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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마창진(창원,진해) 지역 봄꽃 기행 (2005년 4월 16 ~ 17일)'
'중편 ― 만덕사터(당간지주), 용원 유주암과 망상도,
용원 앞바다'
* 이번 답사 코스
'
서울
→ 천안역 → 부산역 → 해운대해수욕장
→ 장산휴양림 → 폭포사와 장산폭포 →
해운대 → 만덕사터 → 만덕사 당간지주 → 만덕동 알터유적 →
진해 용원 →
유주암, 유주비각, 망상도 → 진해시내 → 창원시내 → 마산시내 →
창원친구집(1박) → 불곡사 → 창원시내 → 서울'
* 본 글은 상,중,하 3부로 나눠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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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서 만덕사터를 가기 위해서는 우선 구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만덕2터널을 지나
첫번째 정류장(만덕교차로)에서 내려서
만덕1터널로 올라가는 만덕로를 따라 약 1km 정도를
올라가야 된다.
따뜻한 남쪽 나라라 그런지 날씨는 거의 여름 수준, 올라가는 내내 장산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땀을
처리하느라 나의 손은 조금도 쉴 틈이 없다.
덕분에 손수건은 금방 물수건처럼 변해버렸지.
부산에서도 제일 차량통행이 많다는
만덕2터널이 자주 정체 현상을 빚는지라
많은 차량들이 1터널로
우회 운행을 하는데 특히 대형화물차들의 통행이 빈번하여
인도도 따로 없는 그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불안하던지.
그 불안을 무릅쓰고 계속 길을 올라가니 완전한 시골분위기가 펼쳐진다.
만덕이란 동네가 대단위 아파트 및 거주단지로 인구가 꽤 많지만 만덕1터널 주변
금정산(金井山) 자락은
아직도 완전한 전원(田園)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렇게 15분 정도를 오르니 '병풍사입구'라는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그 부근에 만덕사터와 석불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도로 맞은편에는
만덕사터 당간지주를 알리는 이정표가 각각 보인다.
그래서 나는 당간지주를 먼저 볼 생각으로 이정표를 따라 내려가
보았으나
이정표가 나에게 장난을
걸었는지.
아니면 길 주변 집이나 공장 안에 꼭꼭 숨어버린건지, 당간지주는 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면서
주변을 살폈으나 역시 마찬가지..
그리하여 당간지주는 나중에 시내로 내려올 때 찾기로 하고
우선 산자락에 위치한 만덕사터를 찾아갔다.
▲ 만덕사로 가던 중 만난 징검다리
병풍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만덕사터로 가는 길은 2가지로
정류장 서쪽에 조그만 길로 가는 방법과
정류장 동쪽의 석불사로 올라가는 길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 중 전자(前者)의 방법이 제일 빠르고 간단하게 갈 수 있으며
후자(後者)는 빙 돌아가야 되는데
이정표가 주로 전자 대신 후자 쪽으로 세워져 있어
자칫 빙 둘러가기가 쉽다. 물론 나도 후자의 방법으로
가서 엄청 굴곡지게 갔었지
석불사로 가는 길을 버리고 절터로 가는 길목에 만난 징검다리로
아무렇게나 놓여진 돌 12개가 마치
1년 12달을 상징하듯 그렇게 누워있다.
나는 저 징검다리를 사뿐히 건너며 만덕사터로 계속 다가섰다.
▲ 만덕사터 뒷산
부산의 진산(鎭山) 금정산의 남쪽 자락으로
여기가 과연 부산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전형적인
산촌(山村)의 분위기를 간직한 곳이다.
그 옛날 만덕사는 지금은 집과 밭으로 개간된 저 드넓은 곳에 자리잡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했을 것이다.
♠ 오리무중에 쌓인 거대한 절터, 왕권분쟁의 휘말려 한평생 숨어 살아야 했던
어느 고려 황족의 애달픈 애환만이 남아 있는 ~ 만덕사(萬德寺)터
백두대간의 남쪽 끝으머리인 금정산(金井山)의 만덕1동 산자락에는 만덕사터라 불리는 드넓는 절터가 있다.
만덕사는 그 창건시기와 자세한 사적(事蹟)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절 경영에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거나 혹은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으로 짐작된다.
자칫 잘못했으면 이름 없는 절터로 남을 뻔했던 이 곳이 그나마 이름이라도 건지게 된 것은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만덕사의 존재가 아주 짧막하게 나와있기 때문인데
고려 28대 군주인 충혜왕(忠惠王)의
서자(庶子) 석기(釋器)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절이 바로 이 곳
만덕사라고 한다.
고려의 황족이 출가하여 머무를 정도라면 만덕사의 규모는 제법 컸을
것으로
산자락에 남아 있는
옛 만덕사의 흔적과 절터에서 거의 200m이상 떨어진 당간지주를
보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오랜 세월 쓸쓸히 터만 남아 있던 이 곳은 근래에 절터의 한쪽
구석으로
비록 가건물이긴 하지만
선원(禪院), 요사(寮舍) 등의 불전(佛殿) 3~4동을
세워 옛 만덕사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만덕사터는 부산지방기념물 3호로 지정되었다.
※ 만덕사터 교통편
* 부산시내버스 48,110,111번을 타고 병풍사입구에서 하차,
그러나 이들 노선은 배차간격이 대체로 20 ~ 60분을 넘어가므로
만덕2터널을 경유하는 버스를 타고
만덕교차로에서 1km가량 걸어올라가거나
만덕2동사무소에서 내려서 석불사 방면으로 올라가는 골목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 부산지하철 3호선 만덕역에서 석불사, 만덕1터널 방면으로 도보 15분
* 입장료 없음, 주차는 석불사로 올라가는 길목이나 만덕1동사무소에서 석불사로
통하는 골목에
하면 된다. 절터 앞까지는 차량 접근 불가
* 왕권분쟁에 휘말려 한 평생 숨어 살아야 했던 고려 황족 석기(釋器), 그는 누구인가? |
▲ 만덕사터
안내문, 그 안에 옥의 티 |
▲ 만덕사 금강문(金剛門) |
▲ 절터를 뒹굴고
있는 주춧돌들 |
▲
이렇게 보면 이 곳이 정말 절터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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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를 지키고 있는 누렁이와 온갖 개들 |
▲
만덕사 경내에 피어난 벚꽃 |
▲
가건물로 지어진 만덕사 선원(禪院) |
▲
거대한 석축 |
▲
동그란 모습의 절터 주춧돌 |
▲ 만덕사를 떠받치고 있는 아랫 석축 (동쪽) |
▲ 현재의 만덕사를
받치고 있는 아랫 석축 (서쪽) |
♠ 이보다
더 외로울 수 있을까? ~ 짝을 잃은 채 홀로 서 있는
만덕사터 당간지주(幢竿支柱) - 부산지방유형문화재 17호
만덕사터를 둘러보고 (솔직히 둘러 볼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다시
병풍사입구 정류장으로
나와 당간지주를 찾아본다.
이번에는 아까전 그 길로 내려가는 대신 만덕교차로 방면으로 나 있는 조그만 산길을
따라 내려가니
무슨 공장이 바라보이고, 그 공장의 뒤쪽에 외로이 서 있는 돌기둥 하나가 보이니 그 기둥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 옆에는 만덕1동 주민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당(城隍堂)이 자리해 있어
짝을 잃은 당간지주의
오랜 벗 역할을 해주고 있다.
▲ 만덕사터 당간지주
안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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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홀아비처럼
쓸쓸히 서 있는 당간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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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의 오랜 벗, 성황당(城隍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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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는 보통 절
입구에 세워 이 곳에 부처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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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의 아랫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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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와 당산(堂山)나무 - 이렇게 보니 꼭 늦가을 분위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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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서 바라본
당간지주와 성황당, 그리고 나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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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에서 바라본 만덕2동 아파트단지와 금정봉 자락 |
▲ 만덕동 사기부락
알터유적 안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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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터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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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본 알터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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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터유적을 둘러보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한 폭의 그림처럼 |
만덕사터와 당간지주, 보너스로 만난 알터유적 바위까지
이렇게 만덕동 지역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만덕동 시내로 내려간다.
내려갈 때는 아까전 만덕교차로로 가지 않고 만덕2동으로 통하는 길로
내려왔는데 이렇게 가니 금방 만덕2동 시내가 나온다.
만덕2동 정류장에 도착하여 수령 300년의 정자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다가
사상(沙上) 방면으로 가는
부산시내버스 169번을 타고 서부터미널로 가는데
얼마나 졸리던지 열심히 꾸벅꾸벅 한 끝에 서부터미널에
도착하여 내린다.
여기서 진해의 동쪽 관문인 용원까지 시외버스 표(1400원)를 사들고
10~15분 간격으로 있는 진해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낙동강 하구언(河口堰)을 건너
을숙도, 명지, 녹산을 지나 용원입구에서 내린다.
나는 용원에 정차한다고 하여 용원동 시내를 경유할 줄 알았는데
시내까지는 안들어가고 그냥 외곽 도로
정류장에만 정차하고 그냥 가버린다.
용원입구 정류장에서 10분을 걸어들어와 용원시내에 이르렀고
다시 용원선착장 방면으로 무엇인가를
찾기위해 계속 내려가던 중,
용원 장터 맞은 편, 바닷가에 안내문이 하나 보인다.
그것은 내가 찾고 있던 유주각, 망상도, 유주암에 관한 문화재 안내문..
그럼 이 유주각, 망상도는 어떤 곳일까?
♠ 용원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만 섬 망상도(望像島)와 유주암(維舟岩) ~
그 곳에 숨겨진 옛 가야국(伽倻國)의 이야기.. - 경남지방기념물 89호
진해와 부산 사이에 자리한 용원(龍院, 행정구역상 진해시)이란 동네 앞바다에
망상도(望像島)라 불리는
나무와 바위로 가득한 조그만 섬이 하나 떠 있고 섬의 남쪽에는 유주암(維舟岩)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10년 전 만에 해도 용원 앞바다는 제법 수심이 깊어 어항(漁港)의 역할을 했으나
녹산산업단지 개발로
부산 명지동부터 용원 인근까지 앞바다를 메워버려 용원 앞바다는
거의 육지처럼 변해버렸고 그에 따라
망상도는 무늬만 섬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이제는 용원 시내에서 걸어가 들어갈 수 있게 된 섬, 망상도,
별로
보잘 것 없는 이 섬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경남지방문화재로 특별히 지정되었을까?
이 섬을 비롯하여 용원시내 주택가에 있는 유주각에는
옛 가야국(伽倻國)의 숨겨진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 육지와 붙어버린 망상도의 모습
육지와 망상도 사이로 검은 갯벌이 펼쳐져 있어 이 곳이 예전 바다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 변한연맹(弁韓聯盟)의 하나인 구야국(狗倻國, 지금의 김해)의 땅에서
가야국을 세워 제위(帝位)에 오른 김수로(金首露)는 이역만리 떨어진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이는데 그 허황옥 일행이 도착한 곳이
바로 이 곳 용원이라고
한다.
▲ 망상도의 북쪽 부분
검은 갯벌이 섬 주변을 에워싸고 있고, 섬의 북쪽 부분에는 가지각색의
모양을 한 바위들이 오랜 세월을 그렇게 누워 있다.
섬 건너로 보이는 곳은 망상도를 육지로 만들어버린 주범, 녹산산업공단,
허황옥이 정말로 인도 아유타국에 왔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한나라를
무너뜨린 왕망(王莽) 세력이 후한 광무제(光武帝)에 쫓겨 배를 타고 가야로 망명했다는 이야기
서부터 마한(馬韓)이나 낙랑(樂浪)지역에서 왔다는 이야기, 요즘은 학계 일부에서 진짜로
인도에서
남방불교를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정말 다양한 학설이 나와 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허씨 세력의 정체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대답은 없다.
나 역시 허황옥 관련 이야기에 대해 나름대로 할 이야기가 많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고,
그냥 망상도에 얽힌 전설에만 충실할까 한다.
▲ 망상도의 남쪽 부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허씨 일행은 돌배를 타고 왔다고 한다.
그들은 파신(派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고자 배에 파사석(婆娑石)을 잔뜩 실고 왔는데
가야에 도착 후
그 돌로 탑을 만드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김해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역삼각형 모양의 탑,
파사석탑이라고 한다.
허씨가 돌배를 타고 용원에 도착하기 얼마 전, 김수로왕은 천리안(千里眼)을 가졌는지
아니면 신의
계시(啓示)를 받았는지 그들이 용원으로 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그들을 영접하기 위해 친히 이 곳
망상도로 이어(移御)하여 남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배필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이 섬의 이름이 망상도가 되었다고 한다.
망상도는 즉 무슨 형상을 기다린다. 바란다는 뜻으로 그 형상은 자신의 비(妃)인 허황옥을 뜻한다.
허씨 일행이 이 곳에 당도하자 김수로는 장막으로 임시 환영행사장을 만들어
그들을 예로써
맞이하였고 곧바로 김해로 돌아와 성대하게 국혼(國婚)을 치렀다고 한다.
◀
신비로워 보이는 섬 망상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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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설은 가야의 얼마 남지 않은 이야기 중에 하나로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 전설에 숨겨진 뜻을 찾거나, 해석을 해야 되는데 아마도 허씨라 상징되는 어느 세력이
이 곳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것 같으며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군주로 상징되는 김수로(金首露)는
그 세력을
여기서 맞이하여 자신의 신하로 받아들이고 그 세력을 이끄는 우두머리 집안의 여인을
맞이하여 서로
혈연관계를 맺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 섬 주변을 뒹굴고 있는 바위들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긴 바위가 꽤 신비로워 보인다.
▲ 망상도 섬 내부
나무와 바위들로 가득할 뿐 특별한 것은 없다.
▲ 유주정에서 바라본 망상도
▲ 망상도 남쪽의 유주암(維舟岩)
원래는 망상도 앞에 떠 있던 독자적인 섬이었으나 지금은 망상도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유주암 주변으로 갯벌과 바위들로 가득하여 예전 이곳이 섬이었구나를 느끼게 해줄 뿐이다.
▲ 유주암(維舟岩) 위에 세워진 비석
유주암에 대해서 안내문이나 책에 의하면 배를 뒤집어 놓은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그렇게까지 보이지는 않는데, 그새 유주암의 외모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유주암은 허황옥 일행이 용원에 도착한 후, 그들이 탄 돌배가 파도에 뒤집혔는데
그것이 돌로 변하여 지금의 유주암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전설 역시 후대 사람들이 꾸며낸 것이다.
허씨로 상징되는 그 세력은 아마도 저 유주암에 배를 댄 것 같은데
유주암에서 유(維)에는 '붙들어 매다' '굵은 줄로 잡아 매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배가 뒤집혔다기 보다는 배를 댄 곳으로 보면 될 것이다.
▲ 망상도에서 바라본 유주암(維舟岩)의 뒤쪽
유주암과 망상도 사이로 바위와 돌들로 가득하다.
유주암 너머로 보이는 섬은 가덕도(加德島)
▲ 망상도를 바라보며 서 있는 유주정(維舟亭)
근래에 만든 정자로 망상도와 유주암, 그 주변에 검은 갯벌, 갯벌 너머로
녹산산업공단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망상도와 유주각을 둘러보고 용원 시내로 들어와 주택가로 조금 들어오다 보면
조그만 비각을 하나 만날 수 있는데 이 비각이 바로 유주각(維舟閣)으로
비각 안에는 망상도와 유주암의 이야기를 기록한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다.
▲ 유주각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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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벽돌 담장으로 둘러쌓인 유주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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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주각 내(內)에 갇혀 있는 비석(碑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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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주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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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상도, 유주암, 유주각 교통편 |
~~ 아쉽지만 중편은 여기서 끝.
~~
* 중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5월 17일
* 중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5월 24일
* 중편 수정,보완,편집 ~ 2005년 5월 25일 ~ 8월 11일
* 공개일 - 2005년 8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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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첫댓글 만덕터널지나 병풍사가는 길에 있는 만덕사지....70년대 생각이 납니다. 미륵석불ㄴ님 손을 거치니 이렇게 훌륭한 답사자료가 되었습니다.잘 보고갑니다.
읽어주셔서 그저 황감할 뿐입니다.
부산 30여년전 단 한번간 기억이 희미합니다.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이 부산으로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