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힘찬 푸르름에 이어 마지막 열정으로 처연히 불을 지르고 빛이 바래 지상에서 소멸해가는 낙엽의 계절을 맞고 있다. 쓸쓸한 나뭇잎들이 곧 도시의 거리를 덮을 쯤, 한반도 최남단 짙은 산등성이에서는 마지막 단풍을 토해내며 한 해의 아쉬움을 달래게 될 것이다. 생성하고 융성하고 쇄락하고 소멸하는 여정은 삼라만상이 겪는 자연의 이법이다. 그러나 대자연의 시계추를 가끔은 되돌리고 싶은 게 우리 인간이다. 충장로의 추억이 그렇다. 짓붉게 물들은 만산홍엽의 아름다움을 보듯 뭇사람들의 시선과 동경을 한몸에 받아 눈부시던 시절이 충장로에 있었다. 호남의 경제의 중심지요 금융의 중심지로서 충장로는 지칠줄 모르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산업의 중심으로 행정의 중심으로 그는 호남의 심장이 되어 힘찬 동력을 뿜어냈다. 갖고 싶은 물건이 얼마든지 그 곳에 있었고, 보고 싶은 물건을 얼마든지 눈요기할 수 있었다. 멋과 낭만이 물 흐르듯 끊임없이 샘솟고 있었다. 수줍은 여학생의 치마 아래 종아리 곡선이 햇살에 반사돼 한껏 예뻐 보이는 곳이었다. 꽃양산을 쓴 아가씨의 퍼머 머리가 걸을 때마다 물결을 치며 아리따움을 흘리던 곳이었다. 까까머리 학생과 단발머리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짬을 내 콩콩거리는 가슴으로 은밀하게 데이트를 즐기던 제과점과 빵집이 그곳에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흥분이고 떨림이었다. 그 시절 학생모를 썼던 이들은 기억하리라. 학생주임 몰래 '학생입장 불가' 간판이 내걸린 성인영화를 몰래 보면서 뉴스와 본영화 상영 내내 가슴 조여야 했던 경험을. '가방을 든 여인'이나 '변덕스런 나일강', 혹은 '사랑은 무서워' 같은 폴모리아 아니면 후랑크 포셀 악단의 경음악에 젖어 감미롭게 충장로를 걷던 그 시절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몇 개 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기억만으로도 충장로는 즐겁다. '고래사냥'. '여고시절' '축제의 노래' '하얀나비'를 흥얼거리며 화신다방 같은 음악다방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세대들이 지금 다들 4,50대가 되었다. 마음 속에 사금파리처럼 박힌 소중하고 행복한 시절을 되새김질하며 그들은 아련한 추억 맛에 빠져들곤 할 것이다. 그 시절 충장로는 어느 한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동심은 동심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중년은 중년대로, 노년은 또 노년대로 각기들 충장로의 주역으로 활보하였다. 여러 세대층이 조화를 이루어 다양한 문화 속에서 공존하던 통합의 문화지대였던 곳이다. 어느 한 세대가 장악하거나 어느 한 세대가 밀려나는 편협함과 불균형과 부조화가 끼어들지 않았다. 일방적인 통로만을 가진 충장로가 아닌, 다양한 코드를 만족시킬 줄 알며 여러 통로를 가진 가슴이 넓은 충장로였기에 폭넓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충장로의 낭만과 멋은 여기에서 나왔다. 모든 다층 세대를 껴안고 놀이 문화를 제공했고 물류 공급의 역할을 다 했으며, 도심으로서의 권위도 잃지 않았다. 그러기에 해가 갈수록 과거의 영화를 잃어가는 그 곳을 바라보는 눈길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묻는다. 그 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충장로 축제는 그 때 그 시절을 살갑게 재현해 냈다. '추억의 DJ박스', '추억의 약장수', '미니스커트와 장발족 단속' '추억의 고교 동창회' '만화영화 상영' 같은 프로그램이 그렇다. 단순히 옛 풍경과 만나게 해주는 데에 있지 않다. 축제에 참여한 이들은 옛 풍경과의 만남에서 보다 새로운 의미를 캐고 싶어할 것이다. 새로운 의미는 새로운 만족감을 새로운 기쁨을 안겨준다. 축제 참가자들은 그런 행복감을 맛보게 되길 은근히 기대하는 바가 크다. 충장로 축제는 그런 기대와 갈망을 만족시켜주고자 하였다. 어제와 오늘의 결합을 통해 다시 한번 다세대의 통합을 꾀하고자 하였고 그런 분위기를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완연하였다. 빛고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원형으로 자리잡은 충장로 추억은 여전히 호남의 상징이며 사랑이며 낭만이었다. 찬란한 축제의 메카로서 누구나 한번쯤 가고 싶은 꿈의 공간이었다. '추억의 7080 축제, 광주 충장로 축제'는 이렇게 10월 11일부터 16일까지 엿새간 충장로를 비롯한 도심 일원에서 열렸다. 쇠락해가는 도심에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하였다. 아름다운 추억 속 풍경들을 아낌없이 속속 꺼내 보여주었다. 장은아는 전야제에서 노래했다.
이 세상 어디에 있을지라도 그대가 있으니 슬프지 않네
필자에겐 이렇게 들렸다.
그 시절 내게서 멀리 있어도 충장로 있으니 슬프지 않네.
이용복은 노래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필자에겐 이렇게 들리기도 했다.
붕어빵 베먹고 충장로 거닐던 어린 시절 학원책 손에 쥔 옛 머스마도 가시나도 다시 볼 수 없지만…
충장로 추억들은 노래 속에서, 가장행렬 속에서, 만국기 어우러진 도심 속에서, 옛 영광을 재현하려는 상가와 터주대감들의 애틋한 갈망 속에서 축제의 불꽃을 그렇게 당겨나갔다. 그것은 신바람 문화로 신명나는 흥의 문화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충장로를 가득 메운 발랄하고 싱그런 발걸음들이 그걸 말해 주었다. 도청에서, 금남로에서, 조흥은행에서, 광주우체국에서, 그리고 한국은행에서, 예술의 거리에서 꽉 짜여진 하나하나 축제들이 옛 신명을 되살려 그 흥을 맛보게 했다. 다가오는 미래를 푸른 희망을 머금고 꿈꾸었고 노래했던 학창시절로 완벽하게 되돌아가게 했다. 과거는 오늘을 비쳐주는 훌륭한 거울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오늘의 풍요가 어디서 왔는가를 한 세대 전 7080 세대들, 근대화 이후 땀흘려 달려왔던 주역들, 그들이 일구어낸 피땀의 산물들을 다시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충장로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고 있었다. 오늘의 세대들이 그런 깊은 의미를 받아들일 때 충장로 축제는 보다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다방 앞에서 까만 교복을 입은 남학생 몇몇이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톡특 치며 일부러 건드리는 장면이 결코 불쾌하거나 야해 보이지 않고 웃음짓게 하는 것은 모두가 축제 마인드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예술단 공연이 조흥은행 앞에서 열린다. 봉황 피리소리가 구슬픈 가락으로 울려 나왔다. 괜히 눈물 글썽이게 만드는 오묘한 가락이다. 추억은 눈시울 뜨겁게 하는 이런 묘한 구석도 있다. 나는 공작무, 그 날개짓은 충장로의 번영과 미래의 도약을 암시하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 무용수가 사천검무를 펼친다. 가면이 수시로 변하고 있다. 60-70-80 시절을 거치며 변화해온 충장로 도심을 거기서 본다. 이제 충장로는 문화수도 중심지로 거듭 나고 자 부활의 꿈을 꾼다 충장로, 금남로, 법원통 옛 플라나타나스 잎그늘 아래를 지나며 꿈에 젖어 살았던 그 날 과거의 옛몽상들이 가면을 벗고 다시 새롭게 발돋움하고자 용틀임하고 있었다. 새 시대를 열어가는 벅찬 숨결이 무대 위에 파도처럼 뛰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번 축제가 시종 상쾌했던 이유요, 가을 햇살까지 참 맑다고 느낄 만큼 만족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