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통 :
가씨(賈) 강씨(强) 현풍 곽(郭) 남궁씨(南宮) 강음 단씨(段) 열산 마씨(麻)
함평 모씨(牟) 수원 백씨(白) 원주 변씨(邊) 청주 사씨(史) 섭(葉)씨 성주 시씨(施)
죽산 안씨(安) 의령 여씨(余) 염씨(廉) 휘주 요씨(姚) 유씨(劉) 교동 인씨(印)
요양 자씨(慈) 서산 정씨(鄭) 임천 조씨(趙) 상주 주씨(周) 파릉 초씨(楚)
용강 팽씨(彭) 강릉 함씨(咸) 남양 홍씨(洪) 남양 갈씨(葛) 경씨(景) 구씨(具) 낭씨(浪)
당씨(唐) 만씨(萬) 묵씨(墨) 금성 범씨(范) 황주 변씨(邊) 진주 사씨(謝)
평산 소씨(邵) 거창 신씨(愼) 태원 안씨(安) 여씨(呂) 오씨(吳) 단양 우씨(禹)
유씨(庾) 파릉 호씨(胡) 장(張) 한산 정씨(程) 평양 조씨(趙) 신안 주씨(朱)
제주 초씨(肖) 풍덕 포씨(包) 해씨(海) 당홍 황씨(黃) 희산 감씨(甘) 계씨(桂) 구씨(丘)
노씨(盧) 성주 도씨(都) 매씨(梅) 남양 방씨(房) 범씨(凡) 면천 복씨(卜) 문씨(西門)
진주 소씨(蘇) 영산 신씨(辛) 청주 양씨(楊) 곡산 연씨(延) 의령 옥씨(玉)
원주 원씨(元) 육씨(陸) 평택 임씨(林) 아산 장씨(蔣) 배천 조씨(趙) 제주 좌씨(左)
충주 지씨(池) 통천 태씨(太) 임구 풍씨(馮) 진주 형씨(邢) 아산 호씨(胡)
신천 강씨(康) 곡씨(曲) 영양 김씨(金) 노씨(魯) 광천 동씨(董) 신창 맹씨(孟)
방씨(方) 초계 변씨(卞) 수성 빈씨(賓) 해주 석씨(石) 송씨(宋) 풍산 심씨(沈)
통주 양씨(楊) 전주 연씨(連) 전주 연씨(連) 위씨(魏) 무송 윤씨(尹) 거창 장씨(章)
문경 전씨(錢) 나주 정씨(丁) 흥덕 진씨(陳) 영양 천씨(千) 달성 하씨(夏)
전주 호씨(扈) 회양 후씨(后) 진주 강씨(姜) 곡부 공씨(孔) 남씨(南) 노씨(路) 두씨(杜)
명씨(明) 방씨(龐) 밀양 변씨(卞) 빙씨(氷) 보성 선씨(宣) 승(昇)씨
광주 안씨(安) 어씨(魚) 개성제남왕씨(王) 위씨(韋) 행주 은씨(殷) 남양제갈씨(諸葛)
곡산 한씨(韓) 풍천,장흥임씨(任) 추계,전주추씨(秋)
몽골계통 : 연안 인씨(延安 印氏)
여진계 : 청해 이씨(淸海 李氏)
위그루계 : 경주 설씨(慶州
아랍계 : 덕수 장씨(德水 張氏)
베트남계 : 화산 이씨(花山 李氏)
일본계 : 우록 김씨(友鹿 金氏 : 사성 김해 김씨)
- 기록에 따르면 3국시대에도 섶나무 시씨가 있는걸로 보아서는 적어도 1500년전(신라-백제)
신라와 당의 교류가 활발했던 때 즈음에 전주와 김해지방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여짐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60년)
"곽위는 즉위 후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954년 곽위가 죽자 그의 양자인 시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오대 제일의 명군(名君)이라 일컫는 세종(世宗)이었다. 세종은 곽위의 개혁을 물러받아 내정에 힘을 기울여 국력을 충실히하여 오랜 전란 속에 황폐해진 중원을 경제를 크게 회복시켰다. 이것을 바탕으로 군사적으로 강대해진 후주는 당나라 붕괴 후 아무도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원정에 나섰다."
송나라의 모태는 후주
진교의 변(陳橋之變)
"진교의 변(陳橋之變)은 960년 송태조 조광윤이 7세의 후주의 공제(恭帝)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아, 송나라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969년 오대십국 중 가장 명군으로 손꼽히는 후주의 세종이 급사를 하자, 7세에 불과한 공제 시종훈(柴宗訓)이 그 제위를 이었다. 960년 정월,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카이펑 부근의 진교역(陳橋驛)에서 조광윤에게 술을 만취하도록 먹이고, 정신을 잃은 그에게 황포를 입혀 강제로 추대하였다. 조광윤은 조보, 조광의 등 부하들의 추천에 못이기는 척하며 카이펑에 입성하여 7세의 어린 시종훈에게 황제를 선양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것을 진교병변(陳橋兵變) 또는 진교의 변(陳橋之變)'이라고 한다."
"반대를 하던 한통(韓通)은 조광윤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고, 당시 후주의 재상이었던, 범질(范質)과 왕부(王溥) 등을 협박하여 굴복시켰다. 오대에서는 선양은 이렇듯 자주 일어났었고, 양위를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 때까지 두터운 보호를 받았다. 968년 시종훈이 1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송태종은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뤄준다. 그후 명조는 300년간 시씨의 가문을 돌봐주며, 시씨 가문도 애산 전투에 참여하여 송나라와 명운을 함께 한다."
"대부분의 개국황제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전 군주들을 죽인 것에 반해 조광윤은 후주의 시씨를 시작으로 항복한 나라들의 군주들을 살리고, 귀족으로서의 지위도 보장하였다. 따라서 송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명군 중의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황제이다.
"석각유훈은 조광윤이 돌에 세겨 자손에게 전한 유언이다. 송왕조의 황제가 즉위를 하면 반드시 이것을 석각유훈을 보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존재는 극비였고, 궁중에서만 전해져 내려와 정해진 사람들 이외에는 재상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금군의 침입으로 왕궁이 점령되어 발견되었고, 처음으로 그 존재가 표면화되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유훈은 다음의 두가지이다.
조광윤에게 황위를 미루었던 시씨 가문의 자손을 대대로 돌봐 주어라.
뜻이 맞지 않다고 사대부(관료 / 지식인)를 죽여서는 안 된다.
이 두 개의 유훈이 지켜진 것은 시씨의 자손이 남이 멸망한 애산의 싸움에 운명을 함께 한 것과 정쟁으로 실각한 관료(신법, 구법의 다툼. 사마광과 진회)가 처형되지 않고, 정국의 변화에 의해 좌천되었다가 중앙에 복귀하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조광윤의 우수한 인간성이 후의 송왕조의 정치에 반영된 것을 이 유훈은 말해주고 있다."
- 명조가 후금에게 망할때라면 당시는 1644년 부근일 것이고 왕족의 후손이니, 혼자 오진 않았을 것임
- 절강 등지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식량과 수행인력이 동행했을 것
- 전라도 등지에서 희귀성이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일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