이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남아 있다. (박광승이 광중을 데려다 숨겨 놓고 밀고 하여 살해 하게 했음.)
대균(大均)
문림랑(文林郞: 종9품계)이며 전중성(殿中省) 내급사(內給事: 종6품) 동정(同正)이다.
충정공(忠正公) 묘지(墓誌)에 의(依)한다.
대용(大庸)
문림랑(文林郞)이요, 위위(衛尉) 주부동정(主簿同正)이다.
충정공(忠正公) 묘지(墓誌)에 의(依)한다.
十世 체(蔕) - 1142~1147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확인 됨.
순안 현령(順安 縣令)이다. 박광승(朴光升) 부자(父子)를 죽여 복수(復讎) 하였고 그 사실이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남아 있다.
※.체(蔕)의 子 위(位)와 주영(珠永)은 확실성이 없으므로 차후의 확증을 기다린다.
十一世 위(位) 1117년경 추정 (位의 長子 元義가 1147년생임이 묘지명에서 밝혀 짐)
구보(舊譜)에는 공(公)의 휘(諱)가 실리지 않았는데 영조(英祖: 1724~1776, 이조21代) 기사(己巳: 1749)년에 후손(後孫) 천상(天相)이 풍덕원(豊德院)으로 갔다가 공(公)의 증손(曾孫) 문서공(文書公: 14世 수(須)의 묘지를 발견하여 살펴보니 증조(曾祖)의 휘(諱)가 위(位)라 쓰여 있는지라 이 뒤로 족보(族譜)에 혹(或) 충정 공 의원(忠貞 公 義元)의 자(子)로 쓴바 있으나 순종(純宗: 1907~1910,이조 27代) 경술(庚戌: 1910)년에 발견된 충정 공(忠貞 公) 묘지(墓地)에는 아들3인(光中, 大均, 大庸)이 써 있으되 모두 공(公: 位)의 휘(諱)가 아니요 또한 고려사 열전(列傳)에 광중(光中)의 자(子)는 체(蔕)라 하였으니 또한 공(公)의 휘(諱)가 아니며 그 년대를 참고 하여 보면 공(公)은 체의 자(子)인 듯도 하고 혹은 광중(光中)의 3형제 중 어떤 분의 자(子) 및 손(孫 )일지도 알지 못하여 감히 현령 공(縣令 公) 체(蔕)의 직계로 쓰지 못하고 새로 기층(起層)하여 후일의 확증을 기다린다.
주영(珠永)ㅡ 1남 0녀. 1125년경 생 예상
금오위 중랑장 동정(金吾衛 中郞將 同正)으로 대정(隊正)을 행(行)하고 동지 추밀원사(同知 樞密院事)와 호부상서 상장군(戶部尙書 上將軍)을 증직(贈職) 받았다.
삼가 살펴보면 구보(舊譜)에는 공(公)이 충정 공 의원의 자(子)로 되어 있으나 문경 공 집(文敬公 集: 28世)과 문충공 만기(文忠公 萬基: 30世)가 다 같이 세대가 빠진 것이 아닌가? 의심(疑心)한바 있었고 순종(純宗) 경술(庚戌: 1910년)에 충정공 의원 묘지가 출현하여 과연 자(子) 3인이 있었는데 모두가 공(公)의 휘자(諱字)가 아니고 또한 고려사 열전에 광중(光中)의 자(子) 체(蔕)가 있고 또한 공(公)의 휘자(諱字)가 없는 지라. 그 년대를 상고[詳考)하여 보면 공(公)은 체(蔕)의 자(子)인 듯도 하나 혹 광중 3형제분 중 어느 분의 자(子)나 손(孫)인지도 알 수 없으므로 감히 현령 공 체(蔕)의 하(下)에 계서(系書)하지 못하고 삼가 후일에 확증을 기다리기로 한다.
十二世 광존(光存)ㅡ 1남 0녀. 1155년경 생 예상
흥위위 별장 동정(興威衛 別將 同正)이요, 증(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綠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이부상서 겸 판예부사 상호군(吏部尙書 兼 判禮部事 上護軍)을 증직(贈職) 받았다. 호위별장(護衛別將)이시다. (종형 중랑장 광세와 광상김씨의 양대 산맥으로 광세맥과 광존 맥으로 대별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十三世 대린(大鱗)ㅡ 3남 1녀. 1185년경 생 예상
금자광록대부 예빈경(金紫光祿大夫 禮賓卿)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와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증직 받고, 배(配)는 익양군(翼陽郡) 부인(夫人) 광주 김씨(光州 金氏)다. 父는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이다.※자(字):본 이름 외에 성년식후 지어 부르는 이름. 혹은, 관명이라 한다.
十四世 연(璉: 1215~1291, 76세 생)ㅡ 2남 0녀. 양간공파 조(良簡公派 祖)(父,30세경 출생)
구명(舊名)은 중용(仲龍)이요, 자(字)는 기지(器之)며 고종(高宗: 1213~1259, 23代) 2년 을해(乙亥: 1215)년에 태여 났으며 무술(戊戌: 1238, 24세)년에 시어사(侍御史:어사대의 종6품~5품)로 여러 번 옮겨 병부시랑(兵部侍郞:상서병부의 정4품)이 되었고 추밀원 부사(樞密院 副使:정3품)와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를 거쳐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匡靖大夫 僉議侍郞贊成事: 문하시랑평장사 개명으로 정2품)와 판판도사 사(判版圖司事)를 역임 하였다.충열왕(忠烈王: 1274~1308, 25代) 초에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 都指揮使)가 되어 동정(東征: 일본 정벌)할 전함(戰艦) 제작하는 일을 감독하더니 홀연(忽然)히 몽중에 허리에 찾던 금어(金魚)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해몽 하되 “신장(身章 )이 이미 같으니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 하고 퇴직(退職) 하기를 주청(奏請)하여 도첨의(都僉議 : 중서문하성의 종1품 중서령의 바뀐 名)로 치사(致仕)하고 충열왕 신묘(辛卯: 1291)년 5월25일 신유(辛酉)일에 줄(卒 ).
시호(諡號)는 양간공(良簡公)이며 향년 77세다. 공(公)은 평소에 품성(稟性)이 순후(淳厚)하여 무릇 경조(慶弔)에 친(親)하고 소(疎)함이 없이 하니 세상이 칭송(稱頌)하였고 사실이 려사(麗史)에 있으며 화상 찬(贊)과 원종(元宗: 1275, 24대)2년 신유(辛酉:1261)년 호적(戶籍)이 있고 전북 고창 로산사(蘆山祠)에 철향(腏享)되어 있다. 공(公)은 해양인(海陽人: 光山人)이며 부자(富者)로 알려져 있다.
배(配)는 연주군(連珠郡) 부인(夫人)이다. 능성 조씨(婈城曺氏)니, 父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요, 祖는 검교신호위장군(檢校神虎衛將軍) 복정(僕正) 추재(樞材)요, 曾祖는 호장보(戶長甫) 윤자렴(尹子廉)이며, 外祖는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주정씨(貞州鄭氏) 장(莊)이다. {규(珪)와의 서차(序次) 문제는 논쟁 중에 있음.}
규(珪)ㅡ 낭장공파 조(郎將公派 祖)
구명(舊名)은 찬(贊)이요, 낭장동정(郎將同正)이다. 삼가 살펴보면 구보에 공의 형제 서차(序次)가 상위(相違)되었는데 예로부터 가장(家藏: 집안에 감춰 놓은 것)되어 있던 화상일폭(畵像一幅)에 3인의 화상이 함께 그려져 있고 각각 찬사가 있으되 그중 한분이 중산대부 국학대사 성보 문서 태학사(中散大夫 國學大司 成寶 文署 太學士)로 치사(致仕)한 김찬(金贊)이라 하였으나 찬은 곧 낭장동정 공(公) 규(珪)의 고명(古名)이므로 종의(宗議: 문중 회의)에 의하여 서차(序次)를 시정(是正)했다.(郎將: 고려 정6품) ※ 호(號) : 본명(本名), 자(字), 외(外)에 쓰는 아명(雅名)이다.
이(珥)ㅡ 사온 직장공 파조(司醞直長公派祖),
구명(舊名)은 제(磾)요, 황대전고(黃臺典誥)다. 구보에는 공의 휘가 기재되지 않았는데 옛 부터 가장(家藏)하고 있던 화상일폭(畵像一幅)에 세분의 화상이 함께 그려져 있고 각각 찬사가 있었는데 그 셋째분이 보문서학사(寶文署學士)로 치사(致仕)한 김제(金磾)라 하였으니 제(磾)는 곧 황대전고(黃臺典誥)이(珥)의 고명(古名)이라 하였으니 제(磾)는 곧 황대전고 제안공(提按公) 이(珥)의 고명이므로 재록(載錄)한다.
十五世 사원(士元: 1257~1319, 62 세 생)ㅡ 1남 0녀. 34세에 부친 사망. 父 42세에 출생.
구명은 구(埧)요, 또는 원구(元具)라고도 하며 고려 고종(高宗: 1213~1259, 23代) 44년 정사(丁巳: 1257)년에 출생(出生), 충열왕(忠烈王: 1274~1308, 25代) 계사(癸巳: 1293)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종2품)가 되었고 충선왕(忠宣王:1308~
1313 26代) 신해(辛亥: 1311)년에 평양 부윤(平壤 府尹: 종2품)이며 누천(累遷)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 贊成事: 정2품) 상호군(上護軍: 정3품 )에 이르렀다. 충숙왕(忠肅王: 1313~1330, 27代) 6년 기미(己未: 1319)년 정월 임술(壬戌)일에 줄(卒)하니 향년(享年) 63세요 시호(諡號)는 정경공(貞景公)이다. 배는 순정군 부인 순흥 안씨(順政郡 夫人 順興 安氏)니, 父는 문성공(文成公) 회헌유(晦軒裕)요, 祖는 문하시중 판도판서(門下侍中 版圖判書) 부(孚)며,曾祖는 추밀원 부사 상호군(樞密院 副使 上護軍) 영유(永儒)요, 外祖는 우사간한남(右司諫 漢南) 김록정(金祿廷)이다
사형(士亨)
호(號)는 화암(花菴)이요, 참지정사(參知政事)다.
十六世 진(稹: 1292 ~ ? )ㅡ 5남 2녀, 27세에 부친 사망, 父 35세에 출생.
호(號)는 적제(迪齊), 충열왕(忠烈王: 1274~1309, 25代 )18년 임진(壬辰: 1292)년 생(生)으로 정미(丁未: 1307)년 16세 때에 추장 제술과(秋場 製述科) 문과에 뽑혀 충혜왕(忠惠王: 1330~1332, 1339~1344, 28代) 임신(壬申: 1332)년에 중현대부(中顯 大夫), 성균 제주(成均 祭酒)로 통례문 부사(通禮門 副詞)를 겸하고 계유(癸酉: 1333)년에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禮文館 大提學)과 지춘추관사 상호군(知春秋館事 上護軍)이 되었고 충혜왕(忠惠王) 임오(壬午: 1342)년에 지공거(知貢擧: 과장의 총책)로 인재를 가장 많이 뽑았고 시호(諡號)는 장영공(章榮公)이다. 사실(事實)이 고려사(高麗史)에 있으며 충혜왕 후(後) 2년 계유(癸酉:133
3)년 호적(癸酉 戶籍)에 있다. 배(配)는 영가군(永嘉郡) 부인(夫人) 복주 권씨(福州權氏)다. 父는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 윤명(匡靖大夫 僉議 評理 上護軍 允明)이요, 祖는 추밀원 부사 병부상서 상호군(樞密院副使 兵部尙書 上護軍) 제(濟)요, 曾祖는 병부상서 상장군(兵部尙書 上將軍) 득(得)公이요, 外祖는 삼중대광 세자사(三重대匡世子師) 충열공 안동김(忠烈公 安東金) 방경(方慶)이며, 忠烈王二十一年己未生이요, 묘(墓)는 풍덕부(豊德府) 동부(東部) 망포리(芒浦里) 제1동 응봉(鷹峰) 하(下) 양마교상(養馬橋上) 자좌(子坐) 합폄(子左 合窆).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흥교면(興敎面) 조문리(照門里)다. 실전(失傳)하였다가 순조(純祖: 23대) 무자(戊子: 1828)년에 후손(後孫)이 묘소(墓所)를 찾아서 다시 수호(守護)하게 되었다.
十七世 광리(光利: 1309 ~ ? ) - 1352년 까지는 생존(43세) 父, 17세에 출생
고려 충선왕(忠宣王 : 1308~1313, 26代 )원년 기유(己酉: 1309)년에 출생, 공민왕(恭愍王: 1351~1374,31代 ) 임진(壬辰:1352)년에 좌부대언 (左副代言 : 고려 밀직사. 좌부승지의 고친 이름. 정3품 벼슬)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 밀직사의 정3품)를 역임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종2품 계하) 전리 판서 령 삼사사(典理 判書 領 三司事)에 이르렀다.
영리(英利: 1314 ~ ? )ㅡ 27世 장생(長生: 沙溪)의 조상(祖上)-1354년까지생존(40세)
초명(初名)은 정리(貞利)요 충숙왕(忠肅王: 1313~1330,1332~1339. 27代 )원년갑인(甲寅:1314)년에 출생. 충목왕(忠穆王: 1344~1348, 29代) 정해(丁亥:1347)년에 전라도안(全羅道按) 겸 존무사(存撫使)와 탁전(度田)을 지냈고 공민왕(恭愍王) 갑오(甲午: 1354)년에 좌사의대부 판군기감사(左司議大夫 判軍器監事: 군기감의 으뜸 벼슬. 종3품)에 이르렀고 고려사(高麗事)에 사실(事實)이 있다
성리(成利: 1324 ~ ? ) - 1352년 까지는 생존(28세)
충숙왕 갑자(甲子: 1324)년에 출생. 사온 승 동정(司醞 丞 同正)이니 공민왕 임진(壬辰: 1352년)에 문과 급제하여 판 전리 사사(判典理司事)다.
안리(安利: 1328 ~ ? ) 입사(入仕)~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감.
충숙왕 무진(戊辰: 1328)년에 출생하여 판도판서(版圖判書: 고려 때 호조의 별칭으로서 정 2품 장관이다)다.
천리(天利: 1333 ~ ? ) ㅡ 3남 2녀 - 1392년까지는 생존(59세) - 父 41세에 출생.
충숙왕(忠肅王: 1313~1330, 復位1332~1339, 27代)後 2년 계유(癸酉: 1333)년에 출생하여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 密直副使)와 상호군(上護軍: 오위 정3품下 벼슬로 상장군의 개칭 명)이요 신조(新朝: 1392년 조선 개국 공신)에 입사(入仕)하였다. 배(配) 밀양(密陽) 박씨(朴氏)며, 父는 동지밀직(同知密直) 광후(光厚)다. 묘(墓) 경기도(京畿道) 고양(高揚)이다. 야은 길재(1353~1419): 성리학자. 고려 충신.
十八世 희선(希善) ㅡ 1356 년경 출생 예상. 19世 김약시(金若時:1335~1393)~고려 충신.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로 지냈으며 무후(無後)하다.
무(務 : 1360 년경 출생 예상)ㅡ 4남 2녀. 이조 태조대왕 이성계(李成桂:1335~1408)
조봉대부 행 제용감 소감(朝奉大夫 行 濟用監 少監)이요. 배(配)는 영인(令人: 종4품,~정4품 품계)이며 영가 김씨(永嘉 金氏: 안동 김씨)다. 父는 선공령서린(繕工令瑞麟0l다. 묘(墓)는 안동군(安東郡) 노림(魯林) 자좌(子座) 합폄(合窆)이다. 처가(妻家) 인맥으로 고려 말~조선 초에 안동(安東) 남선면으로 오게 되었고 그 후손(後孫)들이 안동(安東) 풍천면, 풍산면 도양동 등지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김무(金務)의 분재기(分財記) : 1429년(세종11년)에 재주(財主)인 김무(金務)가 그의 네 아들과 두 사위. 그리고 친, 외손자들에게 자신의 재산 중 노비(奴婢 : 奴 113명, 婢 111명, 미상1명하여 225명이다)만을 분배하여 준 문서이다.
안동 지역에 처음 이거한 김무(金務)의 사위 김영명(金永命)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五대조에 의한 유산상속(遺産相續)과 관리(管理) 등의 원인에 따른 이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옛날,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안동의 다른 명칭을 살려 상락김씨, 화산김씨, 영가김씨, 고창김씨, 복창김씨, 또는 선안동 김씨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예(預 : 1365 년경 출생 예상)
문과(文科)로 밀직대언(密直代言)이니 신조(新朝:1392년)에 입사(入仕)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요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문(誌文)을 지었다.
十九世 탄지(坦之) ㅡ 1385 년경 출생 예상.
평시서령(平市署令: 종5품)이며 배(配)는 공인(恭人:종5품 품계)이고 이씨(李氏)니 父는 군사관(郡事寬)이요 外祖는호군(호군)淸州李 덕윤(德潤)이다
※ 평시서(平市署): 시장에서 널리 쓰는 자, 말, 저울, 등과 물가의 고, 저를 검사하는 사무 담당. 1392년(태조 1년) 제정, 1894년 고종 31년 폐지. (令, 主簿, 直長, 奉事)
숭지(崇之: 1400 년경 출생 예상)ㅡ 2남 2녀, 부, 40세頃 출생.
장사랑(將士郞: 종9품계)이요, 목청전직(穆淸殿直)이며 기(忌)는 음력 4월 29일이며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 司僕侍正)을 증직 받음. 묘(墓)는 풍산면(豊山面) 노동(魯洞) 두솔원마(兜率院麻) 감곡(甘谷) 자좌(子座)다. 배(配)는 숙인(淑人: 정, 종 3품 품계)이고 죽산 박씨(竹山 朴氏)다. 父는 판전농사사리(判典農寺事履)요. 기(忌)는 十一月 十六日이며 묘(墓)는 고양(高揚)이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芳幹의 난). 방원(芳遠)을 왕세자로 책봉. 정종이 방원에게 선위. 태종(太宗) 즉위.
정지(貞之) ―경(頃)~ 어떤 시간의 전후를 어림잡아 막연히 일컫는 말. 다섯 시∼.
지령암군사(知靈巖郡事)며 묘(墓)는 고묘 후(考墓 後: 부친 묘 뒤)요, 배(配)는 풍양(豊穰)조(趙)씨요, 부(父)는 중랑장(中郞將) 위징(威澄)이다.
효지(孝之) ~ 0남 2녀. 효로(孝盧)를 키우고 글을 가르침.
록사(錄事:고려 때 정 5품의 무관 벼슬. 조선 때 각 관아에 속한 하급이속(吏屬).)요,
무후(無後)하다.
二十世 회(淮)ㅡ 2남 1녀. 1429 년頃 출생 예상. 父, 29세경 출생.
생원(生員: 初試로 四書 五經으로 經書試驗)이요, 19세에 학행으로 피천(被薦)되어 승의랑 음성 현감(承議郞 陰城 縣監)을 지냈으며 기(忌)는 음 2월8일이고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曹參議)를 증직 받고 향년(享年) 26세(1454~1455년경)에 줄(卒). 묘(墓)는 고묘(考墓) 좌록(左麓) 자좌(子坐)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정3품계)이며 안강 노씨(安康 盧氏)이다. 父는 경산현령(慶山縣令) 노응(盧膺)이며 外祖는 군수(郡守) 재년강( 載寧康) 려(慮)다. 묘(墓)는 풍천면(豊川面) 도양동(道陽洞) 자좌(子坐)다.(남선면 노림과 풍산읍 도양동으로 이전 살았음 ). ※.麓:산기슭 록(녹)
간(澗) ~ 0남 1녀. (婿 :丹城公 金萬均)
二十一世 효원(孝源) - 0남 0여. 1450년경 출생예상
교위(校尉)요, 무후(無後)하다. 배(배)는 선인(宣人) 오씨니, 묘는 도양동(道陽洞)이다.
4대士禍ㅡ 戊午(1498), 甲子(1504). 己卯(1519). 乙巳(1542): 44년간 지속
효로(孝盧: 1454~1534, 80세 생,)ㅡ 2남 2녀. 父, 25세경 출생
자(字)는 순경(舜卿)이요, 호(號)는 용수(龒叟)며 또 춘포(春圃)다.
단종(端宗:1452~1455, 6代)2년 갑술(甲戌: 1454)년에 출생, 11代 중종(中宗: 1506~1544,)29년(1534)년에 향년(享年) 81세에 줄(卒) (음,12월 6일).
1480년 성종(成宗: 1469~1494, 9代) 11년 27세에 생원(生員) 시험에 합격 하였으나 출사(出仕)에 뜻이 없어 과거를 단념하고 초야에 숨어 글을 읽으며 임천(林泉:숲속의 샘)에 자적 하였다. 안동 풍천면 도양리에 살다가 예안면 오천동(외내)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공(公)은 평소에 “선행을 쌓으면 자손들에게 경사스러움이 있게 된다.(積善餘慶)”는 말씀으로 가문(家門)의 근본(根本)을 삼으셨다. 공(公)은 국자감 생원(國子監 生員)으로 일생을 마쳤다. 1542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 吏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았다. 묘(墓)는 안동군 녹전면 죽송동(능동) 계좌(癸坐)며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정2품 품계) 양성 이씨(陽城 李氏)로 세조(世祖)4년 무인(戊寅: 1458)년생으로 신무(神武: 1548)년 4월에 병사(病死) 향년(享年) 91세요 공(公)의 묘좌(墓左)에 부장(附葬)하였다. 쌍분 묘(雙墳 墓)다. 부는 군수(郡守) 지(持)요, 조부는 판중추(判中樞) 정평공(靖平公) 순지(純之)며, 증조부는 병참(兵參) 맹상(孟常)이요, 외조부는 동중추(同中樞) 남양홍씨(南陽洪氏) 익생(益生)이다. (농암, 이현보:1467~1555, 88세 생).
국자―감(國子監) 1.고려 때,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교육 기관. 2.성균관(成均館).
二十二世 연(緣: 1487~1544, 57세 생)ㅡ 2남 3녀. 父.33세에 출생
자(字)는 자유(子由)요, 호(號)는 운암(雲巖)이며 성종(成宗: 1469~1494, 9代) 18년 정미(丁未: 1487)년 2월에 오천동(외내)에서 출생(出生)하여 7세에 취학(就學). 같은 마을에 사는 현감 김만균 단성공(縣監 金萬均 丹城公)이 공(公)을 가르쳤다.
23세 되던 중종(中宗: 1506~1544, 11代) 4년 기사(己巳: 1509, 만22세)년 가을에 경상도(慶尙道) 향시(鄕試)에서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동(同) 을묘(乙卯: 1519, 만32세)년 문과에 급제(及第)하였다. 다시 탁영시{.(濯英試: 당시 국가에서 영재를 발택(拔擇) 등용코자 중종 31년 병신(丙申: 1536)년에 중시(重試)를 설정하고 중종 33년 무술(戊戌: 1538,만 51세)년에 시행}에 합격하였으며,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종9품).예문관(禮文館), 춘추관(春秋館)을 거쳐 1524(만37세)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정6품)에 올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 경주 부윤(慶州 府尹)등을 역임 하는 동안 그 치적이 현저하여 관찰사 재임 시에는 도민들이 공(公)의 치적을 기린 선정비(善政碑)를 세웠으며 경주 재임 시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1544년 58세를 일기로 관아(官衙: 관사)에서 서거하니 중종과 동궁(東宮: 후에 인종 )이 각각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다음해 3월에 예관 채무일(禮官 蔡無逸)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저서로는 운암집(雲巖集)이 있다. 묘(墓)는 안동군 와룡면 서현동 금학산 곤좌(安東郡 臥龍面 西峴 洞 金鶴山 坤左)며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정2품 품계) 창녕 조씨(趙氏)다. 묘(墓)는 합폄(合窆)이다.
43세에 父 사망 綏: 편안할 유. 편안할 수
유(綏: 1491~1555, 64세생)ㅡ4남 2녀. 父,35세에 출생. 綏: 기 머리(旗頭) 장식할 유.
자(字)는 유지(綏之)요 호(號)는 탁청정(濯淸亭)이다. 성종(成宗: 1469~1494, 9代) 22년 신해(辛亥: 1491)년 2월 정미(丁未)일에 예안현(禮安縣) 오천리에서 출생(緣과 4살차이). 같은 마을에 사는 고(故) 단성공(丹城公) 현감(縣監) 김만규(金萬均)의 부인(婦人)은 공(公)의 종고모(從姑母: 5촌.淮의弟 澗의 무남독녀)인데 현감 공(縣監 公)은 공(公)의 준수함을 보고 사랑하여 데려다가 가르치되 자기 아들과 다름이 없었다. 을유(乙酉: 1525)년 만34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였는데 공(公)은 더욱 무예(武藝)에 정통(精通)하므로 문.무대과(文.武大科)에 응시 하여 거의 합격선에 여러 번 들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 하고 문무양시(文武兩試)를 그만 두고 개탄하길 “삶이 일세(一世)의 락지(樂地)를 찾을 지니 어찌 세상의 명리(名利)만 쫒아 다니리.”라 하였다. 을묘(乙卯: 1555)년 5월 19일 줄(卒)하니 향년(享年) 65세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순천 김씨(順天 金氏)로 임인(壬寅: 1542)년 정월 16일 향년 51세로 줄(卒)하고 부는 증(贈),판서(判書) 수홍(粹洪)이요, 조부는 부정(副正) 증(贈),참판(參判) 승평군(昇平君) 약균(若鈞)이요, 증조부는 감정(監正) 증(贈), 참의(參議) 원우(元祐)고 외조부는 장사랑(將仕郞) 안동권씨(安東權氏) 우(瑀)이다. 묘(墓)는 안동군 와룡면 오천동 방잠 129번지 산 신좌(申坐). 배(配)와 부장(附葬) 합부(合祔). 長男 山南 富仁의 貴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증직(贈職) 받음.
탁청정(濯淸亭) 정자는 51세 때 중종36년(1541년:辛丑)에 세워졌고 현판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것을 각판(刻板)한 것임.
건축 당시는 단청(丹靑: 대궐이나 절 등의 벽·기둥·천장 따위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림과 무늬를 그림)으로 되었고 그 규모가 웅장하면서도 우아 정교하여 사가의 것으로는 영남 제일의 정각으로 일컬어져 왔다.(지방문화재 26호로 지정)
벼슬길에 나가 있는 백씨 운암 김연(伯氏, 雲巖 金 緣)대신 향제(鄕第)에서 부모를 봉양 하면서 자적(自適) 하였다.
그는 궁술에 능하였고 성품이 호협한데다 아버지 덕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생전에 많은 명사들을 사귀었다.
※ 퇴계 이 황(退溪 李 滉: 1501~1570, 69세 생)
한석봉 한호(韓石峯 韓濩: 1543~1605, 62세 생) 탁청정(濯淸亭) 현판 글씨 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70세 생)
二十三世 부인(富仁: 1512~1584, 72세 생)ㅡ 4남 0녀. (이현보 딸을 부인으로 맞이함)
자(字)는 백영(伯榮)이요,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중종7년(1512)년 7월 오천(烏川 )본가에서 탄생. 20세에 퇴계선생 문(門)에 부급유학(負芨遊學: 타향으로 공부하러 감)하여 26代 중종 31년(1536)년 향해(鄕解) 진사시에 장원 합격, 동(同) 35년(1540)년 향해 생원시 장원 합격하여, 명종(明宗: 1545~1567, 13대) 4년 기유(己酉: 1549)년 38세로 무과 급제 하여 이듬해 통사랑(通仕郞: 정8품 품계)으로 권지 훈련원 봉사(權知 訓練院 奉仕: 종 8품)에 취임. 이때 빈청(賓廳)에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강(講)하는데 문의(文義)와 음독(音讀)에 모두 통달하여 “누가 저 사람을 무인(武人)이라하겠는가” 하고 대신들이 감탄을 마지않았다고 한다.
특천(特薦)으로 선전관(宣傳官: 종8품) 겸(兼) 비변랑(備邊郞:군무(軍務)의 기밀을 맡아보던 비변사에 두었던 관원. 7품~6품)이 되어 43세 되던 명종(明宗: 1545~1567, 13대) 9년 갑인(甲寅: 1554)년에 두만강 하류 초천(草串)에 야인(野人: 女眞)이 침공 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 하는 등 큰 소란이 있었는데 공(公)이 밀명(密命)을 받들어 종성(鐘城)의 북병사(北兵使)에게 달려가 흉적(凶賊) 오랑케를 모두 소탕하였다. 同 12년 정사(丁巳: 1557)년 10월 강릉 판관(江陵 判官)에 부임 했다. 산기슭이며 바다에 면한 강릉은 토질이 척박 한데다 구실(國稅)이 무거워 주민의 생활이 몹시 피폐(疲弊)하였다. 그래서 공(公)은 부사(府使) 이준민(李俊民)과 함께 성력(誠力)을 다하여 온갖 방도로 백성의 모든 부담을 가볍게 줄여 안정을 돕게 했다. 同 18년 계해(癸亥: 1563)년 6월에는 락안 군수(樂安 郡守)로 부임 하였는데 그 고을에 척신(戚臣: 임금과 외척 관계가 있는 신하)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세력을 믿고 포탈(逋脫)한 곡식을 산처럼 쌓아놓은 못된 토호(土豪)가 있었는데 전임 군수들이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못 내어 모두 그대로 덮어 두었으나 공(公)이 그 사실을 엄하게 조사 하여 밝히고 모두 몰수하니 온 고을이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뒤이어 경원부사(慶源府使), 영해 도호부사(寧海 都護府使: 종3품)에 임명되어 가는 곳 마다 선정(善政)으로 이름을 날렸다. 71세 되던 이듬해 겨울 두만강 기슭에 북적(北狄)들이 다시 침공하여 경원진(慶源鎭)이 함락되자 조야(朝野)가 온통 놀라고 민심이 흉흉(凶凶)함에 公이 “국가가 변란을 당했는데 비록 늙었기로 신자지도(臣子之道)로 안연(晏然)히 있을 수 없다”하여 궐하(闕下)에 달려가자 조정에서 그 의로움을 장하게 여겨 부호군(副護軍: 종4품)에 임명되어 사변(四邊)의 적을 평정하고 돌아와 곧 사임 하였으나 70이 넘은 고령에도 아직 건장하다고 본 대신들이 만류 하였으나, 뿌리치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왔다. 이듬해 5월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임명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公은 오래 벼슬에 있으면서 권문(權門)에 발을 들여 놓아 본적이 없었으며 재리(財利)에 담백(淡白)하여 고장(故庄)에 갑부(甲富:첫째가는 부자. 수부(首富).)라고 일컬을 만큼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음에도 두 아우(부신, 부윤)와 누이 및 가난한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30년 벼슬길에 여러 고을을 역임하고 남북을 드나들며 나라에 이바지하고도 은퇴 하여서는 끼니가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同 17년 갑신(甲申: 1584)년 11월에 줄(卒)하니 향년 73세였다.
이듬해 3월 선조 임금은 예조 좌랑(禮曹 佐郞) 홍 의필(洪義弼)을 보내어 사제(賜祭)했으며 정조 10년 병오(丙午; 1786)년에 사림(士林)에서 락천 서원(洛川 書院)에 위판(位版)을 봉안했다. 배(配)는 영천이씨 정부인(貞夫人:조선 때 정, 종 2품 문무관, 종친의 부인에게 내렸던 봉작.)이시다. 묘(墓)는 안동군 와룡면 라소동 령산 209번지 곤좌며, 배(配)와 쌍분(雙墳)이다.
※. 장자 호(壕:1534~1616), 차자 전(㙉:1538~ ), 3자 탄(坦:1541~ ), 4자 기(圻:1547~ ).
부신(富信: 1523~1566, 43세 생)ㅡ 3남 2녀. 父,32세에 출생. 32세에 父, 사망.
중종(中宗: 1506~1544, 11대) 18년 계미(癸未: 1523)년에 탄생하여 병인(丙寅: 1566)년에 줄(卒)하니 윤칠월 경술(庚戌)일 향년(享年) 44세(歲)였다. 자(字)는 가행(可行)이요, 호(號)는 양정당(養正堂)이다. 퇴계(退溪: 1501~1570. 69세)의 문인(門人)으로 명종(明宗: 1545~1567, 13대)13년 무오(戊午: 1558)년 35세에 사마시(司馬試:조선 시대의 과거의 하나《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가 있었음》. 감시(監試). 소과(小科).) 합격(合格)하여 학문에 독실하여 퇴계선생의 은총을 한 몸에 받고 장차 크게 성취할 인재라고 총망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수산(壽算)이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직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묘(墓)는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臥龍面) 라소동(羅所洞) 한천(寒泉) 신좌(辛坐)다. 오대손(五代孫) 동준(東俊)이 묘표(墓表)를 지었고 유교(遺橋)가 있다. 배(配)는 장수 황씨(長水 黃氏) 목사(牧使) 이(怡)의 女로 17세에 공(公)에게 출가 하여 정유(丁酉: 1597)년 11월 병오 일에 줄(卒)하니 공(公) 묘(墓) 왼편에 합장(合葬)하였다. 조부는 참군(參軍) 윤헌(允獻)이고 증조부는 현감(縣監) 관(瓘)이요, 외조부는 충의위(忠義衛) 광주이씨(光州李氏) 이진(以振)이고. 묘는 합폄(合窆)이다. (임란:1592.4.13~1598년11월)
※.묘표(墓表)~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품계· 관직·성명 등을 새김》. 표석(表石).
부윤(富倫: 1531~1598, 67세 생)ㅡ1남 3녀. (학봉, 김성일:1538~1593, 55세 생,)
자(字)는 돈숙(惇叔)이요, 호(號)는 설월당(雪月堂)이다. 중종 26년(1531년) 오천 본가에서 출생. 명종 10년(1555년) 24세에 사마시(司馬試) 합격하고 선조 8년(1576년) 가을에 돈녕부 봉사로 (敦寧府 奉仕:종8품)로 임명을 받고 정능(靖陵)의 석역(石役)을 주관하였고 同16년(1583년)제용감 직장(濟用監 直長:종7품). 同18년엔 동복현감(同福縣監:종6품) 에 임명. 同 25년(1592년)임진 왜란을 당하여 가산을 기울려 향병(향병 대장은 24世의 近始劑 垓)을 돕고 同 31년(1598년)12월 줄(卒). 향년 68세로 “설월당 문집 3권” 있다. 유물, 문헌, 다수가 설월당 종택에 보전되어 있으며, 배는 숙인 밀양 박 씨다. 묘는 오천동 선고(先考: 綬) 묘후(墓後) 신좌다. 중직대부 행 봉화 현감 겸 안동 진관 병마절제도위(中直大夫 行 奉花 縣監 兼 安東 鎭管 兵馬節制 都尉:종6품)를 지냄. 정구{鄭逑: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page 44 참조 바람.}
부생(富生) ㅡ 2남 0녀. (율곡, 이이: 1536.~1584, 48세 생)
자는 경윤(景潤)이요, 선무랑(宣務郞: 종 6품)이며, 묘(墓)는 와룡면(臥龍面) 오천동(烏川洞) 정곡(井谷)이며 배(配)는 의인(宜人: 正從 6품의 무관 아내에게 봉작) 안동 권 씨(安東權氏) 이다. 군자리(君子里)=정구{鄭逑:1543∼1620),
二十四世 지(址: 1551~1620, 69세 생)ㅡ 1남(光宇 : 死) 3녀. 임진왜란(1592~1598)
자(字)는 경건(景建)이요, 명종 신해(1551)년생 이며 내자시정(內資侍正: 정3품)이요, 기(忌)는 2월14일 이고 향년(享年) 70세에 줄(卒). 배(配)는 숙인(淑人: 정, 종3품 품계)으로 평강 채 씨(平康 蔡 氏)다. 묘(墓)는 와룡면(臥龍面) 라소동(羅所洞) 한천(寒泉) 신좌(辛坐)다. 평(坪)의 子 광술(光述)은 지(址)의 子로 입적(양자)
한석봉(韓石峯 韓濩: 1543~1605, 62세 생),(김장생: 1548~1631, 83세 생, 文元公),
강(堈: 1558~1595, 37세 생)ㅡ1남 2녀. (서애 유성룡: 1542~1607, 65세생)
명종(明宗: 1545~1567, 13대) 무오(戊午: 1558)년생이요, 자(字)는 기중(器仲)이요, 호(號)는 설애(雪厓)요, 신묘(辛卯: 1591)년 33세에 진사(進士)다. 효행천(孝行薦)으로 찰방(察訪)을 배수(拜受)하고 임진란에 종형(從兄) 근시제 해(近始齊 垓)와 더불어 거의(擧義)하였으며 을미(乙未: 1595)년 38세에 줄(卒)하니 참봉(參奉)이다. 배(配)는 단인(端人: 정8품 품계)이며 선산 김 씨다. 묘(墓)는 라소동 한천이다.
신묘(辛卯: 1591)년 33세에 아우 평(坪)과 나란히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평(坪: 1563~1617, 54세 생, )ㅡ4남 2녀. 父,40세에 출생. 3살에 父,사망.
호(號)는 극제(克齊)요, 명종(明宗: 1545~1567, 13대) 18년 계해(癸亥: 1563)년에 탄생. 광해군(光海君: 1608~1623, 15대) 9년(1617)년 54세에 줄(卒). 선조 24년 신묘(辛卯: 1591)년 28세에 생원(生員: 司馬試에 합격)이다. 중망(重望)이 있었고 일직이 삼도 소수(三道 疏首)로 이조 5현(五賢: 李朝 500년 동안의 현인 5명)의 종사(從祀) 할 것을 주청(奏請)한바 있고, 정사(丁巳: 1617)년 7월 11일에 55세로 줄(卒)하니, 문장공 정경세(文狀公 鄭經世:1563(명종 18)∼1633(인조 11).)의 만시(輓詩)에 “사형(事兄)을 여사부(如事父)하고 우도 불우빈(憂道 不憂賓)이라”하였다. 즉,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에 성망(聲望)이 높았고 삼도사림(三道士林: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사람)들이 이조 5현(李朝 五賢 : 김굉필, 정여창, 조 광조, 이황, 이언적)의 문묘 배향(文廟 配享)을 청(請)하는 상소(上疏)를 올릴 때 소수(疏首: 소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묘는 녹전면 죽송(竹松)동 능동 을좌(乙坐)다.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鄰)이 갈문(碣文)을 지었다. 배(配)는 예안 이씨(禮安 李氏) 지평(持平) 공(珙)의 女며, 조부는 진사(進士) 숙인(淑仁)이며, 증조부는 생원(生員) 영(英)이요, 외조부는 참봉(參奉) 경주이씨(慶州李氏) 보(葆)다. 묘(墓)는 와룡면(臥龍面) 나소(羅所) 방잠(芳潛) 한천(寒泉) 해좌(亥坐)다. 배(配): 경주 이씨(慶州 李氏),부는 충순위(忠順衛) 덕음(德音)이고, 조부는 생원(生員 중립(中立)이며, 증조부는 충의위(忠義衛) 해(立+亥)요, 외조부는 충순위(忠順衛) 안동권씨 심변(審辨)다, 묘(墓)는 쌍분(雙墳)이다.
二十五世 광수(光遂: 1604~1677, 73 세 생,)ㅡ. 4남 3녀. 父,41세에 출생.13세에 父, 사망
자(字)는 맹견(孟堅)이요, 선조(宣祖: 1567~1608, 14대) 37년 갑진(甲辰: 1604)년에 출생 하여 정사(丁巳: 1677)년 2월 20일에 줄(卒)하였으니 향년(享年) 74세다. 묘(墓)는 예안면 동편(東便) 성황(城隍) 광달산(廣達山) 계좌(癸坐)다. 배(配)는 안동 노씨(安東 盧氏) 교리(校理) 경임(景任)의 녀(女)며, 조부는 진사 수성(守誠)이요, 외조부는 문경공 풍산유씨(豊山柳氏) 운용(雲龍)이다. 묘(墓)는 안동군 풍산(豐山) 두솔(兜率)원마(院麻) 감곡(甘谷) 자좌(子坐)다. 1592년4월13일 임진왜란 (7년).
광술(光述:1606~1704)ㅡ 3남 1녀. 지(址)의 子로 出家 (예안 파보 책 上卷, page40)
호는 설헌(雪軒)이며 선조 병오(1606)년 생이며, 갑신(1704)년에 졸(卒).묘는 오천동.
병자호란(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 청나라의 싸움.)
광일(光逸: 1612~1677, 65세 생)ㅡ3남 3녀.
자(字)는 희정(希靜)이요, 호(號)는 삼위당(三畏堂)이며, 광해(光海: 1608~1623,15대) 임자(壬子: 1612)년에 출생하였고, 정사(丁巳:1677)년에 줄(卒)하니 향년(享年) 66세며 유고(遺稿)가 있다. 묘는 안동군 임동면 (臨東面) 질우곡(叱牛谷) 사좌(巳坐)다, 배(配)는 전주 유씨(全州 柳氏)니 부(父)는 수잠(守潛)이요, 묘(墓)는 합폄(合窆)이다.遺稿는, 죽은 사람이 남긴, 원고(原稿)나 유초(遺草)를 말한다.
광진(光進:1614~1649, 35세 생)ㅡ0남 0녀. 화(璍 동리 공)를 자(子)로 입적
자(字)는 자익(子益)이요, 광해(光海) 갑인(甲寅: 1614)년에 출생 하였고, 기축(己丑:1649)년 36세에 줄(卒), 묘(墓)는 능동(陵洞) 동북향(東北向)이다. 배(配)는 진성이씨(眞城 李氏)니 부(父)는 진사(進士) 봉(崶)이요, 묘(墓)는 합부(合祔)이다.
二十六世 상(瑺: 1628~ ? )ㅡ 3남 1녀.
자(字)는 사휘(士輝)요, 인조(仁祖: 1623~1649, 16대) 6년 무진(戊辰 生: 1628)년생이며 묘(墓)는 선산부 동산 막동(善山府 東山 幕洞) 유좌(酉坐). 배(配)는 전주(全州) 최(崔)씨다. 묘(墓)는 예안현(禮安縣) 동도동(東陶洞) 상간촌(上間村) 해좌(亥坐)다.
관(琯: 1631~1708, 77 세 생)ㅡ 3남 2녀. 父,27세에 출생.46세 때 父, 사망.
자(字)는 서여(瑞汝)요, 인조9년 신미(辛未: 1631)년생 이며 숙종(肅宗:1674~1720
,19대) 34년 무자(戊子: 1708)년 7월 24일 78세에 줄(卒)하였고 묘(墓)는 예안면(禮安面) 삼계동(三溪洞) 이등동(伊登洞)(이드리 큰 산소) 신좌(辛坐)다. 배(配)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 생원(生員) 주한(柱漢)의 녀(女)며, 조부는 승지(承旨) 중청(中淸)이요, 증조부는 첨추(僉樞) 몽호(夢虎)다, 외조부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맹창(孟昌)이다. 묘(墓)는 합폄(合窆)이다. ※,관 두 사이에 10년 차이를 보면 두 분 사이에 2녀가 있었다는 걸로 보인다.(1녀는?)
두(㺶:1641~1674, 33세 생)ㅡ1남 0녀.
자는 문옥(文玉)이요, 인조(仁祖:1623~1649, 16대) 신사(辛巳:1641)년에 출생하여 갑인(甲寅:1674)년에 34세로 줄(卒). 묘(墓)는 선산(善山) 고남전산(古南前山) 유좌(酉坐)다. 배(配)는 해주(海州) 정(鄭)씨며 묘(墓)는 쌍분(雙墳)이다.
화(璍:1644~1718, 74세 생)ㅡ 2남 0녀. 광진(光進)의 子로 出家 (책 上卷, page 54)
자(字)는 화옥(華玉)이요, 호(號)는 동리(東里)며, 인조(仁祖:1623~1649,16대)갑신(甲申:1644)년에 출생하여 신유(辛酉;1681)년 37세에 진사(進士)하고 문사(文詞)로 명망(名望)이 있었고 숙종(肅宗:1674~1720, 19대) 무술(戊戌: 1718)년 11월 10일 75세에 줄(卒). 묘(墓)는 안동부(安東府) 북재산현(北才山縣) 남자운동(南子雲洞) 유좌(酉坐). 배(配)는 전주 유씨(全州 柳氏)다. 묘(墓)는 합부(合祔)다.
二十七世 진국(振國: 1657~1720, 63 세 생)ㅡ1남 1녀.
자(字)는 성백(聲佰)이며, 효종(孝宗: 1649~1659, 17대) 정유(丁酉: 1657)년생이며 경자(更子: 1720)년 10월 3일 64세에 줄(卒). 묘(墓)는 이동(伊洞) 신좌(辛坐)다. 배(配)는 영천(永川) 이씨(李氏). 묘(墓)는 이동(伊洞) 해좌(亥坐)다.
지국(持國) ㅡ1남 0녀.
자는 유백(維伯)이요, 기(忌)는 11월 27일. 묘(墓)는 이동(伊洞) 신좌(辛坐). 배(配)는 한양(漢陽 조(趙)씨다.
양국(揚國)ㅡ2남 1녀. 1665년경 전후 出生 예상, (1700년경 전후하여 벼슬 예측).
자는 휴백(休伯)이요, 호군(護軍: 정 4품)이며 기(忌)는 1월 10일. 묘(墓)는 예안현(禮安縣) 동원음((東遠音) 점동(店洞) 묘좌(卯坐)다. 배(配)는 영인(令人:정4품 품계), 청주 정씨(淸州 鄭氏) 찬(贊)의 녀(女)이다. 조부는 기세(基世)며, 증조부는 호군(호군) 준(儁)이요, 외조부는 영천이씨 초화(初華)다. 묘(墓)는 동원(同原) 묘좌(卯坐)다.
二十八世 동직(東稷)ㅡ 1남 0녀. 1695년 전후 출생?
자는 흠지(欽之)요, 기(忌)는 1월10일. 묘(墓)는 원음(遠音) 점동(店洞) 묘좌(卯坐)이 고, 배(配)는 경주(慶州) 손(孫)씨다. 묘(墓)는 부군 묘(墓) 좌강(左岡) 묘좌(卯坐)다.
동설(東卨) ㅡ 1남 0녀. 1700년 전후 출생?
자는 경지(敬之)요, 기는 4월 14일. 묘(墓)는 점동(店洞) 묘좌(卯坐)다. 배(配)는 영천 이씨(永川 李氏) 순휴(舜休)의 녀(女)며, 조부는 동휘(東輝)요, 증조부는 가선(嘉善) 숙발(俶發)이요, 외조부는 순천김씨(順天金氏) 진태(振兌)다. 묘(墓)는 부군묘(府君墓) 좌강(左岡) 묘좌(卯坐)다.
二十九世 래익(來翼: 1741~1821, 80세 생)ㅡ 2남 0녀.(삼계동에서 외내로 이주했다 함)
자(字)는 군봉(君鳳)이요, 영조(英祖: 1725~1776, 21대) 17년 신유(辛酉: 1741)년에 태여 났고, 순조(純祖:1800~1834, 23대) 21년 신사(辛巳: 1821)년 1월18일 81세에 줄(卒)하니, 묘(墓)는 광달산(廣達山:묘 자리 망인이 원하였다 함) 축좌(丑坐). 배(配)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 통덕랑(通德郞) 경(炅)의 녀(女)며, 조부는 부호군(副護軍) 재례(載禮)며, 증조부는 진익(震翼)이요, 외조부는 함창김(咸昌金) 대성(大成)이다. 묘(墓)는 합폄(合窆)이다.
三十世 원옥(元玉: 1769~1841, 72세 생)ㅡ 3남 1녀, 父,28세에 출생, 52세에 父, 사망.
자(字)는 대서(大瑞)요, 영조 45년 기축(己丑: 1769)년에 출생 하였고 헌종(憲宗 : 1834~1849, 24대) 7년 신축(辛丑: 1841)년 6월 16일 73세에 줄((卒). 묘(墓)는 삼계동(三溪洞) 성황촌(城隍村) 후(後) 신좌(辛坐). 배(配)는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영춘(李榮春)의 녀(女)다. 조부는 우문(遇文)이요, 증조부는 수일(受逸)이며, 외조부는 은진송씨(恩津宋氏) 갑령(甲齡)이다. (묘(墓)는 현동(縣同) 리곡(狸谷) 간좌(艮坐)다.
근옥(覲玉: 1785~1827,42세 생)ㅡ 1남 1녀, 정익(庭翼)의 子로 出家 (page 315)
자(字)는 대규(大規)요, 정조(正祖: 1776~1800,22대) 9년 을사(乙巳; 1785)년생이며, 순조(純祖:1800~1834,23대) 27년 정해(丁亥:1827)년 6월 21일 43세에 줄(卒). 묘(墓)는 예안(禮安) 동압(東鴨) 수동(水洞) 병좌(丙坐)다. 배(配)는 안동(安東) 권씨(權氏)다. 父는 사설(師說)이요, 묘(墓)는 성황(城隍) 수산(受山) 해좌(亥坐)다.
三十一世 해유(海儒: 1795~1835, 40세 생)ㅡ1남 1녀.
자(字는)는 성관(聖觀) 이요, 정조(正祖: 1776~1800, 22대) 19년 을묘(乙卯: 1795)년생이며, 헌종(憲宗:1834~1849) 원년 을미(乙未: 1835)년 5월 28일 41세에 줄(卒). 묘(墓)는 울진(蔚珍) 부자현(負子峴) 갑좌(甲坐). 배(配)는 진성(眞城) 이씨며. 父는 종대(宗岱)요, 묘(墓)는 현동(縣同) 이곡(梨谷) 간좌(艮坐)다.
이유(頤儒: 1806~1864, 58세 생)ㅡ 2남 1녀. 父,37세에 출생. 35세에 父, 사망.
자(字)는 경하(景河)요, 순조(純祖: 1800~1834, 23대)6년 병인(丙寅: 1806)년에 출생, 고종(高宗: 1863~1907, 26대) 원년(元年) 갑자(甲子: 1864)년 7월 5일 59세에 줄(卒)하니 향년 59세다. 묘(墓)는 오천(烏川) 이곡(梨谷) 신좌(辛坐)다. 배(配)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 권 연(權 延)의 녀(女)며. 조부는 득인(得仁)이요 증조부는 천걸(天杰)이요, 외조부는 순천김씨(順天金氏) 천계(天啓)다. 기(忌 )는 九月 四日이다. 묘(墓)는 한천(寒泉) 임좌(壬坐)다.
간유(侃儒:1809~1869, 60세 생)ㅡ 2남 1녀.
자(字)는 강수(剛叟)요, 순조(純祖: 1800~1834, 23대) 9년 기사(己巳: 1809)년생이 요, 기사(己巳: 1869)년 4월 25일 61세에 줄(卒). 묘(墓)는 광달산(廣達山) 사좌 (巳坐)다. 배(配)는 봉화(奉花) 금씨(琴氏)다. 묘(墓)는 압수동(鴨水洞) 갑좌(甲坐)다.
三十二世 헌교(獻敎: 1827~1884, 57세 생)ㅡ 4남 2녀. 父,21세에 출생. 37세 때 父, 사망.
자(字)는 중문(仲文)이요, 순조(純祖) 27년 정해(丁亥:1827)년에 출생, 고종(高宗: 1863~1907, 26대)21년 갑신(甲申: 1884)년 2월 5일 58세에 줄(卒)하셨다. 묘(墓)는 광달산(廣達山) 병좌(丙坐)다. 배(配)는 진성 이씨(眞城 李氏) 父, 이정곤(李貞坤)의 녀(女) 이일직(李日直)이며, 조부는 언강(彦綱)이고 증조부는 종상(宗相)이요, 외조부는 헌성김(憲城金) 영일(永馹)이다. 묘(墓)는 광달산(廣達山) 자좌(子坐)다
. ※ 흥선 대원군(이하응): 1820년(순조20년)~1898년(광무2년), 고종 부친
진교(鎭敎: 1843~1908, 65세생)ㅡ2남 1녀. 설월당(雪月堂) 경(鍄)의子로 出家(책p 402)
자(字)는 태중(泰重)이요, 헌종(憲宗: 1834~1849, 24대) 9년 계묘(癸卯: 1843)년에 출생. 순종(1907~1910, 27대) 2년 무신(戊申: 1908)년 11월 9일 66세에 줄(卒). 묘(墓)는 현동(玄洞) 곤좌(坤座)다. 배(配)는 진성 이씨(眞誠 李氏)다. 父는 생원(生員) 은순(殷淳)이요, 묘(墓 )는 현동(玄同) 간좌(艮坐)다.
三十三世 제붕(濟鵬: 1847~1912, 65세 생) ㅡ 2남 2녀. 父,20세에 출생, 37세에 父 사망.
자(字)는 운거(雲擧)요, 헌종 13년 정미(丁未: 1847)년생(生)이다. 왜정(倭政) 3년 임자(壬子: 1912)년 2월 17일 66세에 줄(卒). 묘(墓)는 광달산(廣達山) 간좌(艮坐)다. 배(配)는 의성(義城)김씨다. 父는 승한(承漢)이요, 조부는 성노(聲魯)요, 증조부는 종주(宗周)요, 외조부는 안동권씨 재영(載永)이다. 을묘(乙卯: 1855)년生이고 45세 기해(己亥: 1899)년 十二月 十日에 줄(卒). 묘(墓)는 원음세곡(遠音細谷) 경좌(庚坐)다.
제홍(濟鴻: 1857~1929, 72세 생) ㅡ 1남 2녀. 덕교(德敎)子로出(책p. 322 : 대구, 찬기)
자(字)는 명거(溟擧)요, 철종(哲宗: 1849~1863, 25대) 8년 정사(丁巳: 1857)년에 출생하여 왜정(倭政) 20년 기사(己巳 : 1929)년 11월 30일 73세에 줄(卒). 묘(墓)는 만귀동(晩歸洞) 묘좌(卯坐)다. 배(配)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다. 무오(戊午:1858)년生이고 44세 신축(辛丑:1901)년 五月 一日에 줄(卒)하였다. 묘(墓)는 광달산(廣達山) 간좌(艮坐)다.
제학(濟鶴: 1862~ ? )ㅡ 1남 1녀. 응교(應敎)의 子로 出家 (page351)ㅡ 영주 노영
자(字)는 천거(天擧)요, 철종 13년 임술(壬戌:1862)년생(生)이며 忌는 4월 7일이다. 묘(墓)는 삼계동(三溪洞) 우곡(牛谷). 배(配)는 김녕 김씨(金寧 金氏)며, 父는 기호(己鎬)요, 忌는 二月二十九日, 묘(墓)는 담월성촌(淡月城村) 신좌다. 배(配) 려흥 민씨(驪興閔氏)며, 父는 영화(永華)다. 忌는 十月 七日이다. 묘(墓)는 재산(才山) 동향(東向),
제봉(濟鳳: 1865~1929, 64세 생)ㅡ 3남 3녀. 父,38세에 출생. 19세 때 父사망.
자(字)는 휘거(輝擧)요, 고종(高宗: 1863~1907, 26대) 2년 을축(乙丑: 1865)년생(生)이며, 왜정(倭政) 20년 기사(己巳: 1929)년 5월 22일(양력 6월28일) 65세에 줄(卒). 묘(墓)는 예안면(禮安面) 오천동(烏川洞) 군자리(君子里). 배(配)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 父, 김병영(金炳榮:金夏奎=족보명:호적명)과 母, 박춘근(朴春根)의 장녀(長女) 김운흥(金雲興:호적에 1877년생, 명치10년7월5일생,)며, 조부는 의근(義根)이며, 증조부는 참의(參議) 혁순(赫淳)이다. 왜정(倭政) 23년 임신(壬申: 1932)년 12월 8일 (양력 1933년 1월 3일)줄(卒), 묘(墓)는 오천동(烏川洞)이다. (기제일 음력, 조부 ~ 5월21일, 조모 ~ 12월7일)
갑오경장(1894년(고종 31) 7월 27일 ~ 1896년 2월 초, 19개월간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을 말한다).
갑오경장 이후로 전 국민이 성(性)을 갖게 되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호적이 정리 되면서 천민들은 주인의 성을 쓰거나 직업과 비슷한 발음으로 성을 등록 하여 전 국민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족보도 관청에서 문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도 한다.
三十四 世 상관(相觀: 1898~1955, 57세 생)ㅡ 4남 0녀. (戶籍 名은 金 太昌이다.)
자(字)는 해대(海大)요, 호적명(戶籍名)은 태창(太昌)이다. 광무(光武) 2년 무술(戊戌: 1898)년 3월 6일(음력)생(生)이며, 건국(建國) 8년 을미(乙未: 1955)년 4월 14일(음력) 58세에 줄(卒). 묘(墓)는 국영곡 손좌(菊永谷 巽座)다. 배(配)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 필남(弼南)이며 을사(乙巳:1905)년생 3월 12일(음력)이고 임신(壬申: 1992)년 1월 5일(음력)에 줄(卒)하니 향년 88세다. 父는 준모(俊模)요, 조부는 경연(敬淵)이며, 증조는 진굉(鎭宏)이고 을사생(乙巳生)이다.(기제일 음력, 백부,4.13, 백모, 1.4)
상암(相巖: 1903~1973, 70세 생)ㅡ 3남 2녀. ※ 우촌(牛村) 전진한(錢鎭漢:1901~1972)
호적명은 태암(太巖)이다. 광무(光武) 7년 계묘(癸卯; 1903)년 1월 12일(음력)에 출생(出生)하여 건국 26년 계축(癸丑:1973)년 10월 12일(음력) 71세에 줄(卒). 묘(墓)는 예안면(禮安面) 군자리(君子里). 배(配)는 낙안 오씨(樂安 吳氏) 분연(分淵)이며 갑인(甲寅:1914년) 4월 12일생(음력)이고 기묘(己卯: 1999)년 5월 2일(음력)에 줄(卒) 하니, 향년 86세다.父는 승목(承睦)이요, 주부는 희검(熙謙)이며, 증조부는 태기(泰基)요, 외조부는 진주하씨(晉州河氏) 경노(景魯)며, 갑인(甲寅) 四月 十二日生이다. 묘(墓)는 쌍분(雙墳)이다. (기제일 음력, 숙부,10.11, 숙모, 5.1)
상오(相五: 1920~1976, 56세 생)ㅡ 4남 4녀. 父,55세에 출생. 9세에 父,12세에 母사망.
왜정(倭政) 11년 경신(庚申: 1920)년 12월 26일(음력 11월 17일. 호적:18년11월17일)에 안동군(安東群) 예안면(禮安面) 삼계동(三溪洞)에서 출생(出生) 하였고,
을미(乙未:1955)년 3월 강원도(江原道) 태백시(太白市)로 이주(移住). 대한 석탄 공사(大韓石炭公社) 장성 광업소(長省鑛業所)에 입사(入社)하여 근무(勤務: 10년) 하였고, 건국(建國 : 대한민국 1948년) 29년 병진(丙辰 : 1976)년 11월 3일(양력, 12월 23일) 새벽 자택(自宅)에서 향년(享年) 57세에 줄(卒)하였고. 묘(墓)는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군자리(君子里) 이다.
배(配)는 영천 이씨(永川 李氏)로 父, 1898년 무술(戊戌)생 이유덕(李裕悳)과 母, 선성이씨(宣城李氏=禮安李氏) 1899년 기해(己亥)생 이연(李淵:1899~1969,3,16.死)의 무남 2녀(無男 二女)중 차녀(次女)로 무진년(戊辰年:1928년1월22일)생 이차남(李次南: 호적에는 28년3월10일로 기재 됨)이며 음력(陰曆)으로는 1927년 12월 30일 정묘생(丁卯生)이며, 장녀(長女)는 1920년 경신(庚申)생 이분남(李分南)이고, 부군(夫君)은 경주이씨 1919년 기미(己未)생 이인희(李仁熙)이다. (예안의 옛 지명이 선성이다). ※.大正(대정, たいしょう) : 1912∼1926(14년)
※.호적에는 대정십년(大正十年=1922) 5월27일로 기록. 金 濟鳳과 金 雲興의 4남 相五로 記載.
(제봉 30세-①, 33세-②, 38세-③, 42세-④, 45세-⑤, 55세-⑥을 출생하였음.)
34世 = (3남 3녀)ㅡ① 현이(賢伊 : 1895, 乙未 生ㅡ봉화 금 씨, 금 직기(琴 稷基 : 1881, 辛巳 生), ② 상관(相觀 : 1898, 戊戌 生), ③ 상암(相巖 : 1903, 癸卯 生), ④ 점현(点玄 : 1907, 丁未 生ㅡ진성 이 씨 이 중하(李中河 : 1882,壬午 生), ⑤ 월현(月玄 : 1910, 丙戌 生ㅡ선성 김 씨 김 정진(金正鎭 : 1908. 戊申 生), 운상(雲相.1917년4월22일생,1918년12월6일 사망. 호적상 근거임) ⑥ 상오(相五 : 1920, 庚申 生) 순이다. (재봉 사망시 나이: 34세,31세,26세,21세,19세,9세)
三十五世 노경(魯慶: 1945~ )ㅡ 2남 0녀. 父,24세에 출생, 31세에 父,사망.
자(字)는 노학(魯學)이고, 호(號)는“돌다리, 석교(石橋)”다. 1945년 2월 4일, 을유(乙 酉)년生 (음력 1944년 12월 22일, 甲申 生)에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천전 동(川前洞) 내앞에서 출생(出生), 임진(壬辰: 1952)년 봄 오천동(烏川洞:우무실)으로 이주(移住) 하여 계사(癸巳:1953)년에 예안 초등학교(禮安初等學校)에 입학(入學).
그 후 을미(乙未:1955)년 3월, 강원도(江原道) 태백시(太白市) 장성동(長省洞: 和光 洞)으로 이주(移住)하여, 장성 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3학년에 전입(轉入)하였고 기 해(己亥:1959)년 2월에 제 20회 졸업(卒業), 동년3월 태백중학교(太白中學校) 입학 (入學). 임인(壬寅:1962)년 2월 제 13회 졸업(卒業). 동년 3월 태백 공업 고등학교 (太白工業高等學校) 전기과(電氣科) 입학(入學), 을사(乙巳:1965)년 2월 제12회 졸업 (卒業). 병오(丙午:1966)년 7월 26일 대구(大邱) 50사단(五十師團) 신병(新兵) 훈련 소(訓練所) 1중대(一中隊) 입대(入隊: 6주 훈련). 원주(原州) 통신 훈련소(通信 訓練 所) 16주 교육(敎育) 주특기(主特技) 713, 무선전신(無線電信) 32기(期) 수료(修了), 정미(丁未:1967)년 1월 화천군(華川郡) 명월리(사창리)에 육군(陸軍) 제 27사단(師 團) 79연대(聯隊) 2대대(大隊) 본부(本部) 중대 통신(通信) 소대에서 근무(勤務) 하 였고, 무신(戊申: 1968)년 7월 9일 월남(越南) 파월(派越), 십자성(十字星) 사령부(司 令部) 5통신대대(5通信大隊) 본부중대(本部中隊) 작전계(作戰係: 敎育係)로 근무 중, 기유(己酉:1969)년 5월 하사(下士)로 진급(進級)하였고. 1969년 8월 30일 귀국(歸 國)하여 15일 휴가 후 제대(除隊). 당년(當年: 己酉) 10월 15일 대한석탄공사(大韓石 炭公社) 장성광업소(長省鑛業所)에 입사(入社)하였고, 신해(辛亥:1971)년 3월 11일, 경북 금능군 남면 운남동(종상)에 진주강씨(晉州姜氏) 무오생(戊午生) 강환철(姜煥 哲:1918~1958)과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신생(庚申生) 김계남(金季南:1920~2009)의 2남 4녀(장녀 정자, 장남 외규, 차남 제규, 차녀 정선, 3녀 정희, 4녀 정연)에 차녀 (次女) 무자(戊子: 1948)년 12월10일생(음력, 11월 10일) 강정선(姜貞仙)과 약혼식 (김천에서)을 하고 동년 11월 23일 김천 이화예식장에서 결혼하였다.
경진(庚辰: 2000년) 6월 30일 대한석탄공사에서 정년퇴직(停年退職: 30년 8개월 근 무)하였고, 신사(辛巳:2001)년 12월 10일부터 영동선(嶺東線) 철도(鐵道)터널(총 굴 착거리 약, 18km)공사(工事)에서 일해 토건(一海 土建 : 굴착 거리 약 6km)에 화약 류(火藥類) 관리(管理) 책임자(責任者)로 정해(丁亥: 2007)년 2월(5년 2개월)까지 근무(勤務)하였다. 그리고 2009년 9월 3일 태백 화약 상사에 취직하여 화약류 운반 책임자로 근무하여 2010년까지 근무하였다.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1897~1990)
※중수(中樹)박정희(朴正熙:1917~1979), ※현석(玄石) 최규하(崔圭夏:1919~2006)
※김영삼(金泳三:1927~ ), ※후광(後廣)김대중(金大中:1926~2009).
※김종필(金鍾泌:1926~ ). ※일해(日海) 전두환(全斗煥:1931~ ),
※노태우(盧泰愚:1932~ ). ※노무현(盧武鉉:1946~2009),
※이명박(李明博:1941~ ).
노삼(魯三: 1947~ ) ㅡ 2남 0녀. 父,27세에 출생, 29세에 父, 사망.
자(字)는노형(魯亨)이요, 1947년 10월 1일 정해년생(丁亥年生), 음력(陰曆) 8월 17 일 생(生)이다.
1955년 3월 장성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입학(入學), 1961년 2月 第 22回 졸업(卒 業), 동년(同年) 3월 태백중학교(太白中學校) 입학(入學), 1964년 2月 第15回 졸업 (卒業), 동년(同年) 3월 태백공업고등학교(太白工業高等學校) 기계과(機械科) 입학(入 學) 1967년 2月 第 14回 졸업(卒業)하였고.
1971年 2月 2日 안동(安東) 36사단(師團) 훈련소(訓練所) 입대(入隊)하여 1974年 3 月 병장(兵長)으로 제대(除隊)하였고 1976年 4月 13日 대한석탄공사(大韓石炭 公社) 장성광업소(長省鑛業所) 기계부(機械部)에서 군무(勤務)하다가 1998年 11월 17日 명예퇴직(名譽退職) 하였다.
병진(丙辰: 1976)년 음력(陰曆) 3月 13日 충북(忠北) 영동(嶺東) 김해김씨(金海金 氏) 소용(小龍)과 정씨(鄭氏) 옥남(玉南)의 1남 4녀에 2녀 계사(癸巳: 1953)년 10月 18日生(음력, 9월 11일) 윤순(允順)과 결혼(結婚)하였고,
정사(丁巳: 1977)년 1월 23일(음력, 1976년 12월 5일, 丙辰生,)에 장남(長男) 현 웅(鉉雄) 출생(出生) 하였고, 무오(戊午: 1978)년 7月 19日(음력, 6월 19일)에 차 남(次男) 현섭(鉉燮) 출생(出生) 하였다.
은자(銀子: 1950~ ) ㅡ 1남 0녀. 父,30세에 출생, 26세에 父, 사망.
1950년 4월 14일 경인생(庚寅生), 음력(陰曆) 2월 27일 생(生)이다.
무술(戊戌:1958)년 3월 장성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입학(入學). 갑진(甲辰:1964)년 2月 第 25回 졸업(卒業)하였으나, 가정(家庭) 형편(形便)으로 진학(進學)을 못 하고 양장(洋裝) 재단(裁斷) 학원(學院)을 수료(修了)하여 양장(洋裝) 기능공(技能工)으로 일 하였다. 1976년 음력, 3월 28일 진성이씨(眞城李氏) 병술(丙戌: 1946)년 4월 3 日生(음력, 3월 2일) 이동대(李東大)와 결혼(結婚)하였고, 정사(丁巳: 1977)년 2月 25日(음력, 1월 8일)에 장자(長子) 이영정(李泳政)이가 출생(出生)하였다.
노훈(魯勳: 1953~ ) ㅡ 1남 2녀. 父, 33세에 출생, 23세에 父, 사망.
자(字)는 노효(魯効)요, 1953년 8월 29일 계사생(癸巳生), 음력(陰曆) 7월 20일 생 (生)이다. 1961년 3월 장성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입학(入學), 1967년 2월 第 28回 졸업(卒業), 동년(同年) 3월 태백중학교(太白中學校) 입학(入學), 1970년 2월 第 21 回 졸업(卒業), 동년(同年) 3월 태백공업고등학교(太白工業高等學校) 기계과(機械科) 입학(入學), 1973년 2월 第 20回 졸업(卒業). 1973年 3月 3日 논산훈련소(論山 訓 練所) 第 30연대(聯隊) 2중대(中隊) 입소(入所), 6주(周 훈련) 교육후(敎育後) 1군단 (軍團) 1공병(1工兵) 여단(旅團) 113대대(大隊) 본부중대(本部中隊) 정보작전과(情報 作戰課) 근무(勤務)하였고, 1976年 1月 31日 제대(除隊)하였다.
병신(丙申: 1956)년 6月 30일생(음력, 5월 27일생), 안동김씨(安東金氏) 목형(睦涥) 과 김해김씨(金海金氏) 출이(出伊)의 2남 3녀에 장녀(長女)숙희(淑姬)와 결혼(結婚). 무오(戊午:1978)년 12月 4日(음력,11월 4일) 장녀(長女) 현주(衒姝) 출생(出生), 경 신(庚申: 1980)년 5月 10日(음력, 3월 27일) 차녀(次女) 현진(衒稹) 출생(出生), 임술(壬戌年:1982)년 10月 28日(음력, 9월 12일) 장자(長子) 준성(埈成) 출생(出生) 하였다.
노석(魯碩: 1956~ ) ㅡ 1남 1녀. 父,36세에 출생, 20세에 父, 사망.
자(字)는 노진(魯振)이요, 1956년 5월 20일 병신생(丙申生, 음력(陰曆) 4월 11일)이 다. 1962년 3월 장성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입학(入學), 1968년2월 第 29回 졸업 (卒業). 동년(同年) 3월 태백중학교(太白中學校) 입학(入學), 1971년 2월 第 22回 졸 업(卒業). 동년(同年) 3월 태백공업고등학교(太白工業高等學校) 전기과(電氣科) 입학 (入學), 1974년 2월 第 21回 졸업(卒業).
갑인(甲寅: 1974)年 4月 9日 육군 하사관 학교(陸軍下士官學校 入學) 입대(入隊)하 여 졸업(卒業) 했고, 일반 하사관으로 근무 하다가 경신(庚申:1980)年 8月 30日 제 대(除隊)하였다,
경신(庚申: 1980年 12月 7日 대한석탄공사(大韓石炭公社) 장성광업소(長省鑛業所) 전기부(電氣部)에 입사(入社)하여 근무중, 무진(戊辰: 1988)년부터 노동조합(勞動組 合) 전기부(電氣部) 대의원(代議員)으로 수년(數年) 활동(活動) 하였다.
갑자(甲子: 1984)年 1月 8日,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에 살던 경 주손씨(慶州孫氏) 손진용(孫晉龍)과 봉화금씨(奉花琴氏) 금분기(琴忿其)의 4남 4녀에 서 차녀(次女) 경자(更子:1960)년 5月 2日生(음력, 4 월 7일), 승란(承蘭)과 결혼(結 婚)하였고, 갑자(甲子: 1984)년 9월 14일(음력, 8월 19일) 장자(長子) 현민(鉉珉) 출 생(出生). 병인(丙寅: 1986)년 12月 2日(음력,11월 1일), 장녀(長女) 지영(智英) 출생 (出生) 하였다.
옥선(玉仙: 1958~ ) ㅡ 2남 0녀. 父, 38세에 출생, 18세에 父, 사망.
1958년 7월 28일 무술년생(戊戌年生), 음력(陰曆) 6월 12일 생(生)이다.
1966년 3월 장성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입학, 1972년 2월 第 33回 졸업(卒業),
同年 3월 장성여자중학교(長省女子中學校) 입학(入學), 1975년 2월 第 6回 졸업(卒
業), 1980年 9月14日 경남(慶南) 울산(蔚山)에 거주(居住) 하는 계사(癸巳: 1953)년
5月 18日生 (음력, 4月 6日) 밀양(密陽) 박씨(朴氏) 만춘(萬春)과 경주(慶州) 김씨(金 氏) 필남(必南)의 1남 4녀에 장자(長子) 계사(癸巳: 1953)년 5월 18일생,(음력. 4월 6일) 종환(宗煥)과 결혼(結婚)하였고,
신유(辛酉: 1981)년 6月 27日(음력, 5월 26일)에 장남(長男) 기철(基哲) 출생(出 生)하였고, 계해(癸亥: 1983)년 4月 3日(음력, 2월 20일)에 차남(次男) 기웅(基雄) 출생(出生) 하였다.
화자(花子: 1961~ ) ㅡ 2남 0녀. 父, 41세에 출생. 15세에 父, 사망.
아명(兒名)은 정희(正熙)요, 1961年 11月 11日 신축년생(辛丑年生), 음력(陰曆) 10 月 4日 생(生)이다.
무신(戊申:1968)年 3月 장성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입학(入學). 1974年 2月 제 35 回 졸업(卒業), 동년(同年) 3月 장성여자중학교(長省女子中學校) 입학(入學), 1977 年 2月 제 9回 졸업(卒業), 동년(同年)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慶安女子商業高等學校) 입학(入學), 1980年 2月 제 13回 졸업(卒業), 1981年 3月 안동 상지 전문대학(安東 上智專門大學) 입학(入學), 1983年 2月 제 11回 졸업(卒業)하였고, 1986年 3月 16 日 김천(金泉)에 파평 윤씨(坡平 尹氏) 상무(相珷)와 정선 전씨(旌善 全氏) 정자(貞 子)의 1남 6녀에 장자(長子) 무술(戊戌: 1958)년 2月 8日生(음력, 1957년 12월 20 일,丁酉生) 억희(億熙)와 결혼(結婚)하였고,
병인(丙寅: 1986)년 11月 18日(음력, 10월 17일)에 장남(長男) 재훈(在勳) 출생 (出生), 기사(己巳: 1989)년 3月 13日 (음력, 2월 6일)에 차남(次男) 재윤(在潤) 출생(出生)하였다.
순향(順香:1965~ ) ㅡ 1남 2녀. 父,45세에 출생, 11세에 父, 사망.
1965年 7月 17日 을사년생(乙巳年生), 음력(陰曆) 6月 19日 생(生)이다.
1972年 3月 장성초등학교(長省初等學校) 입학(入學), 1978年 2月 第 39回 졸업 (卒業), 同年 장성여자중학교(長省女子中學校) 입학(入學), 1981年 2月 第 13回 졸 업(卒業), 同年 장성여자고등학교(長省女子高等學校) 입학(入學), 1984年 2月 第 12回 졸업(卒業)하였고.
1990年 11月 11日, 신축(辛丑: 1961)년 11月 24日生(음력, 10月 17日) 단양 우 씨(丹陽 禹氏) 태성(泰星)과 경주최씨(慶州崔氏) 죽자(竹子)의 2남 3녀에 신축(辛 丑:1961)년 11월24일, 음력 10월17일 장남(長男) 정열(正烈)과 결혼(結婚)하여, 임 신(壬申: 1992)년 1月 6日, (음력 1991년 辛未 12월 2일)에 장녀(長女) 원교(源嬌) 출생(出生), 계유(癸酉: 1993)년 11月 24日(음력, 10월 11일)에 차녀(次女) 연성(姸 誠) 출생(出生), 을해(乙亥: 1995)년 4月 21日(음력, 3월 22일)에 장자(長子) 선철(嫙 哲) 출생(出生)하였다.
三十六世 현철(鉉哲: 1972~ )ㅡ 2남 0녀.
1972년 12월 23일 임자년생(壬子年生). 음력(陰曆) 11월 18일생으로 강원도(江原 道) 태백시(太白市) 장성동(長省洞)에서 출생(出生). 기미(己未: 1979)년 3월 장성 초 등학교(長省初等學校)입학(入學), 을축(乙丑: 1985)년 3월 태백 중학교(太白中學校) 입학(入學), 무진(戊辰: 1988)년 3월 영주고등학교(榮州高等學校) 입학(入學), 신미 (辛未: 1991)년 3월 안동 상지 전문대(安東 商至專門大)입학(入學), 졸업(卒業)하고 계유(癸酉: 1993)년 육군 3사관학교(陸軍 三士官學校)입학(入學), 졸업(卒業)하여 소위(少尉)로 임관(任官)하였고,
무인(戊寅:1998)년 4월 12일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종만(朴鍾萬)과 진성이씨(眞城 李氏) 이호춘(李好春)의 1남 2녀에 장녀(長女) 계축년생(癸丑年生) 박경희(朴慶喜: 1973년 9월 6일. 음력(陰曆) 8월14일)와 결혼(結婚)하였고, 임오년생(壬午年生) 태 화(泰和: 2002년 3월 1일). 음력(陰曆) 1월 18일, 충남(忠南) 논산시(論山市) 연무읍 (鍊武邑)에서 출생(出生)하였고, 을유년생(乙酉年生) 승우(昇玗: 2005년 3월 28일. 음력(陰曆) 2월 19일), 서울 송파구(送波區) 거여동(巨閭洞)에서 출생(出生) 하였고, 무자(戊子:2008)년 6월 30일자로 대위(大尉)로 예편(豫編)하였다.
현욱(鉉旭: 1975~ )ㅡ 2남 0녀.
1975년 08월 26일 을묘년생(乙卯年生). 음력(陰曆) 07월 21일생으로 강원도(江原 道) 태백시(太白市) 장성동(長省洞)에서 출생(出生). 임술(壬戌:1982)년 3월 장성 초 등학교(長省初等學校)입학(入學), 무진(戊辰:1988)년 3월 태백 중학교(太白中學校)입 학(入學), 신미(辛未:1991)년 3월 황지고등학교(黃地高等學校)입학(入學), 을해(乙 亥:1995)년 3월 관동대(關東大) 환경공학과(環境工學課) 입학(入學), 신사(辛巳:2001 )년 2월 졸업(卒業)하였고, 을해(乙亥:1995)년 12월 21일 육군(陸軍) 논산(論山) 신 병(新兵) 훈련소(訓練所) 입대(入隊)하여 보병(步兵) 제8사단(第八師團) 16연대(十六 聯隊) 수색중대(搜索中隊) 근무(勤務) 하였고 무인(武人:1998)년 02월 20일 제대(除 隊). 갑신(甲申:2004)년 10월 태백시청(太白市廳) 환경보호과(環境保護課)에 근무 (勤務). 병술(丙戌: 2006)년 12월 24일 전주최씨(全州崔氏) 최명규(崔明奎)와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춘호(金春好)의 2남1녀에 경신년생(庚申年生) 최현숙(崔賢淑: 1980 년 06월 14일, 음력(陰曆) 04월 20일)과 결혼(結婚). 정해(丁亥: 2007)년 10월 01일(음력 08월 21일)에 태백시(太白市) 상장동(上長洞)에서 장남(長男) 주성 (柱成) 출생(出生)하였고, 경인(庚寅: 2010)년 05월 03일(음력 03월 20일)에 태백시 상장동에서 차남(次男) 태양(泰樣) 출생하였다.
三十七世 태화(泰和: 2002~ )
2002년 03월 01일 임오년생(壬午年生). 음력(陰曆) 01월 18일생(生)으로 충남 논산 시 연무읍에서 출생(出生)하였다.
승우(昇玗: 2005~ )
2005년 03월 28일 을유년생(乙酉年生). 음력(陰曆) 02월 19일생(生)으로 서울 송파 구 거여동에서 출생(出生)하였다.
※ 광산김씨의 14世 연(璉 :1215~1291, 양간공파 조)의 후손 21世 효로(孝盧 : 1454~1534, 예안파 조)의 손자 23世 부신(富信 :1523~1566, 양정당파 조)의 후손 34世 상오(相五:1920~1976)의 가승(家乘)계통(系統)을 상세하게 기록 하였으니 후손들은 보고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ㅡ 석교(石橋) 김노경( 金 魯慶) ㅡ
※ 광산 김씨 34세 상오 약력 (光山 金氏 三十四世 相五 略歷)
왜정(倭政) 경신(庚申) 11년(1920년) 12월26일(음력 1920년 11월 17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삼계동 이등리에서 예안파(禮安派) 양정당(養正堂) 후손(後孫)으로 태어나서, 왜정(倭政) 20년 기사(己巳 : 1929년 음력 5월 22일)에 부친(父親) 제봉(濟鳳)을 잃고, 임신(壬申 : 1932년 음력 12월 8일)에 모친(母親) 김운흥(金雲興)마저 잃으셨고, 12세 때 양친 부모(兩親父母) 다 잃으셨다.
그 뒤 22세 들던 신사(辛巳) 1941년 3월 5일 (음력2월8일) 삼계동(三溪洞)에서 영천(永川) 이(李)씨 차남(次南 : 1928년 1월 22일생, 戊辰 生. 음력은 1927년 12월 30일. 丁卯 生)과 결혼(結婚)하고 동년 12월 1일(음력 : 10월 13일) 신행=혼행(新行=婚行: 묵 신행은 형식적 이고 실지는 도신행이였다 함)하였고, 이듬해 1942년 봄 분가(分家)하여 예안면(禮安面) 천전동(川前洞 : 내 앞)으로 이주 하여 10년을 살면서 8남매 중 장남(長男) 노경(魯慶 : 1945년 02월 04일. 乙酉 生, 음력(陰曆)은 1944년 12월 22일 甲申 生), 차남(次男) 노삼(魯三 : 1947년 10월 01일. 丁亥生이며, 음력(陰曆) 08월 17일 생), 장녀(長女) 은자(銀子 : 1950년 04월 14일. 庚寅 生, 음력(陰曆) 02월 27일 생)가 태여 났다.
다시 1952년 봄에 오천동(烏川洞) 우무실로 이주(移住)하여 3년을 살면서 3남(三南) 노훈(魯勳 : 1953년 08월 29일. 癸巳 生, 음력(陰曆)은 07월 20일 생)이가 태어났고, 6.25 전쟁(戰爭: 1950년에 시작하여 1953년 07월 27일에 휴전 )이 끝나고 나라에서 전쟁으로 폐허(廢墟)가 된 국가(國家) 비상(非常) 복구책(復舊策)으로, 군(軍) 복무(服務) 나이 넘은 남자들을 소집(召集)하여 6개월~1년을 복무케 하였다. {보국대(保國隊)라 칭(稱)하였음}, 1953년 12월경에 소집(召集)되어 복무(服務)하고 1954년 (대략 8~9월쯤으로 예측 )에 제대(除隊) 하였다.
다시 이듬해 1955년 3월 강원도 삼척군 상장면 장성리(지금은 태백시 장성동)에 있는, 대한 석탄 공사 장성 광업소에 입사(1955년 3월)하여 금천갱(黔川坑)에 10여년(1965년 3월 자퇴)을 근무 하였고, 1976년 12월 23일(음력11월3일) 새벽 장성 화광동 자택(自宅)에서 줄(卒)하였고. 8남매 중 아래로 4명은 모두 장성 화광동에서 태어났는데, 4남 노석(魯碩 : 1956년 5월 20일. 丙申 生, 음력 04월 11일 생 ), 차녀 옥선(玉仙 : 1958년 07월 28일. 戊戌 生, 음력은 06월 12일 생), 3녀 화자(花子 : 1961년 11월 11일. 辛丑 生, 음력은 10월 04일 생), 4녀 순향(順香 : 1965년 7월 17일. 乙巳 生, 음력은 6월 19일 생)이다.
술을 좋아 해 즐겨 드셨고 동네 주위 사람들과는 가까이 친하게 잘 어울리고 지내는 낙천적 성격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친 주벽(酒癖)으로 인하여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그 영향이 컸었다. 이점은 하나의 흠이라 생각되었고 자녀들에게는 큰 교훈(敎訓)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울어졌던 우리 집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준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우리 후손들은 이를 계기로 하여 우리 가문(家門)이 옛날 같이 당당하게 다시 살아 갈수 있도록 모두 함께 힘 써 줄 것을 바란다.
2008년 7월 28일, 석교(石橋) 魯 慶
※ 선대 조(先代 祖)의 흔적(痕迹)을 찾아서
21世 효로(孝盧 : 1454~1534, 예안파 조)代에서 풍산현 도양동(풍천면 도양리)에 살다가 예안면 오천동 외내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1480년경 전후로 예상 됨) 어려서 부친 회(淮 : 26세 생)를 잃고 경산 현령 노응(盧 應) 외조부에 의하여 자라났고, 그 후 종조부 효지(孝之)에게 글을 배워 생원시에 합격(성종 11년,1480)하였으나 출사(出仕)에 뜻이 없어 초야에 묻혀 자적하였다. 公은 평소에 “적선여경(積善餘慶:선행을 쌓으면 자손에게 경사스러움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가문(家門)의 근본(根本)으로 삼았다.
그 후 25世 광수(光遂) 대(代)나 아니면 26世 관(琯) 대(代)에 예안면 오천동에 살다가, 예안면 삼계동(원음 골이라 전함)으로 이주 하여서 살았다고 한다. {24世 평(坪) 3세 때 부친(富信: 양정 당) 死, 25世 광수(光遂) 13세 때 부친(坪:극제) 死, 그래서 광수 代에 삼계동으로 이주 하게 된 것으로 예측 하여 본다}.
그 당시 어떻게 해서 삼계동으로 가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으로 들은 말이나, 나의 생각으로 짐작하기엔, 18世 조(祖) 무(務)가 고려 말~이조초기 한양서 안동으로 처음 내려 왔는데, 그 후손들이 이 지역에 자리 잡기에는 어려웠을 것이 다. 먼저 와서 살기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다른 여러 문중의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 았을 터이니, 뒤 늦게 살기 좋은 곳, 마땅한 자리, 찾아 나서다 보니, 예안면 오천동 외내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을 것이고, 여기서도 다시 찾아 나선 것이 예안면 삼계 동(원음골에 첫 정착 이라함)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이곳은 지금도 산골 오지로 그 시절엔 더욱 사람 살 곳이 못 되었을 것 같은데 그리 로 자리 잡았는지 의아하다. 29世 래익(來翼: 1741년생) 선조가 다시 오천동 외내 로 나와 살다가 1821년 1월 유언에 따라 묘는 삼계동 광달산에 모셨다고 전해지고, 31世 이유(頤儒:1806~1864)가 줄(卒: 죽을 줄)하여, 묘 자리(현 오천동 외내 공산 실 묘)주고 양자(鎭敎:설월당 타파로 양자 줌)를 주기로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갖고 32世 헌교(獻敎:1827~1884)는 오천동 외내를 떠나 삼계동으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고 전한다.그 뒤 왜정시대 말기 1942년 봄부터 다시 34世 상관(相觀)은 오천동 외 내로 이주 하여 살다가 줄(卒)하였고, 둘째 상암(相巖)은 천전동 내앞으로 이주 하 여 살다가 다시 삼계동 이등리로 이주 하여 살다가 줄(卒)하였고, 셋째 상오(相五)는 삼계동에서 영천이씨 차남(次南: 음력, 1927년 12월 30일, 丁卯生 이고, 양력 1928 년 01월 22일, 戊辰生)과 결혼(양력 1941년 3월 5일, 음력은 02월 08일)하여 동년 12월 01일 (음력 10월 13일 ) 신행하여 살다가 분가 하여 이듬해 1942년 봄, 천전 동(川前洞) 내 앞으로 이주하여 10년을 살면서 8남매중 위로 3남매는 천전동에서 태여 났고, 다시 1952년 봄 오천동 우무실로 이주하여 넷째 노훈이가 이듬해 태여 났다. 여기서 6.25사변으로 인하여 전쟁이 끝(1953년.7월.27일 휴전 협정)나고 나라 에서 보국대 (군 입대 나이 지난 남자)에 소집되어 (양력,1953년 12월경~1954년 9~10월경)다녀 와서, 이듬해 1955년 3월 강원도 태백으로 이주하여 대한 석탄 공 사 장성광업소에 입사하여 1965년 3월에 10여년(금천 갱)을 근무하고 퇴직하였으며 그 후 지금까지 태백에서 50년 반세기를 넘게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하여 내려오는 사실과, 그 년대로서 예측 가능하여 기 록 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2008년 7월 28일, 석교(石橋) 魯 慶 글.
※.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무왕에 대한 기록과 광산 김 시조 김흥광.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 저서 (총 73권) ~ 본관 경주, 호 뇌천(雷川). 활동분야 문학, 정치.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당시에 묘청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하여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삼국사기:김부식>는「삼국유사:일연」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사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역사서이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저자는 일연(一然 :1206∼1289)으로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정치적 흥망 변천을 기년체{紀年體=기전체(紀傳體),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서술한 삼국의 정사로 사회, 역사, 경제, 천문, 지리, 풍속, 예악, 전기 등 각 방면에 걸쳐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대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은 물론, 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위하여 힘쓰라는 공적인 윤리를 제시하여, 국가와 민족에 희생하는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조선사학회 간행본인 '교정삼국사기'를 저본으로 하고 지금까지 간행된 관계서를 참고로 하여 번역하였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고어투의 문체를 현대 감각에 맞도록 쉽게 풀어내었다. 편의를 위해 권별로 번역문 뒤에 원문을 수록하였다. [양장본]
※. 신라 김언승(金彦昇=41대, 憲德王)은 40대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 하였고,
김 명(金 明=44대, 閔哀王)은 43대. 희강왕(僖康王)을 죽이고 즉위 하였고,
김우징(金祐徵=45대, 神武王)은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즉위 하였다.
46대,문성왕{文聖王=경응(慶膺): 신무왕의 장자이고, 시조 흥광의 장형이다}.
※. 제220편 장보고, 김우징을 왕으로 세우다 ~{신무왕(神武王)=김우징(金祐徵)}
신라 42대 흥덕왕이 사망 했다. 그에게는 김헌정과 김균정 [金均貞, ? ~ 836] 이라는 두 명의 사촌이 있었다. 그런데 김헌정은 일직 죽었기 때문에 43대 김균정의 왕위 계승자로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막상 김균정이 왕위에 오르려 하자 죽은 김헌정의 아들인 제43대 왕(재위 836-838).김제륭(金悌隆)도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삼촌과 조카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흥덕왕에게는 김충공이라는 친동생도 있었다. 그 역시 일직 죽었는데 그 김충공의 아들이 바로 김명(金明:?~839)이다.
어쨌든 김균정과 그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무력충돌을 벌렸는데 시중이었던 김명은 아찬 이홍등과 함께 조카인 김제륭을 지지하였고 결국 그들이 삼촌인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희강왕이 된다. 그런데 희강왕이 즉위한지 3년째에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즉위시켰던 희강왕을 죽게 하였고 결국 김명이 왕위를 찬탈하여 44대 민애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왕권다툼에 희생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839 ~ 839)은 낙동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의지 하였고 왕위 쟁탈전에서 김균정의 편을 들다 부상을 입었던 무열왕계의 김 양은 뒷날을 기약 하며 도피하게 됩니다.
한편 청해진에서는 김명과 이홍(李弘)이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죽음으로 내 몰고 김명이 왕위를 찬탈 했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대 마침 당나라에서 장보고의 고향 후배이자 친구이기도 한 정년(鄭年)이 장보고를 찾아 청해진에 이르렀습니다. 정년은 장보고에게 크게 잘못(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큰 잘못을 저질러서 용서 받기 어려울 만큼의 잘못을 한 것으로 보임 )을 사과 하고 형님(장보고)의 처분에 따른다 했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정년과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 내막을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다툼을 하고 갈라선 정도가 아니라 둘 사이에 뭔가 큰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했다. 결국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초라한 행색으로 찾아온 고향 후배 정년을 넓은 아량으로 포용한다. 그런데 “장보고 정년 전”을 쓴 당대의 중국 문인 두목(杜牧)은 이때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정년을 용서하고 포용한 사실을 극찬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 고스란히 중국의 정사인 신당서 신라 전에 올라 있다. 시인 두목은 장보고가 정년을 용서 하고 받아들인 일을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곽분양이라는 사람이 사사로운 적대감을 떨치고 이임회라는 사람을 용서한 미담에 비유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칭송하고 있다. 두목의 “번천문집”에 실린 “장보고 정년전”의 해당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년이 장보고를 찾아 갈 적에 “에쿠~ 장보고가 신라 조정도 함부로 대하지 못 하는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이 말이지? 그런데 이 몸은 당나라 땅에서 끼니를 걱정 할 지경으로 천한 꼴이 되었으니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잘못을 빌고 항복을 한다면 과연 과거의 분노를 잊지 못해 나를 죽일 것인가?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이렇게 생각 했다.
그런데 과연 장보고는 정년을 죽이지 않고 그에게 중한 임무를 맡겼다.
그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장보고가 정년을 용서 하고 신임 한데 대해서 당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정년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곽분양이 이임회를 받아들이고 장보고가 정년을 받아들인 것은 인의(仁義)의 마음이 잡성(雜性)을 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로 인의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탁월한 통찰력이 없으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나라에 군자가 한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저 나라를 망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쓸 줄 안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이다.
아~~ 개인적인 원망으로 상호 해치지 않고 나라 일을 먼저 걱정한 사람으로는 진나라에 기해(祁奚)가 있었고 당나라에 곽분양이 있었다면 신라에 장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동이족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당시 중국의 시인이었던 두목이라는 사람은 정년이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에서 장보고에 의해 모든 것을 용서 받고 또한 중요한 임무 까지 맡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글로 썼을까? 하는 점입니다(친밀한 사이로서 자주 접하고 연락 되어 알았다고 본다)
정년을 맞이하는 연회석을 마련하고 장보고는 “청해진의 제장(諸將)들은 들으라. 오늘은 나에게 참으로 기쁜 날이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동무이자 혹은 아우로서 함께 지냈고 멀리 당나라에 까지 함께 건너가 동고동락 하던 사람이 불원천리 창해를 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 이 사람은 당나라의 무령군에서 활동하던 전년(鄭年)소장이다. 이제 내가 이 사람을 장군으로 임명 할 것이니 청해진의 제장들은 합심 협력하기 바란다.”라고 하며 “이 자리는 멀리서 온 내 아우 정년을 환영하는 주연이니 많이들 마시고 흥겹게 즐기도록 하라. 김 공(우징: 희강왕 김재륭과 왕위 쟁탈전을 벌리다가 죽음을 당한 김균정의 아들로서 희강왕 세력의 보복을 피해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의탁하고 있던 김우징이다)께서도 한잔 드시지요.”했다.
이때에 자신을 김양(金陽:이태전 왕위 다툼이 있을 때 김우징공과 함께 김균정공을 옹립하려다 화살을 맞고 부상당했다는 사람이 청해진을 찾아 온 것이다)이라고 밝힌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대사와 김우징을 시급히 만나자고 한다. 대사와 우징은 반가이 맞이하니 김양이 가지고온 소식인즉슨 우징이 왕위를 찬탈하고 아버지 목숨을 앗아간 지금의 국왕(제륭)을 벼르고 있었는데 그사이 임금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상대등 김명(金明)과 시중 이홍(李弘)이 군사를 일으켜 왕의 호위병들을 모두 참살하자, 왕은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이곳으로 왔다 한다. 장보고는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면서 이 화란(禍亂)을 평정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리하여 김양. 김우징. 정년을 장수로 하여 5000명 군사로 서라벌로 가게 된다.(지금의 지명으로 보면 청해진의 완도를 떠나 해남, 나주, 광주, 남원, 대구, 경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왕을 죽이고 김우징은 45대 신무왕이 되었다.
※ 돌다리, 석교(石橋) 김노경(金魯慶)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중요(重要)한 것들이 많다. 그 중 하나 실패(失敗)없는 삶이 아주 중요 하다. 나는 돌다리(石橋)의 역할을 생각 해 본다. 조그마한 개울물로 인하여 서로 마주 보는 이웃과 이웃을 불편하고 왕래가 어렵게 만드는 개울물에 돌다리를 만들어 주어 편리하게 이용 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나도 남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싶어 석교(石橋)라고 하여 미래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이 되고 싶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속담 글이 급함을 자제시켜 실수 없게 하고 승승장구 하라는 뜻으로 받아 들여 마음에 와 닿았고, 한글로는 “돌다리”이고 한자(漢字)로는 “석교(石橋)”이다. 돌다리 속담의 의미는 “튼튼하게 놓여 진 돌다리라 하더라도 두드려 보고 안전할 때 건너라”는 세심한 주의를 말 해 주듯이 나는“돌다리의 세 글자 한자 한자를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삼세(三世)로 연관(聯關)하여 돌(石)다리의 돌(石)은 변할 수 없는 과거(過去)이고(돌=과거), 다리(橋)는 현재(現在)에서 미래(未來)로 마음먹기 따라 변(變) 할 수 있음을 생각해” 항상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에서 미래를 설계 하여 검소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좀 더 보람된 삶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돌다리, 석교(石橋)” 라 호(號)를 지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 보고 가라”했듯이 확실하게 알고 행(行)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성급(性急)함이 많은 나로서는 돌다리 속담의 가르침이 나에게는 좋은 교훈(敎訓)이 될 것이다. 나는 나의 호(號)에서 내 생(生)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거울이 될 것으로 생각 해 본다.
2008年 09月 日 石 橋 魯 慶 書
첫댓글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요... 한점 부끄럼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