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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역사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빨강은 하늘과 땅을 불리한 신 ‘슈(Shu)'의 색이었다. 슈 신은 태양신 아툼(Atum)의 정액에서 쌍둥이 여신인 ’테프누트(Tephunut)'와 함께 태어났다. 슈는 붉은 태양빛을 가득 담은 하늘의 기둥과 대기를, 테프누트는 땅 속에서 올라오는 하얀 수증기를 나타낸다. 사막의 태양빛을 신성시했던 이집트인들은 태양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를 세우고, 태양신 아툼을 섬겼다. 그런데 아툼은 매의 머리 위에 붉은 원을 지고 있는 모양으로 그려지곤 했다는데, 이것이 바로 태양이다. 이 태양은 누트 여신이 낳은 것으로 여기에는 여신이 출산 때 흘린 피의 상징이 담겨 있다. 누트 여신은 저녁이면 태양을 삼켰다 아침이면 다시 동쪽 지평선에 태양을 낳는다. 이렇게 밤이며 사라져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소생하는 태양을 이집트인들은 불사조 베누(Benu)의 모습으로 그렸는데, ‘베누’란 ‘눈부심 속에 일어나다’란 뜻이다. 그들이 그린 베누는 그리스로 건너가 ‘피닉스(Phonenix)’가 되었는데, 그 뜻 역시 ‘빨간색’이다. 우리나라의 구전설화에도 태양신 누트 여신과 같은 역할을 했던 신이 있었다. ‘해치’라는 이름의 용과 호랑이를 섞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신화의 주인공은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하늘로 올라가 세상 구석구석에 고루 햇빛을 비춰 주고 밤이면 해를 도둑맞지 않게 창고 문에 자물쇠를 걸어두고 지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우리에게도 서양의 피닉스에 해당하는 신이 있었다. ‘사신도’에서 남쪽을 맡고 있는 주작이 그것인데, 주작은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을 오가며 인간에게 불멸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전해주는 존재이다. 마치 서양의 불새인 피닉스처럼 주작 역시 빨간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를 입증해 주는 좋은 역사적 유물로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인 ‘강서중묘’의 ‘사신도’를 찾아보면 된다.
그러고 보면 빨강이란 생명의 색이자 불멸의 색이고, 어둠과 밝음을 포괄하는 색이다. 이제부터는 빨강이 갖고 있는 밝은 쪽 측면인 권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빨강에 부여된 여러 가지 가치와 이미지는 각종 후장과 트로피를 장식하는 붉은 천과 리본, 권력자가 앉는 의자나 물건들을 장식하던 붉은 벨벳에 응용되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권좌의 나폴레옹>을 보자. 온통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빨간색 벨벳 옷과 그의 머리 뒤로 권세를 드러내는 등 높은 의자를 감싼 좀 더 짙은 빨간색 벨벳과 커튼, 심지어 바닥에 까지 깔려있는 빨간색 융단, 이 모든 것이 고대 로마가 쥐고 있던 패권주의를 계승하고 싶었던 나폴레옹의 권력 욕구를 드러내 주는 상징색이 되어 준다. 사실 빨강은 로마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황제와 귀족, 성직자에게만 허용되는 고귀한 색이었다. 적어도 청교도 정신이 유럽 사회를 지배하기 까지는 고결한 색으로 소수만이 독점하는 비싼 색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빨간색의 염료는 ‘코쿰(coccum)'이라는 연지벌레의 알에서 얻어졌는데, 옷 한 벌을 빨갛게 물들이려면 수십 만 마리의 연지벌레의 알이 필요했을 테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렸을 시장 경제를 떠올릴 때, 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잠시 다양한 빨강에 대해 그 이름을 살펴볼까 한다. 황제의 색인 ‘푸르푸라(prupura)'라는 빨강이었다. 푸르푸라는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빨강이라고 연상하는 새빨간 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주색에 가까운 색이다. 영어의 퍼플(purple)에 근접한 색체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푸르푸라는 다양한 빨강 색을 포괄한다. 우리말의 자주에 해당하는 크림슨(crimson), 진홍에 해당하는 스칼렛(scarlet), 심홍에 해당하는 마젠타(magenta), 그리고 주홍에 해당하는 버밀리온(vermilion)까지 빨강에 검정과 하양을 어느 정도 배합했느냐에 따라 빨강의 채도와 명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되어진다. 정확히 어떤 빨강인지 형용할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 카민 레드(carmin red)를 좋아한다. 내 눈에는 그 어느 빨강보다 가장 포근한 빨강으로 보여기 때문인데, 그 만큼 빨강의 중립적인 중점에 위치해 있는 색이라는 개인적 식견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내 취향이니 이 말은 독자들께서 가볍게 넘어가 주셨으면 한다.
빨간색은 생명을 담고 있는 색이라고 이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는데, 단순히 인간이나 동물의 붉은 피만을 상징했을까? 질문에 대한 해답을 유도하기 위해 잠시 천주교 미사 전례의 성찬식 때 신부님의 말씀을 인용해 보겠다.
“이것은 내 피다. 많은 이들을 위해 내가 흘린 피이니, 이것을 받아 마심으로서 너희는.....”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할 때 포도주 잔을 들어 올리시며 했던 말씀이다. 여기서 ‘내 피’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이다. 즉 ‘성혈’이다. 신의 피를 나눔으로서 우리는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제 답이 되었을 듯하다. 즉 빨간 색의 포괄적 단어인 푸르푸라는 기독교에서는 성직자의 석관과 복음서를 적은 필사보 양피지를 물들이는 신성한 색으로 추앙되었다. 북독일의 화가 얀 반 아이크가 그린 <롤랭과 함께 있는 성모>(1437)을 보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는 빨간색 가운에 둘러 싸여 있다. 기독교 성화의 도상학적 상징으로 해석하자면 그녀가 두르고 있는 빨간색은 그리스도가 흘린 수난의 피이며, 영원한 생명의 잉태를 뜻한다고 한다.
빨강은 눈을 확 잡아끄는 색이다. 빨강을 보면 우리는 멈칫하다가 심지어 뒤로 흠짓 물러서게도 된다. 빨강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색이다. 모든 색에서 가장 핵심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색이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의 가장 높은 자리에 해당되는 색, 가장 긴 가시광선을 갖고 있는 색이다. 그래서 빨강은 그 이름도 많고 탈도 많고 뒷이야기도 많다. 짧은 칼럼 속에 단 일회로 풀어내기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도도한 색이지만, 우리가 연상하는 빨강에는 부정적이고, 음란하고 무언가 캥기는 또 다른 이야기도 숨겨있다. 다음 회에서 그 뒷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하고, 이번 호에서는 빨강에 얽힌 역사적인 사실과 신화적 의미, 기독교적 상징들만을 간단히 소개한 것으로 필자는 만족하려 한다.
빨강 고양이?
하얀 고양이도 보았고 검정 고양이도 보았고, 두 가지 색이 섞여 있는 어룩이 고양이도 보았지만, 아직 빨강 고양이는 본 적은 없다. 그런데 프랑스의 그림책 작가 에릭 바튀는 마투란 이름의 빨강 고양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그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빨간 고양이 마투』(문학동네어린이)로 2000년 알퐁스 도데 어린이문학상(2000 Prix des enfants de Daudet)을 탔다. 알퐁스 도데 어린이 문학상은 프랑스의 아카데미 공쿠르에서 선정하는 상으로 콩쿠르의 종신회원이자 소설가인 미셸 투르니에가 심사위원으로 있다. 그 점이 더더욱 내 호기심을 자극해 나는 그의 그림책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온통 빨강 투성이다.
조금은 거만하고 도도해 보이는 빨간 고양이 마투가 화면 가득한 첫 번째 그림을 한참 본다. 눈까지 지그시 감고 있는 빨간 고양이 마투는 꼬리 끝만 제외하면 온통 빨간색이다. 도대체 우리들의 관념을 깨고 빨간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일까? 조바심을 내며 책장을 넘겨본다. 바람 부는 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걷는 걸 좋아하는 마투가 하루는 산책 길에서 작은 새알을 발견한다. 여느 고양이라면 당연히 한 입에 꿀꺽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투는 비범하다. 기다릴 줄 안다. 그래서 마투는 알이 부화해 새가 될 때까지 참는다. 드디어 아기 새가 알을 깨고 태어났다. 마투는 또 참는다. 군침이 돌았지만, 더 큰 새가 될 때까지 참기로 한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작은 새끼 새에게 해바라기 씨며 밀알을 주면서 포동통하게 살이 오르도록 길러주기 까지 한다. 그러나 마투의 인내와 정성에도 불구하고 다 커버린 새는 제 갈 길을 찾아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린다.
상심한 마투는 어쩔 도리가 없다. 제 아무리 비범한 색을 타고난 빨강 고양이라도 하늘을 날 수는 없으니까. 별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 새가 다시 마투를 찾았다. 잡아먹힐지도 모르는데, 고양이 마투에게 날아 돌아왔단 말이다. 둘은 한 동안 마주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될까? 긴장의 순간이다. 그러나 빨강 고양이 마투는 배고픔 보다는 홀로 있는 외로움이 더욱 절절하다. 너무나 비범해서 고고하든가, 빨갛기 때문에 다른 고양이들 사이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고독한 존재이다. 달리 이야기 하자면, 사람들이 빨강에 대한 선입견처럼 마투는 제멋대로이고, 금기를 깨는 위험 동물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작은 새가 튀는 존재인 마투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둘은 이제 산책도 하고 장난을 치며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마치 이 대목에서 나는 파리의 뒷골목과 선술집 창녀촌으로사라지곤 했다는 슬픈 운명의 곱추 화가 로트렉을 연상하게 된다. 그가 외로운 빨강 존재들인 창녀들과 악사들의 소굴로 스스로 걸어들어 간 것처럼, 이 그림책의 작은 새에게서 로트렉의 존재감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트렉에게 파리의 뒷골목이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듯이 이 그림책 속의 새 역시 여름이 오면 따듯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야만 했다. 빨강 마투의 표정이 무척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귀에 익은 노래 소리에 마투는 눈을 떴다. 떠났던 새는 가족을 만들어 마투를 잊지 않고 또 다시 찾아왔다. 이제 새는 아내도 있고 아기 새들이 있다. 신이 난 마투는 어린 새들을 등에 태우고 봄바람에 수염을 휘날리며 마음 닿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산책을 떠난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마투의 얼굴에서 이제는 도도한 표정을 찾을 수 없다. 마투의 등 위에서 짹짹 거리는 작은 새들도 마냥 편안해 보일 뿐이다.
합판 위에 붉은 물감을 풀어 거친 바탕의 마띠에르가 고스란이 느껴지도록 하고, 그 앞에 화면 한 가득 빨간 마투를 그린 에뤽 바튀의 그림은 빨강 만큼이나 아주 직설적이다. 군더더기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주인공들의 동작도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약간의 선과 점의 변화를 통해 고양이 마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도도한 고양이 마투의 오만한 눈빛이 점점 온화하게 변모하는 것은 단순히 선과 점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점이 놀랍다. 에릭 바튀는 빨강 고양이 마투와 새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어린이 독자의 눈높이에서는 관계 맺음과 관계의 지속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정이나 사랑은 상대에게 특별한 것, 자신의 요구에 따라 변하길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어른의 눈높이에서는 좀 더 은밀한 것을 읽게 된다. 빨강 마투는 분명 외로운 존재이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천덕꾸러기다. 적어도 빨강이 내재한 의미가 특히 프랑스에서는 고운 시선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점에서 그러하다. 19세기 초, 즉 로트렉이 화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파리의 창녀들은 빨갛게 머리를 물들이고 다녔다고 한다. 빨간 머리의 여자가 정열적이라는 속설 때문에,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타고난 머리가 붉은 색인 여자들은 곤혹을 치러야 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빨강에 붙어있는 서구 근대 사회의 라벨들은 고운 문구로 그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어딘지 부정하고, 어딘지 음험한 존재로 그것을 묘사한다. 마투가 빨간 색인 이유도 바로 그런 부정적 선입견을 깔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작가가 고양이의 탐욕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갖고 있는 빨강에 대한 지나친 편견임을 반증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그림책은 시종일관 빨간색이 넘쳐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편하지가 않다. 모든 편견을 제거해 버리고 본다면, 빨강은 그리움을 담은 색이고, 모든 것과 어우러지고 싶어 하는 심성을 갖고 있는 색이라는 그 이면이 보인다. 결국 작가는 빨강색에 대한 편견이 마투로 인해, 그와 맺은 작은 새의 우정으로 인해 깨어지는 것을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책에 따르자면 빨강은 관계지향적인 색이며 우정의 색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불멸의 빨강, 불멸의 소리로 이어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도 사물에 피를 발라 소생시킬 수 있다는 원시 신앙을 갖고 있었다. 알타미라 동굴의 붉은 들소를 채색하기 위해 한 입 가득 붉은 물감 혹은 피를 머금고 있다 뿜어 대는 구석기인을 생각해보면, 마치 입김을 불어 육체의 형상에 숨결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무 생명도 없던 그림 속 소가 심장이 팔딱 팔딱 뒤는 생명력 가득한 소가 되어 들판을 뛰어 다니기 까지는 주술적인 매개체인 붉은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 영화이야기를 해보자. 프랑소아 지라르(Francois Girard)와 돈 맥켈러가 각본을 쓴 영화 속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이번에는 들소가 아니라 바이올린이 그 대상이 된다. 그럼 그 바이올린은
어떤 생명을 얻었을까? 죽어도 죽지 않고 부활하는 새, 피닉스처럼 바이올린은 불사의 영원성을 붉은 피로부터 얻어냈다.
이 영화에서 붉은 바이올린은 3세기에 걸쳐, 세 대륙을 넘나들며 붉은 색이 대표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표출하고 있다. 인간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들인 성욕과 권력욕, 소유욕 등을! 채 마르지 않은 붉은 안료가 발린 화면 위를 슬쩍 눌러 보자. 화면 밖으로 스며나오는 불멸의 욕망들은 영구히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재생의 재생을 거듭하며 시공간을 관통하고 있지 않은가?
17세기의 이탈리아에 크레모나 바이올린의 장인 부조티가 바이올린에 혼을 불러넣으며 섬세한 손길로 악기를 어루만지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에게는 곧 태어날 아기와 그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부인 안나가 있다. 영화에서 최초의 복선인 불길한 예언에 따라 안나는 출산 도중 아이와 함께 죽고 만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과 삶의 희망을 잃은 부조티는 안나의 긴 머릿칼을 잘라 붓을 만들어 그녀의 팔뚝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묻혀 바이올린을 칠한다. 그렇게 해서 불사의 운명을 갖게 되는 바이올린이 탄생하게 된다.
붉은 색은 유혹의 색이자 금기의 색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붉은 색은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없는 권력자의 점유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영화로 다시 넘어가보자. 금기의 대상을 내 것으로 취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압도할 만한 기운을 갖고 있어야 한다. 특히 그 자체 내부에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갖고 있는 대상을 소유한 자는 소유의 대가로 무엇인가를 내어놓아야 한다. 불멸의, 불사의 것은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는 미미한 인간 존재에게는 재앙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내부에서 활활 타오르는 욕망은 금기가 강한 대상일수록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스스로 그 금기의 벽을 넘어서는 과욕을 부리기도 한다. 영화는 이 장면을 잔인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선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의 수도원에서 만난 10살의 바이올린 신동 캐스퍼. 그가 과연 무엇을 욕망하겠는가? 다만 놀라운 재능 하나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었고 그러다 궁정까지 불려가 오디션을 받게 된 것 뿐인데.... 하지만, 영화에서 붉은 바이올린은 무차별적인 가혹함으로 자신을 소유하려 하는 자를 위해한다. 소년은 오디션 도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레드 바이올린과 함께 땅 속에 묻힌다.
자, 이제 세월은 19세기, 바야흐로 집시의 시간으로 옮겨졌다. 영국의 음산한 분위기를 기분 내키는 대로 음악으로 표현하는 집시 바이올린니스트 포프가 레드 바이올린의 주인이다. 앞서 영화가 10살의 캐스퍼를 보여주었다면, 이제 영화는 청년 포프를 등장시켜 인간 욕망을 세대별로 조망하고 있다. 캐스퍼는 가히 악마적이다. 섹스를 해야만 악상이 떠오르고 작곡이 가능하다는 기벽을 갖고 있는 그는 다른 여자와 놀아나다 아내의 손에 의해 바이올린이 파손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다. 결국 악기와 자신을 일심동체로 여기며 지낸 그에게 남은 선택은 자살이었다. 감독은 캐스퍼란 인물을 통해 바이올린을 악마적으로 탐미했던 파가니니를 대비시킨다. 사실 탐욕이 극에 달한 파가니니가 영화 속에서와 같이 섹스를 해야만 악상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캐스퍼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은 음악을 위해 영혼까지 메피스토팔레스에게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으니 악마성으로 말하자면 캐스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성 싶다.
이제 악기는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하필이면 문화혁명의 혼란 속에 던져지게 된다. 레드 바이올린을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샹 페이는 소중히 간직하던 바이올린을 문화 혁명의 화염을 피해 믿을 만한 음악 선생에게 맡긴다. 그렇담 여기에서는 붉은 색의 상징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이다. 바로 불과 혁명과 중국이다. 중국인 만큼 붉은 색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바로 그 점을 감독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즉 세기말을 맞이한 레드 바이올린은 몬트레올의 한 경매장에서 존재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지게 된다.
이 영화는 음악을 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 자신이 이미 바흐를 새롭게 재해석한 글렌 굴드를 소재로 <굴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단편들>이란 영화로 토론토 영화제와 상파울로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음악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예술인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영화의 OST에는 바이올린을 중심으로한 음악들이 많이 선보이는데,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기라성 같은 현존하는 대 바이올린 비루투오소들의 연주를 듣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우선 <바이올린 플레이어>는 기돈 크레머가, <파가니니>는 살바토레 아카르도가 연주를 맡고 있다. 또한 17분 가량의 대작인 존 코 릴리아노(John Corigliano) 작곡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샤콘느:"The Red Violin"- Chaconne For Violin And Orchestra>는 역동적 에너지를 가진 젊은 바이올린니스트 죠슈아 벨(Joshua Bell)을 위해 작곡된 곡이다. 헬싱키 태생의 이사 페카살로넨(Esa-Pekka Salonen)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협연하고 있다. 이 곡은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와 어울리게 바로크, 집시, 고딕 로만 양식의 요소들로 변주되어 지는데, “The Red Violin Caprices"란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이 악보는 인터넷 상에서 구해볼 수 있으니, 바이올린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검색해 보시도록...... 2000년에 있었던 제 7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존 코 릴리아노는 이 멋진 음악을 작곡한 덕분에 ‘음악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자, 이제 서서히 빨강 속의 어두운 측면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다. 다음 컬럼에서는 빨강이 감추고 있는 욕망과 에로티즘을 보다 더 노골적으로 파헤쳐 볼까 하다.
첫댓글 정말 오랫만에 글을 올렸네요. 사진을 좀 더 정렬하여 올려야 하는데,,,,, 조금 귀찮아서.... 이해해 주실거죠?
멀리 가을 여행 떠나셨나 했어요. 재밌게 읽었어요. 프로이트 학설을 빌면 저도 유아기적 성욕동이 과대 충족됐거나 좌절됐었나 봅니다. 아직까지도 와인(전 개인적으로 와인 레드를 좋아해요.) 레드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를 보면 한참 쫓아가는 걸 보면요. 욕망과 에로티즘 기대합니다.
멀리 가고 싶어도 밥벌이의 족쇄가 늘 저를 묶어둡니다. 저 역시 망가진 제 과거 기억을 회복시키고 싶습니다만, 새로운 기억으로 하나의 가설 위에 제 과거를 조작한다느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되네요. 현상(지금의 모습)을 보고 어설프게 알고 있는 이론을 매개로 어쩌면 있지도 않거나 그러지도 않았을 과거를 만들어내는 거죠. 그렇게 보면 제 과거는 컴플렉스와 해결되지 않은 외디프스 컴플렉스 일렉트라 컴플렉스, 말 그대로 컴플렉스드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