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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삼국연의[三國演義]
☆ 딸의 부탁 ☆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행복한 일을 맞을까?
느끼기에 따라서는 작은 일도 크게 느낄 수가 있는가 하면, 큰 행복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엄청난 기쁨에 젖어 있다.
남들에 비해서 아주 빠른 만 4세에 한글을 읽기 시작한 나의 큰 딸은 한동안 우리가 생활이 어려워서 쌀 살 돈이 없었어도 책을 사주면서 키웠는데, 당시 아내의 말에 의하면 출판사에서 오는 책장사(?) 아줌마들이 우리집에 오면,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때에 따라서는 주인공 아이를 보고 가겠다고 하였다는데....
책을 판매하러 다니는 아줌마 부대들의 판매 전략은 집요하여, 일단 집에 들여 놓으면 그들의 마술에 걸려서 책을 사지 않고는 견디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그 아줌마 사원도 우리 집에 오면 더 이상 팔 책이 없음에 놀라고, 이렇게 많은 책을 읽는 아이가 누구냐면서 보고 돌아 가겠다고는 눌러 앉기가 일쑤 였다는 말씀이다.
또,
학교에 다닐 때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 말씀이, 공부시간에 공부는 안고 책을 본다고 하시기에 주의를 주겠다고 아내가 그러니 오히려 나두라고 하셨다던가? 이유는 시험을 보면 늘 일등이었으니까! 이다.
6학년 때의 선생님은 대학생 아들을 둔 할머니 선생님이었는데, 그분 말씀이 대학 다니는 자기 아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칭찬을 하였던 아이인데.....그 아이가 고국에서 초등학교만을 졸업하고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황해를 건너 중국의 칭다오로 왔는데, 어렵게 학교에 입학을 시켰더니 학교를 가지 않겠다 하며, 한문 - 중국어라고 하지 않음 - 은 배워서 뭐하냐고 따지고 덤비기도 하더니, 급기야는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였었다.
더 큰일은 아내까지 나서서 찬성을 하면서 거들고.... 나는 학교를 졸업을 하여야 동창도 있고 친구도 있는 것이니 다녀야 된다고 하였지만 모녀의 파상공세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좌우간
그 아이는 지난해(2002년) 여름에는 고입검정 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 금년 봄에는 대입 검정 고시를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는 내년에는 제3국으로 유학을 가겠다는데....
지금 그 큰 딸은 고국에 들어가 있다.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 아이가 삼국지를 페러디해서 인터넷에 띄웠고, 그 것이 출판사의 눈에 들어 몇 명의 튀는 작가(?)들과 함께 삼국지를 출판 하자는 제안이 왔기 때문에 협의 차 들어 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제 부녀[父女] 작가가 될 것이다.
☆ 우리집의 삼국지 - 나와 삼국연의 ☆
중국 고전문학 4대 명저의 하나인 삼국연의를 나는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한 번도 완독을 한 적이 없다.
학교 다닐때에는 방학중에 학교의 추천도서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 가기 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기 전,
이외에도 인생의 결정적인 중요한 전환점에서 읽혀 진다는 삼국지.
1800여년 전의 역사적 사실과 민간에 널리 퍼진 이야기들을 모아서 나관중이 엮은 삼국지는 지금 중국에서보다는 오히려 한국에서 더 읽혀 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삼국지를 읽지 안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송사를 벌이지 말라는 말도 있고....이렇게 삼국지는 우리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많은 대기업들의 필독서로 지정이 되었는가 하면, 선생님과 선배들이 추천하는 제1순위 도서로 선정이 되기도 하는 삼국지. 그러다 보니 우리는 주위에서 삼국지를 3번 이상 읽었다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가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삼국지는 530여년 전에 우리 땅에 들어 온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10~15년을 주기로 시대에 맞게 각색이 되어 새로운 작가에 의하여 다시 쓰여지고는 하였다.
박종화, 정비석, 이문열, 황석영 등의, 국내에서 유명한 당대최고의 작가들도 삼국지를 엮어 내기도하여 30여종이 넘는 삼국지가 있다.
이에 따라서 독자의 나이나 취향에 따라서 선택의 폭이 넓기도 한데, 어린이를 위하여 만화로 엮어 읽기 쉽게 재미를 더한 삼국지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만화이기도 하지만, 영어나 일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엮어진 것도 있으며, 애초에 영어 공부를 초첨으로 맞추어 회화 테이프까지 곁들여 엮어진 삼국지까지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이름 있는 출판사나 작가는 반듯이 삼국지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필수사항이 되다보니,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삼국지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에 관련한 책은 1000여가지가 넘는 것으로 파악이 되기도 하였다는데....
즉,
삼국지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지침서에서부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을 중심으로 풀어 놓은 책이 있는가 하면, 이미 알려진 삼국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온 이야기를 발췌하여 엮은 것도 있으며, 기업 경영의 마인드를 가지고 보라고 엮어 놓은 삼국지도 있고, 삼국지를 빌어 어려운 한자 공부에 도움이 되라고 엮어 놓은 삼국지 관련서도 있다.
또한,
그 주요인물들의 전략과 경영철학을 조명하여 엮은 삼국지도 있고, 삼국지에 나오는 각 인물들의 출생지, 관직명, 소속, 유명한 일화, 평가 등등을 엮어 놓은 것도 있으며,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유적 속에 깃 든 영웅들의 삶과 혼을 읽어 내려고 한 것도 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삼국지 속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각색해 놓은 것도 있다.
이 외에도 뒤집어 보는 이나 거꾸로 보는 이라고 하여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근거를 끄집어 내어 강조하여 풀어놓은 것들도 많이 있다.
이렇게
삼국지는 시대에 따라서 해석이 달리되기도 하고,
엮는 사람의 의도가 많이 반영된 것이 있는가 하면,
같은 책이라도 읽는 사람의 주관적 평가에 의하여 그 뜻이 달리 해석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삼국지는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집에도 몇 질의 삼국지가 있다.
금성 출판사의 소년소녀 원색 드라마 삼국지가 있고,
애니북스가 만든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가 있으며,
민음사에서 발간한 이문열 평역의 삼국지가 있고,
서울 문화사의 영웅 삼국지가 있는데, 이 것은 저자가 기타가타 겐조라는 일본인이고 유현종이 감수하고 이계성이 옮긴 것이다.
또,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판한 황석영 옮김의 삼국지가 있다.
위의 책들은 모두 10권짜리로 구성이 되어 있다.
이밖에도
예림당에서 나온 어린이용 그림 삼국지가 있는가 하면, 몇 개의 삼국지가 더 있으니 이는 우리 집에서 가장 똑똑한 큰 딸 만이 볼 수 있는, 중국 섬서[陝西]성 서안[西安]시에 있는 삼진[三秦]출판사에서 발간한 한문(!)으로 된 삼국연의[三國演義]이다.
금년 나의 생일 선물로 받은 '중국의 4대 명저'로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西遊記]
시내암[施耐庵]과 나관중[羅貫中]의 수호전[水滸傳]
조설근[曹雪芹]과 고악[高 -물수리악(e)]이 지은 홍루몽[紅樓夢]과 함께 출판된
나관중의 삼국연의[三國演義]이다
** 우리집에는 총 9질의 삼국연의가 있다. **
그 밖에도 삼국지 관련서적으로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삼국지를 읽은 작가 김문경이 짓고 사계절에서 만든 '삼국지의 영광'이 있으며, 서동훈, 김운회, 장정일이 200여권 이상을 참고하여 3여년을 연구하여 같이 쓰고, 김영사에서 출판한 '삼국지 해제'도 있다.
또,
오수형이 편역하여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제갈량 문집 '난세를 건너는 법'이 있으며, 작가 유재주가 쓴 소설 천년의 끝에서 만나는 위대한 지성 '공명의 선택'이라는 장편소설로 웅진 탓컴에서 엮은 것도 있다.
이외에도 더 있지만 각설하고....
큰 딸은 대화 할 상대가 없다면서 얼마 전부터 나에게 자꾸 삼국지를 읽으라고 종용을 하였었다. 아빠의 체면에 보기 싫다는 말은 하기 어렵고, 몇 번이나 이것 저것 읽으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도대체가 나와 맞지(?)를 안아서 보다가는 놓기를 몇 번... 그러나 이번에는 서둘러서 꼭 삼국지를 읽어보아야겠다고 다짐을 해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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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글은 고국에서 제3차 자전거 장정을 할 때에 그 아이의 책 출판 소식을 듣고 칭다오로 돌아 온 후인 2003년 7월 29일에 남겨 놓은 것입니다.
2004년 3월 23일 옮김. 2004/04/05 마무리.
[1-2] 콩밍[孔明]은 어디에...
☆ 콩밍[公明]을 찾아서 ☆
제 4차 자전거 장정으로 칭하이[靑海]성의 씨닝[西寧]에서 깐수[甘肅]성의 뚠황[敦煌]을 지나 위그르[維吾爾-Uygur]의 우루무치[烏魯木齊]까지의 네 번째 4천5백여리의 자전거 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서 휴식을 하고 있던 중, 큰 딸의 말없는 압력과 4차 장정을 같이 했던 서월[西越-黃凱]의 어디로든 한 번 더 가자는 열화같은 성화로 콩밍[孔明-諸葛亮의 號]의 고향[故居]를 찾아 나섰는데....
한편,
이는 자전거 여행을 좋아 하는 내가 삼국지[三國演義]. 특히 소설중에 주인공 콩밍[孔明]에 관심이 많은 "딸을 위한 자전거 여행"이라고 핑계가 되기도 하고, 더구나 여행중에 내가 뭔가를 발견하면 이미 삼국지와 콩밍에 대하여 도사(?)가 된 딸과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기도하여 떠나는 것이다.
출발하기 전에 "콩밍의 자취를 더듬어..."라는 주제에 어울리게 여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사전 준비 작업으로 작가 유재주가 쓰고 웅진 닷컴에서 엮어낸 소설, "천년의 끝에서 만나는 위대한 지성 '공명의 선택'"을, 침도 바르지 말고 접어서 표시도 내지 말고 보라는 딸의 엄명대로 조심조심 열심히 읽었지만, 떠나기 전에 전체 3권으로 된 것을, 제2권의 절반도 못 읽고 길을 떠났다.
딸에게 물어서 알아낸 콩밍의 고향은 삼국지의 관련서들에 나오는 대로 연주의 낭야[琅 ]]국이라는 사실밖에는 모르고 있었다. 떠날 때가 다 되어서야 현지인 서월이 인터넷으로 알아 내어 나에게 보고 하기를 싼둥[山東]의 린이[臨沂]라고 하였다.
그 곳은 내가 96년 처음으로 중국에 왔을 때에 아내를 따라서 갔었던 칭다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이기도 한데...
그래서 지도로 찾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알아 보았더니 ...
"낭야"라는 이름은, 처음으로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맡아 놓은 자기 땅의 이곳저곳 돌아 다니는 것을 즐겨 하던 진시왕이 동쪽으로는 어디가 끝인가? 하고 다녀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칭다오에 사는 많은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백주[白酒]가 바로 랑야타이[瑯 臺]라는 술이라는 사실이다.
이 술은 병의 모양에 따라서 모양과 포장갑의 색상도 다향하고, 도(%)수도 여러 가지로 선택의 폭도 넓을 뿐만아니라 값도 비교적 저렴하며, 마셔 본 사람들이 한결 같이 말하기를 마신후에 뒤끝도 깨끗하다고 한다.
본론으로 돌아 와서
이제 낭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 그 곳은 칭다오시에 속하는 지아오난[膠南]시의 낭야[琅 ]진이며, 진시왕이 다녀갔다고하여 "낭야대"라 이름 붙여, 기념 공원을 조성해 놓은 곳은 칭다오에서 반시간정도 배를 타고 지아오저우[膠州]만을 가로 질러 황다오[黃島]구에서 내려, 차를 타고 백여리를 르짜오[日照-남향]쪽으로 내려가는데, 엔타이[煙臺]에서 시작되어 샹하이[上海]까지 연결이 되는 204국도의 287km지점에서 동쪽으로 5십여리를 더 들어가면 닿을 수가 있다.
이렇게 낭야국이 아니라 지아오난[膠南]시에 속하는 진[鎭:우리의 행정단위로는 면에 해당됨]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전에 낭야국인 콩밍의 고향으로 가자면...
그 곳에서 남쪽으로 100여리를 더 내려가면 르짜오[日照]시의 똥깡[東港]구이고, 완전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200여리를 가는 중에 쥐[Ju]현을 지나면, 내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에 가 보기도 했던 농촌 이난[沂南]현이다. 그 곳에는 콩밍의 동상[銅像]이 있기도 하다.
또 한가지 방법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엔타이[烟臺]에서 엔윈깡[連雲港]까지 연결이 되는 통싼[同三]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르짜오 까지 한시간을 달리고 르짜오에서 똥밍[東明]까지 연결이 되는 르똥[日東]고속도로를 타고 88km를 달려 이난[沂南] 나들목에서 빠져 나가면 바로 콩밍의 동상을 만날 수가 있다.
++ 르똥[日照~東明] 고속도로 - 이난[沂南] 나들목에서 빠지면 바로 쭈꺼량[諸葛亮] 동상을 만날수가 있다. 이난은 르짜오에서 약 88km이다. ++
그 동상 앞에서 기념 사진을 몇 장 찍었으면, 더 얻을 정보도 볼 구경거리도 없으므로 곧 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70여리를 내려가면 쫜뿌[石+專(塼)埠]진이다. 진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난 콘크리트로 잘 포장이 된 길을 따라서 르짜오시에서 시작되어 서쪽[東明]으로 나가는 고속도로 때문에 생긴 다리 밑까지 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을 달리면 만나는 동네가 이름만 보아서는 콩밍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쑨쟈황투안[孫家黃田+童]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그 곳이 콩밍의 고향인데, 지금 지어 놓은 기념관은 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는 쑨위엔지[孫元吉] 노인이 말했다.
그 박물관 울안에는 엄청 굵고 큰 은행나무가 한 그루서 있는데, 그 나무 때문에 콩밍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 곳에 기념관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그 곳에서는 몇 천년전의 질그릇 조각도 나왔다고 하여 한가운데 모아 놓고 망을 씌워 놓기도 하였다.
다시,
그 곳에서 서북쪽으로 중국 어느 농촌 어느 길에도 심어져 있는 은사시나무가 두 줄로 높게 자란 흙길을 따라서 공동묘지를 지나고, 고속도로를 밑을 토끼굴로 지나서 이르면 그야말로 콩밍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꾸쥐[故居]가 있는데, 가을 걷이가 끝이 난 황량한 벌판에는 바짝마른 옥수수대가 서 있는 귀퉁이에 초라한 돌비석을 하나 세워 놓아 그 곳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지혜의 군사[智慧的軍師]"이며 "최고의 충신[最高的忠臣]"으로 불리는 쭈꺼리양[諸葛亮]이 태어난 곳이라고 알리고 있다.
++ 이 비석 옆의 딸기밭이 바로 당대 최고의 재상 쭈커콩밍이 잉태되고 태어난 곳이다. ++
2004년 3월 23일 옮김.
[1-3] 자전거를 타고...
☆ 낭야로 가는 길 ☆
앞의 소개는 지도를 보고 설명을 한 것이고....
어느 길로 어떻게 찾아 갔을까?
이번에 우리는 콩밍이 태어난 고향을 찾아 가면서, 같이 간 서월의 요구로 그의 고향도 들렸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거쳐 돌아가기도 하였다.
첫날(2003년 11월 18일)은
칭다오[靑島]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204국도를 타고 지아오저우[膠州]의 지홍탄[棘洪灘]에서 점심을 먹고 쭈청[諸城]시에 닿았다.
중국의 경제가 발전을 한 만큼보다 훨씬 더 많은 차가 오가면서 짙은 매연을 뿜어내니 별도의 대책 없이 실컷 마시면서 이미 깜하게 어두운 17시 22분에 91.67km를 달려 푸지[鋪集]진의 반점[飯店]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은 조죽과 시금치 삶아 무침, 고춧가루를 한 알갱이도 넣지 않고 끊인 배추 돼지고기국 이었다. 친절한 옆집의 젊은 새댁이 앞의 가게에서 사온 쓰촨[四川]특산이라는 고춧가루는 겉에서 보아도 기름에 파묻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것인데, 친구와 같이 오라니까 혼자 따라온 자칭 나의 "영원한 동지" 윤상미 여사의 성화로 뚜껑을 열고 말았다. 내가 그 것을 먹지 못하자 이번에는 자전거를 타고 온 외국인이 보고 싶어 호기심으로 따라온 사진관집 아줌마가 무짠지를 가져왔지만 역시 입맛에 맞지를 않아서 먹지를 못하였다.
새벽녘인데, 서월의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깨어 뒤척이다가 이어폰을 더듬어 찾아 귀에 꽂으니 소리가 없기에 배터리를 갈고 어쩌고 하다가 1134Khz에 흐르는 고국의 소리를 들었다. "오늘밤도 눈물에 젖어 춤추는 캬츄샤의 ...."하는 노래인데 안타깝게도 웅웅하는 소리와 잡소리로 인해 더 이상 듣지는 못하였다. 한 밤중에 중국땅에서 우리 노래를 한 소절 듣는 감회는 잠결임에도 짜릿한 전율로 온 몸에 전해져 왔다.
둘째(2003년 11월 19일)날
서월의 변함없는 엿 고는 소리(?)에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홍포[紅布]. 즉, 현수막을 하나 써서 들고 가야 하는데, 추진위원장(?) 감투를 쓰고 있는 서월이, 바쁘게 새로 여는 공장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는 내게 전화를 하여 "내일 출발하자"하여 벼락치기로 떠나는 바람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여관 앞의 작은 문방구에서 어렵게 잉크와 붓을 샀고, 집에서 가져온 홍포에 서예를 한다는 서월에게 부탁을 하여 몇 자를 썼다.
한글로 쓴다면 "공명의 자취를 더듬어... "라고 쓰면 좋을 것이라고 이내 결정을 했지만, 알아 볼 사람이 없으므로 서월의 권유대로 심방공명고리[尋訪孔明故里]라고 써 서는 잉크도 마르기 전에 들고 나가 출발 전에 급하게 기념으로 한 장을 찍고 길을 떠났다.
** 심방공명고리[尋訪孔明故里]라고 홍포를 써서 들고 자세를 잡아 보았다. **
아침부터 날씨가 우중충하더니 가면 갈수록 날씨가 점차 흐려졌고, 급기야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비를 피하여 길가의 쑨펑지우루[順風酒樓]라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니 보일러를 돌려 놓은 따듯한 방안으로 안내가 되었다.
매미와 찬용[蠶 ]이라 부르는 누에 뻔데기와 녹색식품이라는 벌레[豆蟲], 생선등의 내가 먹기 곤란한 점심이 차려졌고, 나는 먹는둥 마는둥 하고는, 이내 길을 나서 비를 맞으면서 르짜오[日照]시 경계를 넘어 들어 갔는데, 우리가 가는 길은 서월의 고향으로 가는 길로 비포장의 연속이었다.
늦지 않은 저녁, 그러나 짧은 가을해는 제집으로 돌아가고 이미 어둠이 내린 17시18분, 4시간 43분을 자전거를 타고 78.4km를 이동하여 싼둥의 전형적인 농촌마을 쉬멍[許孟]진에 도착을 하였다.
** 엽기적? 몬도가네식 점심 **
** 오전에 내린 비로 자전거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
단 하나 밖에 없다고 하여 선택의 여지 없이 묵게 된 여관은 마침 개고기를 가공하는 집으로 앞 마당의 큰 우리에 수십마리의 개들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가는 차가 없는 시골 벽촌이라서 조용한 밤을 보낼것이라는 기대가 깨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개집)는 크지만 잡혀온 개들이 많아서 꽉찼기에 좁아 터진 개장에는 죽음의 공포에 젖은 개들이 저마다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 우리가 묶은 방은 뒤쪽이라서 편안히 밤을 보냈고,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으려고 나갔더니 이미 견공들은 숨쉬기를 멈추고, 윤기 없는 털옷도 벗어 놓고, 거꾸로 높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 3인의 숙련공들이 각자의 일을 분담하여 열심히 개의 털옷을 벗기고 있다 **
** 그들은 콘베이어 벨트 라인에 서 있는 노동자들과 같이 능숙한 솜싸로 눈 깜짝 할 사이에 한마리씩 깨끗하게 벗겨 나갔다. **
☆ 먼저 들린 서월의 고향 ☆
셋째(2003년 11월 20일)날
서월[西越]은 어버지가 교직에 계셨기에 자라면서 이사를 자주 하였고, 그렇기에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 광법위하게 분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너무도 어렸기에 알아보는 이가 없지만,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함자를 대자 동네어른들은 이내 기억을 더듬어 냈다. 그렇게 지나가는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먹고 쉬면서 많은 시간이 흘러 갔다.
이어 닿은 곳은 웨이팡[ 坊]시 우리엔[五蓮]현 쏭바이[松柏]진 똥바이[東柏]묘의 서월이 태어난 동네이다. 하지만, 중국 역시 새마을사업(?)으로 80년대까지 주택 개량사업은 계속되어, 이전의 집들은 모두 헐리고 공산주의 나라 답게 지금과 같이 크기나 모양이 하나 같이 일률적인 일자형 집들이 들어 앉음으로하여 그가 태어났다는 집터만 대충 이쪽이다는 것만을 확인하며 아쉬움을 달래야 하였다.
** 씨위에[西越]의 고향 - 웨이팡[ 坊]시 우리엔[五蓮]현 쏭바이[松柏]진 똥바이[東柏]묘의
앞길에서 **
그렇게 여유만만 더듬으면서 길을 가니 동짓달의 짧은 해는 이미 떨어져 잠이 들었고, 깜깜한 길을 더듬으면서 겨우 56.99km를 탔으며, 17시 50분이 되어서야 르짜오시 똥깡구에서 오는 335선 도로의 길가에 있는 싼좡[三莊]진의 싼더리[三得利] 여관에 도착을 하였다.
너무 늦어서 서둘러 저녁을 주문했지만, 손님이 많아 그런가 한참이 지나서야 주문한 감자볶음, 배추국, 큰 날파[大蔥], 사마귀가 포함된 큰 메뚜기 튀김, 돼지고기볶음[京醬肉絲]등등이 상위로 올라 왔다. 식후에는 낮에 씨위에[西越]의 고향에서 그의 친구인 왕싼리양[王善良]이 싸준 사과까지 까서 먹으니 배는 든든하였다. 식사비는 만만치 않은 37위엔이었고 여관비로 30위엔을 주었다.
☆ 콩밍의 라오쟈[老家]를 향해... ☆
넷째(2003년 11월 21일)날,
비가 온 뒤라 날씨가 몹시 차가워졌고, 서둘러 길을 떠나 점심 때 쯤에 쥐[ju]현에 닿았고, 206국도를 타고 내려 가다가, 린이[臨沂]시 경계에 이르렀다.
해가 이미 내려 앉을 준비운동을 할 때쯤에 띵수웨이[丁水]진에 닿았고, 16시 10분 206선 국도 480km지점의 주유소에서 우회전을 하여 가로 질러 달리는 중에 해는 이미 서둘러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오래전에 산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 없는 남북으로 난 철길아래의 공사중인 비포장길을 지났고, 이수웨이[沂水]현에서 오는 큰길 227 성도를 만났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인 17시 15분이었다.
바로 꺼꺼우[葛溝]진에 닿았고, 하나 뿐이라서 사치스럽게 선택의 자유를 운운할 여지도 없이 지저분하기로는 두말이 필요치 않은 공수오[供鎖]빈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 꺼꺼우[葛溝]진 삼거리에서 찍은 안내 이정표 - 이대로 따라가면 10km가 넘고 비포장 농로로 가면 차뿌둬 **
다섯째(2003년 11월 22일)날,
아침에 일어나니 몹시 추웠다.
어젯밤에 뒷간에 다녀 올 때에 보니, 빨래줄에 걸려 있는 옷이 얼었기에, 날씨가 추워 진줄 알고, 떠나기 전에 아내랑 따푸위엔[大福苑-대형 창고형 백화점]에 가서 산 얇은 하늘색의 내의를 꺼내어 입었더니 메이꽌시[沒關係-괜찮다.]였다.
아침은 밀가루를 기름에 튀긴 여우쵸[油條]와 빠바오쭈[八寶粥-팔보죽]로 대충 밀어 넣고 길을 나섰다. 꺼꺼우를 벗어나자 만난 것이 물이 맑고 깨끗하며 양도 많은 이허[沂河]였고, 쫜뿌[石+專 埠]진의 소재지를 지나 30여리를 달려 드디어 도착 하였다.
해가 긴 여름에 칭다오를 떠나 바로 달려 온다면 하룻만에 닿을 수가 있는 거리인데, 이렇게 저렇게 들려 돌아오느라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 맑은 물이 풍부한 이허[沂河]를 건너기 바로 전의 안내판 **
지금은 당연히 모든 주소가 바뀌어 산동성 임기시 기남현 전부진 손가황탄[山東(싼둥)省 臨沂(린이)市 沂南(이난)縣 石+專埠(쫜뿌)鎭 孫家黃田+童(쑨쨔황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마침 큰 버스를 타고 단체로 온 관광객이 있어 그들의 틈에 끼어 들어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왜 왔는지 모를 그들을 뒤로 밀어 내고, 뚜렸한 목적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고생하며 온 우리는 여봐란 듯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70이 넘은 쑨위엔지[孫元吉]관장의 자세한 설명을 마음 놓고 훔쳐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서툰 현지어 때문에 제대로 들어 내지도 못하면서 돌아가면 딸과 대화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두귀를 쫑끗세우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의 후손이 한국으로 건너가서 제갈[諸葛]씨가 퍼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족보를 파 넣은 비석과, 뒤 후원에는 건립당시에 찬조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있었는데, 한국에 있는 그의 후손과 언론사에 적을 둔 한국인 몇 사람의 이름이 파여 있어 나의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한동안 그의 꾸쥐[故居]에서 사면을 둘러보고, 하늘도 쳐다보고 했지만, 풍수지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할 말이란?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콩밍의 유적지임을 알리는 그 돌비석 앞 멀지 않은 거리에, 동에서 서로 고속도로가 닦여 많은 차들이 쏜살 같이 달리고, 왼쪽으로 그 만큼의 거리에는 맑고 풍부한 이허[沂河]의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풍요로운 농촌! 그져 그런 중국의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이라는 말씀이외에는 ....
** 기념관 앞 주차장에 있는 돌비석 - 글이 짧아서...**
** 기념관 대문 - 홍등은 시내에 있는 술집 쭈꺼리양따지우띠엔[諸葛亮大酒店:제갈량대주점]의 광고이다. **
++ 기념관에 모셔진 콩밍의 상[像] ++
++ 이 비석 옆의 딸기밭이 바로 시대 최고의 재상 쭈커콩밍이 잉태되고 태어난 곳이다. ++
쭈꺼콩밍의 기념관과 탄생지를 천천히 둘러보고 예정대로 린이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전에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넓은 국도에 붙어 이어지는 은사시 나무가 쭉 심어진 비포장의 농로를 따라서 안으로 쭉 들어가면 어떤 마을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이번에 다 풀리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이허[沂河]를 건너서 좋은 길을 따라서 찾아 들어 콩밍의 꾸리[故里]를 모두 보고 나올 때는 바로 그러한 길로 나왔다.
즉,
곧게 뻗고 은사시나무가 길가 양쪽에 일렬로 심어진 흙길을 6km를 나오니 콩밍의 꾸쥐[故居]를 찾아 갈 때에 건넌 이허 다리가 있는 곳이었다. 바로 콩밍의 탄생지가 그러한 길의 안쪽에 다소곳이 박혀 있는 전형적인 중국의 농촌마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지혜의 군사[智慧的軍師]"이며 "최고의 충신[最高的忠臣]"으로 불리는 쭈꺼리양[諸葛亮]이 태어난 곳은 그의 명성에 비하여 그져 보잘 것 없는 전형적인 농촌에 불과 하였다.
큰 기대를 가지고 힘들게 자전거를 타고 찾은 여행자가 느끼기에는 너무도 섭섭할 정도로.....
2004년 3월 23일 옮김. 2004/04/05 마무리.
[1-4] 욍희지[王羲之]를 찾아서....
☆ 왕씨즈[王羲之]의 고적[古跡]을 향해... ☆
허난[河南]이 지리적으로 중간에 있고, 젖줄인 황하를 끼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원임을 자처 하는데 비하여, 싼둥이 동양사상의 중원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의 심오한 철학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다음 목적지로 잡은 린이[臨沂]는, 산동의 서남부 지방으로 베이징과 제2의 도시인 경제 중심지 샹하이를 잇는 징후[京 ]고속도로와 205, 206 310, 312등 몇 개의 국도와 여러 갈래의 성도[省道]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우리가 린이로 향하는 목적은 유사이래 동서고금을 통 털어 최고의 서예가라 일컫는 왕희지[王羲之]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린이는 그의 고향으로 그의 유적과 기념관이 있다기에 구경을 하기 위하여 페달을 돌려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동네의 이름에서도 알수가 있듯이 물이 풍부하였다.
가는곳마다 샘[泉]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골짜기에는 맑은 물[川]이 풍부하게 흐르고 있었다. 린이는 가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62.02km를 달려 17시17분에 왕희지의 고리[故里]에 도착을 하였다.
여섯째(2003년 11월 23일)날,
시의 남쪽에 있는 왕희지의 기념관은 넓기도 하고 잘 꾸며져 있기도 하였다.
연못과 대나무,
많은 그의 작품들....
잘 지어진 전각들....
많은 관람객까지....
아쉬운 것은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거의 다 와서 지아오저우[膠州] 못 미쳐 윤 상미의 자전거 바퀴가 터져서 때우려고 공구 가방을 열었다가 닫지 않고 오는 바람에 넣어 놓은 필름이 떨어져 나감으로 해서 그 곳에서 찍은 사진이 몇 장 않된다는 것이다.
** 왕희지 유적은 상대적으로 넓기도 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
가면서 일정이 많이 늦추어 졌기에 오면서는 서두르기로 하였다.
린이를 벗어 나기 전에 보기에 예쁜 사과가 나를 잡아 끌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3근(1.5kg)을 샀는데 내 주먹보다 큰 것으로 6개를 주었다. 맛은 색이 예쁜것보다 더하여 매우 상큼하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혀뿌리 아래쪽에서 신침이 돈다.
점심은 탕허[湯河]진의 허름한 식당에서 건두부 삶아서 볶아 무친 것과 가지볶음, 천하에서 제일 맛이 아니었던 탕수육에 끈기가 없고 퍼지는 설은밥을 얻어 먹었고.... 식후에는 앞만 보고 서둘러 70.84 km를 달려, 깜깜해진 뒤인 18시 10분에 팡치엔[坊前]진에 닿았다.
일곱째(2003년 11월 24일)날
나와 서월 그리고 자칭 "영원한 동지"임을 강조하는 윤상미 여사. 단 세명이기에 식구는 단촐하였다. 어디나 그렇듯이 린이를 떠난 뒤로는 이렇다 하게 보아야할 유적이나 관광지는 없었기에 진행은 빨리 되었지만, 힘든(?) 몇가지가 있어서 속도는 매우 느렸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바람으로서, 북풍이기에 차기도 하였지만 맞 바람이어 자전거를 타기에는 속도는 나지 않으면서도 많은 힘을 필요로 하였으며,
또 하나는
뚱땡이 씨위에의 자전거 타는 기력[騎力]이 별로여서 자꾸 떨어졌고, 떨어지면 그를 기다리느라고 많은 시간이 흐르고 하였다.
남은 하나는
여름이라면 사정에 따라서는 8시까지 타기도 하겠으나, 동지가 얼마 남지 않은 요즘은 해가 짧아질 대로 짧아져서 점심을 먹고나면 해는 벌써 서산으로 내리 꽂혀 여차하면 밤에 자전거를 타야 했다.
그런가 하면 화쉬에[滑雪-스키]할 때에 끼는 두꺼운 솜장갑을 끼었지만 손이 시려워서 고생이 배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윤여사의 바퀴가 두 번이나 "빵꾸"가 나서 때우면서도 열심히 달린 보람이 있어, 르자오를 지나서 지아오난[膠南]의 씬양[信陽]진에 닿은 시각은 이미 한 밤중 같은 6시가 넘었고, 달린 거리는 94.56km에 달했다.
여덟째(2003년 11월 25일)날
전날의 계획은 아침에 일찍부터 서둘러서 랑야타이를 들렸다가 황도에서 배를 탈려고 하였으나 오늘도 여러 가지 이유로 늦어 졌고, 해가 떨어지고 깜깜해진 뒤에 가까스로 칭다오로 돌아 오는 배를 탈 수가 있었다.
황다오 부두에서 배를 타기 전에 간단히 지아오즈[餃子-만두]로 요기를 하였고, 칭다오 부두에서 부터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려고 하였으나, 서월이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고 그답게 대단한 의지를 보여, 결국은 나도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이동을 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서월은 10가 넘어서 집에 닿았다고 한다.
92.87km를 달림.
2004년 3월 23일 옮김.
[1-5] 다음에는...
☆ 1차 마무리 ☆
삼국지 아니 쭈꺼콩밍[諸葛孔明]을 좋아하는 큰 딸의 덕으로 그의 고향을 다녀 왔다.
이 자전거 여행은 이번의 그가 태어나서 13세 까지 살았다는 린이로 끝이나는 것이 아니다.
2차로
다음에는 그가 성장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공부 하며 생활하였던 곳으로 유비가 세번이나 그를 찾아와서 삼고초려[三顧草廬-중국인들은 三顧茅廬라고 함]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롱쭝[隆中]. 즉, 후베이[湖北]성의 샹판[襄樊]이다.
또, 3차로
촉[蜀]나라의 수도이며, 그를 위하여 지은 사당 무후사[武侯祠-漢昭烈廟]]가 있기도 한 쓰촨[四川]성의 청두[城都]. 더구나 그 곳에는 유비의 무덤 한소열황제릉[漢昭烈皇帝陵]과 삼국시대의 유물을 전시해 둔 삼국문화랑[三國文化廊]과 진열관[陳列館]등도 찾을 것이다.
끝으로
서기 234년, 가을이 깊어가는 우쫭위엔[陝西省 岐山縣 五丈原鎭]의 전쟁터에서 위[魏]나라의 중달[司馬懿]과 전쟁을 벌이다가 숨을 거둔 웨이허[渭河]의 강가까지.... 더구나 그 곳에는 콩밍을 모신 사당[廟]과 박물관이 있으며, 그의 의관총[衣冠塚]도 있기에 꼭 방문을 할 예정으로 있다. 그 시기는 부정확하지만 나의 자전거 여행은 이렇게 4차에 나누어 진행이 될 것이다.
이번의 자전거 여행은 먹거리가 너무도 부족한 초라한 여행이었다.
총인원이 3명으로 너무도 식구가 적었기 때문이다.
양이 많은 중국요리는 최소한 장정 4명이 넘어야 이것저것 각자 하나씩 좋아하는 요리를 시켜 골고루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최소 공배수가 만들어 지는데, 그러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시킨 요리는 늘 숫자에서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뿐만아니라 싼둥의 요리는 차오차이[炒菜]라 하여 기름에 볶는 채소요리를 위주로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음으로.... 또, 같이 간 서월과 취향이 다름으로 해서.... 등등의 이유로 먹는 즐거움은 없었다.
이전에는 몇 천km의 장거리 자전거 여행을 많이 해 보았기에, 지도를 펼쳐 놓고 한 눈에 끝에서 끝이 다 보이는 짧은 거리의 여행이라 간단하게 짐을 꾸려서 길을 나섰다.
준비물은 속옷 한벌 양말두개, 그리고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카셑트에 날씨가 차 졌음으로 해서 특별히 겨울용 장갑과 내복을 준비했을 뿐 짐을 싣는 가방은 구하지를 못하기도 하였지만, 뒤에 짐받이는 있음에도 달지 않고, 짐을 배낭에 넣어 등에 메고 떠났다가 이전에 느끼어 보지 못한 그 중량에 사타구니가 아파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삼국지를 읽지 않으면 팔불출이로 몰아가는 경향이 많은 가운데 반하여, 이번의 여행을 하면서 길에서 만난 수없이 많은 현지인들은 쭈꺼량[諸葛亮]이 누구냐고 묻는 나의 물음에 대부분은 모르기가 일쑤이고, 겨우 들은 대답이 "그 사람은 역사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냐?"고 내게 되묻는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당과 국가에 충성하기 위하여 사상학습을 열심히 하고, 개혁개방후에는 돈을 쫒아가기에도 바쁜데, "그런 하찮고 쓸데 없는 일...." 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듯한 그들의 대범함(?)에, 힘들여 자전거를 타고 남의 역사 소설에 나오는 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를 뒤돌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2004년 1월 12일 칭다오에서 烘 轉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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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는 글
[1]
이 기행문을 마무리하기 전부터 1차 여행지를 다시 한번 더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이난[沂南]에 그의 동상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곳을 거쳐야 하고, 지난번의 여행 때에 찍은 필름을 잊어버림으로하여 다시 찍어야 하며, 랑야[瑯 ]대도 들려서 사진을 찍어 이 기행문에 첨부를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인화를 한 사진도 스캐너의 고장으로 같이 올리지 못함도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다음의 기회를 기약한다.
[2]
이번의 글을 쓰면서도 하찮은 일에 신경을 썼다.
랑야의 한자가 지도에는 琅王+牙+(우부방변:邑)라고 나오는데, 칭다오에 사는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술병에는 앞쪽에는 瑯王+牙+(우부방변:邑) 라고 인쇄를 하였고, 뒤쪽에는 지도와 같이 琅王+牙+邑라고 하였다. 어느것이 맞을까? 모두 상관이 없는 것일까?
이난[沂南]현 소재의 제갈공명 동상
++ 이난 에서 뵌 쭈꺼량 - 그런데 타고 다닌 수레가 휠체어 같이 이렇게 작았을까? 늘어진 옷 소매가 바퀴로 달려 들어 가거나 먼지가 많이 묻었겠다.! ++
++ 이 사진을 찍기 위하여 두번째로 자동차를 타고 찾아 간 날(2004/04/04), 마침 화사한 봄을 맞아서 쏟아져 나온 인파가 물결을 이루었고, 그들과 같이 따라 나온 장사꾼들과 먹고 버린 쓰레기들이 온 바닥을 덮어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
++ "공"사중이라서 "공"짜로 들어 갔는데, "공"장이 노는날이라 모든 "공"인들이 나들이를 나와서 좁은 쭈꺼량 "공"원안에는 "공"공질서와 "공"중도덕은 찾아 볼 수 없이 무질서 하고 지저분 하여 안타까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