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을 가진 물고기가 있다. 밥상 위에 친숙하게 오르는 조기가 그 주인공이다. 건강에 좋고 기운을 북돋워 준다고 해서 ‘조기(助氣), 머리에 돌 같은 이석이 두개 들어 있다 해서 ‘석수어’, 봄철 바닷물을 따라 연안에 회유해 온다는 뜻에서 ‘추수어’로 이름 붙은 조기 이야기를 따라가 본자.
우리나라에서 조기를 잡기 시작한 사람은 임경업 장군이다. 조선의 명장 임경업이 인조 21년 명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연평도에 이르렀을 때, 선원들은 명나라로 가는 것을 반대하며 식수를 모두 바다에 쏟아 버렸다. 하지만 임 장군은 식수와 소금과 반찬을 다시 배에 가득 싣고는 선원들에게 엄나무발을 만들어 해안 암석 사이에 꽂아 놓으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엄나무 발에 수천마리의 조기가 걸려들었다. 장군은 이 조기를 걷어 소금에 절인 다음 배에 싣고 명나라로 건너가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평도에는 5월이되면 임경업 장군 영묘에서 조기잡이 풍어를 기원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민속학자 주강현 씨의<조기에 관한 명상>을 보면, 조기는 황해 어민의 최대 생계수단으로 민중의 역사이면서 과학임을 알 수 있다. 몽뚱하고 못생긴 몸매. 큰 아가리. 황금색 비늘…. 황해 법성포 앞 칠산바다는 예로부터 조기가 많이 났는데, 수심이 5미터 정도로 낮아 알을 낳기에 좋고, 물에서 밀려나온 뻘 때문에 영양분이 많기 때문이다.
조기는 동중국해에서 겨울을 보낸뒤 4~6월쯤 산란하기 위해 연평도 근해까지 북상한다. 칠산 앞바다를 지날 때 알이 가득 차는데, 이때 잡은 것을 최고로 치고 맛도 가장 좋다. 조기잡이는 황해 민중들의 최대 생계수단이었고 어촌마다 파시를 형성하면서 조기의 일거수 일투족에 의해 어업생산력 수준이 결정되었을 정도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굴비! 영광 굴비를 으뜸으로 치는 이유는 칠산바다에서 잡힌 조기인데다, 소금 절인 조기를 걸대에 걸어 보름쯤 말린 뒤 다시 통보리 속에 넣어 저장하는 이 지방의 독특한 조기가 공술 때문이다. 굴비는 수분을 빼서 말린 것이어서 단백질이나 지방, 칼슘, 인, 철분, 무기질, 비타민이 조기에 비해 많다. 고려 인종 때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던 이자겸이 법성포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혼자 먹기 아까울 만큼 감칠맛 나는 생선이라 ‘석어(石魚)’라는 이름을 달아 임금께 진상했다고 한다. 또 자신이 결코 비굴하지 않다는 뜻을 담아 ‘굴비’라고 했다고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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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이 분명하고 도드라진 비늘,뭉툭하고 불쑥 튀어나와 못생긴 가분수형 머리,빼곡히 알이 차서 임신 8개월쯤 된 것처럼 더부룩한 배,짚새기로 엮은 굴비두름,.
예의를 갖추는 식탁에서는 빠지지 않았고 일찌기 한민족으로부터 절 받는 고기로 행세해온 '조기',드디어 인문학의 뭍에 올랐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1.2'에서 질퍽한 입담과 해학적 필치로 양반문화에 가리워진 성과 농경문화에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민속학자 주강현씨(경희대교수).우리 것에 대한 그의 호기심이 이번엔 흑산도에서 북쪽 가도에 이르기까지 1년동안 50여개의 섬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조기에 관한 명상-황금투구를 쓴 조기를 기다리며'(한겨레신문 출판사)를 내놓게 만들었다.
저자는 흑산도에서 시작하여 가도에 이르기까지 조기가 다닌 길을 따라가며 고전과 신화,섬 풍속과 고기잡이법,조기에 대한 선조들의 기록,조기에 얽힌 민중의 정서,어촌에 드리운 역사의 그림자 따위를 낱낱이 기록하였다.
고등어(공지영) 연어(안도현) 홍어(김주영)가 최근 뜨고 있다지만,거기에 담긴 인문학적 깊이와 맛은 조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조기는 황해의 어종이다.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수 억마리의 조기떼가 회유하며 토해내는 울음소리를 적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전국에서 수천 척의 조기잡이 어선이 연평도 앞바다에 모여 출어 고사를 지냈다.
연평도 앞바다의 배들은 굿당의 임경업 장군에게 풍어를 이루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냈다.황해의 섬들마다 그를 기리는 당집을 만들고 그의 영정을 붙이고 풍어를 기원했다.민중들은 일개 무장을 민중의 신 풍어의 신 조기의 신으로 재생시켰다.
조기가 처음 우리 해안으로 들어오는 곳은 처형의 땅이자 유배지인 흑산도.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전은 조기에 대한 단상을 남겼다.
조기는 가짜와 진짜의 차이를 중요시한다.부세 반어 백조기 강다리 참조기 등등.조기는 법성포를 거슬러 오르고 어민들은 띠배를 바다에 보내 맞이한다.
천수만에 이르러서는 바다에 돌과 살을 고정시켜 놓고 물 한 말에 고기 석 섬을 건져올린 사슴섬의 어살을 발견하게 된다.청나라 군인을 피하려고 조혼을 치르거나 쓰개치마로 얼굴 가리고 강화도 바다에 몸을 던진 우리의 조상들이 만든 것이다.
조기를 따라 북으로 오르던 길은 문득 끊겨 버린다.한반도가 동강나면서 뱃길도 끊긴 것이다.한반도는 다시 이으면 그만이다.그러나 한번 사라진 조기는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주남저수지의 환경조건이 악화되면서 천수만을 찾았으나 그나마 생존터를 잃고 삽교호 아산만 영산호를 방황하는 날새들처럼,오염된 황해에 이제 조기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조기의 연대기에 역사와 신화로 간을 맞추고,황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불로 구워낸 특이한 '조기 인문학서'이지만 그 뒷맛은 왠지 개운치가 않다.황금어장 황해안에서는 이제 조기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