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도배 전문 회원 적곡 마로 입니다.
오늘은 무휼과 낙랑국의 대립이 첨예하던 바로 그 시절 고구려에게 큰 위협거리였던 광무제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던 공손 술이라는 제왕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백제성(白帝城)은 오늘날 사천성 봉절현의 백제산 위에 있는 산성입니다.
서한 말 왕 망이 천자 자리를 뺏을 때 각지에서 일어 난 영웅 중 촉(오늘날 사천성)을 근거로 한 공손 술이 백색을 나라의 색깔로 삼아 이곳을 백제성이라고 명명하고 중요시했지요.
이 백제성은 또한 삼국 시대(이른바 삼국지) 촉한 왕조의 유 비가 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제갈 량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은 장소기도 합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서한(前漢) 말(BC 1세기 경) 왕 망의 찬탈 및 신 왕조 수립 이후에 군웅(郡雄)의 한 사람이던 공손 술(公孫述)이 이 곳에 왔을 때, 우물 속에서 백룡(白龍)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한(漢)나라의 명운(命運)을 자신이 받게 되었다고 하여 자기를 백제(白帝), 그 성을 백제성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3국시대(서기 3세기)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 유 비가 이 곳의 견고한 지세를 이용하여 오(吳)나라군의 침입을 막고 물리친 후 영안(永安)이라 개명하였던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곳에는 유 비(劉備) ·제갈 량(諸葛亮) 등을 제사 지낸 묘당(廟堂)이 있고, 당 왕조 때의 시선 이 백(李白) ·시성 두 보(杜甫)도 백제성을 읊은 시를 지어, 역사와 전설로 가득찬 성으로서 유명하지요.
두보가 추모시에서 언급했던 '삼협(三峽ㆍ싼샤)' 즉 세 협곡이 백제성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도 보지는 못해 잘 모르지만 세개의 협곡을 합쳐 부르는 삼협은 장편의 대서사시를 보는 듯하다고들 합니다.
동쪽의 이창(의창 宜昌)까지 이르는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 세 개의 협곡은 총길이가 193km라 하지요.
구당협은 웅장하며 무협은 은은하고 수려하며 서릉협은 여울이 많고 험준하다고들 말합니다.
백제성은 작은 성이라 하지요.
하지만 장강 즉 양자강을 한 눈에 굽어볼수 있는 전략요충지이라고도 합니다.
충칭(중경 重慶)시 외곽의 펑지에(奉節)에서 약 5km 떨어져 있는 이곳에 유 비는 생을 마감하며 아시다시피 제갈 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 선을 부탁했지요.
이렇게 유서 깊은 지역의 첫 테이프를 끊은 공손 술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님에도 중국 역사서에는 '우물 안 개구리 어쩌고'하며 온통 그를 매도하는 형편입니다. 물론 현대에는 다소 수정 되었지만요.
이때 중원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광무제 유 수는 이미 낙양에 동한 정권을 창설해 놓고 공손 술에게 편지를 보내 천하의 정세를 분석한 후 공손 술더러 투항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사실 말이 분석해준 것이지 실제로는 협박문이나 다름 없지요.
공손 술은 황제인 자신이 어떻게 투항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공손 술이 바랐던 것은 중원 통일도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지역에서 평화롭게 황제 노릇하며 살기를 원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광무제는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워 공손 술의 입장을 무시합니다.
서기 36년 유 수의 군대가 공손 술을 크게 치자 공손 술은 유 수의 사령관을 암살하는 등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 항쟁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였습니다.
공손술은 멸망 직전까지 12년 동안 황제로 있었습니다.
실제 다스린 기간까지 전후로 계산하면 공손 술은 서남지역을 28년간 통치하였습니다.
28년 동안 서남지역은 비교적 안정적이였으며 중원 지역의 전쟁 영향도 받지 않았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공손 술은 농업을 발전시키고 많은 수리 공사 즉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하수도 공사를 단행하여 해당 지역 즉 사천성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였습니다.
적어도 물 부족은 면해주려고 노력했다는 말이지요.
때문에 공손 술이 전쟁에서 죽자 해당 지역 백성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백제성 안에 <백제묘>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유독이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힘 있는 층의 횡포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요즈음입니다.
회원 적곡 마로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