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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훼 직전의 청주읍성 청남문(남문)의 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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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에는 '서원경에 성을 쌓았다'라는 표현이 문헌적으로 분명하게 등장한다. 이때가 서기 689년이다.
'9년 가을 윤 9월에 왕이 장산성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에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서원경 성벽을 쌓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도 자세히 등장한다. 삼국사기 권47 '열기'라는 인물의 열전은 이렇게 쓰여 있다.
'구근(仇近·사람 이름)은 원정공을 따라 서원경의 술성(述城)을 쌓았는데 원정공(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 한다하여 곤장을 때렸다.'
이어지는 내용은 '(그러자) 구근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김유신 지칭)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국사로 대접하였는데 지금 뜬 소문을 듣고 나를 죄 주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더큰 것이 없다" 하였다'라고 돼 있다.
구근이라는 인물이 청주성을 쌓던 중에 게으름을 피운다고 상관인 원정공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고, 때문에 인간적으로 매우 섭섭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경 성터가 지금의 남문로 일대인지는 분명치 않다.
고려시대부터는 지금의 남문로 일대에 청주성이 분명히 존재했다. 고려사는 이렇게 적었다.
'공양왕 2년 5월 무오에 청주에 갑자기 뇌우가 크게 내리니 앞내가 별안간에 불어 성남문을 허물고 바로 북문에 부딪치니 성중의 물깊이가 장여(丈餘)나 되었고 관사와 민가가 표몰되기를 거의 다하였다.'
문헌적인 근거는 또 있다. 고려사 공민왕 11년 10월조는 '11년 10월 계미에 큰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를 치니 청주성 내 물이 불어 죽은 뱀이 떠다니는 것이 있었고 개구리가 나무가지에 올라갔으며 기후는 여름과 같았다'라고 썼다.
이때까지의 청주읍성이 토성인지 돌성(石城)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청주읍성이 석성의 외형을 지니기 시작한 시기는 특정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조선 전기 무렵으로 보여진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청주읍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1천84보인데, 성안에 우물 13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석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밖에 성종실록은 '이달에 충청도 덕산성(덕주산성 지칭)을 쌓았는데 높이가 9척이고 둘레가 2천6백55척이었으며, 청주성은 높이가 13척이고 둘레가 5천4백43척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청주성을 마지막으로 보수하다, 구세적
본보는 청주읍성 성돌이 탑동 양관을 짓는데 사용됐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관리부재 상태의 청주옥의 석부재도 양관 건축에 사용됐다.
'감방(조선시대 전통옥 지칭)은 절반이 거의 무너져가는 온돌로 되어 있어 (…) 이러한 이유로 유치인이나 수인이 집을 부수고 도망이 계속 일어나 도망치면 잡히고 잡혀서는 다시 도망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청주연혁지>
이와는 별개로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청주읍성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丙辰四月日畢役' 명문이 새겨진 성돌을 수습한 바 있다. 직역하면 '병진년 4월에 공사를 마쳤다'는 뜻이다. 기년상 조선후기 병진년에 해당하는 해는 1736년(영조 12)과 1796년(정조 2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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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에서 출토된 '丙辰'명 성돌. | |
| 이와 관련 지역 한 사학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청주읍성이 일부 허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개·보수가 이뤄져 1736년에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인좌가 청주읍성을 접수할 때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는 적지 않았다. 무기를 숨겨 상여에 숨겨 몰래 들어왔고, 또 내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적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를 실어다 고을 성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영조실록>
이어지는 내용은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라고 적혀 있다.
병진년 명문과 관련해 또 하나 눈여겨 볼 문헌사료는 1786년(정조 10)에 청주성을 수축했다는 내용이다.
'청주성을 수축하였다. 전 병사 김영수가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사 구세적이 모두 수축하였다. 둘레가 1천 4백여 보였다.'-<정조실록> 그러나 1786년은 앞서 밝힌 두번째 병진년인 1796년과 10년의 시차가 난다. 역시 논리가 잘 맞지 않고 있다.
인용문에 병사 구세적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청주읍성의 마지막 수축이 있던 1년전에 충청도 병사로 부임했다.
그는 충청병사로 재직하는 중에 청주읍성 외에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부정적인 내용이다. 연풍현의 봉수 관리가 문제가 됐다.
'연풍현 마골의 봉화는 경상우도 문경현의 탄항 봉화와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탄항의 봉화는 비록 날씨가 맑은 때라도 간혹 봉화불을 피우지 않았으나, 마골의 봉화는…'-<정조실록>
이와 관련 구세적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다 도리어 처벌받는다.
'이윽고 김광묵이 아뢰기를, "구세적이 자기가 흐리멍덩했다는 것은 살피지 않고 이 문제를 먼저 제기하여 자신은 모면하고 죄없는 수령에게 잘못을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구세적을 처벌하고 조정옥은 유임하소서."하니….'-<정조실록>
결국 구세적은 봉수를 관할하는 병조에 붙들려가 문초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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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주성에 대한 유래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