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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둥근달
하나님도 못당하시는 일곱종류의 기질
하나님이 경멸하시며 심판하시는 일곱종류의 기질이 에스겔을 통한 계시를 통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결은 다 멸하셨습니다. 하나님도 당하실 수 없는 열방들은 심판으로 밖에 다스릴 수 없는 육적인 기질들을 말합니다.
제자훈련은 이러한 기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도록 돕는 사역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교회안에 "내 성질 몰라? 내 기질은 성령님도 못고쳐!" 라고 버팅기는 기질은 하나님도 버려둔 영혼일지도 모릅니다.
에스겔 25장부터 32장에 일곱나라가 이스라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나라 주변에는 더 많은 나라가 있었으나 주께서 일곱나라를 대표로 뽑았다는 뜻입니다. 암몬 모압 에돔 불레셋 두로 시돈 애굽이 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교회가 초대교회의 일곱교회의 형태가 존재하였고 지금도 그 카테고리안에서 교회들을 적용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주변의 열국들에게 대한 진리로 빛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가가 최후의 보루입니다. 복음으로 변화되지 못한다면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1)암몬족속
암몬과 모압은 롯이 자기 딸들을 취하여 낳은 두 형제들입니다. 그들의 기원은 부적절한 관계에서 싹이 난 추하고도 악한 것입니다. 암몬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소가 더럽혀졌을 때 [아하 좋다]고 말하였습니다(겔25:2-3).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황폐되었을 때에 암몬 족속들은 또 즐거워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집이 포로로 끌려 갔을 때 즐거워해 했습니다. 성소는 이땅에 장막을 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을 말씀하고 있고 좋은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모든 풍성함과 은혜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유다집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암몬 족속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를 미워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2)모압족속
[보라 유다집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다]라고 말합니다.(겔25:8) 교회를 세상과의 사귐안으로 이끌기를 좋아하는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상과 같게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교회를 암몬 족속은 미워하지만 모압족속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로 하여금 세상과 사귀게하고 물들게 만들어갑니다. 세속화하고 세상의 모든 문화와 방법을 끌여들여 많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지탄을 받는 교회와 성도를 칭하는 족속이 모압족속입니다.
3)에돔
에돔은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족속과 에돔은 사촌간인 것입니다. 에돔은 옛사람을 말합니다. 우리의 거듭나지 않는 옛사람은 에돔이고 우리의 거듭난 새사람은 이스라엘입니다. 에돔은 늘 이스라엘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여 복수를 하고 원한을 갚으려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교회를 사랑하고 한편으로는 교회를 미워하는 양면성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교회의 형제들을 사랑하다가 그들을 증오하고 돌아서기도 합니다. 우리의 본성속에 에돔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주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다가 세상으로 돌아서서 교회를 헐뜯고 시비하는 에돔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4)불레셋
불레셋은 불레셋 사람들은 좋은 땅에 근접하여 살면서 심지어는 이스라엘과 섞이면기도 했습니다. 불레셋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주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한번은 언약궤가 불레셋인들게 사로 잡혀 갑니다. 불레셋은 변화받지 못한 육의 본질인 인간의 기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돔족속과 불레셋 족속은 교회 생활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본질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은 방해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5)두로
두로는 세상적인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예표합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돈벌고 부요해지기를 추구합니다.두로 사람들은 믿음의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더 높은 명에를 얻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만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두로는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라고 했고 그것을 고소하게 즐겼습니다. 오늘도 그런 부류의 기질이 교회안에 얼마든지 있음을 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고 믿음안에 살아가는 자를 조롱하고 물질을 낭비한다고 생각하며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위한 헌신이나 봉사가 체질회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아직도 두로의 기질에서 거듭나지 못한 육적인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이런 두로와 같은 기질의 사람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6)시돈
시돈은 이스리엘을 찌르는 가시라고 말합니다.(28:24) 교회안에 두로와 시돈의 많은 성도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13장22절에 예수님은 재리의 유혹과 이 세상의 염려가 마치 생명의 성장을 막는 가시들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시돈은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잡초와 같은 해로운 존재들인 것입니다. 교회안에 시돈와 같은 목사도 있고 잘오도 있고 권사도 있고 집사도 있다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마치 가라지와 같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솎아 낼 때 해야 합니다. 자칫 하다간 알곡이 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자훈련을 통하여 다듬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생산성향의 성도가 있고 소비형의 성도다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소비형의 성도들을 말씀으로 생산적인 성도로 양육하는 것이 제자훈련사역인 것입니다.
7)애굽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나일강이 있어서 하늘로부터 비를 의지하지 않고 나일강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사용하여 천연자원을 개발함으로 부하게 되었고 풍성한 공급을 얻게 됩니다. 에스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섰고 애굽을 기대고 지팡이처럼 애굽을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애굽은 부서지기 쉬운 지팡이라고 말씀하십니다(겔29:2-9). 결국은 애급의 교만으로 인하여 철처하게 바벨론에 붙여 그 교만을 꺽어 버립니다. 하나님 없는 부요 하나님 없는 명예는 교만하게 만드는 장해물인 것입니다.
일곱열국에 대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파멸시켰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 나라들을 황폐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의 교만을 꺾으셨습니다. 영원히 그들을 제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일곱개의 기질을 가진 개인이고 국가고 왕이고간에 하나님의 다스림속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도 다루실 수 없는 기질의 열방들을 다 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 되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옛사람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람과 환경을 통하여 겸손하게 만들고 말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주라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모압 암몬 에돔 불레셋 두로 시돈 애굽은 교회 생활을 손상시킬 수 있는 일곱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거스르고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주의 은혜를 거역하는 사람들은 암몬족속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점차로 교회를 세속화 하여 교회를 세상과 구별이 없게 하는 망난이들입니다. 이들은 모압입니다. 옛사람을 대표하는 애돔이 있고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을 방해하는 천연적인 기질을 대표하는 불레셋인 족속이 있습니다. 또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두로가 있고 부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회의 가시가 된 시돈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굽인은 충성한 공급을 위하여 자신의 자원을 개발함으로 세상적인 부를 추구하며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의 공급의 근원이 되고 하나님과는 독립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적인 풍성함으로 믿음의 길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인 기질을 성령의 일곱가지 열매를 맺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육의 본성을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된 본성을 처리하시고 부활의 영으로 각자 성도들의 심령을 지성소로 삼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주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제자훈련을 통하여 주의 형상을 날마다 닮아가서 우리 모두는 신의 성품에 참여케 되는 것입니다.
교파,교리에 메이지 않는 제자훈련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몇가지를 체험한 사실들을 나누려 합니다. 저희 교회가 같은 상가 같은 층에 나란히 교회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알고 보니 분양을 받을 때 분양주와 양해아래 분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래서 5층에 반쪽은 감리교 다른 반쪽은 장로교단 이렇게 목회를 해 오는 중 장로교가 분양가를 치루지 못하고 모든 성도들은 채무에 눌려서 서울에서 나오던 성도들이 다 흩어지고 교회가 폐쇠 상태에서 당시에 부목으로 있던 필자가 만리현 교회의 지원으로 잔금을 치루기로하여 현재 교회자리에 새롭게 교회가 개척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 필자는 부목을 사임을 할 상황이고 해서 일단 교회를 개척하기로 온 당회와 교회가 결정하여 필자를 파송하여 분당 제자교회가 설립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목회를 하다 보니까 엘리베이터을 타고 5층에서 내리면 감리교의 복도를 지나서 제자교회를 들어오는 보기에 좋지않는 인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같은 층에 교회가 나란히 있다보니 여러가지 은혜스럽지 못한 일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주의 몸안에서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걸리돌이 될 것 같아 남녀화장실을 한나씩 나누어 쓰기로 하고 복도의 문을 이중으로 하여 막고 제자교회는 4층에서 내려 복도를 끼고 계단을 걸어서 사용하게 된것입니다.
그런데도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제자교회를 찾아온 성도들이 감리교회로 곧장 올라가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고 예배 도중에 건너오는 성도들도 생겨 여간 불편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승강기 안에 교회를 알리는 거울을 부착했는데 새벽기도회 때 보니 와장창 깨져있어 확인하니 청년들이 부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탑이 없어 전면에 간판을 해 달았는데 그 간판을 감리교의 간판보다 크게 했다고 시비를 하는 바람에 정말 한국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운다고 말한 외국 사람들의 농담이 장난이 아님을 실감했습니다. 전도를 하여 막 교회에 등록을 하여 교패를 붙여 놓고 왔는데 큰 교회의 전도사가 와서 교패를 잡아 때고 큰 교회의 교패를 붙이고 자기 교회에 나와 솔로로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바울파도 아닙니다. 아볼로파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 것입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교파를 뛰어 넘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주님의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교리에 묶여 있는 성도들을 봅니다. 칼빈신학이니 웨슬레 신학이니 하여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사중 복음이니 오중복음이니 우습지 않습니까?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를 통하여 십자가와 부활만 전하기로 작정합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는 것입니다.
신학 자체가 생명이 되진 못합니다. 많은 교파가 생기는 것은 시기와 다툼이 있어서 갈라서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분파를 일삼은 것은 우리 속에 처리되지 못한 자아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파가 말하는 것 말고 교리가 말하는 것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제자가 참 제자인 것입니다. 교파의 사람을 만들지 말고 교리의 사람이 되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닮아가는 생명을 누리는 제자를 훈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주님의 몸을 보아야 합니다. 몸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한소망안에 부르심을 입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교리나 교파로 분리하지 않고 구별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유를 향유하며 누리는 제자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주께서 하나되게 하심을 나뉘게 하는 분리는 세상적이요 마귀적이요 사단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 차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골로새서에 마지막 부분에서 10여명의 동역자들을 열거하면서 지면을 할애하여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체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와 골로새 사이에 지리적인 지역 안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십자의 복음안에서 하나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기고 오네시모 아리스다고 마가 바나바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 데마 눔바 아킵보 등 헬라인 유대인 할례당 무할례당 야인 스구디아인 종 자유인 다양하게 구성된 주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면 주님께 부끄러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일에 간섭하거나 어려움을 줄까 두려워서 다른 지방 교회들과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선교의 현장에서 도망쳐온 일로 바나바와 사역의 등을 돌리고 갈라섰던 일을 잊고 이제는 마가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하나됨 그리고 데마는 세상이 좋아 세상으로 나갔던 그도 복음사역에 하나로 구성된 한 몸된 사실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많은 분파로 많은 교리로 삼분 오열되어 교파싸움을 하면서 성경을 교리와 신학으로 갈기갈기 찢어 발기고 죽어가는 오늘의 교회를 제자훈련을 통하여 그 세포를 살려야 하며 동맥경하와 같은 체질을 그리스도의 깨끗한 피로 씻어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장로교에서 자라서 성결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설교나 성경공부 제자훈련에서 교파의 교리나 신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증거하고 훈련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없기 떄문입니다. 제자훈련을 하고 받는 모든 주의 종들은 먼저 교파의식을 뛰어넘어 순수하게 무릎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주님에게 붙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쫒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목장은 푸른 초장이 될것이고 쉴만만한 물가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삯군 목자인가 선한 목자인가?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가 이루어야 할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질문에 몇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인 제자 삼으라는 대위임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평신도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몇 년을 시도해 보다가 표면적으로 어떤 결과가 없을 때는 슬그머니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하여 시행을 해 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맞추어 입지 않는 기성복이라서 결국은 몸에 맞지 않아 또 다른 기성복으로 갈아입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일관성 있는 교육 목표를 향해 나갈 수가 없는 경우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제자훈련을 다 시행해본 것으로 치부하고 제자훈련을 한물간 기성품으로 취급하며 폄하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해아래 무슨 새것이 있다고 새것을 찾아 헤매는 오늘의 목회 현장의 단면을 보게된 것같아 필자는 기분이 찜찜합니다. 왜냐하면 제자훈련의 진수를 모르고 수박 겉핱기식의 미세한 시도를 가지고 주님이 제시한 목양방법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훈련의 유일한 목표가 무엇인가?
목회자가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지 못하면 중도에서 포기하거나 좌절을 경험할 것입니다. 모든 프로그램이 교회가 수적 부흥되는 교회성장쪽으로 기울여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주님의 시행한 훈련의 방법을 준수하면서 사역을 시행한다면 부흥의 열매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12명의 소수의 사람들과 3년을 거치면서 3년동안은 수적 증가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일정한 시간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투자하여 그들로 피값으로 사신 교회의 양무리를 먹이고 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위로부터 공급된 주님의 부활의 영으로 초대교회가 탄생되고 내주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재생산을 위한 양치기로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재생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생산에 투입되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작은 목자로 세워서 주님이 맡긴 양들을 치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유일한 목표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마인드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목자마인드 작업이 제자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선한 목자로 어떤 목양의 철학을 가지고 사역을 하였는가를 먼저 체험하고 보여주며 가르쳐서 그것을 실행하도록 평신도를 주님의 제자로 훈련해야 하는 것이 제자훈련 사역의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신도 모두를 양치기로 부르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한가를 확인하시면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위임하십니다. 이 때 양은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양치는 목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출발되어야 하고 그 양치는 원리는 잃은 양을 찾아 그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잔치를 벌리고 기뻐한 그분의 심정을 실현하는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분당에 개척한 이래 주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를 재생산을 위한 전략적 목회 방식을 그대로 제자교회의 비전으로 제시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10여명의 작은 목자를 배출하고 이들과 함께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표를 세운 만큼 눈에 보이는 큰 열매들은 없지만 주님의 마인드를 가지고 함께 나아갈 평신도 지도자를 세워가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지금 교회를 섬기고 있는 일군들은 제자훈련을 통하여 세움을 받는 평신도 지도자들입니다. 훈련을 받지 못한 분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주님의 목자의 마음을 전달하는 훈련을 다양하게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교회를 향한 비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미숙하고 연약하지만 주님의 제자들이 세계를 복음화 했던 주역들임을 알게 되면 분명히 주님의 교회를 위한 소중한 기둥들인 것입니다.
제자훈련에서 다루어져야 할 주님의 목자 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연구하는 목회자 모임에서 함께 고민하며 이 문제를 나누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제일 큰 과제는 목회자 스스로가 주님의 방식과 철학으로 목회의 방향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은 가지고 있지만 아직 자신도 준비되거나 훈련되지 못한 부족함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모든 프로그램을 적용한다고 할지라도 같은 결과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주님의 길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목회자가 먼저 주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복음의 그릇으로 훈련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연구원들의 간증은 성서 안에서 주님이 제시한 그 초점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로 제자훈련에 대한 마인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모든 것이 주님의 목회 방식으로 변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제자훈련의 원리인 것입니다. 먼저 목회자 스스로가 충성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충성된 자를 제자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내용에 포함해야 할 작은 목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에스겔서 34장에서 목자상에 자질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화들은 에스겔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이상을 확실히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목자장되실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삯군목자들을 언급하면서 이스리엘 지도자들을 통렬히 지적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양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배만 채우는 목자는 훈련되어야 합니다.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않았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목자로써 전혀 자질이 없는 지도자 가 양을 맡아 목양을 하다보니 양들은 다 흩어지고 그 양들은 들짐승의 밥이 되고 유리 방황하는 양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의 일을 맡은 직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양들을 치는 것이 아니라 양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며 직무를 유기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무자격 목자들이 존재한다면 주님의 제자로 훈련되어 양치기를 잘 하는 작은 목자를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한 목자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목자장 되신 주님께서 그 양들을 삯군 목자들의 손에서 찾으신 다는 말씀입니다. 잃은 양을 찾으시던 주님은 지도자들이 잃어버린 양들을 다 찾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겔34:10)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그들을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로 먹이되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 야들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겔34:13-14) 그렇습니다. 주님의 양을 치는 모든 직분자들은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양들을 위하여 푸른 초장인 생명의 떡상으로 인도하며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성장하도록 영을 치고 먹이는 작은 목자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라도 지불합니다.
겔34:16에서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이 땅에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희생하시고 부활의 영으로 살리는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 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치유하시며 상처를 싸매시며 병을 고쳐주시는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제자훈련은 우선 평신도가 이런 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치료하심과 능력주심을 체험하고 그것을 배우고 훈련하여 목자의 그 마음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양들을 다루는 작은 목자로 세워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이를 놀이터에 놀게 한뒤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보호하는 것처럼 목자는 양떼를 생각하며 양을 치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필립 목사님은 시편 23편의 다윗의 체험을 이해하기 위하여 양을 직접 쳐보았습니다. 양들의 많은 기질과 속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들은 방향감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갈 길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목자의 인도가 없으면 살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양은 방어 기제가 없습니다. 흉한 짐승들의 공격을 받으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은 고집이 셉니다. 오래된 양은 텃새를 합니다. 면역체가 약해서 자주 병들게 됩니다. 이런 속성이 우리가 치는 양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주 넘어지기 쉽고 병들기 쉽고 길을 잃고 방황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목자의 보호와 관심 속에서 성장하여야 합니다. 당신들이 치는 양들은 건강합니까?
한 목자를 세우셔서 우리에게 표본을 보여 주십니다.
(겔34:22-23)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 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주님은 이스라엘의 삯군 목자들의 예를 들어서 이 땅에 선한 목자 되신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성육신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선한 우리의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은 그의 음성을 알게 됩니다. 오늘 주의 목자들이 우리에게 맡겨준 양들을 얼마나 아는가? 그들을 인격적으로 얼마나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는가? 수많은 군중을 모아놓고 설교하기를 즐기는 목자들이 양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묻고 싶습니다. 필자는 목회를 하면서 체험한 것이 1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 하는데도 양의 개개인을 다 알지 못합니다. 양의 욕구와 그들의 필요를 다 알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0:7-8)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구약시대의 모든 목자들은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만이 양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하여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요10:11-1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 을 버리노라"
제자훈련은 이 주님의 양을 향한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정신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를 훈련하여 주님의 양들을 돌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훈련은 바로 목자의 심정으로 양치기를 잘하도록 훈련하는 사역입니다. 진정한 목자의 마음으로 변화 받지 못한 주님의 사역자들은 오히려 양들을 병들게 하고 양들을 넘어지게 하고 주님의 목장인 교회를 혼란에 빠지도록 일만 만들어 내는 거치는 삯군 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목회의 현장을 주님의 목장으로 회복하기 위한 훈련을 위하여 먼저 던저야 할 질문 당신은 삯군목자입니가? 선한 목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