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방에서 잠자고 직산부엌에서 밥먹는다?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날 새벽에 집을 나섰다.
아마, 삼남대로에서는 마지막일 것이다.
대간, 정맥들에서 숱하게 반복해 왔는데도 처음과 마지막 출가는
매번 새롭게 특별한 느낌이었다.
길이라 해서 다를 리 있겠는가.
아득하기만 했던 시작 때와 달리 넉넉히 잡아도 4일 이내에 끝날
것인데 왜 아니 그러겠는가.
9월 16일, 천안행 첫 급행전철을 탔다.
사흘간의 알맞은 휴식 후라 그런가 한결 가벼운 몸이었다.
천안땅에는 볼거리가 많지만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금북정맥 각흘고개 이후 아산 ~ 홍성지역을 통과할 때처럼.
이 일대는 공교롭게도 나만 남겨두고 일찍 가버린 K. U. L. 등 세
명의 벗과 관련이 유난히 많아 이 지역에 들어설 때마다 이 몹쓸
사람들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옛 신은역(新恩驛) 터라는 신부동(新富) 역말오거리에서 북상하는
1번 국도와 그 주변이 여전히 소란하다.
늘 이런 저런 공사중이다.
이름(富垈洞)과 달리 토질이 척박해 빈촌이었던 이 지대에 대소
공장들이 들어서고 영농술의 발달로 지금은 옛 지명대로 부티는
나지만 어수선함이 언제쯤 진정될 것인지.
'부투리' 또는 '비투리' 등으로도 부른다는데 대동지지의 비토리
(o土里)는 여기 부대동을 말하는 듯.
부대초교와 천안공대가 있는 마을 이름이 '원(院)넘어'다.
천안시의 기록에 의하면 서울 ~ 아산간의 전철 두정역이 들어선
두정동(斗井 : 우물물이 말로 쏟아졌대서 붙여진 이름이라나)에
풍천원(楓川院)이 있었단다.
'원넘어'는 이 원(院)의 산 넘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니까
부대동 일대에 원이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겠다.
북상을 계속하던중 잠시 웃을 거리가 생겼다.
천안 방에서 잠자고 직산 부엌에서 밥을 먹는다나.
신당동(新堂) 월경(越境월갱이)마을의 경우다.
이런 경직된 행정의 산물은 전국적이다.
하나의 주택이 작게는 리계(里界)에서 면계, 시군계, 광역시도계
등으로 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직산쪽 월경리는 직산에서 성거로 구역 개편되면서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으니 일부러 그러지 않고서야?
대동지지의 병장승우(幷長承隅)는 막연하다.
비토리에서 북쪽 13리간이라면 현 천안시 부성동(富城)과 성거읍
(聖居)사이 어느 지역일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차암동(車岩)에서 직산으로 통하는 길가에 장승이 서서 아산과
천안 길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는 하는데 1번 국도에서 상거가
만만치 않아 확인 불가로 정리하고 성거읍에 들어섰다.
이 성거읍땅도 직산읍에 들기 전 1번 국도상에 다소 큰 자투리로
붙어 있는데 직산에 넘겨주면 안되나?
山과 길의 차이
아무튼, 성거땅을 밟는 잠시동안에도 금북정맥 성거산(백두대간
104번 글이참조)이 다가왔다.
579m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산이다.
신령이 사는(聖居) 산이라는 뜻으로 왕건이 직접 명명하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는 산이다.
또한 저 성거산은 천주교 성거산 순교성지가 되었다.
나는 금북정맥 종주중 제1, 제2로 나뉘어 들어선 이 줄무덤들이
꼭 정맥마루에 있어야만 하느냐고 아쉬워 했다.
순교성지가 정맥 한 복판이 아니면 안되느냐고.
조그만큼이라도 느슨해지는 듯 하면 그 틈새를 비집고 고개드는
산을 향한 절절함을 어찌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굳이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음 설렘도, 심리적 갈등도 이미 극복되었고 웬만큼만 회복되면
다시 산으로 갈 것이 자명한데.
대간이건 정맥이건, 전국이 온통 산이다.
길은 지극히 조금인 일부 평야지대를 제외하고는 산들 사이로 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산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렇듯 경계의
끈을 죄려고만 해서야 어찌 걸을 수 있겠는가.
쭉쭉 뻗은 1번 국도가 다소 지루함을 느끼게 했다.
국도에 흡수될 당시의 옛 대로는 꼬부랑길 그대로 였을 것이다.
확.포장공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직선화 되었으며 곳곳에 버려진
자투리 길들은 그 수반 퇴물이다.
일부에는 자동차와 관련된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일부는 소규모 주차장 구실을 하기도 한다.
차량 통행량이 워낙 많은 1번 국도라 가능한 재활용이다.
그런데 산은 파괴당하는 족족 재앙으로 대갚음해 오지만 길은 파
헤치는 동안은 불편하나 그 결과는 생활을 업그레이드 해준다.
인간의 탐욕스런 이기심만 개입되지 않으면.
이것이 산과 길의 차이다.
그러나 산은 사람이 오만하게 굴지 않는 한 다소 불편은 해도 해를
주지 않지만 길은 편리한 만큼 불행도 수반한다.
이것이 또한 산과 길의 차이다.
옛 길에도 속도제한 표지가 있었던가.
공포심을 자극하는 <사고다발지역>, <사망사고발생지역> 푯말이
길가에 세워졌던가.
매일 수 없이 자주 보고 들어야 하는, 눈 귀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
아프게 하는 교통사고 소식이 있었던가.
어쩌다 낙마하거나 우마차에 치이면 회자거리가 되었는데 그것은
사건의 희소성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나마도 교통수단이 마소로 발전한 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편리 일변도로 발전할 수록 크고 작은 사고도 증폭된다.
즉, 편리와 행복이 꼭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옛 길에서는 황홀한 쾌감은 없었겠지만 참담한 불행도 없었다.
이것은 길과 길의 차이다.
삼은리(三隱)에 속았다
이런 생각중에도 걸음은 계속돼 직산(稷山)땅에 들어섰다.
직산현(縣)이던 시절에 비해 강등된 셈이나 천안시가 2개의 구
(區)로 분구되고 접경인 성거읍에 서북구청이 들어서면서 동반
상승 무드를 타고 있는 듯 하다.
내 몸 또한 이전보다 놀랍도록 부드러워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
없이 괄목할 만한 진도를 보이고 있다.
삼은리(三隱) 앞에서 늙은 길손은 돌연 진지해졌다.
려말(麗末)의 세 성리학자 목은(牧隱:李穡), 포은(圃隱:鄭夢周),
야은(冶隱:吉再)을 우리는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3인의 호에 각각 은(隱)자가 들어 있는 데서 유래했다.(최근에
야은을 도은(陶隱:李崇仁)으로 대체하자는 학자도 있으나 역시
三隱이다)
원(元)나라의 성리학을 연구하여 한국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한
이들은 고려 말에 출사(出仕)하였으나 고려의 패망 이후엔 이씨
왕조에의 협조를 끝내 거부했다.
포은은 선죽교의 참변으로 끝났고 생존한 양은(兩隱)도 은둔해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이 삼은과 동명의 마을인데 어찌 진지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허탈해지고 말았다.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고한읍의 두문동은 려망(麗亡)의
운명과 맥을 같이 하지만 여기 삼은리는 전혀 관련이 없다.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때 직산군 서변면 지역인 자은방리와
삼거리가 병합됐는데 삼거리의 삼자와 자은방리의 은자를 따서
삼은리라 했을 뿐이라잖은가.
직산현(懸)의 관아가 있던 군서리 시름새 혹은 수헐리는 현(縣)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이름이 바뀐 적이 전혀 없단다.
수헐원(愁歇院)이 있던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원(이 때 이미 원이 있었나 보다)에서 쉬다가
오색 구름이 영롱한 동쪽의 산을 보고 신선이 사는 산(聖居山)이라
하며 제사지내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근심을 풀고 잘 쉬어 갔단다.
그래서 시름세 또는 수헐이라 하였다는 것.
개구리참외에 대한 향수
성환땅(成歡)에 접어들면서 생각난 것은 개구리참외.
맨 먼저 먹어보고 싶은 것 역시 개구리참외였다.
그러나 개구리참외는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성환' 하면 '개구리참외'가 떠오를 만큼 성환과 개구리
참외는 동의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삼남대로 상에서도 전남 영암의 무화과와 충남 공주의 밤은 각기
그 지역의 상징에 다름 아닌 특산물이다.
찐빵으로 유명한 평해대로상의 안흥(安興)찐빵은 횡성군 엠블럼
(emblem)이 되다시피 되어 있다.
성환 개구리참외도 한 때는 그랬다.
개구리참외 먹으러 기차차고 소풍가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생산원가 경쟁에서 밀리고 당도도 턱없이 떨어져 추억의
먹거리감으로 전락됐는데 생산의욕인들 일겠는가.
주특산물 자리는 개구리참외를 밀어내고 신고배가 차지했다.
특산물에 관한 성환읍의 통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신고배 생산 농가가 506가구에 면적이 83.4㏊인데 반해 개구리
참외는 10가구에 2.4㏊뿐이니 겨우 맥을 유지하고 있다 할까.
그나마도 미구에 사라지고 말 거라니 아쉽기 그지 없으나 생산
농가의 소득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환의 중심 성환리에는 성환역이 있었다.
이조시대에는 찰방(察訪)이 있던 곳이다.
성환도찰방은 천안, 공주, 연기 지방의 28개 역을 관장하던 주역
(主驛)으로 종육품(從六品)의 문관(文官)이 주관하였단다.
종육품이라면 현감과 동일한 품계다.
개구리참외를 먹지 못했기 때문인지 시장기가 들었다.
아침에 천안역에서 토스트 1개 먹었을 뿐이니 그럴만도 하지.
도심을 벗어나 한 분식집에 들어갔다.
이 일대에서는 꽤 큰 휴게소 겸 식당이다.
롯데가 분식집까지 잠식했나?
롯데 마크가 선명하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중년 주인 부부가
아직 아마추어 상태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 업을 시작하게 된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시원한 잔치국수를 주문했는데 여인은 더운 것을 권했다.
그리고 가르쳐 주는 먹는 방법대로 다 먹고 일어서는데 남자는
냉장고에서 배즙 2팩을 꺼내어 내 배낭에 넣게 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지금은 신고배의 주산지가 된 성환이다.
드릴 게 이것 뿐이라며, 더위에 몸 조심하라는 부부의 인사 또한
아마추어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녹록치 않을 이들의 앞날이 염려되어 자꾸만 뒤돌아다 봐졌다.
잘 헤치고 나가기를 계속해서 간절히 빌어주고 싶다. <계속>
* 날로 더 기계치(痴)가 돼가고 있다.
늙으면 다 그래진다니까 낙담할 건 없지만 아무리 디카 조작이
미숙해도 이토록 다 달아나버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