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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高政會 27 원문보기 글쓴이: 동해바다
三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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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촉한 | 위 | 오 |
수도 | 성도 | 허창→낙양 | 건업 |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 2황제 유비 유선 | 5황제 조비 조환 | 4황제 손권 손호 |
성립 | 221년 | 220년 | 229년 |
멸망 | 264년 | 265년 | 280년 |
삼국 시대, 각국의 세력도. |
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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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황하・장강 문명 | |||||||
신화·삼황오제 | |||||||
하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046?~기원전 256 | |||||||
서주 기원전 1046?~기원전 771 | |||||||
동주 기원전 771~기원전 256 | |||||||
춘추 시대 기원전 771~453 | |||||||
전국 시대 기원전 453~221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2~서기 220 | |||||||
전한 기원전 202~서기 8 | |||||||
신 8~23 | |||||||
후한 25~220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220~265 촉한 221~263 오 229~280 | |||||||
진 265~420 | |||||||
서진 265~316 | |||||||
동진 317~420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39~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
북송 960~1127 | 서하 1038~1227 | ||||||
남송 1127~1279 | 금 1115~1234 | ||||||
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36~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민정부) 1912~1949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
v • d • e • h |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후한이 몰락하기 시작했던 2세기 말부터 위, 촉, 오가 세워져 서로 다투다가 서진이 중국을 통일하는 3세기 후반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엄격하게는 위가 세워진 220년부터 오가 진에게 멸망한 280년까지를 삼국시대로 보나, 많은 사람들은 황건의 난을 삼국시대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의 다른 국가들과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위를 조위, 촉을 촉한, 오를 동오라고 부르곤 한다.
비록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였다. 삼국 시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전되었고, 최근에는 TV, 영화, 비디오 게임 등으로 제작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명나라의 나관중이 쓴 삼국시대에 기반을 둔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이다. 가장 권위있는 역사 기록은 진수가 쓰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삼국지이다.
삼국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시기였다. 후한 말의 인구조사에는 그 당시 인구가 약 5천만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서진 초에는 천 6백만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의 인구 조사는 한의 인구 조사보다 덜 정확했기 때문에 실제 수치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삼국지 모든 시기(184년~280년)의 중국 인구는 3,000만명에서 5,000만명으로 확실히 추정된다.
후한의 힘은 화제의 재위기 이후에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많은 황제들이 어려서 재위에 올랐고, 사실상 친척들이 더 많은 권력을 지녔다. 황제들이 성년에 이르러도 외척들은 권력을 내주길 꺼려했기 때문에, 황제는 권력을 찾기 위해 관리들과 환관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환관들과 외척간의 다툼은 그 당시 중국정부의 가장 큰 문제였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동안 환관들에 대한 관리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많은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고, 환관들은 저항에 참여했던 관리들을 처형하라고 황제를 설득했다. 몇몇 지방의 통치자들은 이렇게 억압적인 정치 분위기를 기회삼아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고 했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는 한나라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 더해서 당시 중국에는 많은 자연재해들과 여러 반란들 역시 존재했다.
184년 2월, 도교적 교단 태평도의 지배자였던 장각은 형제였던 장보와 장량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난은 급속도로 퍼져 수십만에 이르렀고, 중국 곳곳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36개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고, 큰 요새는 만명 이상, 작은 요새는 6~7천명 정도의 군사를 가져 한나라 군대와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그들은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라는 구호를 내새웠다. 영제는 황보숭과 노식, 주준을 보내 황건적을 물리치도록 했고, 지방의 관리들에게 군사를 보내 이를 돕도록 명했다. 삼국지연의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황건적은 결국 패배하고 중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때문에 살아남아 산지에서 도적으로 살아갔고, 이로 인해 시대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중국 곳곳으로 퍼진 도적떼들을 다 처리할 능력이 한나라 군대에는 없었다. 188년, 유언은 지방관들이 직접 그 지방을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 영제에게 건의했고, 영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주가 도적들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로 인해 중국 내부의 혼란은 결국 더 커지게 되었다.
이듬해에 영제가 죽고 다시 또 외척과 환관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환관 건석은 외척이었던 하진을 죽이고 왕세자자리에 올라있던 유변을 대신해 유협을 왕세자로 바꿀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유변은 황제가 되어 소제가 되었고, 하진은 원소와 함께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장양이 수장으로 있던 환관무리 십상시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하진은 또한 양주의 동탁과 병주의 정원에게 병력을 보낼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십상시는 이를 알아차렸고,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을 암살했다. 그러자 원소는 궁을 급습해 십상시와 2천여명의 환관들을 살해했다. 이로써 외척들과 환관들의 긴 싸움은 끝났지만 군주들간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혼란의 시대를 열었다.
이 일로 인해 북서쪽 국경에 있던 동탁이 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북서쪽 국경에서 창족과 전쟁중이었고, 이로 인해 동탁은 잘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군대를 끌고 낙양에 왔을 때 그는 쉽게 수도를 점령 할 수 있었다.
동탁은 더 능력있는 사람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유변 대신 유협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동탁은 전쟁통에 도망나온 유변과 유협을 지키고 있던 군대를 만났다. 동탁이 거만하게 행동하자 유변은 겁을 먹었으나 유협은 침착하고 권위있게 동탁에게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했다.
동탁은 처음에는 한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의 정치적인 능력은 군사적 능력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의 행동은 점차 폭력적이고 권위적으로 변했으며, 그에 반대하는 사람을 모두 처형하거나 멀리 유배를 보냈고, 황제에 대한 존경 역시 점차 없어졌다. 그는 왕실의 예절을 모두 무시했으며, 궁궐에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 190년에 반동탁 연합군이 조직되었다. 191년 5월, 계속된 패배에 결국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동탁은 낙양에 살던 수백만의 거주자들을 장안으로 강제이주 시키면서 그의 정치적 무능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는 반동탁 연합군이 낙양을 점령하지 못하게 낙양을 불태웠고 결국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를 불태우는 일을 저질렀다. 게다가 그는 군사들에게 지나가면서 보이는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했다. 군사들은 주민들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가져왔고 이를 전쟁에 승리한 것 처럼 보이게 하는 전리품으로 사용했다. 1년후에 동탁은 왕윤과 여포의 쿠데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191년, 연합군 사이에서는 황실의 친척이었던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점점 연합군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몇몇 군주들을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주들은 한나라의 재건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강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결국 한나라는 군주들에 의해 나뉘었다. 원소는 업의 북쪽 지역을 그의 상관이었던 한복으로부터 빼앗아 다스렸고, 북쪽 국경지대의 공손찬과 대립했다. 원소의 바로 남쪽에 있던 조조는 원술, 그리고 화이허와 창 강근처를 지배하고 있던 유표를 상대로 대립했다. 손견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받은 남쪽의 손책은 비록 원술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힘을 키우고 있었다. 서쪽은 유장이 익주를 다스렸고 그 북쪽에는 마등등과 같은 많은 군주들이 있었다.
동탁은 여포와 사도 왕윤에게 살해당했다. 여포는 동탁의 부하들(이각, 곽사, 장제, 번조)에게 차례로 공격당했다. 왕윤과 그의 가족들은 전부 처형당했다. 여포는 잠시 장양에게 몸을 위탁하다가 원소의 밑으로 들어갔다.
195년 8월, 헌제는 이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장안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위험한 방랑을 하면서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을 찾았다. 196년 조조는 황제를 모시면 다른 군주들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지니게 된다는 모사 순욱의 제안에 따라 황제를 모셨다.
조조는 189년 겨울에 군사를 일으켰다. 몇번의 전술과 전투로 조조는 황건의 몇몇 무리를 격퇴했다. 이로인해 조조는 장막과 진궁등을 무리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황건적과 싸워 약 삼십만의 군대를 흡수했다. 196년, 그는 허창으로 수도를 바꾸고 근처에 둔전제를 시행했다. 비록 높은 세금(농산물의 40~60%)을 부과하기는 했지만, 농부들은 안정적으로 군사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는 후에 그의 두 번째로 성공적인 정책이라고 일컬어진다.
194년, 조조는 서주의 도겸을 상대로 전쟁을 했는데, 이는 도겸의 부하였던 장개가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도겸은 유비와 공손찬의 도움을 받았으나, 조조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주가 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조는 자신이 없는 동안 여포가 연주에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도겸에 대한 전쟁을 잠시 미루고 후퇴했다. 도겸은 그해 사망했고 서주를 유비에게 물려줬다. 이듬해인 195년, 조조는 여포를 연주에서 쫓아냈다. 여포는 서주로 도망갔고, 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
남쪽의 손책은, 원술에게서 독립하고, 양주의 군주들이었던 유요, 왕랑, 엄백호등을 물리쳤다. 197년에 원술은 스스로 중 (후한)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군주들의 분노를 불러온 실수였고, 또한 그의 부하였던 손책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조조는 손책에게 원술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손책은 이를 따랐고, 또한 원술에 대항해 유비, 여포 등과 연합을 하라고 조조를 설득했다. 결국 원술은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도망쳤다.
후에 여포는 원술의 잔여병력과 힘을 합쳐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점령했다. 유비는 그의 의형제였던 관우, 장비와 함께 조조에게로 도망쳤다. 뒤이어 조조는 유비와 함께 서주를 공격했다. 여포의 부하들은 그를 배신했고, 원술의 지원군은 오지 않아 결국 여포는 그의 부하였던 송헌과 위속에게 포박당해 조조에게 끌려갔고, 이후 조조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200년, 외척이었던 동승은 헌제로부터 조조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는 유비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으나, 조조에 의해 발각되어 유비를 제외한 공모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유비는 북쪽의 원소에게로 도망쳤다.
황건 잔당들의 반란과 궁 내부의 위협들을 처리한 뒤, 조조는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한 원소에게로 눈을 돌렸다. 원래부터 조조보다 신분이 더 높았던 원소는 거대한 군대를 모으고 황하 북쪽의 댐을 따라서 야영지를 세웠다.
200년에 유표를 상대로 승리하고, 허공의 반란을 진압한 손책은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동생이었던 손권을 후계자에 임명했다.
조조는 관도 대전에서 원소와 충돌했다. 군사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승리했는데, 특히 원소의 군량창고에 불을 질러 군대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로 도망쳤고, 많은 원소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202년에, 조조는 원소의 죽음과 이후 원소의 아들들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황하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204년에 업을 함락시키고, 기주, 병주, 청주, 유주를 점령한다. 207년 말, 오환을 상대로 한 북방 정벌에서 승리를 거둔 후 화베이 평원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얻었다.
208년에, 조조는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유표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고 형주를 넘겼으며, 조조는 거대한 함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강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손책의 후계자 손권은 저항을 계속했다. 손권의 모사 노숙은 북쪽에서 도망쳐 온 유비와 동맹을 맺었고, 주유는 손가를 섬기던 노장 정보와 함께 손권의 해군 제독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명은 적벽에서 조조의 대함대와 2십만 군대와 마주쳤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자 조조의 함대에 불을 질렀고, 결국 조조는 대패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유비와 손권은 결국 살아남았고, 촉과 오가 세워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북쪽에 돌아 온 후, 조조는 211년 북서쪽 지역을 병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이로써 점점 힘을 길러갔다. 그는 계속해서 힘을 길렀고, 결국 217년, 그가 조종하는 헌제에 의해 위왕에 올랐다. 유비는 형주의 태수들이었던 한현, 금선, 조범, 유탁을 물리치고, 214년에는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점령했고, 형주에는 관우를 남겨두었다. 손권은 합비 전투를 끝내고 형주로 눈을 돌렸고, 둘 사이의 연합을 깨져가는 듯 보였다. 219년, 유비가 조조에게서 한중을 빼앗자, 조조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형주를 쳤다. 손권의 장수 여몽에 의해 관우는 잡혔고, 결국 처형당했다.
220년 1월, 조조가 죽고, 그해 10월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에게 황제 자리를 내놓을 것을 강요했고, 결국 한나라는 멸망했다. 조비는 낙양에서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가의 이름을 위로 했다. 221년, 유비는 멸망한 한을 재건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다. 같은해에 위는 손권에게 오왕의 자리를 수여했다. 1년 후에, 촉은 관우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오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비는 손권의 지휘관 육손에 의해 대패하고, 촉으로 후퇴한 뒤 곧 사망했다. 유비가 죽은 후, 오와 촉은 위를 상대하기 위해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222년, 손권은 조비가 내려준 직책을 거부했고, 229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북쪽은 완전히 위가 점령했고, 남서쪽은 촉이, 남쪽과 동쪽은 오가 지배했다. 국경 외부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제한된 곳이었다. 예를 들어, 촉의 정치적 지배권은 남쪽(현재의 윈난 성과 미얀마)의 남만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223년, 유비가 패배하고 사망하자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후 촉과 오의 적대기간은 끝났으며, 두 국가 모두 내부 문제와 외부의 적(위)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 전쟁의 승리로 촉이 형주를 노릴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이후 남동쪽의 원주민이었던 백월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4년, 제갈각은 약 십만명의 백월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면서 3년간에 걸친 전쟁을 끝냈다. 그들 중 약 4만명 정도가 오의 군사에 편입되었다. 그동안 촉 역시 남쪽의 원주민들에 의해 골치를 썩고 있었다. 남만은 촉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익주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제갈량은 남쪽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촉군에게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했다. 그는 남만의 대장 맹획과 몇번의 전투를 벌였고, 결국 맹획은 항복했다. 남만인들은 촉의 수도였던 성도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었고, 또한 군대에도 남만부대가 생겼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 끝나자, 촉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7년에 제갈량은 촉의 주력 군대를 한중으로 이동시켰고, 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제갈량은 조운과 함께 기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선봉이었던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전략에 의해 패배를 하고 만다. 그 후 6년동안 제갈량은 몇번의 공격을 더 했으나, 물자 공급문제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고, 웨이허남쪽의 오장원에서 전투를 했다. 그러나, 그해 제갈량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북벌을 할 동안, 오나라는 위나라가 침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었다. 특히 합비근처는 적벽 대전 이후부터 계속해서 오와 위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던 지역이었다. 계속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합비의 거주자들은 결국 장강 남쪽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죽은 뒤, 화이허남쪽에 대한 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는 오의 수비선을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손권의 긴 재위기는 오나라의 전성기로 여겨지고 있다. 북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백월족 이주민들로 인해 농사를 지을 인력이 풍부해 졌다. 또한 바다를 통한 운송업도 발전해 만주나 타이완등으로의 바다 여행도 가능해졌다. 오의 상인들은 현재의 베트남 북쪽 지역이나 캄보디아 등과도 교역했다. 경제가 번영한 것과 같이 문화나 예술 역시 발전했다. 낙양남쪽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 역시 이때였다.
230년대 후반부터 조씨 가문과 사마씨 가문사이의 긴장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조진이 죽은 후, 조상과 사마의간의 파벌싸움이 시작되었다. 조상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마의를 배척했다. 위나라에서 땅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가문 중 하나였던 사마씨 가문은 사마의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어 그 세력이 커졌다. 게다가 사마의는 매우 능력있는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238년에 사마의는 공손연의 반란을 진압하고 랴오둥 반도를 정부의 직접통치하에 두었다. 결국, 그는 조상과의 힘싸움에서 이긴 셈이었다. 조상과 그의 가족들이 고평릉으로 간 틈을 타 사마의는 낙양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씨 가문에 대해 대항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죽림칠현이었다. 죽림칠현중 하나였던 혜강은 조상의 몰락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처형당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그가 차지하고 있던 승상자리는 장완과 비위, 동윤이 차지했다. 그러나 258년 이후, 촉의 정치는 환관들에게 조종당했고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제갈량의 후임이었던 강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은 점점 무너져 갔다. 263년에 위는 세갈래로 공격을 진행했고, 촉군은 한중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강유는 황급히 검각에 수비진을 폈으나,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험준한 지역인 음평을 통해 진군해 온 위의 등애에 의해 측면을 공격당했다. 그해 겨울 등애에 의해 수도인 성도가 함락되고, 황제 유선은 항복했다. 결국 촉나라는 43년 만에 멸망했다. 유선은 낙양에서 위나라에 의해 "안락공"에 봉해졌다.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죽이려 했다가 오히려 사마소에게 살해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조환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곧이어, 사마소가 죽고 그의 "진왕"직은 아들 사마염이 물려받았다. 사마염은 바로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품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조환은 조모와는 달리 황제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264년, 사마염은 조환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위를 멸망시키고 진을 세웠다. 이것은 40년 전 조비가 한을 멸망시킨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손권이 죽은 후 어린 손량이 252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오는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촉의 멸망은 위나라가 오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선이 항복한 후 사마염(사마의의 손자)은 246년, 위의 황제를 몰아내고 진의 새로운 황제가 되면서 46년간 이어진 조위를 멸망시켰다. 진이 생겨난 후 오의 황제였던 손휴가 사망했고, 신하들에 의해 손호가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손호는 촉망받던 영재였으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급격히 포악해져 자신에게 간언을 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269년, 진의 남쪽을 지휘하고 있던 양호는 왕준과 함께 지금의 쓰촨 성 지역에서 오를 정벌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년후, 오나라의 육항이 유능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79년 겨울, 사마염의 명에 의해 진이 공격을 시작했고, 쓰촨 성 지역의 함대는 강을 따라 형주로 향했으며, 창 강을 따라 건업(현재의 난징 시)에서 강릉까지 다섯군데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런 맹공에 결국 건업은 280년 3월에 함락당한다. 손호는 항복하고, 봉토를 받아 그 봉토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국 시대는 끝났고, 약 300여년간의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황건의 난 이후에 중원에 심각한 기근이 왔다. "170년 봄에, 하내의 몇몇 부인들이 남편을 먹었고, 하남의 몇몇 남편들이 부인을 먹었다."고 기록된 것 처럼 식인풍습이 널리 퍼졌다. 동탁이 권력을 잡은 후, 군대를 동원해 많은 여자들을 납치하고 강간했다. 반 동탁연합이 결성되자, 동탁은 갑자기 낙양의 시민들에게 낙양의 모든 궁궐과 절, 공관서와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장안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당시 비참했던 생활상을 고려할 때 시민들이 장안까지 살아서 도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조조가 서주를 참략했을 때, 수십만의 사람들이 산채로 땅에 묻혔고, 강은 막혀 마을이 회복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각 (후한)이 관중 (지명)을 침략했을때, 당시 수십만의 주민이 있었고, 이각의 명령하에 군대가 약탈을 자행해 결국 서로를 잡아먹는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 삼국시대의 인구감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후한 말기에서 서진의 통일까지 125년밖에 안되는 기간이었으나, 인구는 약 35%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이후 수나라의 시대까지도 인구가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인구중에 군사의 비율이 매우 높은 시기였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예를 들어, 촉의 인구가 900,000명이었을 당시 군인은 100,000명으로 군인이 전 국민의 10%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국지에 삼국 시대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다른 많은 중국의 역사 기록이 그렇듯, 이 인구수 역시 실제 인구보다 적은 수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인구조사가 정확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한 세금 회피자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지 모든 시기(184년~280년)의 중국 인구는 3,000만명에서 5,000만명으로 확실히 추정된다.
왕조 | 년도 | 가구 | 인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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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 156 | 10,679,600 | 56,486,856 | |
촉한 | 221 | 200,000 | 900,000 | |
촉한 | 263 | 280,000 | 1,082,000 | 촉한이 멸망했을 당시, 병사는 102,000명이었고, 40,000명의 관리들이 있었다. |
동오 | 238 | 520,000 | 2,567,000 | |
동오 | 280 | 530,000 | 2,535,000 | 오의 멸망시에, 32,000명의 관리와 230,000명의 병사, 그리고 5,000명의 후궁이 있었다. |
조위 | 260 | 663,423 | 4,432,881 | |
서진 | 280 | 2,495,804 | 16,163,863 | 진이 중국을 재통일했을 당시가 이 시대에서 인구가 제일 많았던 시기였다. |
후한 말기, 자연재해와 사회적 불안정때문에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고, 결국 많은 농지가 버려졌다. 몇몇 지방관리들과 귀족들은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세우고, 농사를 지어 점차적으로 자급자족 체제를 마련했다. 이런 요새와 영지체계는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왕실의 몰락으로 인해, 헌 동전을 녹여서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돈을 주조했기 때문에, 국가가 아닌 개인이 주조한 동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삼국시대에는 새로 주조한 동전은 화폐로써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비단과 곡식들이 화폐의 역할을 주로 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지역적인 분열은 결국 후의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삼국시대로부터 약 700년이나 지난 북송시대에도 중국의 지역 경제권은 크게 3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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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고황제 (高皇帝) (위 문제 추숭) | 조등(曹騰) | - | - | - |
- | - | 태황제 (太皇帝) (위 문제 추숭) | 조숭(曹嵩) | - | - | - |
- | 위 태조 (魏太祖) (위 무조<魏武祖>) | 무황제 (武皇帝) (위 문제 추숭) | 조조(曹操) | - | - | 고릉(高陵) |
제1대 | 위 세조 (魏世祖) (위 고조<魏高祖>, 위 태종<魏太宗>) | 문황제 (文皇帝) | 조비(曹丕) | 황초(黃初) 220년 ~ 226년 | 220년 ~ 226년 | 수양릉(首陽陵) |
제2대 | 위 열조 (魏烈祖) | 명황제 (明皇帝) | 조예(曹叡) | 태화(太和) 227년 ~ 233년 청룡(靑龍) 233년 ~ 237년 경초(景初) 237년 ~ 239년 | 226년 ~ 239년 | 고평릉(高平陵) |
제3대 | - | 소황제 (少皇帝) (제왕<齊王>, 소릉여공<邵陵厲公>) | 조방(曹芳) | 정시(正始) 240년 ~ 249년 가평(嘉平) 249년 ~ 254년 | 239년 ~ 254년 | - |
제4대 | - | 폐황제 (廢皇帝) (고귀향공<高貴鄕公>) | 조모(曹髦) | 정원(正元) 254년 ~ 256년 감로(甘露) 256년 ~ 260년 | 254년 ~ 260년 | - |
제5대 | - | 원황제 (元皇帝) (진류왕<陳留王>) | 조환(曹奐) | 경원(景元) 260년 ~ 264년 함희(咸熙) 264년 ~ 265년 | 260년 ~ 265년 | - |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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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한 열조 (漢烈祖) | 소열황제 (昭烈皇帝) (촉 선주<蜀先主>) | 유비(劉備) | 장무(章武) 221년 ~ 223년 | 221년 ~ 223년 | 혜릉(惠陵) |
제2대 | - | 효회황제 (孝懷皇帝) (촉 후주<蜀後主>, 안락사공<安樂思公>) | 유선(劉禪) | 건흥(建興) 223년 ~ 237년 연희(延熙) 238년 ~ 257년 경요(景耀) 258년 ~ 263년 염흥(炎興) 263년 | 223년 ~ 263년 | - |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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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 시조 (吳始祖) (오 대제 추숭) | 무열황제 (武烈皇帝) | 손견(孫堅) | - | - | 고릉(高陵) |
- | - | 장사환왕 (長沙桓王) (오 대제 추숭) | 손책(孫策) | - | - | - |
- | - | 오왕 (吳王) | 손권(孫權) | 황무(黃武) 222년 ~ 229년 | 220년 ~ 229년 | - |
제1대 | 오 태조 (吳太祖) | 대황제 (大皇帝) | 손권(孫權) | 황룡(黃龍) 229년 ~ 231년 가화(嘉禾) 232년 ~ 238년 적오(赤烏) 238년 ~ 251년 태원(太元) 251년 ~ 252년 신봉(神鳳) 252년 | 229년 ~ 252년 | 장릉(蔣陵) |
제2대 | - | 폐황제 (廢皇帝) (회계왕<會稽王>) | 손량(孫亮) | 건흥(建興) 252년 ~ 253년 오봉(五鳳) 254년 ~ 256년 태평(太平) 256년 ~ 258년 | 252년 ~ 258년 | 관후묘(官侯墓) |
제3대 | - | 경황제 (景皇帝) | 손휴(孫休) | 영안(永安) 258년 ~ 264년 | 258년 ~ 264년 | 정릉(定陵) |
- | - | 문황제 (文皇帝) (오 말제 추숭) | 손화(孫和) | - | - | 명릉(明陵) |
제4대 | - | 말황제 (末皇帝) (귀명후<歸命侯>) | 손호(孫皓) | 원흥(元興) 264년 ~ 265년 감로(甘露) 265년 ~ 266년 보정(寶鼎) 266년 ~ 269년 건형(建衡) 269년 ~ 271년 봉황(鳳凰) 272년 ~ 274년 천책(天冊) 275년 ~ 276년 천새(天璽) 276년 천기(天紀) 277년 ~ 280년 | 264년 ~ 280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