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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예닮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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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목회 스크랩 교회내의 질서 (이다윗 목사)
권오수 추천 0 조회 102 11.05.20 12: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교회내의 질서

 

(이다윗 목사)

 

 

성령사역을 행하는 교회는 강력한 교회입니다. 많은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력이 떠나가고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그런데 성령사역을 하는 교회는 오히려 일반교회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목사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 값지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일 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거나 서로 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각자가 제 갈 길로 가는 식의 교회운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인해 서로 다른 교단이 생기고 그 교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교파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교회는 사실상 하나의 교회입니다. 별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니 교회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이 다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여야 하며, 교파가 다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종교와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귀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 주님의 몸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몸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성경은 성도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몸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모든 성도는 곧 성전이며 곧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 된 성도들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성전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주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전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를 가리켜 ‘주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은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바울은 교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 각 성도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주님의 몸은 성도들의 상태에 따라 변화가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건강한 주님의 몸을 만들려고 한다면 모든 성도들이 아름답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죄에 빠져 살아가거나 악한 마음을 먹고 살아간다면 주님의 몸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성도들이 날마다 회개하며 정결과 거룩함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주님의 몸은 건강해질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지체

 

모든 성도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각 성도는 각자의 기질과 성품과 능력에 따라 몸의 각자 다른 지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주님의 몸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주님의 몸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시험에 빠져 낙심하게 될 때에 몸의 어느 한 부분에 상처를 입은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는 아주 빨리 상처 난 부위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싸줘야 합니다. 이렇게 가벼운 상처라면 쉽게 그 상처가 치유되어서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성도가 음란죄에 빠지게 되거나 도박에 빠진 죄를 습관적으로 짓게 된다면 이것은 몸에 종기가 나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몸에 종기가 나면 예전에는 ‘고약’을 붙였습니다. 한 동안 붙인 고약을 떼어 내면 종기의 뿌리가 고약에 달라붙어 빠져 나옴을 느낍니다. 어떤 경우엔 몸에 구멍이 뻥하니 뚫려 있기도 합니다. 종기의 뿌리가 뽑아져 나오면 일반 상처처럼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른 후 붕대로 감싸주면 곧 낫습니다.

 

이처럼 종기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음란죄나 도박죄같이 심각한 죄를 짓는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며 상한 심령으로 주님의 용서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듯 죄를 회개할 수 있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더 이상 교회 내에 음란의 죄가 번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도박의 영이 교인들에게 번지지 않도록 막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몸은 말끔히 치유됩니다.

 

하지만 암같이 강력한 질병이 있을 땐 주님의 몸도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심한 경우엔 죽기도 합니다. 주님의 몸이 죽는 다는 것은 교회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암세포는 원래 일반 세포와 똑 같은 세포입니다. 정상적인 세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쁜 세포로 돌아선 것입니다. 암 세포는 정상적인 조절기구의 통제를 받지 않고 무질서하게 증식만을 고집하는 세포입니다. 암 세포가 일반 세포와 다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제멋대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도 제 멋대로 행동하는 성도가 있을 때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님의 몸은 철저하게 질서를 유지해야만 정상적이고도 건강한 몸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면서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자기 고집대로 이끌어가려고 할 때 교회는 엄청난 상처를 당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세포는 몸을 가장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질서에 순종하며 따르는 반면에 암세포는 세워진 질서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맘대로 아무렇게나 증식하기 때문에 문제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암세포가 존재합니다. 암세포가 많이 모이게 되면 암 덩어리가 됩니다. 하지만 암 세포가 있거나 암 덩어리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세포가 암 세포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암 세포가 활동을 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들어진 암 세포가 자극을 받아 활동을 하게 되면 온 몸에 퍼지게 되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문제는 항상 있습니다. 문제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 문제가 활동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사건이 발단하면 활동하지 않고 있던 문제들이 바깥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큰 문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암 세포를 자극시키는 것은 분노입니다. 의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스트레스’입니다. 누군가 뺨을 치면 그것에 대한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것을 가져가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분노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사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자기 뜻대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무조건 대듭니다. 그 사람이 옳은지 자신이 그릇되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은 다 적으로 생각하고 원수로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못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조용히 있던 암 세포를 자극해서 암 세포를 활동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조용히 있는 암 세포가 활동하는 암 세포로 바뀔 때 다시 한 번 활동하는 암 세포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항암인자’라는 특유의 면역세포를 준비하셨습니다. 일종의 ‘최후의 방어진’이라고 할까요. 항암인자의 말을 암 세포가 잘 들으면 활동을 멈추고 다시 조용한 상태로 있게 됩니다. 또한 조용히 있던 암 세포가 정상세포로 변하게 됩니다.

 

바로 이 ‘항암인자’는 ‘회개’입니다. 성도가 회개를 하게 되면 순식간에 정상적인 몸으로 변형됩니다. 잘못된 습관과 더러운 인격 등을 통해서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몸이 정상적인 몸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돕는 것이 ‘주님의 보혈’입니다. 누구든지 ‘회개’와 ‘보혈’을 통해서 정상적인 성도로 변하게 됩니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주님의 ‘보혈’과 눈물의 ‘회개’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처절할 정도로 울부짖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못된 성격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의 정욕에 빠져 살았던 못된 본성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한 줄기 치유의 광선이 병든 사람의 영혼에 내리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더럽고 추악한 세포들을 다 태워버릴 것입니다. 그리곤 건강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암 세포

 

교회에 이러한 암 세포가 있으면 안 됩니다.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성도는 모두 암 세포입니다. 정상적인 세포는 질서에 순종합니다. 하지만 암 세포와 같은 성도는 자기 뜻이 절대적입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 아무도 그 사람의 뜻을 꺾을 수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이라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실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교만한 자’라고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마귀는 ‘교만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교만을 사랑했으며 교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결국 교만 때문에 망했고 하나님 면전에서 쫓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루시퍼는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의 보좌보다 더 위대한 자리로 올리려고 했습니다. 저의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하나님의 정죄함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아름다운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는 칭호를 뒤로한 채 ‘마귀’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세상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고 말씀하셨듯이 루시퍼는 그의 교만 때문에 저의 인생이 완전히 망하게 되었고 지옥 불에 떨어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암 세포는 루시퍼와 같은 교만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교만을 좋아하면 루시퍼처럼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교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당신의 교만을 조심하십시오. 루시퍼를 따른 천상의 천사들이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사도요한은 요한계시록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 12:9)고 말했습니다. 마귀를 쫓았던 그의 사자들이 얼마쯤 되는지는 다음구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 12:3-4)

 

마귀가 하늘전쟁에서 미가엘에게 패한 후에 땅에 떨어질 때 자신과 함께 하는 천사들을 이끌고 이 땅에 내려왔는데 무려 그 수가 하늘 천사의 삼분의 일에 해당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성도들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저들을 꺾으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통해서 저들의 머리를 짓밟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당연히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강력하게 선포할 때 마귀의 세력은 우리 앞에 꼼짝도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귀는 교회 내에 암 세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질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반기를 들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마음이 교만을 심습니다. 마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교만’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귀처럼 ‘타락’하게 될 것이고 ‘멸망’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의 말은 성령사역을 하는 교회에 너무나도 필요하고 중요한 말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일반교회에도 절실히 필요한 내용일 것입니다. 건강한 주님의 몸을 세우려고 하는 교회는 반드시 바울의 말한 바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성도는 성전입니다. 이 성전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몸은 하나인데 지체가 있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고전 12:26) 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주님의 몸은 ‘몸 가운데 분쟁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는 서로가 아름다운 존재이고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한 발이 스스로를 가리켜 몸에 붙어있지 않다고 주장하지도 못하고 손이 스스로를 가리켜 몸에 붙어있지 않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몸의 지체로 있다면 스스로 “나는 아니다”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몸의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교회에서는 누가 크고 누가 작은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을 사모하고 높은 직책을 탐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낮은 직분을 속한 사람들을 마치 자신보다 낮은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여 주셨다”(고전 12:23-24)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곧 바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님의 질서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그래서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교회 내에 몇 가지 그룹을 정하셨습니다.

 

1. 사도 apostolo"(아포스톨로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를 말합니다. 진정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가리켜 ‘사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의 사역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대제사장에 넘기는 일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 도로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로 앞 구절에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바울은 눈을 뜨고 사물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장님이 되었던 3일 동안에 자신에게 들려졌던 주님의 음성에 대해 깊이 있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라는 칭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땅의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연히 주님을 보아야만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사도’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주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 들 중 오직 선택받은 사람만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열린 환상으로 주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당신을 ‘사도’로 부르지 않았다면 당신은 사도가 아닌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사도’라고 칭한 사람은 당신도 그 사람을 ‘사도’라고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함이 옳으며 주님께서 그런 당신의 믿음과 순종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바울은 사도였으며 그의 사도직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사도가 된 것이었습니다.

 

2. 선지자 profhth"(프로페테스)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누구라도 스스로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영분별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에게 이런 수많은 은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은사 있음 때문에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세우셨듯이 그렇게 오늘날에도 직접 선지자를 세우십니다.

 

3. 교사 didaskalo"(디다스칼로스)

 

우리나라 성경에서 ‘교사’라는 단어로 번역된 이 단어는 성경에서는 ‘선생’이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여진 곳을 보면 한 결 같이 예수님을 호칭할 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교사’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랍비’보다 훨씬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사’라고 말을 하면 뭔가를 가르치는 사람을 뜻한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순히 육적이고 혼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일반교사의 뜻이라기보다는 영적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영적선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영적인 교회로 들 수 있는 안디옥교회에도 ‘교사’가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 13:1)

 

그들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을 성경은 ‘교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단순한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처럼 그렇게 제자들을 사랑하고 섬겼던 사도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려고 결심을 했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그때 바울은 저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 한 것이라”(행 20:18-20)

 

바울은 저들에게 겸손과 눈물을 보였습니다. 시험을 참으며 주님을 열심으로 섬겼습니다. 성령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것은 담대히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교인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으며 주님을 향한 믿음을 증거 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의 ‘교사’는 바울의 행한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사가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은 ‘목사’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하는 ‘교사’는 ‘선생’보다는 ‘목사’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몰려온 장로들을 향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 20:37) 바울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이여! 바울처럼 되소서. 당신들이 목회를 그만 둘 때 누구 한 성도라도 이처럼 당신의 목을 끌어안으며 “떠나지 마세요. 목사님”이라고 울 사람들이 있습니까?

 

4. 능력?dunami"(뒤나미스)

 

바울이 언급한 교회의 지도자 중에서 네 번째 언급된 것은 직분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능력’이라는 단어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일곱 번째까지는 모두 은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질서를 위해 세우신 일곱 가지는 모두 은사적인 구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라는 직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도적인 은사를 자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선지자라는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교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몇 가지는 어떠한 직분이 아니라 은사적인 구분이며, 은사를 통해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들이 종류에 따라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적인 은사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최고의 우선적인 자리에 속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 중에서 이미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그 ‘사도’적인 직분을 담임목사가 갖습니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은 ‘사도’의 직분을 받은 담임목사를 통해서 전해져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성도는 ‘사도’의 직분을 받은 담임목사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담임목사의 말에 절대적인 순종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당신에게 사도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은사를 가지고 ‘사도’의 직분을 부여받은 담임목사에게 순종하면서 당신의 은사를 협력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세울 때,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지자’ 직분을 받은 사람이나 ‘교사’ 직분을 받은 사람의 다음 단계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에게 놀라운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의 위치는 교회의 가장 우두머리가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당신이 금가루를 내리게 하고 금이빨을 만들어 내는 은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의 질서에 있어 네 번째 순위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5. 병 고치는 은사 iamacarisma (이아마 카리스마)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병 고칠 수 있는 신유은사 소유자보다 더 위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병을 고칠 수 있는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에게 찾아와서 신유의 은사를 전이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누구든지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려고 할 때마다 일부러 한적한 곳으로 떠나 계셨습니다. 또한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함이 들 때마다 스스로 한적한 곳에 거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자세입니다.

 

6. 서로 돕는 것 antilhyi"(안틸레프시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사용된 것 말고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더 깊은 내용을 찾아보니까 ‘붙잡음’이라는 뜻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실족한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여 다시금 교회생활 잘 할 수 있도록 붙잡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바나바사역’이라고 합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요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더라면 바울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로 인해 소망을 갖게 되었고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바나바사역’을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에게 주보를 보내고 교회 잡지를 보냅니다. 어떤 교회는 엽서나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서로 돕는 은사에 속합니다. 교회에는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7. 각종 방언을 하는 것 geno"glwsa (게노스 글롯사)

 

각종 방언은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은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언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선교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언의 은사를 허락하신 것은 대신해서 대화가 가능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이야 전 세계 언어를 빨리 통변할 수 있는 기계가 통역자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각 나라의 언어를 빨리 통변할 수 있는 통역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빨리 올 수도 있고, 인터넷과 전화를 통해서 얼마든지 통역을 받을 수 있지만 여전히 각 족속의 방언은 필요합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작은 부족을 방문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입니다. 이러한 은사가 있으면 저절로 그 족속들과 대화가 가능합니다. 또한 매우 빨리 그 부족의 언어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게 되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방언통변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방언을 통변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언을 통변하는 것보다 직접 음성을 들으면서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좋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방언하는 은사는 사실상 가장 낮은 위치에 속한 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열할 때에 ‘사랑’이라는 열매가 가장 크고 점점 작은 열매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성령의 열매가 9가지뿐일 것이라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9가지 성령의 열매를 통해 모든 성령의 열매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대표적인 열매를 나열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9가지 은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의 말씀’ 은사가 맨 마지막에 언급된 ‘방언들 통변’하는 은사보다 더 큰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강한 은사부터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은사를 종류대로 나열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28절에 언급하고 있는 질서는 순서대로 나열한 것입니다. 가장 먼저가 ‘사도’이며 가장 나중이 ‘방언하는 자’입니다. 방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사도’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서로 돕는 자’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도 순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윗단계의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을 경우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행동을 불순종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당신은 사울 왕처럼 내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아름다운 주님이 몸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직분자를 세웁니다. 보통 교회는 <목회자-장로-권사-집사-성도>순으로 질서를 세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는 이러한 질서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권사’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직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워진 질서에 따라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 갑니다.

 

천주교의 경우는 일반교회에 비해 다소 직분이 복잡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 추기경 -주교-사제-부제-신도>의 질서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성경에 언급된 바가 없습니다.

 

내가 지나치게 성경적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옳은 것입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성경에서 모든 정보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우시고 저들에게 제자훈련을 했다면 오늘날에도 예수님처럼 12제자를 세우고 12제자에게 집중적인 제자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따라 한다면 뭔가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이발을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옷도 그렇게 입을 수는 없겠죠. 시대적인 흐름이 있는 것이니 요즘 목사에게 옛적에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두루마리를 들고 다니라고 권유한다면 목사는 심방 갈 때마다 U-haul 트럭을 빌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충분히 우리에게 적용될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다 놀라운 비밀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일곱 가지 직분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라는 권고를 바울로부터 들었습니다. 단순히 바울의 의도하는 바가 아닐 겁니다.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은 성경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임을 믿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의도를 따지지 말고 그대로 실천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언급은 성령사역을 하는 교회일 때 적용할 수 있는 맹점이 있습니다. 방언을 한 명도 못하는 교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질서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음성도 못 듣고 환상도 못 보고 신유의 은사도 없는데 어떻게 질서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음성을 못 듣고 환상을 못 보기 때문에 그런 은사들을 다 무시하고 오늘날 세운 질서가 옳다고 주장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일차적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대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아무런 역사가 안 일어난다고 해서 성경이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틀릴 수 있고 나는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다고 보는 것이 옳은 믿음일 것입니다.

 

열 쇠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세울 때 ‘열쇠’를 사용하십니다. ‘열쇠’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열쇠를 사용할 때 문이 열립니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차를 사용할 때는 반드시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 없이 문을 열거나 자동차를 몰고 가면 문제가 됩니다. 도둑이라고 몰릴 수도 있고 잘못하다간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이시기 때문에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그 열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오직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담임목사가 한 사람만 필요한 법입니다. 당연히 성가대에는 한 명의 지휘자밖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동시에 두 지휘자가 지휘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물론 필요에 따라 거대한 성가대를 지휘할 때는 한 명의 지휘자를 보고서 여러 지휘자가 똑 같이 지휘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성가대에는 한 명의 지휘자만 필요합니다.

 

정명훈 지휘자는 매우 유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성가대는 정명훈 지휘자를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명훈 지휘자가 우리 교회 성가대를 매주 마다 지휘하면 몰라도 우리 교회 지휘자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초등학생들을 인도하는 전도사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전도사 허락 없이 주일학교 시간에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직 해당 전도사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초등학교를 인도할 수 있는 열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시골의 작은 성당에 가서 그곳 사제를 제치고 직접 예배를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주교 전체의 열쇠는 교황이 받았지만 작은 성당을 인도하도록 열쇠를 받은 사람은 그곳의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아랫사람이 다 자기보다 낮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열쇠만 있습니다.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문이 있으며 그 사람은 그 문만 열면 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그에게 맡겨진 열쇠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 다른 교회 담임목사 허락 없이 말씀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에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을지라도 담임목사 허락 없이 설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질서조차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열쇠’라는 단어는 유치원생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열쇠’에 대한 이해를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권사님 때문에 교회가 완전 망했다고 합니다. 그 권사님은 집집마다 찾아 가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준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의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교회를 하나씩 떠났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 권사님은 담임목사를 불평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열심히 하는데 담임목사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교인들이 다 떠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실상은 자기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 권사님이 뭘 잘못했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열쇠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대로 담장을 넘어서 그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어쩌면 열쇠를 가지고 있었겠죠. 친교담당 열쇠! 자신에게 주어진 열쇠가 친교담당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열쇠인줄 알고 열심히 문을 열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열다가 안되니까 도둑같이 담장을 넘어간 것이 화근이 되었고 결국은 큰 문제로 발생된 것을 어찌 그 권사님이 알겠습니까. 어쩌면 천국에 갈 때까지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열쇠’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기란 이처럼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열쇠’에 대한 이해를 한 사람은 좀처럼 남의 죄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울의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 5:22)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주일학교에 초등학교 1학년 담당 선생이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절대로 담당 선생님께 “야~”라든가 “누구야”라면서 이름을 함부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항상 “000 선생님”이라고 깎듯이 대우를 해 줬습니다. 왜 그 권사님이 그렇게 대우해 줬을까요? 그 권사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초등학교 1학년의 열쇠를 쥐고 있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쇠’에 대한 이해입니다.

 

담임목사가 해임되거나 교회를 떠나면 그 밑의 부목사나 전도사는 다 해임이 됩니다. 이것이 일반교회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담임목사가 오면 그 목사를 통해서 새롭게 부교역자가 선정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왕이 죽으면 왕의 신하들이 통째로 다 같이 죽는 것도 어쩌면 이와 같은 원리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식한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부목사의 적이 담임목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담임목사를 제거해야 자신이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들은 모두 공동운명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교회의 질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서 교회의 질서를 무시한 채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담임목사가 있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자신 스스로 예언자쯤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경우에도 문제가 되지만 담임목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큰 문젯거리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도무지 담임목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담임목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동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마치 담임목사와 동급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합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당연히 ‘열쇠’가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열쇠’가 없다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혹자는 “목사님, 그러면 왜 성령님께서는 말해서는 안 되는 말씀을 주신 것이죠?”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 음성을 듣는 사람이나 그것으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무조건 음성을 들으면 당연히 말을 해야 하는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래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들은 성령님의 음성이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담임목사에게 찾아가 성령님께서 들은 내용을 말씀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과정을 통해 들은 음성에 대해 분별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질서 때문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성령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질서에 따라 들은 음성을 점검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이러한 점검을 무시한 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 14:32)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예언하는 사람들이 다른 예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재를 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예언만 듣지 말고 여러 예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순서대로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질서 있게 하나님의 음성을 말하게 하였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29-31)

 

오늘날 많은 교회는 교회 안에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교회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염려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의 담임목사가 예언을 하지 못할 경우엔 더더욱 배제하게 될 것입니다. 보통적으로 교회 내에서 절대로 예언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심할 경우엔 교회에서 떠나라는 통지를 받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바울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하심도 아닙니다.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최고인 것이 아니라 음성을 듣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냐 아니냐를 점검할 필요가 있으나 제대로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이나 과정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단순히 예언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담임목사가 예언을 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말대로 행해야 합니다. 바울이 권고하고 있는 바는 이렇습니다. 누군가 예언을 한다면 그 사람의 예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또 다른 예언자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면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의 예언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수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2~3명 정도의 예언이 적절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예언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예언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선입견이 들어간 예언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예언자들의 예언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에 대한 분별을 통해서 교회는 보다 정확한 예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보다 건강한 주님의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교 만

 

성령사역을 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음성을 듣고 너도 음성을 듣는데 우리는 다 같지 않느냐?”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너도 음성을 듣고 나도 음성을 들으면 서로 똑 같은 등급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만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음성을 들었지만 백성 중에서도 음성을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 임했을 때 모세와 함께 했던 70명의 장로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장 그 예언은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회막에 나가지 않았던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사람이 각자의 진에 머물면서 예언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년이 잽싸게 모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옆에 있던 여호수아가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출 11:29)고 말했습니다.

 

모세만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처럼 음성을 듣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를 위해 오직 모세에게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여호수아에게 넘겨졌습니다. 열쇠가 여호수아에게 넘겨졌을 때 모세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같이 가나안땅을 정복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느보산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 당시 모세는 120세였지만 아주 건강했습니다. 하지만 ‘열쇠’가 여호수아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열쇠’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알지 못해서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0번이고 똑같지 알지 못해서 죄를 짓는다면 무지를 가장한 교만한 자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남의 ‘열쇠’에 대한 제대로 인식을 못한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내게 어떤 열쇠가 주어졌는지 잘 모를 때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런 열쇠를 주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마치 열쇠더미를 받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린 입으로 아무 소리를 내 뱉고, 달린 손으로 아무에게 안수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자신이 교만해지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으로부터 쫓김을 받게 된 것은 그의 ‘교만’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삼분의 일이나 되는 천사들도 ‘교만’을 좋아해서 마귀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교만’을 더 사랑해서 멸망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실제적으로 자신이 교만으로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교만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쳐든 놋 뱀을 기억합니까? 광야생활에 짜증을 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위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장대에 놋 뱀을 달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 놋 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나음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 생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대에 단 놋 뱀을 쳐다봤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놋 뱀을 쳐다보고 산 사람보다 쳐다보지 않고서 죽은 자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목이 굳어 있어 도무지 남의 말을 듣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이 교만한 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맞지만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적으로 교만한 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교만한 줄 알면서도 교만한 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막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담배가 안 좋은 것인 줄 알면서도 끊을 수가 없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교만은 사람을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절대로 남의 ‘열쇠’를 빼앗지 마십시오. 절대로 내가 갖지 않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남의 ‘열쇠’에 대해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마십시오. 그냥 당신에게 주어진 ‘열쇠’만 사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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