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을 떠나 집안을 찾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광개토경호태왕릉과 비를 보러 간다.
발견된 이후 수많은 역사왜곡에 시달려 온 호태왕비 그 만큼 그의 삶이 컸다는 것
을 말해준다.
대제국을 이룬 호태왕의 유지와 정신은 장수왕과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고구려 유민으로 서역정벌을 한 고선지 장군, 산동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이정기
장군뿐만 아니라 북간도와 서간도에서 활약한 항일 무장 독립투사 등을 통해 오늘에 까
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농부의 곡굉이 질 천오백년 잠을 깨우니
나 여기 이렇게 살다 갔노라 크게 외친다.
왜놈 머슴 살던 족보 드러날까 노심초사
돼놈은 호태왕 업적에 놀라
불에 태운다.
정으로 쫀다.
회칠 분칠을 해도
그 역사 어디로 가나 껄껄 웃으시며 굽어본다.
우리는 큰 나라 대륙의 중심
말 달려라 요동으로 백제를 쳐라 바다건너 왜국을 꿇어 앉혀라
당당한 호태왕의 명 만주벌 쩌렁쩌렁 울린다.
지금 광개토대왕비는 보호각 안에 모셔져 있다. 얼마전 까진 보호각 안으로 들어가
지도 못하고 밖에서 바라보아야만 했다는데 중국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접근금지가 많이
완화되었나 보다. 그만큼 동북공정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단 이야긴가. 비를 보호하기 위
해 방탄유리로 에워싼 보호각이 비 크기에 비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처럼 제
습기도 설치하지 않는다면 굳이 유리로 밀폐시킬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더 넓고 높
게 보호각을 지어 사방을 통하게 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고 비에도 더 좋지 않을까
호태왕 비에서 서쪽으로 조금 덜어진 곳에 호태왕이란 명문이 발견되어 광개토대왕릉으
로 전해지는 커다란 능으로 간다.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한 능은 많이 무너져 있다.
돌무지돌널무덤으로 커다란 입석들이 사방을 바치고 있다. 시신을 안치한 석실은 묘의
상층부에 있다. 묘실의 입구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때는 시신을 안치할 때 동쪽
으로 머리를 두었던 것 같다. 태양(한알-하날- 하늘)의 자손답게 자신들이 온 고향 해
가 뜨는 방향으로 누웠다. 왕릉에서 주위를 살피면 이곳이 집안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
을 알 수 있다. 남으로 압록과 북한의 산이 서로는 송화강이 동쪽과 북쪽으론 산맥 둘
러쳐져 있는 분지 지형인 집안의 배꼽쯤이 이 능이다. 환인에 있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
왕으로 묘로 추정되는 미창구 장군무덤에도 그 주위의 분지 한가운데 있어 무덤이 무덤
으로서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국가를 구성하는 세력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천
제를 지내는 장소로서도 기능하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서도 그런 느낌
을 받는다.
(무덤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버팀돌이 거대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들이 더 이상 관리되지 않고 방치
된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씁쓸하다.
고구려를 돌의 문화라 규정지을 때 가장 많이 거론 되는 것이 장수왕를이라 전해지는
장군총이다. 일천 오백년을 한결같이 서 있게 한 많은 장치들이 고구려 돌 문화의 정수
이다. 고구려 축성에서 등장하는 들여쌓기와 아랫돌의 면을 그대로 두고 윗돌을 아
랫돌의 면에 맞춘 그랭이질, 돌이 밀려나가지 않게 돌 끝에 턱을 주고 그것도 못 미
더워 거석으로 버팀돌을 한 것 까지 오늘 장수왕릉이 건재한 이유이다. 각면마다 세 개
씩 세워 놓은 거석들의 의미를 갖고 12지신상 같은 의미의 거석신앙을 나타냈다는 설과
릉이 붕괴되는 것을 막는 버팀돌이라는 설이 있는데 동쪽면 가운데 돌이 없는 부분이
밀려나오는 것으로 보아 버팀돌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릉에 쓰인 돌 하나의 무게
가 이집트 피라밋의 돌 보다 더 무겁다. 동방의 피라밋으로 불리는 장수왕릉의 석실도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석실 입구 천정을 잘 살펴보면 지붕돌의 수평을 맞추기위해 돌
을 깍은 단면들이 보이는데 여기서도 그랭이질과 정교한 돌다듬기를 확인할 수 있다.
석실의 안에는 부부합장릉으로 쓰였는지 두 개의 돌 평상이 놓여 있다. 석실을 둘러보
고 나오는데 석실 정면으로 저 멀리 호태왕비와 릉이 보이고 그 뒤로 국내성터가 아득
하게 보인다.
릉을 돌아 내려오면 장수왕릉의 축소판인 딸린 무덤이 보인다. 딸린 무덤은 원래 다섯
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 용도에 대해서도 말이 많
은데 왕릉을 축조하기까지 가매장무덤이었다는 설과 첩실들의 무덤이라는 설 가신들의
무덤이라는 설등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무너져 내린 딸린 무덤이 고인돌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돌방을 어떻게 만들었나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여기서도 물이 돌방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지붕돌 바닥
면에 빙둘러 홈을 파 놓은 것이 보인다.
거대한 돌을 캐고 운반하고 다듬어 쌓았을 민초들의 아픔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노고와 훌륭한 지도자 덕분에 오늘 여기 서 있는 내가 있으니 자랑삼아 말할 수 있는 선조가 있으니 민초들이 흘린 땀도 고맙고 장수왕도 고맙다. 이제 장수왕릉을 끝으로 집안에서의 일정은 끝이 났다. 다시 올 수 있을까? 기약 없이 떠나는 나그네의 뒤로 해가 길게 드리운다.
첫댓글 '기약없이 떠나는 나그네의 뒤로 해가 길게 드리운다"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