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는 사극의 단골 소재다. 2011년에 방영된 SBS <무사 백동수>에서는 사도세자가 주요 인물로 등장했고, 2010년에 방영된 KBS2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금등지사의 비밀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졌고, 2007년에 방영된 MBC <이산>에서는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정조 이산의 집념이 묘사되었다.
최근 4년 사이에 드라마 3개의 소재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사도세자는 대중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다. 비운의 왕자로 살다가 비운의 최후를 마쳤기에, 사도세자처럼 ‘훌륭한’ 대중문화의 소재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세자를 ‘비운의 왕자’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비운의 왕자이기 이전에 ‘고독의 왕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지상에서의 스물여덟 해는 말 못할 고독의 세월이었다. 그의 고독은 생후 100일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그는 부모의 품을 떠나 보모의 손에서 성장했다. 부인인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신 지 백일 만에 탄생하신 집복헌(창경궁 내)을 떠나 보모에게만 맡기시어, 오래 비어 있던 저승전(창경궁 내)이란 큰 전각으로 옮기게 하셨다.”
이 문장의 행위주체는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제21대 영조다. 영조가 갓 태어난 사도세자를 품에서 떼어낸 것은 아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가 장희빈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형인 제20대 경종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요인 중 하나는, 경종이 마음은 너무 곱고 체력은 너무 약했다는 점이다. 영조는 자기 아들이 경종처럼 유약해지지 않기를 희망했던 듯하다. 생후 100일의 아기를 떼어놓은 데는 그런 심리도 작용한 것 같다.
부모 품에서 떨어졌더라도 보육환경만 좋았다면, 사도세자는 안정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운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생활한 저승전은 경종의 부인인 선의왕후가 지내던 곳이고, 그의 음식을 준비하는 취선당은 장희빈이 지내던 곳이었다. 경종은 영조와 대립했고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은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숙빈 최씨)과 대립했다. 영조 쪽 사람들에게 음습한 느낌을 주었을 공간들이 갓 태어난 세자와 연관된 것이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 살 때 동궁(세자궁)을 새로 꾸릴 때 충원된 궁녀들도 선의왕후를 모시던 이들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결코 우호적일 수 없는 사람들과 공간들이 세자의 주위를 둘러쌌던 것이다. 이처럼 사도세자는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부모로부터 떨어진 채 성장했다.
사도세자는 집권세력으로부터도 고립됐다. 열 살 때부터 여당 격인 노론세력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런 만만치 않은 세자가 15세부터 대리청정(대통령 권한대행)을 했으니, 집권세력이 얼마나 불안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탕평정치를 실현하고자 원칙적으로 행동했지만, 이런 행보는 그에게 정치적 고립을 안겨주었다. 처가마저 그를 죽이는 데 가담한 것을 보면, 그의 고립의 정도를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큰 상처였다. 영조는 자기 아들이 집권세력과 갈등을 빚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뭐라 말할 수는 없으니까 아들한테만 한층 더 가혹하게 대했다.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지만, 아버지는 항시 아들을 외면했다.
여기에 더해, 부인 홍씨의 몰이해도 세자의 고독을 한층 더 부채질했을 것이다.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는 집권세력과 갈등하고 탕평을 추구하는 남편에 대한 따뜻한 인간적 관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홍씨 가문이 세자의 죽음에 대해 별 책임이 없다는 점만 부각됐을 뿐이다. 부부 간의 정서적 유대가 매우 약했던 것이다.
생후 100일부터 부모와 떨어지고, 두 살부터는 비우호적인 궁녀들 틈에서 성장하고, 좀 커서는 집권세력은 물론이고 아버지와도 멀어지고, 처가도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은 물론이고 아내마저 자기를 몰라주는 상황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 못할 고독에 치를 떨며 28년 생애를 살았다.
죽는 순간마저, 그는 아름답게 죽지 못했다. 그가 뒤주(곡식 상자)에 갇힌 날은 영조 38년 윤5월 13일(1762.7.4)이고 숨이 멎은 날은 윤5월 21일(7.12)이다. 승정원(대통령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 기간은 대체로 무더웠다. 윤5월 16일(7.7)에 약간 선선했고, 윤5월 20일(7.11) 오후 3~5시 사이에 폭우가 잠시 내렸을 뿐이다. 양력 7월의 무더위 속에서 곡식 상자에 갇힌다고 상상해보라!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는 어린아이가 쭈그리고 앉아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28세 청년이 무더운 날씨에 8일간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좁은 뒤주에 갇혀 죽었으니, 이만큼 처참한 광경이 또 있을까.
갑갑함이나 무더위보다도 그를 더욱 더 괴롭힌 것은 고독이었을 것이다. 뒤주 밖에서 군병들이 지키고 관료들이 지켜보고 있지만 그를 위해 변호해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생후 100일부터 죽는 순간까지 그의 삶은 고독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